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주 (조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관주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서인 및 노론 계열의 가문 출신이다. 17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했고,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탄핵했다가 유배되었다. 정조 사후 순조 즉위 후 예조 판서, 우의정을 거쳤으나, 순원왕후의 간택을 반대하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지지하다가 파직되었다. 이후 김조순 등 시파의 탄핵으로 유배를 가던 중 사망했다. 사후 복권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벌열양반 - 홍봉한
홍봉한은 영조와 정조 시대의 권력자이자 정조의 외조부로,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사도세자 죽음의 책임론과 정조의 개혁 정책에 저항하다 실각한 인물이다. - 벌열양반 - 민유중
민유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이자 노론의 지도자였으며, 예송 논쟁과 당쟁에 연루되었고, 딸 인현왕후가 숙종의 계비가 되면서 권력을 장악했으나 권력 남용으로 비판받다 사망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노론 벽파 - 심환지
심환지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정조와 순조 시대에 걸쳐 요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격변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정조와의 비밀스러운 소통이 드러나 기존 평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인물이다. - 노론 벽파 - 조엄 (조선)
조엄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로,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며 요직을 역임했고, 일본 통신사로 고구마를 들여왔으며, 저서로 《해사일기》와 《해행총재》가 있으나, 홍국영의 모함으로 유배되어 생을 마감했다. - 1743년 출생 - 니콜라 드 콩도르세
니콜라 드 콩도르세는 프랑스의 수학자, 철학자, 정치인이자 계몽주의 사상가로서, 수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기고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진보적인 정치 사상을 펼쳤으며,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전망한 『인간 정신 진보의 역사적 개관 초고』와 선거 방법론을 다룬 『다수결의 결정 확률에 대한 분석의 적용에 관한 논문』 등의 저서를 남겼다. - 1743년 출생 -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는 독일의 철학자, 작가, 사업가로, 칸트 등 독일 관념론 철학을 비판하고 이성과 믿음의 관계에 대한 독자적인 사상을 제시했으며, 독일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김관주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김관주 |
| 한자 이름 | 金觀柱 |
| 자 | 경일(景日) |
| 시호 | 문익(文翼) |
| 국적 | 조선 |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여주군 여흥면 |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 사망지 | 조선 함경도 이원군 |
| 출생일 | 1743년 |
| 사망일 | 1806년 (향년 64세) |
| 본관 | 경주 |
| 당파 | 노론 벽파 세력 |
| 분야 | 유교 성리학 |
| 관직 (영조 재위 기간) | |
| 직책 | 조선의 홍문관 교리 |
| 임기 | 1768년~1771년 |
| 임금 | 영조 이금 |
| 대리청정 | 세손 이산(1771~1776) |
| 관직 (정조 재위 기간) | |
| 재임 | 1793년~1794년 |
| 임금 | 정조 이산 |
| 작위 | 조선의 평안도 용궁현감 |
| 관직 (순조 재위 기간) | |
| 작위 | 조선의 의정부 우의정 |
| 임금 | 순조 이공 |
| 재임 | 1802년 10월 27일~1804년 7월 10일 |
| 시호 | 문익(文翼) |
| 대리청정 | 정순왕후 경주 김씨(1800~1803) 영의정 김조순(1803~1804) |
| 가족 관계 | |
| 배우자 | 기계 유씨 부인 |
| 아버지 | 김한록 |
| 어머니 | 풍산 홍씨 부인 |
| 자녀 | 김노정(장남) 김노돈(차남) |
| 친인척 관계 | |
| 친인척 | 김운경(할아버지) 김선경(이복 작은할아버지) 김한원(큰아버지) 김한곤(작은아버지) 김한구(친가친척 5촌 종숙부) 김한기(친가친척 5촌 종숙부) 김한로(친가친척 5촌 서종숙부) 김상주(친가친척 사촌 종형) 김내주(친가친척 사촌 종제) 김귀주(친가친척 6촌 재종형) 정순왕후 김씨(친가친척 6촌 누이동생) 영조 이금(친가친척 6촌 매제) 김노서(친가친척 오촌 종질) 김한귀(친가 방척 11촌 숙부) 김한룡(친가 방척 11촌 숙부) 김한봉(친가 방척 11촌 숙부) 김복경(친가 족척 족조부) 이규진(사돈댁) 손충섭(사돈댁) |
| 경력 | |
| 경력 | 1765년 식년문과 병과 급제 |
2. 생애
김관주는 서인 및 노론 계열 정치 가문 출신으로, 민회빈 금천 강씨의 억울한 죽음을 상소하였다가 효종에 의해 장살된 김홍욱의 후손이다. 김운경(1698~1756)의 손자이자 김한록(1722~1790)의 아들이다. 영조의 장인 김한구(1723~1769)와 영조의 처숙부 김한기(1728~1792)는 그의 5촌 종숙부였다. 6촌 여동생 정순왕후 김씨, 6촌 형 김귀주는 모두 그의 친가 재종형제자매간이었다. 그의 어머니 풍산 홍씨는 홍국영의 5촌 당고모이며 홍낙춘과는 4촌간이었다. 1765년(영조 4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93년(정조 17년) 용궁현감이 되었다. 이후 한직을 전전하다가 1800년 정조 사후 순조 즉위 후 벽파가 득세하면서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예조 판서로 등용되었다. 이때 순원왕후의 간택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후 이조판서, 양주목사 등을 거쳐 1802년 우의정으로 고속승진했다. 1803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둘 상황에 놓이자, 좌의정 이시수 등과 함께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복권되었으나 1805년 김조순 등 시파가 집권하면서 국혼 방해를 이유로 대사간 신헌조 등의 탄핵을 받고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 도중 이원군에서 병사하였다.[2] 사후 복권되었다.
2. 1. 생애 초기
서인 및 노론 계열 정치 가문 출신으로, 민회빈 금천 강씨의 억울한 죽음을 상소하였다가 효종에 의해 장살된 김홍욱의 후손이다.김운경(金運慶, 1698~1756)의 손자이자 김한록(金漢祿, 1722~1790)의 아들이다. 영조의 장인 김한구(1723~1769)와 영조의 처숙부 김한기(1728~1792)는 그의 5촌 종숙부였다. 6촌 여동생 정순왕후 김씨, 6촌 형 김귀주는 모두 그의 친가 재종형제자매간이었다. 그의 어머니 풍산 홍씨는 홍국영의 5촌 당고모이며 홍낙춘과는 4촌간이었다. 1765년(영조 4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2. 2. 관료 생활
1793년(정조 17년)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되었다.이후 한직을 전전하다가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여 벽파가 득세하면서 다시 발탁되어 중추부첨지사(僉知事)를 거쳐 예조 판서로 등용되었다. 이때 순조의 빈으로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된 김조순의 딸(순원왕후)의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이후 이조판서, 양주목사 등을 두루 거쳐, 1년만인 1802년 우의정으로 고속승진했다. 이듬해 1803년 대왕대비(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둘 상황에 놓이자,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등과 함께 반대하고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계속할 것을 종용하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복권되었으나 정순왕후 사후 1805년 김조순 등 시파가 집권하면서 순조와 순원왕후의 국혼을 방해했다 하여, 대사간 신헌조(申獻朝) 등의 탄핵을 받고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를 가던 도중, 귀양길에 이원군에서 병사하였다.[2] 사후 복권되었다.
3.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
| 할아버지 | 김운경(金運慶, 1698~1756) |
| 할머니 | 충주 지씨(忠州 池氏, ?~1749) |
| 백부 | 김한원(金漢圓, 1719~?) |
| 백모 | 청주 한씨(淸州 韓氏) |
| 사촌 종형 | 김상주(金象柱, 1737~?) |
| 사촌 형수 | 남양 홍씨(南陽 洪氏) |
| 아버지 | 김한록(金漢祿, 1722~1790) |
| 어머니 | 풍산 홍씨(豊山 洪氏) |
| 본인 | 김관주(金觀柱, 1743~1806) |
| 부인 | 기계 유씨(杞溪 兪氏) |
| 장남 | 김노정(金魯鼎) * 사촌 종형 김상주(金象柱)의 양자로 감. |
| 자부 | 이규진(李奎鎭)의 딸 |
| 차남 | 김노돈(金魯燉) |
| 자부 | 손충섭(孫忠燮)의 딸 |
| 숙부 | 김한곤(金漢崑, 1725~?) |
| 숙모 | 수원 백씨(水原 白氏) |
| 사촌 종제 | 김내주(金崍柱, 1744~?) |
| 사촌 제수 | 창녕 조씨(昌寧 曺氏) |
| 5촌 종질 | 김노서(金魯瑞) |
4. 평가
김관주에 대한 평가는 현재 남아있는 사료가 부족하여 구체적으로 내리기 어렵다. 추가적인 사료 발굴 및 연구가 필요하다.
참조
[1]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1996
[2]
실록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1838-05-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