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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우라 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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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요우라 게이고는 1850년 태어난 일본의 정치인으로, 법조인, 관료, 귀족원 의원, 추밀원 고문관을 거쳐 1924년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그는 사법성에서 검사로 근무하며 일본 최초의 현대적인 형사 소송법 초안 작성에 기여했고, 내무성 경보국장으로 경찰 제도를 개혁했다.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며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여러 내각에서 법무대신을 지냈다. 1924년 총리대신에 취임했으나, 귀족원 중심의 내각 구성과 중의원의 반발로 5개월 만에 사퇴했다. 총리 퇴임 후에도 중신으로 활동했으며, 1942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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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우라 게이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예복을 입은 기요우라
예복을 착용한 기요우라
본명기요우라 게이고 (清浦 奎吾)
출생일1850년 3월 27일 (또는 1850년 2월 14일 (음력))
출생지일본 히고 국가모토 군 야마가시가몬토마치구루메
사망일1942년 11월 5일
사망지일본 시즈오카현아타미시
기요우라 서명
작위 및 훈장
작위종1위 백작
훈장대훈위 국화대수장
훈1등 욱일대수장
정치 경력
소속 정당무소속
총리내각총리대신
재임 기간1924년 1월 7일 ~ 1924년 6월 11일
천황다이쇼 천황
섭정히로히토
전임야마모토 곤노효에
후임가토 다카아키
추밀원추밀원 의장
추밀원 의장 재임 기간1922년 2월 8일 ~ 1924년 1월 7일
추밀원 의장 전임야마가타 아리토모
추밀원 의장 후임하마오 아라타
추밀원 부의장 재임 기간1917년 3월 20일 ~ 1922년 2월 8일
귀족원귀족원 의원
귀족원 의원 재임 기간1891년 4월 9일 ~ 1906년 5월 17일
내무대신 재임 기간1905년 9월 16일 ~ 1906년 1월 7일
농상무대신 재임 기간1903년 7월 17일 ~ 1906년 1월 7일
기타 직책사법대신 (제6, 9, 11대)
가족 관계
배우자기요우라 렌코 (清浦錬子)
자녀삼남: 기요우라 야스쓰네 (清浦保恒)
사남: 기요우라 게이키치 (清浦敬吉)
오남: 기요우라 도요아키 (清浦豊秋)
팔남: 기요우라 스에오 (清浦末雄)

2. 생애

가에이 3년(1850년) 2월 14일, 히고국야마가군 가미고우다 마을(현: 야마가시가모토마치라이민)의 멘쇼지(정토진종 본원사파) 주지였던 오쿠보 료시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적 이름은 '''오쿠보 후자쿠'''였다.[2] 후에 기요우라의 성을 사용했다. 게이오 원년(1865년)부터 분고국히타에서 한학자 히로세 탄소가 주최하는 간기엔에서 배웠다. 동창으로는 요코타 구니오미가 있었고 친우가 되었으며[3], 히타 현령을 맡고 있던 마쓰카타 마사요시, 노무라 모리히데의 지우를 받았다.

1873년 사이타마현에서 하급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876년 사법성에 들어가 검사로 근무하며 형사소송법 초안 작성에 기여했다. 1884년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눈에 띄어 34세의 젊은 나이에 내무성 경보국장에 발탁되었다. 이후 법무 차관, 법무 대신을 역임하며 1887년 치안유지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1891년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4]

1891년, 황실 지명으로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측근으로서, 제2차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과 제2차 야마가타 내각에서 법무대신, 제1차 가쓰라 다로 내각에서 법무대신과 농상무성 대신을 역임했다.

1902년 화족 작위 제도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듬해 서보장 1등을 받았고, 1906년에는 욱일대수장 1등을 수여받았다. 1907년 9월에는 자작으로 승작되었다.

1914년 추밀원 의원이었던 기요우라는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뒤를 이어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는 천황 칙령을 받았다. 그러나 지멘스 사건과 관련된 논란으로 인해 이 자리를 거절했고, 대신 오쿠마 시게노부가 총리로 선택되었다.[10]

1923년(다이쇼 12년), 제2차 야마모토 내각호토몬 사건으로 총사퇴하자, 총선거 시행을 위해 공정한 내각의 출현을 바라는 사이온지의 추천으로 조각의 대명이 다시 기요우라에게 내려졌다. 1월 1일에 대명을 받은 기요우라는 75세라는 노령과 추밀원 의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1월 3일 섭정궁 히로히토 친왕으로부터 "이런 때이므로 힘써 해라"라는 우젠(優諚)을 받고 조각을 하게 되었다.[1] 구마모토현 출신으로 총리대신에 취임한 것은 기요우라가 처음이었다.

기요우라 내각은 1924년 1월 7일에 성립되었는데, 귀족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정당 세력은 배제되었다. 이 때문에 "특권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헌정회, 정우회, 혁신구락부의 호헌 삼파는 제2차 호헌 운동을 전개하여 내각 타도를 외쳤다. 기요우라 내각은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했으나, 호헌 삼파가 압승하여 5개월 만에 총사퇴하였다.

총리 퇴임 이후, 중신으로 열거되었으며, 신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중신 회의에 참가하여, 5·15 사건 당시에는 사이온지와 마찬가지로 거국 일치 내각의 성립을 추진했다.[12] 1941년(쇼와 16년) 중신 회의에서 도조 히데키의 후임 총리 옹립을 승인했다. 회의에서는 하야시 센주로가 황족 내각을 제안했지만 이에 반대하고, 군부에서 총리를 맞이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1942년(쇼와 17년) 11월 5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에는 역대 최장수 총리대신 경험자였다. 현재도 역대 5번째 장수 총리대신이며, 전전(戰前)에 한정하면 최장수 총리대신이다. 묘소는 요코하마시 총지사에 있다.

1992년(헤이세이 4년) 기요우라의 생가 야마가시가모토초 메이쇼지 옆에 [https://yamaga-tanbou.jp/spot/1390/ 기요우라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도쿄도 오타구 주오 1초메에 있는 카스가 신사의 석제 사호표 "촌사 카스가 신사"는 기요우라의 필적이다. 이외에도 고코쿠지, 시나가와 신사, 시부사와 에이이치 기념관, 다이엔지, 신명 신사 등 여러 곳에 기요우라의 필적이 남아있다.

2. 1. 초기 생애

가에이 3년(1850년) 2월 14일, 히고국야마가군 가미고우다 마을(현: 야마가시가모토마치라이민)의 멘쇼지(정토진종 본원사파) 주지였던 오쿠보 료시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적 이름은 '''오쿠보 후자쿠'''였다.[2] 후에 기요우라의 성을 사용했다. 게이오 원년(1865년)부터 분고국히타에서 한학자 히로세 탄소가 주최하는 간기엔에서 배웠다. 동창으로는 요코타 구니오미가 있었고 친우가 되었으며[3], 히타 현령을 맡고 있던 마쓰카타 마사요시, 노무라 모리히데의 지우를 받았다.

2. 2. 관료 시대

1873년 사이타마현에서 하급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876년 사법성에 들어가 검사로 근무하며 형사소송법 초안 작성에 기여했다. 1884년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눈에 띄어 34세의 젊은 나이에 내무성 경보국장에 발탁되었다. 이후 법무 차관, 법무 대신을 역임하며 1887년 치안유지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1891년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4]

2. 3. 정계 진출

1891년, 기요우라는 황실 지명으로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측근으로서, 제2차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과 제2차 야마가타 내각에서 법무대신, 제1차 가쓰라 다로 내각에서 법무대신과 농상무성 대신을 역임했다.

1902년, 기요우라는 화족 작위 제도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듬해 서보장 1등을 받았고, 1906년에는 욱일대수장 1등을 수여받았다. 1907년 9월에는 자작으로 승작되었다.

1914년, 추밀원 의원이었던 기요우라는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뒤를 이어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는 천황 칙령을 받았다. 그러나 지멘스 사건과 관련된 논란으로 인해 이 자리를 거절했고, 대신 오쿠마 시게노부가 총리로 선택되었다.[10]

2. 4. 내각총리대신

1923년(다이쇼 12년), 제2차 야마모토 내각호토몬 사건으로 총사퇴하자, 총선거 시행을 위해 공정한 내각의 출현을 바라는 사이온지의 추천으로 조각의 대명이 다시 기요우라에게 내려졌다. 1월 1일에 대명을 받은 기요우라는 75세라는 노령과 추밀원 의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1월 3일 섭정궁 히로히토 친왕으로부터 "이런 때이므로 힘써 해라"라는 우젠(優諚)을 받고 조각을 하게 되었다.[1] 구마모토현 출신으로 총리대신에 취임한 것은 기요우라가 처음이었다.

기요우라는 자신의 지지 기반이었던 연구회를 중심으로 조각을 진행했기 때문에, 내각 구성은 귀족원에 크게 편중되었다. 귀족원에서는 연구회가 3명, 교우회가 2명, 다화회가 1명, 공정회가 1명 입각했고, 육군 대신과 해군 대신 외에는 외무 차관이었던 마츠이 게이시로만 입각했을 뿐 정당 출신 인사는 없었다.[2] 그러나 사이온지는 기요우라를 추천하면서 "정우회를 존중하게 하고, 정책에 따라 돕게 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듯이, 기요우라 내각과 정우회의 협조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고,[3] 기요우라 측도 정우회를 적으로 돌릴 의도는 없었다. 연구회는 전통적으로 정우회와 협조 관계였고, 조각 과정에서도 정우회와 조정이 이루어졌다.[4] 또한 내각서기관장으로 정우회 중의원 의원이었던 코하시 이치타를 초빙하여 정우회와 연락을 유지했다.[5] 기요우라는 훗날 귀족원에서 "과도기에 이러한 내각이 헌정의 상도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했다.[6]

하지만 야마모토 내각 이후 정우회 내각이 들어설 것이라 예상했던 정우회 파벌은 이에 반발했고, 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사임시키려는 움직임이 거세졌다.[7] 다카하시 파가 주도권 탈환을 위해 기요우라 내각과 대결 자세를 강화하는 한편, 1월 1일 밤에는 반(反) 다카하시 파인 "개혁파" 모임에서 기요우라 내각에 대해 "적극적 원조 방침을 취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8]

1월 11일, 도쿄 내 신문들이 일제히 기요우라 내각에 반발하면서 의회 안팎에서 내각 타도 움직임이 시작되었다.[9] 1월 18일, 추밀 고문관 미우라 고로의 중재로 정우회 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 헌정회 총리 가토 다카오미, 혁신구락부 이누카이 쓰요시가 회합을 갖고 "특권 내각을 하루라도 빨리 타도"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른바 호헌 삼파에 의한 내각 타도 운동인 "헌정 옹호 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10]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 당시


1월 2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기요우라 수상이 시정 방침 연설과 보통 선거 법안 제출을 할 예정이었으나, 히로히토 친왕의 결혼을 앞두고 정쟁을 자제해야 한다는 정우회 오가와 헤이키치의 동의에 따라 29일까지 휴회가 의결되어 연설은 무산되었다.[11] 한편, 연구회의 세력 확대와 당파성이 강한 의회 운영에 반감을 품은 "코 산 파"로 불리는 반(反) 연구회 세력은 귀족원 내에서 기요우라에 대한 비판을 강화했다.

호헌 삼파가 2월 1일 내각 불신임안 제출 의사를 굳히자, 이를 감지한 코하시 서기관장은 그 전에 의회 해산을 진언했다. 기요우라는 이를 받아들여 1월 29일 본회의에서 해산을 단행했다.[12] 이는 "징벌 해산"으로 불리며 각계의 반발을 샀다. 같은 날, 정우회에서 "개혁파"였던 토코나미 타케지로 등 149명이 정우 본당을 결성하며 분열했고, 이들은 기요우라 내각의 준 여당이 되었다.[13]

1924년 1월 26일, 히로히토 황태자(훗날의 쇼와 천황)와 구니요시 나가코(훗날의 고준 황후)의 결혼이 거행되었다.

5월 10일 총선거 결과, 호헌 삼파는 총 281석을 얻어 압승했고, 준 여당인 정우 본당은 기존 의석에서 33석이 줄어든 116석을 얻는 데 그쳤다. 기요우라는 이미 패배를 예견하고 투표 당일 사임 의사를 밝혔다.[14] 사이온지는 "기요우라가 사임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현실적으로 의회 운영은 불가능했다.[15] 결국 5월 15일 기요우라 내각은 총사퇴했다. 5개월 만의 단명 내각이었다. 기요우라는 헌정의 상도에 따라 제1당이 된 헌정회 총재 가토 다카오미를 후임 총리로 추천하려 했으나, 사이온지는 이를 거절하고 원로로서 가토를 다시 추천했다.[16]

2. 5. 총리 퇴임 이후

그 후 기요우라는 중신으로 열거되었으며, 신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중신 회의에 참가하여, 5·15 사건 당시에는 사이온지와 마찬가지로 거국 일치 내각의 성립을 추진했다.[12] 1941년(쇼와 16년) 중신 회의에서 도조 히데키의 후임 총리 옹립을 승인했다. 회의에서는 하야시 센주로가 황족 내각을 제안했지만 이에 반대하고, 군부에서 총리를 맞이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1942년(쇼와 17년) 11월 5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기요우라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역대 최장수 총리대신 경험자였다. 현재도 역대 5번째 장수 총리대신이며, 전전(戰前)에 한정하면 최장수 총리대신이다. 묘소는 요코하마시 총지사에 있다.

1992년(헤이세이 4년) 기요우라의 생가 야마가시가모토초 메이쇼지 옆에 [https://yamaga-tanbou.jp/spot/1390/ 기요우라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또한, 도쿄도 오타구 주오 1초메에 있는 카스가 신사의 석제 사호표 "촌사 카스가 신사"는 기요우라의 필적이다. 이외에도 고코쿠지, 시나가와 신사, 시부사와 에이이치 기념관, 다이엔지, 신명 신사 등 여러 곳에 기요우라의 필적이 남아있다.

3. 정책 및 업적

1896년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이 성립되자 기요우라는 사법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898년 제3차 이토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같은 해 11월에 성립된 제2차 야마가타 내각, 1901년에 성립된 제1차 가쓰라 내각에서도 사법 대신을 맡았다. 제1차 가쓰라 내각에서는 농상무 대신을 겸임(후에 전임)하고, 내무 대신을 겸임했다. 농상무 대신 재임 시에는 같은 고향 출신인 마키노 테루토모를 농상무 대신 비서로 기용했다.[6] 기요우라의 사법 대신 재임 기간은 총 5년 6개월에 달한다. 1902년에는 이러한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또한 법전 조사회의 부총재도 여러 번 역임했다.

제1차 사이온지 내각에서는 농상무 대신을 마쓰오카 야스다케, 체신 대신을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맡고 있었지만, "농상무와 같은 차관 이하 속료 모두 기요우라 파이고", "체신과 같은 차관 이하 속료 모두 기요우라 및 오오우라의 파"라는 상황이어서 양 대신의 실권은 거의 없었다. 하라 다카시는 기요우라와 오오우라가 내각을 동요시킬 것이라고 경계했다.

4. 평가 및 비판

기요우라 게이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법률 전문가로서 일본 근대 법체계 확립에 기여하고, 행정 관료로서도 뛰어난 실무 능력을 발휘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반면, 귀족원 중심의 내각을 구성하여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제2차 호헌 운동을 초래하여 정국 혼란을 야기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4. 1. 긍정적 평가

기요우라 게이고는 법률 전문가로서 일본 근대 법체계 확립에 기여했다. 제2차 마쓰카타 내각, 제2차 야마가타 내각, 제1차 가쓰라 내각에서 사법 대신을 역임하며 총 5년 6개월 동안 재임했고, 법전 조사회 부총재도 여러 번 역임했다.[6] 행정 관료로서도 뛰어난 실무 능력을 발휘하여 농상무 대신과 내무 대신을 겸임하기도 했다.[7]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측근으로서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제1차 사이온지 내각에서는 마츠오카 야스다케가 농상무 대신을,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체신 대신을 맡았지만, 실권은 기요우라 파에게 있었다고 평가받는다.[6]

4. 2. 부정적 평가

기요우라 게이고는 귀족원 중심의 내각을 구성하여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0] 1923년 제2차 야마모토 내각이 총사퇴한 후, 기요우라는 중의원 총선거를 위해 중립적인 내각을 구성할 적임자로 추천받았다. 그러나 기요우라 내각은 귀족원 의원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정당의 참여는 배제되어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그의 내각은 제2차 호헌 운동을 초래하여 정국 혼란을 야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4년 1월, 주요 정당들은 연합하여 기요우라 내각 타도 운동을 전개했고, 이는 결국 내각 불신임안 제출과 중의원 해산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징벌 해산"으로 불리며, 사회 각층의 비판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기요우라 내각은 5개월 만에 붕괴하였고, 이는 그가 정당 정치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양부기요우라 히데타츠구마모토 번사, 구마모토현사족
양모코지마 타미코지마 메이쵸의 장녀
오쿠보 료시히고국야마가군 카미고우다 마을(현: 야마가시카모토마치라이민) 묘쇼지(정토진종 본원사파) 주지
기요우라 렌코교육가
삼남기요우라 야스츠네1883년 - 1928년, 구요 상회 이사·구마모토 전기 이사
사남기요우라 케이키치1886년 - 1941년, 구요 상회 이사
오남기요우라 토요아키1888년 - 1952년, 구요 상회 감사역
육남기요우라 츠네미치1891년 - 1973년
칠남기요우라 야스나오1894년 - 1983년
팔남기요우라 스에요1898년 - 1982년, 육군 소좌
양녀하타베 시즈오가와 시게지로의 처
양녀코노자키코노 미치노리 삼녀, 우츠노미야 토모에의 처, 칸노 모리지로의 처
현손기요우라 나츠미여배우·가수


6. 기타

기요우라는 도쿄도오타구에 사저를 두고 오랫동안 거주했으며, 1939년(쇼와 14년)에 설립된 오모리 클럽의 초대 명예 회장을 맡았다. 기요우라 저택이 있던 곳 바로 앞의 언덕은 2015년에 오타구에 의해 '''기요우라 씨의 언덕'''이라고 명명되어 표지판도 세워졌다.[35] 지가사키, 오다와라, 교토에 별장을 소유했다.

7. 저서

제목발행일출판사비고
치죄법 강기 수청 수필1882년 1월박문사
경관 연습소 기요우라 케이고 연술 강담 필기1889년 5월경관 연습소
내무성 경보국장 기요우라 케이고 씨 경찰 사항에 관한 연설1891년 2월화족회관
감옥 비용에 관한 의견1891년 4월기요우라 케이고
규도여타1891년 8월경찰기관사2020년 복각판 출간
메이지 법제사1899년 6월명법당2003년 복각판 출간
기요우라 남작 산업 논집1906년 5월박문관
기요우라 자작 연설1922년 5월고하시 이치타
기요우라 내각 총리대신의 성명한 중의원 해산 이유1924년
규도 시존1926년 11월나카가와 요시로
메이지 무진의 회고・쇼와 무진에 대하여1928년 2월도쿄 강연회
기요우라 백작 경찰 회고록1929년 4월경찰협회
규도 야화 미수암에서1937년청쾌루 고옥 여관
규도 야화1938년 10월오늘의 문제사1939년 보급판 출간


참조

[1] 서적 Kiyoura Keigo Japan Encyclopedia
[2] 서적 「近代日本における統治機構整備と議会開設 : 明治五年から二四年までの清浦奎吾の経歴を通して」『慶応義塾大学日吉紀要 社会科学』 The Hiyoshi review Keio University
[3] 서적 華族総覧 講談社現代新書
[4] 간행물 貴族院要覧(丙)
[5] 간행물 官報 1891-04-10
[6] 서적 日本の経済学を築いた五十人 : ノン・マルクス経済学者の足跡 日本評論社
[7] 간행물 官報 1906-04-14
[8] 간행물 官報 1906-05-18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간행물 官報 1884-07-01
[14] 간행물 官報 1890-07-15
[15] 간행물 官報 1896-10-12
[16] 간행물 官報 1942-11-07
[17] 간행물 官報 1887-11-26
[18] 간행물 官報 1889-12-05
[19] 간행물 官報 1890-12-27
[20] 간행물 官報 1893-12-29
[21] 간행물 官報 1896-01-04
[22] 간행물 官報 1897-06-29
[23] 간행물 官報 1902-02-28
[24] 간행물 官報 1903-12-28
[25] 간행물 官報 1907-01-28
[26] 간행물 官報 1908-09-28
[27] 간행물 官報 1907-09-23
[28] 간행물 官報 1916-12-13
[29] 간행물 官報 1928-11-10
[30] 간행물 官報 1931-12-28
[31] 간행물 官報 1941-10-23
[32] 간행물 官報 1892-03-31
[33] 간행물 官報 1906-11-12
[34] 간행물 官報 1924-05-23
[35] 웹사이트 大森倶楽部初代名誉会長 清浦奎吾元内閣総理大臣邸宅跡に、「清浦さんの坂」 標柱完成 https://www.magome-b[...] 一般社団法人大森倶楽部 2015-12-14
[36] 뉴스 陽のあるうちに大阪に着いた 東京朝日新聞 193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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