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현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금현성은 충청북도 제천시에 위치한 백제의 성곽으로, 신라 진흥왕이 점령하여 남한강 상류와 하류 지역에서 고구려의 10군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고로봉형 산성으로, 약 2.75km의 둘레를 가지며, 한국 전쟁 당시 격전지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금현성 점령을 통해 죽령 이북 고구려 강역 10군과 청풍강 하류 한성 지역을 점령했다. 금현성의 정확한 위치는 논쟁의 대상이며, 진천, 전의 등으로 추정되지만, 지리적, 역사적 기록과 일치하지 않아 불확실하다. 금현성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고구려를 견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지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다.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신현리, 한수면 덕곡리, 한수면 탄지리 접경지역에 걸쳐 있는 북형산(와룡산)에 있으며, 좌표는 N36 55.707 E128 06.704이다. 이 성안에는 고산사가 있다. 금현성은 백제의 성곽으로 신라 진흥왕이 이곳을 점령하여 남한강 하류와 상류 지역에 걸쳐 고구려의 10군을 점령할 수 있는 전초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백제의 금현성([1])은 위치 비정이 명확하지 않아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으로 비정[2]하거나,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로 비정[3]하기도 하지만, 삼국 항쟁의 전적과 지리적으로 불합리하며 성곽의 명칭을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금현성은 쇠(金)와 관련된 성곽 명칭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금곡산(金谷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10] 금곡산은 청풍군 서쪽 26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11] 현재의 와룡산과 월형산이 금현성의 위치로 추정된다.
금현성은 고로봉형 산성으로, 산 능선을 따라 돌과 흙을 쌓아 만들었다. 자연적인 절벽 지형을 활용하여 성벽의 전체 둘레는 약 2.75km에 달한다. 성 안에는 마실 물이 풍부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당시에는 마지막 격전지 중 하나였다.[14]
2. 위치
3. 역사적 기록과 논쟁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은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싸워 지친 틈을 타 이사부를 시켜 금현성과 도살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죽령 이북 지역의 고구려 강역 10군[5]과 청풍강 하류 한성(漢城) 지역을 점령하였다.
3. 1.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에 따르면, 진흥왕 11년(550)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쳐서 빼앗자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진흥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에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공격을 명하였다. 신라는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주둔군을 배치했다. 고구려는 금현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이사부는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크게 승리했다.[4] 이 승리로 신라는 죽령 이북 고구려 강역 10군[5]과 청풍강 하류 한성(漢城)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진흥왕 12년(551) 봄 3월, 진흥왕이 낭성을 순수하다가 우륵과 그의 제자 니문이 음악을 안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은 하림궁에서 그들의 음악을 들었는데, 두 사람은 각각 새로 지은 노래를 연주하였다.[6] 이는 진흥왕이 금현성과 도살성을 점령한 청풍강 유역을 순수하며 우륵의 청풍체(淸風體) 하림조(河臨調)를 들었다는 것을 시사한다.[7]
3. 2. 위치 비정 논쟁
백제의 금현성([1])은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으로 보는 견해[2]와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로 보는 견해[3]가 있지만, 삼국 항쟁의 전개 과정이나 지리적 조건과 맞지 않고, 성의 이름도 명확하게 밝히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에 따르면, 진흥왕 11년(550)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자,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진흥왕은 두 나라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사부에게 공격을 명했고, 이사부는 두 성을 모두 빼앗아 증축하고 갑사(甲士)를 주둔시켜 지켰다. 이후 고구려군이 금현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크게 이겼다.[4] 이 기록을 통해 신라가 백제의 금현성과 고구려의 도살성을 차지하여 죽령 이북의 고구려 땅 10개 군[5]과 청풍강 하류의 한성(漢城)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명칭 유래
쇠시리재는 한수면 덕곡리 골안 남쪽에서 탄지리로 가는 고개로,[12] 쇠가 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금현(金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쇠시리재는 금현성의 진입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지리적 특징 및 구조
신라 이사부가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찌른 광천의 금곡마을에는 '살패'라는 지명이 전해 내려온다.[14] 금현성은 단양 도살성에서 서쪽으로 모녀현을 넘어 성천과 광천이 합쳐지는 금곡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청풍강과 가까워 성 안에서 농성하며 한강 하류로 진격하거나 방어하는 데 유리했다.
금현성은 청풍강과 그 지류인 성천, 광천, 송계 계립천을 아우르는 요충지로,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면서 한강 하류 지역과 죽령 북쪽, 고현 안쪽 고구려의 10개 군을 점령할 수 있었다.[14]
5. 1. 주변 지형과의 관계
금현성은 동쪽으로 다랑산(591m), 북쪽으로 골안 마령과 경심령성, 서쪽으로 등곡산, 남쪽으로 월악산 덕주산성, 북북서쪽으로 쇠시리재, 동북동쪽으로 꼬부랑재 등 사방으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14] 배후에 남한강을 두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6. 역사적 의의
금현성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고구려를 견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사부의 고구려 격퇴와 관련된 '살패'라는 지명이 금곡마을에 전해진다.[14] 신라는 금현성 점령을 통해 청풍강 유역(성천, 광천, 송계 계립천)을 장악하고, 단양, 충주, 제천, 청풍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더 나아가 죽령 이북 고현 이내 고구려 10군을 점령하는 발판을 마련했다.[14]
참조
[1]
서적
삼국사기
[2]
논문
高句麗 道西縣城考
1983
[3]
서적
국역 삼국사기
1977
[4]
서적
삼국사기 卷第四十四 列傳 第四 異斯夫
[5]
서적
조상상고사
[6]
서적
삼국사기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7]
간행물
청풍 성열현인 악성 우륵의 사료집성
2013
[8]
간행물
제천군지
1969
[9]
간행물
제천의 옛성터2
2000
[10]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11]
서적
대동여지도
[12]
간행물
제천시지
2004
[13]
간행물
충북지방 성곽의 보존 및 활용방안
2013
[14]
간행물
충북지방 성곽의 보존 및 활용방안
2013
[15]
서적
삼국사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