교황 보니파시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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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니파시오 3세는 로마 출신으로, 부제로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포카스 황제의 신임을 얻어, 교황 선출 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보편적 주교' 칭호를 로마 주교에게 귀속시키는 등 교황 수위권을 강화했다. 606년 교황 사비니아노의 후임으로 선출되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로 돌아오는 데 1년이 걸렸으며, 60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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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보니파시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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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보니파시오 3세 |
직함 | 로마 주교 |
교회 | 가톨릭교회 |
임기 시작 | 607년 2월 19일 |
임기 종료 | 607년 11월 12일 |
선임자 | 사비니아노 |
후임자 | 보니파시오 4세 |
별칭 | 보니파시오 |
사망일 | 607년 11월 12일 (67세) |
사망 장소 | 동로마 제국, 로마 |
2. 생애 초기
보니파시오는 요한 카타디오케의 아들이었으며, 로마인 혈통이었다.[4] 부제로 재직하면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레고리오 1세는 603년에 그를 교황 특사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실에 파견하면서 "믿음과 인품이 검증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이는 그의 짧지만 다사다난했던 교황 재위 기간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 중요한 시기였다.[2]
보니파시오는 부제로 재직하면서 교황 그레고리오 1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레고리오 1세는 603년에 그를 교황 특사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실에 파견했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였다.[2]
교황 사비니아노가 606년 2월에 선종한 후, 보니파시오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로 돌아오는 데 거의 1년이나 걸렸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좌가 비어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보니파시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자신의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교황 선거와 관련하여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니파시오 자신은 선거가 공정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이며, 로마에서는 그의 선출이 정당한지 확신이 들 때까지 귀환을 미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니파시오의 행동은 반대자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결국 로마로 돌아와 교황좌에 앉게 되었다.[4]
보니파시오 3세는 교황 사비니아노가 사망한 606년 2월에 후임으로 선출되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로 돌아오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다. 이러한 교황 공석 기간이 길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다. 일부에서는 보니파시오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황제의 비준이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간의 갈등으로 인해 지연되었다는 의견이 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3] 보니파시오 3세는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확신하기 전까지는 교황직을 수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2]
보니파시오는 '특사'로서 포카스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코르키라 섬의 알키손 주교를 위해 포카스 황제에게 중재를 요청했는데, 이때 보니파시오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에피루스의 유리아 출신 주교 요한은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의 공격을 피해 성직자들과 함께 고향을 탈출하여 코르키라 섬에서 안전을 확보했다. 하지만 요한은 알키손 주교 아래에서 섬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주교 권한을 찬탈하려 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지만, 포카스 황제는 요한 주교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간섭할 의향이 없었다. 알키손은 교황 그레고리오에게 호소했고, 그레고리오는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보니파시오에게 맡겼다.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보니파시오는 황제의 신임을 유지하면서 모든 당사자를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다.[2]
3. 교황 사절 (603년 ~ 606년)
보니파시오는 동로마 제국 황제 포카스로부터 큰 신망을 받았다. 이러한 관계는 코르시카 섬 주교 카시오페의 알키온을 위해 황제에게 청원하라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지시를 받았을 때 매우 유용했다. 알키온 주교는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의 공격을 피해 성직자들과 함께 피신했는데, 그 사이에 에피루스 주교 에우리아의 요한이 자신의 주교좌를 강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요한은 알키온 주교 밑에서 섬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주교좌를 차지했다. 포카스 황제는 요한에게 우호적이라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알키온 주교는 그레고리오 1세에게 호소했고, 그레고리오 1세는 보니파시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시하였다. 보니파시오는 외교술을 발휘하여 황제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당사자들을 서로 화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2]
4. 교황 선출 (606년 ~ 607년)
보니파시오 3세는 선출되었지만, 황제의 비준이 그레고리오 1세의 정책을 지지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지연되었다는 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3] 보니파시오 본인은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렇게 되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교황직을 수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2]
보니파시오 3세는 교황 선출에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는 교황 생존 기간 동안 후임 임명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제정하여, 이를 어기면 파문에 처하도록 했다. 둘째는 교황 장례 후 3일이 지나야 교황 후임자를 위한 절차를 시작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는 그가 교황 선거를 자유롭게 유지하려는 의지가 확고했음을 보여준다.[2]
5. 교황 (607년)
그는 교황 선출 제도 개혁과 '보편적 주교' 칭호 독점 외에도 다른 업적을 남겼으며, 607년 11월 12일에 선종하여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4]
5. 1. 교황 선출 제도 개혁
보니파시오 3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교황 선출 제도에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교황 재위 기간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차기 교황 후임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를 어길 시에는 파문한다는 조치를 내렸다.[4] 둘째, 교황 장례 미사 후 사흘이 지나기 전까지는 후임 교황을 선출할 수 없다는 조치를 내렸다.[4] 이러한 조치들은 앞으로 교황 선거를 보다 공정하게 치르도록 하여, 자신이 겪었던 문제를 후임 교황들도 똑같이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4]
보니파시오 3세의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행적은 동로마 황제 포카스와의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포카스 황제로부터 "성 베드로좌는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내용의 칙령을 받아냈는데, 이는 곧 교황이 기독교 세계 전체의 으뜸가는 지도자임을 인정받은 것이다.[4] 또한 이 칙령은 스스로 ‘세계 총대주교’라고 칭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치명타를 안겨 주었다.[4]
5. 2. '보편적 주교' 칭호 독점
보니파시오 3세는 동로마 황제 포카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포카스에게 "사도 성 베드로의 보좌는 모든 교회의 으뜸이 되어야 한다"는 칙령을 요청하여 받아냈다.[2] 이를 통해 "보편적 주교"라는 칭호가 로마 주교에게만 독점적으로 주어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키리아쿠스가 스스로를 "보편적 주교"로 칭하려던 시도는 효과적으로 좌절되었다.[2]
참조
[1]
웹사이트
"Boniface III", The Holy See
https://w2.vatican.v[...]
[2]
논문
Pope Boniface III
[3]
웹사이트
"The 66th Pope", Spirituality.org, Diocese of Bridgeport
http://www.spiritual[...]
[4]
간행물
"Pope Boniface III"
https://en.wikisourc[...]
Catholic Encyclopedia, Robert Appleton Company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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