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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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가대관구는 나치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 설치했던 행정 구역이다.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 룩셈부르크 등지에 설치되었으며, 독일의 팽창 정책에 따라 더 많은 지역에 설치될 계획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안슐루스 이후 7개의 제국대관구가 설치되었고, 체코에서는 뮌헨 협정 이후 주데텐란트가 주데텐란트 제국대관구로 편입되었다. 폴란드에서는 폴란드 침공 이후 바르테란트와 단치히-서프로이센이 설치되었으며, 룩셈부르크는 코블렌츠-트리어에 룩셈부르크 민정 장관 지역을 더하여 모젤란트가 설치되었다. 이 외에도 벨기에,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유고슬라비아, 소련 등 여러 지역에 제국대관구 설치가 계획되었으나, 연합군의 진격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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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관구 | |
---|---|
라이히스가우 | |
독일어 명칭 | Reichsgau |
유형 | 행정 구역 |
국가 | 나치 독일 |
존속 기간 | 1938년 ~ 1945년 |
개요 | |
설치 시기 | 1938년 |
설치 배경 | 안슐루스 이후 |
관할 지역 | 오스트리아의 분할된 지역 및 체코의 일부 지역 |
주요 기능 | 나치 독일의 행정 구역 단위, 국방군관구 역할 수행 |
역사 | |
배경 | 나치 독일은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 기존 Gau 체제를 확장함.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 지역을 7개의 라이히스가우로 분할함. |
주요 변화 | 1939년 뮌헨 협정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라이히스가우를 추가 설치함. 각 라이히스가우는 국방군관구로서 군사적 역할도 수행함. |
소멸 | 1945년 나치 독일 패망과 함께 해체됨. |
특징 | |
행정 체제 | Gau 체제를 기반으로 함. 각 라이히스가우는 나치당의 통제를 받음. |
역할 | 나치 독일의 행정 구역 단위 국방군관구로서 군사적 역할 수행 |
중요성 | 나치 독일의 영토 확장 및 통치 체제 강화에 기여 |
라이히스가우 목록 | |
명칭 | 라이히스가우 빈 |
중심지 | 빈 |
명칭 | 라이히스가우 니더도나우 |
중심지 | 크렘스안데어도나우 |
명칭 | 라이히스가우 오버도나우 |
중심지 | 린츠 |
명칭 | 라이히스가우 잘츠부르크 |
중심지 | 잘츠부르크 |
명칭 | 라이히스가우 슈타이어마르크 |
중심지 | 그라츠 |
명칭 | 라이히스가우 케른텐 |
중심지 | 클라겐푸르트 |
명칭 | 라이히스가우 티롤-포어아를베르크 |
중심지 | 인스브루크 |
명칭 | 라이히스가우 주데텐란트 |
중심지 | 라이헨베르크 (보헤미아) |
2. 명칭과 기원
'제국대관구(Reichsgau)'라는 명칭은 '제국(Reich)'과 '대관구(Gau)'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Gau'는 중세 시대부터 사용된 단어로, 현대의 '주(州)'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나치당은 초기에는 선거구 분할에 기반하여 '대관구(Gau)'를 설치했으나, 1938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Land) 기능을 정지시키면서 대관구는 최상위 행정 구역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나치 독일은 기존 행정 구역 체계에서 발생하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국가대관구 설치를 추진했다. 나치당의 지역 조직인 '대관구(Gaue)'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존재했던 '주(Länder)'는 서로 관할 구역이 일치하지 않고 권한이 중첩되어 행정적 혼란을 야기했다.
나치 독일은 1938년 안슐루스(합병) 이후 오스트리아에 7개의 국가대관구를 설치했다.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에는 바르테란트와 단치히-서프로이센을 설치했으며, 1938년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수데텐란트를 할양받아 수데텐란트 제국대관구를 설치했다. 1942년에는 룩셈부르크를 병합하여 모젤란트를 설치했다.
3. 설치 배경 및 목적
빌헬름 프리크 내무 장관은 행정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당 대관구 지도자(Gauleiter)에게 제국총독(Reichsstatthalter)의 지위를 부여하여 당과 국가의 행정 조직을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당 대관구와 연방 국가의 경계가 일치하게 되었고, 대관구 지도자는 제국총독의 역할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 개혁은 기존 독일 영토("구 제국", Altreich)에서는 대관구 지도자들의 영향력 때문에 시행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나 주데텐란트와 같이 새롭게 병합된 지역에서 우선적으로 시행되었다.
4. 설치된 제국대관구
4. 1. 오스트리아
1938년 안슐루스(합병) 이후 오스트리아에는 7개의 국가대관구가 설치되었다. 1940년, '오스트마르크'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42년에는 '도나우-알프스 제국 대관구군'으로 다시 변경되었다.[4] 각 제국대관구는 기존 오스트리아 연방주와 대체로 일치하며, 일부 지역은 슬로베니아 등을 포함하도록 조정되었다.
가우 이름 | 독일어 이름 | 수도 | 설립 연도 | 비고 |
---|---|---|---|---|
카린티아 | Kärntende | 클라겐푸르트de | 1938년 | 이전 오스트리아 연방주인 카린티아와 동티롤에서 형성되었으며, 1941년부터 슬로베니아 일부를 포함했다. |
니더도나우 | Niederdonaude | 크렘스안데어도나우de | 1938년 | 이전 오스트리아 연방주인 니더오스트리아와 북부 부르겐란트de에서 형성되었으며, 1939년부터 남부 모라비아, 남동부 보헤미아와 브라티슬라바의 두 구역인 데빈과 페트르잘카를 포함했다. |
잘츠부르크 국가대관구de | Salzburgde | 잘츠부르크de | 1938년 | 이전 오스트리아 연방주인 잘츠부르크 (주)de에서 형성되었다. |
슈타이어마르크 | Steiermarkde | 그라츠de | 1938년 | 이전 오스트리아 연방주인 슈타이어마르크와 남부 부르겐란트de에서 형성되었으며, 1941년부터 슬로베니아 일부를 포함했다. |
티롤-포어알베르크 | Tirol-Vorarlbergde | 인스브루크de | 1938년 | 이전 오스트리아 연방주인 포어알베르크de와 티롤 북부에서 형성되었다. |
오버도나우 | Oberdonaude | 린츠de | 1938년 | 이전 오스트리아 연방주인 오버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의 일부인 Ausseerlandde에서 형성되었으며, 1939년부터 남부 보헤미아 일부를 포함했다. |
빈 | Wiende | 빈 | 1938년 | 이전 오스트리아 연방주인 빈과 이전 니더오스트리아의 주변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
4. 2. 체코
1938년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수데텐란트를 할양받아 수데텐란트 제국대관구를 설치했다. 관구 도시는 리베레츠였다.[1]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은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으로, 슬로바키아 지역은 독립 슬로바키아로 재편되었다.[1]4. 3. 폴란드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바르테란트와 단치히-서프로이센이 설치되었다. 폴란드의 일부 지역은 상슐레지엔 및 동프로이센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폴란드 총독부 관할이 되었다.바르테란트 제국대관구의 관구도는 포젠(포즈난|Poznańpl)에 설치되었으며, 처음에는 포젠 제국 대관구라고 불렸다. 포즈난현, 우치현의 대부분, 포모제현의 5개 군, 바르샤바현의 1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단치히-서프로이센 제국대관구의 관구도는 단치히(그단스크|Gdańskpl)에 설치되었으며, 처음에는 서프로이센 제국 대관구라고 불렸다. 포모제현의 나머지 부분이 편입되었다.
- 역대 가울라이터
- 한스-알베르트 호른펠트(1926년 - 1928년)
- 발터 마스(1928년 - 1930년)
- 알베르트 포르스터(1930년 - 1945년)
폴란드의 카토비츠(카토비체|Katowicepl)는 상슐레지엔에, 동프로이센 인접 지역도 마찬가지로 편입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에는 폴란드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4. 4. 룩셈부르크
1942년, 코블렌츠-트리어에 룩셈부르크 민정 장관 지역을 더하여 모젤란트가 설치되었다.[1]5. 계획되었던 제국대관구
나치 독일은 전쟁 중에 여러 지역에 제국대관구를 추가로 설치할 계획을 세웠지만,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다.
노르트마르크는 오르후스 또는 코펜하겐을 수도로, 베스트란트, 베스키덴란트, 갈리치엔, 판데렌란트, 바이셀란트, 고텐란트 등의 설치가 계획되었다.
바나트/프린츠-오이겐-란트는 베오그라드를 '프린츠-오이겐-슈타트'로 개칭하여 수도로 삼고, 현재의 세르비아, 루마니아, 헝가리 일부 지역을 포함할 예정이었다. 이 명칭은 베오그라드 포위전에서 승리한 사보이 공자 오이겐의 이름을 딴 것이다.
5. 1. 벨기에
1940년 벨기에에 대한 독일의 침공 이후 군정이 실시되었다. 1944년 7월, "대독일" 편입의 전 단계로서 문민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벨기에는 플란데른, 발로니, 브뤼셀의 두 개의 국가대관구와 직할시로 분할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분할은 연합군의 진격으로 인해 서류상으로만 남게 되었다.[6][7]5. 2. 프랑스
프랑스 지역에는 부르고뉴, 상라인, 베스트마르크 설치가 계획되었다.상라인의 경우, 1940년에 바덴 대관구(관구도: 카를스루에)는 알자스 민정 장관 지역을 편입하였다. 1945년에 관구도를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스트라스부르프랑스어)로 이전하여 제국대관구로 할 계획이 있었다.[1]
베스트마르크의 경우, 1940년에 자르=팔츠 대관구가 CdZ-Gebiet Lothringen|로렌 민정 장관 지역de을 편입하여 베스트마르크 제국대관구가 되었고, 그 관구도는 노이슈타트 안 데어 바인슈트라세에 설치되었다. 1945년에 관구도를 자르브뤼켄으로 이전하여 제국대관구로 할 계획이 있었다.[1]
5. 3. 기타 지역
참조
[1]
서적
Prague in black: Nazi rule and Czech nationalism
Harvard University Press
[2]
서적
Spionage gegen die Schweiz
Huber
[3]
서적
Nazism, 1919-1945: Foreign policy, war and racial extermination
University of Exeter Press
[4]
문서
[5]
문서
[6]
URL
https://books.google[...]
[7]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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