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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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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라트 헨라인은 1898년 보헤미아에서 태어난 독일계 보헤미아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으로 포로가 되었다. 1920년대 푈키쉬 운동에 참여하여 체조 협회에서 활동했으며, 1933년 수데텐 독일당을 창당하여 수데텐 지역의 자치를 주장했다. 헨라인은 나치즘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으나, 1937년 이후 친독일 노선으로 전환하여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수데텐란트의 국가판무관과 대관구 지도자를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친위대 장교로 활동했으며, 1945년 미군에 체포된 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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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헨라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콘라트 헨라인 (1898-1945)
1938년 9월, 수데텐 독일인 자유군단 지도자 헨라인
본명콘라트 에른스트 에두아르트 헨라인
출생일1898년 5월 6일
출생지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리베레츠 마퍼스도르프
사망일1945년 5월 10일
사망지체코슬로바키아 플젠
소속 정당나치당 (1939–1945)
기타 정당수데텐 독일인당 (1933–1938)
직업은행원
군사 경력
소속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수데텐 독일인 자유군단
슈츠슈타펠
복무 기간해당 정보 없음
계급Kriegsfreiwilliger (전쟁 자원병)
SS-오베르그루펜führer
소속 부대티롤 황제-엽병 연대 제3번
보병 연대 제27번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주요 전투이탈리아 전선 (포로 수용)
훈장해당 정보 없음
정치 경력
직책대관구 지도자(Gauleiter) of Reichsgau(Reichsgau) 수데텐란트
임기 시작1938년 10월 1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8일
이전 직책직책 신설
다음 직책직책 폐지
수상해당 정보 없음
직책2Reichsstatthalter(Reichsstatthalter) of Reichsgau(Reichsgau) 수데텐란트
임기 시작21939년 5월 1일
임기 종료21945년 5월 8일
이전 직책2직책 신설
다음 직책2직책 폐지
수상2해당 정보 없음
직책3수데텐 독일인 자유군단 사령관
임기 시작31938년 5월
임기 종료31938년 9월
이전 직책3직책 신설
다음 직책3직책 폐지
직책4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 독일인당 대표
임기 시작41933년 10월 1일
임기 종료41938년 11월 5일
이전 직책4직책 신설
다음 직책4직책 폐지

2. 초기 생애

콘라트 헨라인은 1898년 5월 6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헤미아 왕국 영토였던 리베레츠 인근 브라티슬라비체 나드 니소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콘라트 헨라인 시니어는 회계 사무원이었고, 어머니 헤드비카 안나 아우구스타 드보라체크는 체코인 가문 출신의 독일계 보헤미아인이었다.

헨라인은 야블로네츠 나드 니소우에서 상업 학교를 다녔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군 자원병으로 입대하여 k.u.k. 티롤 카이저-예거 연대 #3에 배속되었다. 1916년 5월에는 장교 후보생 학교에 입학한 후, 그라츠에 주둔한 k.u.k. 인판테리-연대 Nr. 27에 배속되었다. 그는 1916년 5월부터 1917년 11월 17일 사이에 돌로미테스의 몬테 포르노, 몬트 지에프, 몬테 말레타에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했다.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이탈리아 왕국군에 포로로 잡혀 전쟁의 나머지 기간을 아시나라 섬에서 포로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얀의 독일 ''Turner'' (체조) 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가스 공격을 받아 최전선에서 싸운 Frontkämpferde로서의 그의 경험은 그의 정치적 성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데텐 공동체를 위한 투사로서의 그의 자아상은 그의 이후 경력에 매우 중요했다.

2. 1. 푈키쉬(Völkisch) 운동 참여

콘라트 헨라인은 푈키쉬 운동을 받아들여 체조 협회(''Deutscher Turnverband'')에 가입했다. 1923년부터 지역 ''터너'' 클럽에서 푈키쉬 이데올로기를 홍보했다. 1926년 프라하에서 열린 체조 대회에서 클럽이 우승한 후 수데텐란트에서 점점 더 유명해졌다. 헨라인의 멘토인 하인츠 루타는 터너분트 운동의 창시자였으며,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메너분트/männerbundde (남성 엘리트)의 퓌러/Führernde (지도자)를 제안했는데, 이는 헨라인의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데텐란트의 정치는 수데텐 독일인이 체코슬로바키아 선거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충성파와, 헨라인을 포함하여 그렇게 하지 않은 분리주의적 "부정주의자"로 나뉘었다. 1928년까지 ''터너분트''는 프라하의 연립 정부에서 "활동가" 정당에 반대하는 일종의 정치 정당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930년 12월 투르너차이퉁/Turnerzeitungde에 게재된 기사에서 헨라인은 수데텐 독일인에게 푈키쉬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라고 촉구했으며 자유주의민주주의를 "비독일적"이라고 비난했다. 1931년,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었던 ''터너분트''(Turnerbund)의 회장으로 선출된 후, 더욱 노골적으로 푈키쉬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터너분트''의 목적은 회원들을 푈키쉬 운동으로 세뇌시키는 것이었다.

3. 정치 활동

3. 1. 수데텐 독일당 창당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이 반역죄로 수데텐란트의 두 주요 푈키슈/völkischde(민족주의) 정당을 금지하려 하자, 1933년 10월 1일 헨라인은 수데텐 독일 본부(Sudetendeutsche Heimatfront, SHF, 수데텐 독일 고향 전선)를 창설했다. SHF는 원래 금지된 반체코 독일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독일 국민당의 후계자로 의도되었지만, 곧 독일 소수 민족의 자치 지역을 위한 빅 텐트 우익 운동이 되어 독일 사회 민주 노동자당과 경쟁했다. 헨라인은 오스트리아 철학자 오트마어 스판의 가르침을 따르는 가톨릭 ''Kameradschaftsbund''와 연관되어 그의 운동이 금지된 정당의 연속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미국의 역사가 게르하르트 와인버그는 헨라인을 "수데텐 지역의 인종주의적 운동 단체에서 두각을 나타낸 35세의 전쟁 참전자였다. 그는 이제 오랫동안 내부 분쟁에 연루된 다양한 요소들을 자기 주변에 모았다."라고 묘사했다.

영국의 역사가 마크 콘월은 그가 "평범함 때문에 정확히 수데텐 인구에게 매력적이었다... 평균 수데텐 독일인의 불만을 대표하는 모든 사람"이라고 썼다. 수데텐란트의 민족 독일인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선호되었고, 갑자기 새로운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외부인이 되었다. 헨라인은 자신을 모든 수데텐 독일인을 위한 폴크스게마인샤프트/volksgemeinschaftde(민족 공동체)의 창시자로 여겼다. 헨라인은 수데텐 독일인을 특별하고 독특한 독일 공동체로 제시했다. 이러한 수데텐 "특수주의"는 나중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같은 그로스도이칠란트/grossdeutschlandde(대독일) 민족주의자들이 이러한 연설에 반대했을 때 제3제국 치하에서 헨라인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콘월은 "...헨라인이 수데텐 퓌러/Führerde(지도자)로서의 자기 인식과 카리스마와 정치적 수완이 모두 부족한 사람의 현실 사이에는 천천히 간극이 생겨났다."라고 썼다.

3. 2.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에서의 입장 변화

콘라트 헨라인은 초기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며 나치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2] 1934년 5월 15일, 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에드바르트 베네시는 토마시 가리구에 마사리크 대통령에게 헨라인의 Heimfrontde가 베를린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고 언급했다.[1] 1934년 4월부터 헨라인은 Auswärtiges Amtde(외무부) 뿐만 아니라 Verband für das Deutschtum im Auslandde(해외 독일인 협회)의 보조금을 받았다.[1]

헨라인은 수데텐란트의 자치를 옹호했지만,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1] 그는 자신의 정당이 금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반체코적인 주장이 아닌 친민주주의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충성을 넘어선 정체성을 가진 중앙 유럽 "공동 공간"에 살고 있는 수데텐 독일인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는 모든 중앙 유럽을 포괄하는 더 넓은 게르만 "공동 공간"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인과 체코인 사이의 "화해"를 옹호했지만, 체코인들이 자신과 수데텐란트인들이 중앙 유럽 "공동 공간"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1]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와 그 다양한 민족에 대한 충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삶을 체코슬로바키아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묘사했으며, 추종자들에게 체코인과 유대인이 소유한 사업체를 보이콧하도록 장려했다.[1]

1935년 4월 19일, 헨라인의 정당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압력으로 수데텐 독일당(Sudetendeutsche Parteide, SdP)으로 개명되었다. 1935년 5월 의회 선거에서 SdP는 나치당의 대규모 지원을 받아 15.2%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강력한 정당이 되었다. 헨라인은 수데텐란트의 실업률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두 배라는 점에 대한 불만을 이용했다.[1] SdP는 Auswärtiges Amtde로부터 은밀한 보조금을 받고 있었으며, 1935년 한 해에만 프라하 주재 독일 공관으로부터 15,000 Reichsmark를 받았다.[1] 1933년에 보조금이 크게 증가했고, SdP는 1935년 봄에 독일 자금의 주요 수혜자가 되었다.[1]

SdP가 수데텐란트에서 다수의 의석을 얻었지만, 체코 정당의 수적 우위로 인해 SdP는 항상 야당일 수밖에 없었다.[1] 주요 우익 체코 정당들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단일 국가로 보존하는 것을 선호했고, 헨라인은 이 문제에 대해 그들과의 대화가 빠르게 실패했다.[1] 체코 여론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연방으로 바꾸라는 요구에 압도적으로 적대적이었다. 체코 정부는 수데텐 독일의 자치를 거부했고, 헨라인은 체코 정부에 압력을 가할 수 있기를 바라며 외국 정부, 특히 영국을 구애했다.[1]

1937년, 헨라인은 아돌프 히틀러의 열렬한 추종자로 변모했다. 이는 카를 헤르만 프랑크가 대표하는 SdP 내 친독일 진영이 승리한 이후였다. 1937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은 (아마도 독일 비밀 정보부에 의해) 그의 측근인 하인츠 루타의 동성애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고, 루타는 SdP에서 활동하는 젊은이들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혐의로 투옥되었다. 루타는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1] 이후, 헨라인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주데텐란트의 독일 귀속을 주장하기 시작했다.[1] 1937년 11월 19일, 헨라인은 히틀러에게 주데텐 독일 공동체의 유일한 지도자로서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편지를 썼고, 독일인과 체코인은 단순히 같은 국가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자신의 믿음을 선언했으며, 주데텐란트를 "제국"으로 가져올 독일의 모든 외교적 움직임을 지지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1]

3. 3. 영국과의 접촉

헨라인은 1935년 7월, 영국 공군(RAF) 그룹 대위인 그레이엄 크리스티를 처음 만났으며, 이후 크리스티는 3년 동안 헨라인과 영국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헨라인은 외국 정부의 환심을 사는 것을 즐겼는데, 이는 자신의 당에 대한 권위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35년 12월, 헨라인은 런던의 채텀 하우스에서 수데텐 독일인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헨라인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수데텐 독일인 간의 해결의 기초로서 현존하는 헌법, 조약 및 소수 민족 조약을 수용하며, 보헤미아 영토의 본질적인 통일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당이 ''민족주의적''임을 인정했지만, 독일과의 어떠한 접촉도 부인했다.

1938년 이전 영국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해 베르사유 조약생제르맹 조약의 "부당함"을 언급하며, 수데텐 지역이 독일에 합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헨라인은 채텀 하우스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1936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 총리 밀란 호자는 헨라인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같은 해 6월, 헨라인은 에거에서의 연설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법이 개인의 권리만을 보호한다고 비판했다.

1936년 7월, 헨라인은 다시 런던을 방문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계''가 느끼는 불만을 설명했다. 로버트 반시타트 경은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대상으로 계획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그들에게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영국은 헨라인의 당이 독일의 비밀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936년 가을,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은 헨라인과 대화하려 했으나, 헨라인은 베를린의 지시에 따라 제안을 무시했다.

1937년 1월부터 영국 정부는 베네시에게 헨라인과 협상할 것을 압박했지만, 베네시는 거부했다. 프랑스 장관인 de/레오폴드 빅토르 드 라크루아프랑스어는 베네시를 지지하며 헨라인에게 양보하면 체코슬로바키아가 약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베네시는 1937년에 헨라인과 협상하라는 영국의 압력에 굴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3. 4. 뮌헨 협정과 독일 점령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병합되자, 헨라인은 국가판무관과 주데텐란트 국가대관구의 대관구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1939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여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을 수립하자, 헨라인은 한 달 동안 민정 수반을 맡았다. 그는 친위대(SS)에 입대하여 친위대 중장(SS-Gruppenführer) 계급을 받았으며, 1943년에는 친위대 대장(SS-Obergruppenführer)으로 승진했다.

1938년 10월 1일, 국방군이 주데텐란트에 진입하자 헨라인은 국가판무관에 임명되었으며, SS-집단지도자가 되었다. 헨라인은 1938년 11월 9일 주데텐란트에서 유대인의 집과 사업체를 파괴한 수정의 밤 포그롬을 조직했다. 또한 주데텐 경제의 "유대인 제거" 캠페인에 깊이 관여하여 유대인이 소유한 사업체와 재산을 몰수했다. 그는 직접 유대인 사업가로부터 라이헤베르크(현재 리베레츠, 체코)에 있는 빌라를 몰수하여 1945년까지 자신의 집으로 사용했다. 1938년 12월 나치 독일 국회에 선출되었고, 1939년 1월 26일 정식으로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9년 3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부분을 점령했을 때, 헨라인은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의 민정 수반으로 한 달 동안 복무하여 Reichsprotektorde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에 이어 보호령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리에 올랐다. 헨라인은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의 창설을 독일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체코 종속"을 회복하는 것으로 환영하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가 불행히도 체코인에 의해 "점령"된 "독일 땅"이며, 이제 독일이 착취할 "인구 및 경제적 자원"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권력은 그의 오랜 라이벌 카를 헤르만 프랑크의 손에 들어갔다. 1939년 5월 1일, 헨라인은 Reichsgau Sudetenland(주)의 Reichsstatthalterde(제국 총독)로 임명되어 관할 구역에서 가장 높은 당 및 정부 직책을 모두 맡게 되었다. 1942년 11월 16일, 그는 주를 위한 제국 방위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1938년 10월 3일, 히틀러와 빌헬름 카이텔(오른쪽) 장군 사이에 앉아 독일군 침공 당시 프란첸스바트(Františkovy Lázně)로 가는 길에서 휴식을 취하는 제복을 입은 헨라인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4. 1. 체포와 자살

1945년 5월 10일, 헨라인은 플젠의 병영에서 미국에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깨진 안경으로 정맥을 끊어 자살했다.[5] 그의 시신은 플젠 중앙 묘지에 익명으로 묻혔다.[5]

독일에 대한 주데텐란트의 합병은 전쟁 후 무효가 되었고, 1945~46년 베네시 포고령에 따라 주데텐란트의 모든 독일계 주민이 동독으로 추방되었다. 체코어로 'Henleinovci'('헨라인주의자')는 배신자 또는 제5열을 의미하는 비속어이다.

4. 2. 사후 평가

5. 기타

콘라트 헨라인은 국가보안본부 장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자주 대립했으며, 하이드리히로부터 암살 대상으로 지목받았다. 하지만, 헨라인과 히틀러의 좋은 관계 덕분에 계획은 실패했다. 후에, 영국군의 앤스로포이드 작전에 의한 하이드리히 암살 소식이 전해지자, 헨라인은 지역 비어홀로 향해, 술에 취해 공개적으로 이를 축하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헨라인은 아프베어의 빌헬름 카나리스를 통해 영국과 협상했다고 한다.[6]

참조

[1] 뉴스 Henlein Named Leader New York Times 1938-11-01
[2] 간행물 Two Years of German Oppression in Czechoslovakia Czechoslovak Office of Foreign Affairs 1941
[3] 잡지 Hint to Hitler TIME Magazine 1938-09-05
[4] 논문 A Faraway Country: Munich Reconsidered Midwest Quarterly 2006
[5] 백과사전 Konrad Henlein http://www.britannic[...] 2009-07-05
[6] 웹사이트 The Papers of Group Captain Malcolm Christie. http://janus.lib.c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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