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망명정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그리스 망명 정부는 1941년 그리스가 추축국에 점령당하자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와 함께 해외로 망명하여 결성된 정부이다. 아테네 함락 직후 총리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가 자살하고, 에마누일 츠데로스가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이집트, 남아프리카, 런던 등을 거쳐 1943년 카이로로 돌아왔다. 망명 정부는 키프로스와의 통합을 추진하고, 도데카네스 제도 등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한편, 국내 저항 세력, 특히 공산주의 세력인 EAM/ELAS와의 갈등을 겪었으며, 영국 특수 작전 집행부(SOE)와의 관계 또한 순탄치 않았다. 1944년 EAM의 반란과 츠데로스의 사임 이후 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총리를 역임했다. 1944년 10월, 그리스가 해방되면서 망명 정부는 귀국하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그리스-영국 관계 - 런던 조약 (1827년)
런던 조약 (1827년)은 1827년에 체결되었으며 특정 시대, 사회, 기술적 특징을 가지고 한국 관련 역사, 사회문화적 특징, 정책 등에 영향을 미친 조약이다. - 그리스-영국 관계 - 엘긴 대리석 조각군
엘긴 대리석 조각군은 19세기 초 엘긴 백작이 아크로폴리스에서 떼어내 영국으로 가져간 조각품으로,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리스와의 반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리스 - 데켐브리아나
데켐브리아나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아테네에서 그리스 인민해방군을 주축으로 한 좌익 세력과 영국군 및 그리스 정부군 간에 벌어진 시가전으로, 저항 세력의 무장 해제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면서 발발하여 그리스 내전의 서막을 알렸다. -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리스 -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왕국이 그리스를 침공하여 시작된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은 이탈리아군의 준비 부족과 그리스군의 저항 등으로 이탈리아군의 공세가 좌절되었으나, 독일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그리스가 항복하게 되었다. - 망명정부 - 연방의회 대표위원회
연방의회 대표위원회는 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선출직 의원들의 모임으로, 군부의 불법성을 규정하고 국민통합정부를 수립하여 저항하며 국제적인 협력을 요청하고 있다. - 망명정부 - 시리아 임시정부
그리스 망명정부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그리스 망명 정부 |
상태 | 망명 |
존속 기간 | 1941년 – 1944년 |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제 |
수도 | 아테네 |
망명 수도 | 크레타: (1941년) 카이로: (1941년) 런던: (1941년–1943년) 카이로: (1943년–1944년) |
국가 | [[File:Greece national anthem.ogg]] |
공용어 | 그리스어 |
종교 | 동방 정교회 |
지도자 | |
국왕 | 요르요스 2세 |
국왕 재임 기간 | 1941년–1944년 |
총리 | 에마누일 추데로스 |
총리 재임 기간 | 1941년–1944년 |
총리 | 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 |
총리 재임 기간 | 1944년 |
총리 |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
총리 재임 기간 | 1944년–1945년 |
역사 | |
주요 사건 시작 | 그리스 전투 |
주요 사건 시작 날짜 | 1940년 10월 28일 |
주요 사건 1 | 크레타 전투 |
주요 사건 1 날짜 | 1941년 5월 20일 |
주요 사건 2 | 카이로 도착 |
주요 사건 2 날짜 | 1941년 5월 24일 |
주요 사건 종료 | 그리스 해방 |
주요 사건 종료 날짜 | 1944년 10월 |
이전 | |
이전 국가 | 8월 4일 체제 |
다음 | 그리스 왕국 |
2. 역사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 총리가 아테네 함락 직전 자살하자, 게오르기오스 2세 국왕은 알렉산드로스 마자라키스-아이니안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국왕이 8월 4일 체제 하에서 미움을 받던 콘스탄티노스 마니아다키스 공공질서 장관을 해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다.[1] 마이클 팔레어 아테네 주재 영국 공사는 8월 4일 정권보다 더 대표적인 정부를 원했기에 강한 압력을 가했고, 국왕은 1941년 4월 21일 에마누일 추데로스를 총리로 임명했다.[1] 그리스 은행의 전 총재였던 추데로스는 직업 정치인이 아니었고, 메탁사스 정권 하에서 망명했기 때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추데로스는 망명 정부가 8월 4일 정권의 유산을 단절하는 것을 꺼렸고, 매우 느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1]
1941년 4월 25일, 그리스 전투가 시작되면서 국왕 조지 2세와 그의 정부는 그리스 본토를 떠나 크레타섬으로 향했고, 1941년 5월 20일 나치 독일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독일군은 대규모 공수 침투 작전에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여 섬의 세 주요 비행장을 공격했다. 7일간의 전투와 격렬한 저항 끝에 연합군 지휘관들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스파키아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5월 24일 밤, 조지 2세와 그의 정부는 크레타에서 카이로로 대피했다.[1] 정부는 1944년 10월 17일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철수할 때까지 이집트에 머물렀다.[1] 키프로스로 이전하려 했지만,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대다수가 망명 정부에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불만을 제기한 영국 식민지부의 반대에 따라 이집트가 대안으로 제시되었다.[1] 이집트에는 이집트의 그리스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정치적으로 베니젤로스주의자 성향을 띠었고, 국왕의 지지를 받았던 내각의 메탁시스트 장관들에게 반대했다.[1] 이집트의 그리스인 공동체는 사업에서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집트 경제에서 과도한 역할을 했으며, 망명 정부는 그들의 재정적 지원에 매우 의존했다. 1941년 6월 2일, 국왕은 마니아다키스가 남아 있는 한 이집트의 그리스인 공동체가 망명 정부와 아무런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마지못해 마니아다키스를 해임했다.[1]
망명 정부는 1941년 7월 남아프리카 연방 프리토리아로, 1941년 9월 런던으로 이전했다.[1] 그리스 중동군의 대다수가 이집트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성은 전쟁 기간 내내 카이로에 머물렀다.[1] 1943년 3월, 망명 정부는 카이로로 돌아왔다.[1]
전쟁 기간 내내 초데로스와 망명 정부는 키프로스와의 ''에노시스''(연합)를 위해 영국에 강력하게 압력을 가했고, 키프로스인 대다수가 민족 그리스인이며 그리스에 합류하길 원한다고 주장했다.[1]
1943년 11월, 영국 장교 도날드 스토트 소령이 그리스에 도착하여 EAM을 제외한 모든 저항 단체의 지도자들과 접촉했다.[2] 이 단체들의 대부분이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스토트는 그들에게 조지 2세 국왕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도록 압박하며, 왕당파 저항의 부재는 영국 정부에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2] 스토트는 또한 그리스가 해방되면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 단체 간에 그리스 내전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하며, 영국은 후자를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2] 그 후 스토트는 아테네로 가서 독일 군사 경찰의 손님으로 머물렀다.[2] 스토트의 방문 목적은 보안 대대가 EAM이 그리스를 장악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귀환하는 정부가 그리스 협력주의자를 고용하는 데 동의할 의향이 있다고 독일 측에 주장하면서, 헬레니크 주에 충성하는 보안 대대가 정부가 그리스로 돌아올 때 망명 정부를 섬기도록 전환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었다.[2]
1944년 3월, EAM은 통제하에 있는 그리스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국민 해방 정치 위원회를 선포했는데, 이는 임시 정부를 선포하는 것과 매우 가까웠고, 망명 정부는 이를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1] 1944년 4월, 이집트 주재 그리스군에서 친 EAM 반란이 발생했다.[1] 알렉산드리아에서 항구에 주둔한 왕립 헬레닉 해군의 모든 군함의 승무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장교들을 바다로 던졌다.[3] 정부는 자체 군대에 대한 권위를 유지할 수 없어서 영국에 반란을 진압하도록 요청해야 했다.[1]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초데로스는 1944년 4월 13일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로 대체되었다.[1] 1944년 4월 23일, 반란의 절정에서 충성스러운 그리스 해군과 하급 해군 장교들은 반란군이 통제하는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그리스 해군 군함을 습격했으며, 그 과정에서 5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했다.[3] 베니젤로스는 1944년 4월 26일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에게 총리직을 사임했다.[1]
새로운 파판드레우 정부는 레바논 회의를 통해 국내 정치 세력과의 통합을 모색했으나, EAM/ELAS와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4] 그리스 정부는 1944년 10월 영국군과 함께 망명에서 돌아왔다.[2]
2. 1. 설립 배경
1941년 4월, 독일군의 침공으로 그리스 본토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와 총리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는 크레타섬으로 피신했다. 코리지스 총리가 자살한 후, 게오르기오스 2세는 에마누일 추데로스를 새 총리로 임명하여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1]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 총리가 아테네 함락 직전 집무실에서 자살하자, 게오르기오스 2세 국왕은 알렉산드로스 마자라키스-아이니안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국왕이 8월 4일 체제 하에서 미움을 받던 공공질서 장관 콘스탄티노스 마니아다키스를 해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다. 아테네 주재 영국 공사 마이클 팔레어 경은 8월 4일 정권보다 더 대표적인 정부를 원했기에 강한 압력을 가했고, 국왕은 1941년 4월 21일 에마누일 추데로스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리스 은행의 전 총재였던 추데로스는 직업 정치인이 아니었으며, 메탁사스 정권 하에서 망명했기 때문에 임명되었다. 그래서 국왕은 팔레어에게 내각을 확장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추데로스는 망명 정부가 8월 4일 정권의 유산을 단절하는 것을 꺼렸고, 매우 느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1941년 4월 25일, 그리스 전투가 시작되면서 국왕 조지 2세와 그의 정부는 그리스 본토를 떠나 크레타섬으로 향했고, 크레타는 1941년 5월 20일 나치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독일군은 대규모 공수 침투 작전에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여 섬의 세 주요 비행장을 공격했다. 7일간의 전투와 격렬한 저항 끝에 연합군 지휘관들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스파키아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 2. 망명 생활과 연합군의 지원
1941년 5월, 크레타 전투에서 패배한 그리스 망명 정부는 이집트 카이로로 이동했다.[1] 이후 남아프리카 연방의 프리토리아를 거쳐, 1941년 9월에는 런던으로 이동했다.[2] 1943년 3월, 망명 정부는 다시 카이로로 돌아왔다.영국은 그리스 망명 정부의 주요 후원국이었다. 그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상선을 보유하고 있었고, 영국은 독일 해군의 유보트 공격으로 인해 식량 부족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상선은 망명 정부가 영국과 협상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었다.[4] 따라서 그리스 상선은 연합군의 전쟁 물자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3]
망명 정부는 이집트의 그리스인 공동체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5] 이들은 베니젤로스주의자 성향이 강했으며, 국왕을 지지했던 8월 4일 체제 출신 각료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2. 3. 국내 저항 세력과의 갈등
망명 정부는 그리스 국내의 저항 운동, 특히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민족해방전선(EAM)과 그 군사 조직인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망명 정부는 EAM/ELAS를 견제하고 왕정 복고를 위한 기반을 다지려 했으나, 이는 국내 저항 세력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1]1943년, 영국의 특수 작전 집행부(SOE)는 그리스 내 저항 세력 간의 갈등을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SOE 요원 도날드 스토트 소령이 독일군과 접촉한 사건은 EAM/ELAS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망명 정부와 EAM/ELAS 간의 불신을 증폭시켰다.[2] 스토트는 EAM을 제외한 모든 저항 단체의 지도자들과 접촉하여 게오르기오스 2세 국왕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도록 압박했다. 또한 스토트는 아테네로 가서 독일 군사 경찰의 손님으로 머물면서, 보안 대대가 망명 정부를 섬기도록 전환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2. 4. 해방과 귀환, 그리고 내전의 그림자
1944년, 연합군의 공세와 국내 저항 운동의 압력으로 독일군은 그리스에서 철수했다.[1] 영국군의 지원을 받으며 망명 정부는 그리스로 귀환했으나,[2] 이미 국내 정치 지형은 크게 변화한 뒤였다. 1944년 4월, 이집트에 주둔하던 그리스군 내에서 친EAM 성향의 반란이 일어났다.[3] 이는 망명 정부의 취약한 권위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이 반란으로 에마뉘엘 츠데로스는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를 거쳐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총리가 되었다. 망명 정부는 레바논 회의(1944년 5월) 등을 통해 국내 정치 세력과의 통합을 모색했으나, EAM/ELAS와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4]3. 주요 인물
(출생-사망)

(1890년–1947년)

(1882년–1956년)

(1894년–1964년)

(1888년–196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