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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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는 1757년 8월 30일, 7년 전쟁 중 동프로이센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러시아군은 스테판 표도로비치 아프락신 원수의 지휘하에 프로이센군을 기습하여 승리했지만, 이후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지 않고 러시아로 철수했다. 전투 결과, 프로이센군은 약 5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러시아군은 약 5,4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장기적인 육박전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었으며, 러시아는 240주년을 기념하여 칼리닌그라드의 프리드랜드 문에 전투를 묘사한 파노라마를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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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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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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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757년 8월 30일 |
장소 | 그로스-예거스도르프, 동프로이센 (현재의 메즈두레치예, 칼리닌그라드주) 근처 |
관련 전쟁 | 제3차 슐레지엔 전쟁 (7년 전쟁) |
결과 | 러시아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러시아 칼미크 칸국 |
교전국 2 | 프로이센 |
지휘관 | |
러시아 제국 지휘관 | 스테판 표도로비치 아프락신 원수 표트르 A. 루먄체프 |
프로이센 왕국 지휘관 | 한스 폰 레발트 원수 |
병력 규모 | |
러시아 제국 | 54,800명 |
프로이센 왕국 | 24,700–27,700명 |
사상자 규모 | |
러시아 제국 | 5,400명 사망 및 부상 |
프로이센 왕국 | 4,600명 사망 및 부상, 대포 28문 |
2. 배경
스테판 표도로비치 아프락신 원수가 지휘하는 러시아군 7만~7만 5천 명이 프로이센을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메멜을 5일간 포격해 점령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동프로이센 침공을 시작했다.[12] 아프락신은 신중하고 전쟁 경험이 부족해 전투를 꺼렸다. 베라우로 진군하는 대신 그로스-야거스도르프 마을 근처에서 프레겔 강을 도하하려 했다. 러시아군은 이동을 숨기기 위해 마을을 포위하고 불태웠다.[13]
2. 1. 7년 전쟁
7년 전쟁은 세계적인 분쟁이었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 이후 유럽 전선에서 특히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1748년 아헨 조약으로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는 번영하는2. 2. 동프로이센 전역
스테판 페도로비치 아프라크신 원수가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70,000-75,000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프로이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러시아군은 5일간 메멜에 대한 포격을 가한 후에 점령하였고, 이 요새를 거점으로 삼아 동프로이센에 대한 침입을 시작했다.[12] 아프라크신은 신중한데다가 전쟁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전투를 벌일 가능성이 있는 베라우로 진군하는 대신에 아프라스킨은 병력을 이끌고, 그로스-야거스도르프 마을 근교에서 안전하게 프레겔강을 도하하길 원했다. 러시아군은 자신들의 움직임을 숨기기 위해 마을을 포위하고 불질러버렸다.[13]표트르 아프락신은 약 55,000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네만강을 건넜다. 그들은 메멜을 점령했는데, 이곳은 프로이센의 나머지 지역을 침공하기 위한 군대의 기지가 되었다. 동 프로이센의 위치는 러시아의 보급선을 늘렸고, 병사들은 식량을 조달해야 했다. 식량 조달은 곧 무질서로 변질되었고, 초토화 작전으로 바뀌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는 러시아군을 훈련되지 않은 군인으로 생각하며 이 과정을 조롱했다. 왕은 훈련된 군대라면 그들을 쉽게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쾨니히스베르크로 이동하여 도시를 점령하거나 적어도 포위하려 했다.[14]
프리드리히는 70세의 원수 한스 폰 레발트를 28,000명의 병력과 함께 동프로이센의 병력을 지휘하도록 보냈다. 그는 레발트에게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채울 수 있는 백 개의 장교 임명장을 제공하여 그곳에서 군대를 강화할 것을 기대했다.[15][16] 그는 또한 자신의 원수가 적절하다고 판단할 때 러시아군을 공격하라는 모호한 명령을 내렸다. 프리드리히는 그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고, 유리한 순간이라고 판단될 때 행동하라는 일반적인 지시만 내렸다.[17]
3. 전투
한스 폰 레발트 원수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러시아군이 프레겔강을 건너는 동안 바실리 로푸힌 장군 휘하 부대를 기습 공격했다. 로푸힌은 전사했고, 표트르 루먄체프는 프로이센 보병대의 우익을 공격했다. 다른 러시아군 부대는 레발트 부대의 후방을 공격했다.[12]
프로이센군은 퇴각했지만, 러시아군은 혼란에서 벗어나 반격했다. 칼미크인과 돈 코사크 부대는 거짓 퇴각으로 프로이센군을 아군 포격 사정거리 안으로 유인했다.[13]
3. 1. 양측 군대의 배치
한스 폰 레발트 원수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25,500명 규모였다. 레발트는 수적으로 우세한 러시아군을 상대하기 위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러시아군이 프레겔강을 건너는 동안 바실리 러프킨 장군 휘하 부대를 공격했다. 러프킨 장군은 프로이센군과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표트르 루미야세프는 러프킨의 위기 소식을 듣고 덤불을 돌파하여 프로이센 보병대의 우익을 공격했다. 다른 러시아군 부대는 레발트 부대의 후방을 공격했다.[12]프로이센군이 점차 퇴각하기 시작하자, 기습당했던 러시아군 중군은 혼란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했다. 프로이센군 좌익과 교전 중이던 칼미크 기병대와 돈 코샤크 부대는 거짓 퇴각 전술을 사용하여 프로이센군을 아군 포병대의 사정거리 안으로 유인했다.[13]
3. 2. 전투 경과
한스 폰 레발트 원수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25,500명 정도의 병력이었고, 더 많은 수의 러시아군을 상대하기 위해 기습을 계획했다. 러시아군이 프레겔강을 건너는 동안 바실리 로푸힌 장군 휘하의 부대를 공격했다. 바실리 장군은 프로이센군과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했다.[14][19] 표트르 루미야세프는 로푸힌의 고전 소식을 듣고 덤불을 뚫고 돌진하여 프로이센 보병대의 우익을 습격했다. 러시아군의 다른 부대는 레발트 부대의 후방을 공격했다.[19]
프로이센군이 서서히 퇴각하기 시작하자, 기습을 받은 러시아군의 중군은 혼란 상태에서 회복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프로이센군의 좌익과 싸우던 칼미크 기병대와 돈 코샤크 부대는 거짓 퇴각으로 프로이센군을 아군의 포격 사정거리 안으로 유인하였다.[19]
러시아군은 느긋하게 행군하며 하루를 시작했지만, 규율이 없었고, 집중적이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이동하기 어려웠다. 기회를 엿본 프로이센군은 혼란스럽고 "대비되지 않은 무리" 상태의 러시아군을 공격했다.[18] 레발트의 기병대는 러시아군의 북부 및 남부 측면을 공격하여 초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절반밖에 안 되는 군대의 공격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러시아군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표트르 루뱐체프 장군은 초기 공격의 충격에서 벗어나 중앙에서 러시아군을 재결집시켰다.[19]
초기에 레발트의 군대는 전투에서 약간 우위를 유지했다. 프로이센의 격렬한 공격으로 러시아군은 기병대를 격퇴하기 위한 전통적인 사각형 대형을 형성할 수 없었지만, 붕괴되어 도망치지는 않았다. 러시아군은 초기 공격의 충격에서 벗어나 반격했고, 결국 프로이센군은 이에 붕괴되었다.[18] 게다가 프로이센군 좌익의 칼미크 기병대와 돈 코샤크는 후퇴하는 척하며 공격하는 프로이센군을 강력한 포격에 가두려 했다.[19]
레발트의 군대는 이전 야영지로 퇴각하여 그곳을 사수했다.[17]
3. 3. 전투 결과
해가 질 무렵 러시아군의 승리가 확실해졌고 프로이센군은 전장에서 물러났다. 러시아군과 동행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영사는 빈에 보낸 보고서에서 "18세기에서 이제껏 본 적이 없는" 혈전이라고 묘사하였다. 프로이센군은 5,000명, 러시아군은 5,400명의 병력을 잃었다.[19] 일부 자료에서는 러시아군의 사상자를 7,000명 선으로 50% 더 많았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18]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불타는 마을의 연기로 인해 피아식별이 어려워져 프로이센군이 패배했다고 분석했지만, 이 전투는 프로이센군이 장기적인 육박전을 벌일 능력이 없음을 증명하였다. 이는 다가올 전투에서 러시아군에게 유리한 이점으로 작용했다. 전투 결과, 아프라크신은 동프로이센 전역을 장악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진군을 멈추고 러시아로 퇴각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표트르 3세 제위 계승을 돕기 위해서였다.[30] 아프라크신이 천연두 때문에 퇴각했다는 견해도 있다. 천연두는 러시아군, 특히 칼미크 부대에 심각하여 1757년 모든 전투의 사망자보다 8.5배나 많은 사망자를 낳았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지 240주년이 지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의 현재 이름)의 프리드랜드 문(Friedland Gate)에 이 전투를 묘사한 파노라마 그림이 전시되었다. 프로이센군은 기습 공격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부터 다수의 거점을 탈취하고 동등한 피해를 입혔다. 조른도르프에서와 마찬가지로, 근접 전투에서 더 강력한 병력에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작센 장교는 러시아군이 "사각 대형을 갖출 시간도 기회도 없었지만, 완전히 기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잘 싸웠다"고 말했다.[20]
레발트는 전투에서 군단을 철수시켰고, 이후 슈트랄준트 봉쇄를 감독했다.[16] 그로스예거스도르프에서의 러시아의 성공은 스웨덴이 프로이센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장려했다.[21]
4. 영향
오스트리아의 영사는 빈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 전투를 "18세기에서 이제껏 본 적이 없는" 혈전이라고 묘사했다.[29]
이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지 240주년이 지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의 현재 이름)의 프리드랜드 문(Friedland Gate)에 이 전투를 묘사한 파노라마 그림이 전시되었다. 또한 2000년에 발행된 트란스니스트리아 루블의 200 루블 지폐 도안으로도 사용되었다.
4. 1. 프로이센과 러시아
해가 질 무렵 러시아군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프로이센군은 전장에서 물러났다. 양측 모두 5,000명 정도의 병력을 잃었다.[29] 이 전투는 프로이센군이 장기적인 육박전을 벌일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이는 이후 전투에서 러시아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불타는 마을의 연기로 인해 피아식별이 어려워져 프로이센군이 패배했다고 분석했다.[29]
전투 결과, 아프라크신은 동프로이센 전역을 장악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진군을 멈추고 러시아로 퇴각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표트르 3세의 제위 계승을 돕기 위해서였다.[30] 그러나 천연두가 러시아 군대에 퍼져, 특히 칼미크 부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혀 1757년 전투의 사망자보다 8.5배나 많은 사망자를 낸 것도 퇴각의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19]
최근 연구에 따르면 러시아는 서부 국경 너머의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동프로이센에서의 보급 문제를 현실적으로 평가하지 못했다. 아프라크신은 평범한 지휘관이었고, 중립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보급 기지를 설치하지 않고 현지 보급에 의존하려 했다. 1757년에는 92,000마리의 말을 지원할 사료가 리보니아에서조차 부족했고, 동프로이센에서는 더욱 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러시아는 발트해 항구를 이용한 보급 기지 확장 노력도 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보급품 징발은 지역 게릴라 봉기에 직면했고, 농부들은 러시아에 넘기느니 작물을 불태우고 보급품을 파괴했다.[24] 러시아가 리보니아에 도착했을 때, 말들은 참나무 잎을 먹고 매일 수백 마리씩 죽어갔다.[25]
엘리자베타 여제는 아프라크신에게 분노하여 지휘권을 박탈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아프라크신의 친구이자 재상인 알렉세이 베스투제프-류민은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영지로 추방되었다. 엘리자베타는 윌리엄 페르머를 새로운 러시아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이듬해 침공이 다시 시작되었다.[21] 페르머는 러시아 경계 밖에서 광범위한 보급 기지와 자원 네트워크를 개발하여 전임자보다 성공적이었지만, 황실 재정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받았다.[26]
이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지 240주년이 지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의 현재 이름)의 프리드랜드 문에 이 전투를 묘사한 파노라마 그림이 전시되었다.
4. 2. 7년 전쟁의 전개
7년 전쟁은 세계적인 분쟁이었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에 따라 유럽 전선에서 특히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1748년 아헨 조약으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번영하는 슐레지엔 지방을 차지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대를 재건하고 새로운 동맹을 맺기 위해 조약을 체결했지만, 슐레지엔을 되찾고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1]1754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프랑스는 대서양 무역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킬 기회를 포착했다. 오스트리아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프로이센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오랜 경쟁 관계를 뒤로하고 새로운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영국은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 동맹에는 개인적 동군 연합으로 유지된 영국 왕의 영토인 하노버와 그의 친척들이 다스리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 헤센-카셀 방백령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움직임을 외교 혁명이라고 부른다.[2][3][4]
전쟁 초기, 프리드리히는 유럽 최고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어떤 부대든 분당 최소 4회, 일부는 5회까지 일제 사격을 할 수 있었다.[5] 1757년 말까지 전쟁의 흐름은 프로이센에게 유리하고 오스트리아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프로이센은 로스바흐 전투와 로이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오스트리아에 빼앗겼던 슐레지엔의 일부를 되찾았다.[6] 이후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 모라비아로 진격했다. 1758년 4월, 프로이센과 영국은 영-프로이센 협약을 체결하여 영국은 프리드리히에게 연간 670000GBP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영국은 프리드리히의 매형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 페르디난트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7,000~9,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7] 페르디난트는 프랑스군을 하노버와 베스트팔렌에서 몰아내고 1758년 3월 엠덴 항구를 탈환했다. 그는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에 경보를 울렸다. 페르디난트가 크레펠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뒤셀도르프를 잠시 점령했지만, 더 큰 규모의 프랑스군이 성공적으로 기동하면서 그는 라인강 너머로 후퇴해야 했다.[8][9]
페르디난트와 영국의 동맹군이 라인란트에서 프랑스군을 저지하는 동안, 프로이센은 스웨덴,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싸워야 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오스트리아에, 포메라니아를 스웨덴에, 마그데부르크를 작센에, 동프로이센을 폴란드 또는 러시아에 잃을 위기에 처했다.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10] 특히 동프로이센은 폴란드 영토 500km에 의해 프로이센 본토와 단절되어 있었고,[11] 쉬운 목표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부 러시아 궁정 관리들, 특히 재상 알렉세이 베스투제프-류민은 서유럽 분쟁에 러시아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베스투제프-류민은 프로이센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프랑스나 영국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유럽 강대국들의 외교 관계가 재편되면서 적의 적이 과연 친구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10]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승리했지만, 프로이센군은 우세한 적군에게 기습 공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이듬해 초른도르프 전투에서도 이 전술은 효과를 발휘했다. 한편 러시아군은 기습을 받았지만 "방진을 형성할 시간도 기회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잘 싸웠다."라고 평가받는다.[29]
전투 후, 아프락신은 동프로이센 전체를 점령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쾨니히스베르크로 진격하지 않고 러시아로 퇴각했다. 퇴각 이유는 표트르 3세를 황위 계승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30]
5. 평가 및 기념
프로이센군은 패배했지만, 우세한 적군을 기습하여 거의 대등한 피해를 입혔다. 이 기습은 초른도르프 전투에서처럼 많은 적군에게 효과적이었다. 러시아군도 기습을 받았지만 "방진을 짤 시간도 기회도 없었지만 매우 잘 해냈다"고 평가받는다.[29]
아프락신은 이 승리 후 동프로이센 전체를 점령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쾨니히스베르크 진격을 멈추고 러시아로 철수했다. 철수 이유는 표트르 3세를 황위 계승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30]
5. 1. 기념
러시아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지 240주년이 지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의 현재 이름)의 프리틀란트 문(Friedland Gate)에 이 전투를 묘사한 파노라마 그림을 전시했다.[29] 또한, 2000년 트란스니스트리아 루블의 200 루블 지폐 도안으로 사용되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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