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김조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조순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조선의 문신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다. 그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규장각 대교 등을 지냈으며, 순조의 즉위 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 병조판서를 거쳐 비변사 제조를 겸임했다. 정순왕후가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섭정하며 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안동 김씨의 세력을 강화했다. 김조순은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60년간 안동 김씨가 권력을 휘두르는 세도정치의 기반을 다졌으며, 1832년에 사망하여 종묘에 배향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의 소설가 - 김만중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은 명문 양반 가문 출신으로, 암행어사, 공조 판서, 대사헌, 대제학 등 요직을 역임하며 숙종의 궁녀 장씨 총애를 비판하다 유배 생활을 했고, 어머니를 위해 지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비롯한 저서를 통해 국어 문학 발전에 기여하며 주자학적 세계관과 불교적 사상을 융합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 조선의 소설가 - 이인직
    이인직은 대한제국 시대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받는 『혈의 누』를 통해 신소설의 효시로 여겨지나, 친일 활동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문학적 업적과 친일 행적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조선 순조 - 영온옹주
    영온옹주는 조선 순조와 숙의 박씨의 외동딸이자 효명세자의 이복 여동생으로, 11세에 옹주로 책봉되었으나 병약하여 13세에 요절하였으며 효명세자의 깊은 슬픔을 자아냈다.
  • 조선 순조 - 심환지
    심환지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정조와 순조 시대에 걸쳐 요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격변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정조와의 비밀스러운 소통이 드러나 기존 평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인물이다.
  • 1765년 출생 - 제임스 아이보리 (수학자)
    제임스 아이보리는 1765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타원 보정, 인력 문제 등 다양한 수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코플리 메달을 수상하고 왕립 학회 회원으로 선출된 수학자이다.
  • 1765년 출생 - 요한 프리드리히 파프
    요한 프리드리히 파프는 독일의 수학자이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의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했고, 수열과 적분, 1계 편미분 방정식 연구에 기여했다.
김조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조순 초상 (지본담채, 33.5센티미터 × 44.5센티미터)
본관신안동(新安東)
자(字)사원(士源)
호(號)풍고(楓皐)
시호(諡號)충문(忠文)
생년1765년
몰년1832년 (향년 약 66세)
사망 장소한성부, 조선
가족 관계
아버지김이중
어머니평산 신씨 부인
배우자청송 심씨 청양부부인
자녀김유근 (장남)
김원근 (차남)
순원왕후 (딸)
김좌근 (삼남)
친인척김문근 (조카)
김수근 (조카)
김조근 (조카)
관력
등과1785년 정시문과 병과 급제
주요 직책조선국 영돈녕부사
조선국 금위대장
조선국 상급 국상 부원위
정치 성향노론 세력
주요 관직
관직최고 국무위원
임명권자정조
순조
재임 시작1800년 1월 31일
재임 종료1811년 1월 9일
관직 2섭정
군주 2순조
임기 시작 21803년 12월
임기 종료 21804년 3월
임기 시작 31811년 1월 9일
임기 종료 31811년 2월 28일
임기 시작 41811년 1월 9일
임기 종료 41831년 1월 18일
섭정 4효명세자 이대(前)
영의정 남공철(前)
기타 정보
존경 칭호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2. 생애

김조순은 1765년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의 현손이자 서흥부사를 지낸 김이중의 아들로 태어났다. 노론이었으나 시파에 속했다.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규장각 대교 등을 지냈다. 1788년 규장각 대교 시절, 당쟁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당쟁을 없앨 것을 정조에게 주장했다. 1792년에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이후 규장각 직각, 이조참의, 승지, 총융사, 양관(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9]

정조는 김조순을 신임하여 그의 딸 순원왕후를 세자빈으로 간택하고, 어린 순조의 보필을 부탁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며 김조순을 병조판서에 임명했으나, 그는 두 번 사직했다.[11][12][13] 이후 비변사 제조를 겸임했다.[14] 그러나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는 김조순을 공격했고,[16] 신유박해로 인해 친족인 김건순이 처형되기도 했다.[20][21] 1801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고, 1802년 딸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22][23]

1804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김조순은 순조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섭정 직후 노론 벽파의 지도자들을 역적으로 단죄하고, 1805년에는 순조에게 친정 체제를 부여케 하였다. 정순왕후가 승하한 뒤, 경주 김씨 벽파를 대규모로 숙청하고, 안동 김씨 시파를 등용하여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을 만들었다.[5][6]

1811년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다. 1827년 관서 지방을 여행하며 민간의 폐단을 순조에게 보고하여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

1828년 아내 청양부부인 심씨가 사망하자 순조는 효명세자를 보내 조문하려 했으나 김조순은 이를 사양했다. 1832년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뒤 사망하였다. 사후 충문(忠文)이라는 시호추증되었으며, 1833년 종묘의 정조 묘정에 배향되었다.[30]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생애

김조순은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의 현손이자, 서흥부사를 지낸 김이중의 아들로 태어났다. 노론이었으나 시파에 속했다. 정조의 신임을 받아 그의 딸 순원왕후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어린 순조를 보필하며 '신(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9]

1765년, 김조순은 김이중과 평산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 김창집은 영의정을 지냈고, 김창집의 동생들인 김창협, 김창흡 등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이들의 후손은 정계 최고위층에 오른 문신들로, 김조순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신 안동 김씨 가문은 많은 재산과 권력을 소유했는데, 2022년 기준 국토 전체 가격의 상당수를 소유했다고 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지녔다. 또한 '천생오태사'로 불릴 만큼 권력적인 측면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었다.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 규장각 대교 등을 지냈다. 1788년 규장각 대교 시절, 당쟁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당쟁을 없앨 것을 정조에게 주장했다. 1792년에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이후 규장각 직각, 이조참의, 승지, 총융사, 양관(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정조는 김조순을 신임하여 어린 순조의 보필을 부탁했으며, 사망 직전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며 김조순을 병조판서에 임명했다.[11] 김조순은 두 번 사직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12][13] 비변사 제조도 겸임하게 되었다.[14]

그러나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는 김조순을 공격했다.[16] 신유박해가 일어나 김조순의 친족인 김건순[20]이 처형되고,[21] 김조순과 친분이 있던 김려도 체포되었다.[21] 1801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고, 딸(순원왕후)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22]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23] 1802년 훈련대장, 호위대장,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했고, 같은 해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

경화사족은 서울 중심의 특권 계층을 말한다. 19세기 대표적인 경화사족으로는 심상규가 있었고, 신 안동 김씨(김조순), 풍양 조씨(조만영) 등은 세도가문으로 성장했다. 김조순의 처가인 청송 심문(심택현, 심건지, 심풍지, 심능건, 심능악, 심의면, 심순택, 심이택) 또한 대표적인 경화사족이다. 신 안동 김씨는 구 안동 김씨와는 다른 가문으로, '신(新)'자를 사용한다.

정순왕후가 섭정에서 물러난 후, 김조순은 자신의 가문과 정파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정적들을 제거했다.[5] 이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6]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김조순은 순조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고, 지방 수령과 감사들은 안동 김씨의 환심을 사야 했다.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은 안동 김씨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가문을 이었다.[7][8]

2. 2. 관료 생활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과 규장각 대교(待敎)를 지냈다. 그는 노론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788년 규장각의 대교를 지낼 당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당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정조에게 주장하였다. 1792년에는 동지(冬至) 겸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규장각 직각과 이조참의, 승지, 총융사, 양관(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로부터 어린 순조의 보필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받은 규장각의 각신들 중 한 사람이었다. 정조는 사망 직전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였으나 결혼은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함으로써 김조순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정조의 후계 작업이 미완성인 채 김조순의 지위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10] 대왕대비인 정순왕후는 새로 즉위한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정순왕후에 의해 병조판서에 임명되자,(1800년 음력 8월 2일)[11] 두 번이나 사직하였으나, 정순왕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13] 게다가, 정순왕후는 곧 그를 비변사 제조도 겸임하게 하였다(음력 8월 4일).[14] 정순왕후로서는 쉽사리 김조순을 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15]

그러나, 이런 표면상의 관직 제수와 별개로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정권은 전방위적으로 김조순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16] 즉, 노론 벽파의 사헌부 장령 이안묵시파의 서유린(徐有隣) 형제를 탄핵했다.(1800년 12월 23일(음력 11월 8일))[17] 또한, 정순왕후가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림으로써(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18] 신유박해가 개시되었는데, 실제 공격 대상은 노론 시파, 소론, 남인에다 왕실 인사까지 광범위했다.[19] 이때, 김조순의 친족인 천주교 신자 김건순[20]이 체포(4월 28일(음력 3월 16일)) 및 처형( 6월 1일(음력 4월 20일))되었고, 김조순과 친분 관계에 있던 김려(金鑢)도 이때 체포되었다.[21] 1801년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환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딸(순원왕후)이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자( 10월 2일 (음력 9월 6일))[22]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23] 정치인으로서 그는 결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24] 1802년에 다시금 훈련대장과 호위대장에 제수되었으며 역시 같은 해인 1802년에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에도 제수되었으나 두 차례의 사직 상소를 올려 윤허되었고 같은 해에 판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

2. 3. 섭정과 권력 장악

정순왕후1804년 2월 9일(1803년 음력 12월 28일)에 수렴청정을 거두고[25]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김조순은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게 되었다. 섭정에 오른 직후 노론 벽파의 지도자들을 대부분 정조 임금의 유지를 저버린 역적으로 단죄한 후 1804년 영의정이었던 이병모에게 1805년까지 1년간 섭정을 위임케 하고 이후 1805년에는 16세였던 사위 순조 임금에게 친정 체제를 부여케 하였다. 정순왕후가 승하(1805년 2월 11일 (음력 1월 12일))한 뒤, 정순왕후의 6촌으로서 함께 권력을 쥐고 있던 김관주가 귀양길에 병사(1806년)[26] 하는 등 정순왕후의 친정 가문 경주 김씨벽파가 대규모로 숙청되었다. 그리고, 김조순 자신과는 10촌 친척이지만, 벽파김달순도 사사되었다.(1806년)[27] 또한, 노론 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심환지(각각 이미 고인이었다)도 역시 선왕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들로 지목하여 추탈시켰다.[28] 여기에 남인 계열도 숙청되었다. 그러한 빈 자리에는 새로 과거로 뽑아들인 노론 청명당 및 노론 시파 계열 인사들과 일부 소론, 규장각에서 눈여겨봤던 각신들을 대거 발탁하여 조정의 요직에 배치했다. 김이익(金履翼)과 김이도(金履度) 등의 안동 김씨 시파도 등용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정순왕후 집권 이후 계속된 천주교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숙청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1811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임명되었으나 세 차례나 사직상소를 올려 결국 윤허되었다. 1827년에는 관서 지방을 여행하다가 서하(西下) 지방의 열악한 민간 실정을 순조에게 보고하여 경외(京外)에 위치한 각 아문(衙門)들의 절미(折米)와 형정(刑政), 인사, 대동미 등의 폐단을 정리하게 하였다.

정순왕후가 섭정에서 물러난 후 이미 영향력 있는 측근이었던 김조순은 자신의 가문과 정파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정적들을 제거했다.[5] 이는 안동 김씨세도정치, 즉 과두정치[6]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김조순은 노론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는 순조, 헌종, 철종 세 왕의 재위 기간에 걸쳐 60년 동안 안동 김씨가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김조순은 순조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굳게 장악했다. 지방 수령과 감사들은 모두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안동 김씨의 환심을 사야 했다.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은 안동 김씨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가문을 이어받았다.[7][8]

2. 4. 정책 및 개혁 시도

1788년 규장각 대교로 있을 당시, 시파벽파의 당쟁에서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정조에게 주장하였다.[10] 정순왕후수렴청정을 거두고(1804년 2월 9일 (1803년 음력 12월 28일))[25]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그는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섭정에 오른 직후 노론 벽파의 지도자들을 대부분 정조 임금의 유지를 저버린 역적으로 단죄한 후 1804년 영의정이었던 이병모에게 1805년까지 1년간 섭정을 위임케 하고 이후 1805년에는 16세였던 사위 순조 임금에게 친정 체제를 부여케 하였다. 정순왕후가 승하(1805년 2월 11일 (음력 1월 12일))한 뒤, 정순왕후의 6촌으로서 함께 권력을 쥐고 있던 김관주가 귀양길에 병사(1806년)[26] 하는 등 정순왕후의 친정 가문 경주 김씨벽파가 대규모로 숙청되었다. 김조순 자신과는 10촌 친척이지만, 벽파김달순도 사사되었다.(1806년)[27] 또한, 노론 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심환지(각각 이미 고인이었다)도 역시 선왕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들로 지목하여 추탈시켰다.[28] 여기에 남인 계열도 숙청되었다. 그러한 빈 자리에는 새로 과거로 뽑아들인 노론 청명당 및 노론 시파 계열 인사들과 일부 소론, 규장각에서 눈여겨봤던 각신들을 대거 발탁하여 조정의 요직에 배치했다. 김이익(金履翼)과 김이도(金履度) 등의 안동 김씨 시파도 등용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정순왕후 집권 이후 계속된 천주교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숙청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5][6]

1827년 관서 지방을 여행하다가 서하(西下) 지방의 열악한 민간 실정을 순조에게 보고하여 경외(京外)에 위치한 각 아문(衙門)들의 절미(折米)와 형정(刑政), 인사, 대동미 등의 폐단을 정리하게 하였다.

김조순은 순조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굳게 장악했다. 지방 수령과 감사들은 모두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안동 김씨의 환심을 사야 했다.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金左根)은 안동 김씨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가문을 이어받았다.[7][8]

2. 5. 말년

1828년 김조순의 아내 청양부부인 심씨(靑陽府夫人 沈氏)가 사망하자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를 보내 직접 조문하게 하였으나, 김조순은 "처음에는 놀라고 송구스러워하다가 이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나 이는 국조(國朝) 수백 년 내에는 아직까지 듣고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라며 사양하여 조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32년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뒤인 1832년 음력 4월 3일에 사망하였다. 사후에는 충문(忠文)이라는 시호추증되었으며, 1년 뒤인 1833년 음력 4월에는 예조판서인 조만영의 건의로 종묘의 정조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30]

3. 사후

1832년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뒤인 1832년 음력 4월 3일에 사망하였다. 사후 '충문(忠文)'이라는 시호추증되었으며, 1년 뒤인 1833년 음력 4월 예조판서 조만영의 건의로 종묘 정조대왕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30]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성균관관상감사에 증직되었다.

경기도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과 이천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생전 문장력이 뛰어나 초계문신을 역임하였다. 죽화(竹畵)에도 능했으며, 문집으로는 16권 8책으로 구성된 《풍고집》이 있다. 묘소는 《풍고 김조순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207호)으로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에 있다.

4. 평가

김조순은 대정치인의 현손으로,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 용모가 수려했으며 기국과 식견이 넓었다. 그는 공평하고 정직하며 숨김이 없어 정조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31]

19세기 경화사족(京華士族)은 서울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특권을 누리던 계층을 말한다. 심상규는 경화사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신 안동 김씨(김조순), 풍양 조씨(조만영) 등은 세도가문으로 성장했다. 김조순의 처가인 청송 심씨(심택현, 심건지, 심풍지, 심능건, 심능악, 심의면, 심순택, 심이택) 또한 대표적인 경화사족이었다. 신 안동 김씨는 낡을 구(舊)자를 쓰는 구 안동 김씨와는 다른 가문으로, 명성에 비해 인구가 극소수였으며, 새로울 신(新)자를 사용했다.

4. 1. 긍정적 평가

정조는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훗날 김조순에게 부탁할 정도로 김조순의 공평하고 정직하며 숨김없는 성품을 높이 평가했다.[31] 김조순은 권상왕의 지위에 있었으나, 노비나 호위무사를 많이 소유하지 않았고 굉장히 절제적이고 정결했다는 기록이 있다.[31]

4. 2. 부정적 평가

김조순은 남공철, 심상규, 이만수, 서영보와 함께 순조 시대 정계를 움직인 핵심 인물로, 이들은 그 권력이 막강하여 천생오태사(天生五太史)라고 불렸다.[32]

1800년 정조 사후 순조 즉위 초기에는 심환지벽파가 득세했으나, 1806년 병인경화(丙寅更化)로 벽파가 제거되면서 정조와 협력했던 노론 시파와 소론이 다시 부상했다. 이때 정조의 신임을 받았던 천생오태사가 정계 전면에 나섰다.

정순왕후가 섭정을 거둔 후, 김조순은 자신의 가문과 정파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정적들을 제거했다.[5] 이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 즉 과두정치의 시작이었다.[6] 김조순은 노론의 주요 인물로서,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60년간 안동 김씨가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세도정치 시대를 열었다.

김조순은 순조의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지방 수령과 감사들은 안동 김씨의 환심을 사야만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 김좌근은 안동 김씨 세력의 절정기에 가문을 이끌었다.[7][8]

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 - 사망비고
증조부김제겸(金濟謙)? - ?김창집의 아들
조부김달행(金達行)? - ?의정부좌찬성
아버지김이중(金履中)? - ?서흥부사, 증 영의정
어머니평산 신씨? - ?부사 신사적(申思迪)의 딸
배우자청양부부인 청송 심씨1766년 - 1828년호조정랑 심건지(沈健之)의 딸, 예조판서 심풍지의 조카
장남김유근1785년 - 1840년문과 급제, 판돈령부사, 시호 문정(文貞), 김용순(金龍淳)의 양자로 감
차남김원근1786년 - 1832년문과 급제, 증 이조판서, 이조참판
장녀순원왕후1789년 6월 8일 - 1857년 9월 21일순조의 왕비
사위순조1790년 7월 29일 - 1834년 12월 13일조선 제23대 왕
삼남김좌근1797년 - 1869년문과 급제, 영돈령부사, 영의정, 시호 충익(忠翼)
사남김손근(金遜根)? - ?
차녀신 안동 김씨? - ?판관 남구순(南久淳)에게 출가
외손자남병철1817년 - 1863년문과 급제, 이조판서, 시호 문정(文貞)
삼녀신 안동 김씨? - ?한성부윤 이겸재(李謙在)에게 출가
사녀신 안동 김씨? - ?연안 이씨 이긍우(李肯愚)에게 출가


6. 기타

김조순은 심상규와 둘도 없는 절친이었으며, 천생오태사(天生五太史)로 불리는 동지였다. 심상규가 중국 연행(燕行) 중에 김조순에게 보낸 편지에는 "갈수록 바람은 날카롭고 눈마저 날리는데 / 그대는 나를 생각하고 나는 그대를 생각하네 / 문득 하늘 밖에서 편지통을 만나니 / 옥호산장에서 촛불 심지 자르며 글 읽을 때 같네"[33]라고 적혀 있었다.

참조

[1] 서적 Seoul's Historic Walks in Sketches https://books.google[...] Seoul Selection 2018-08-16
[2] 서적 Seoul: A Field Guide to History https://books.google[...] Dolbegae Publishers 2007-01-01 # 날짜 정보가 연도만 있으므로 01-01로 설정
[3] 서적 韓國史研究論選: 朝鮮後期史 https://books.google[...] 百頭文化 2000-01-01 # 날짜 정보가 연도만 있으므로 01-01로 설정
[4] 뉴스 [DBR] '안동金씨' 최고 권력 터 닦은 김조순. 왕실만을 섬긴 '겸손', 명과 암을 낳다 https://dbr.donga.co[...] 2016-02-01 # 날짜 정보가 월만 있으므로 01일로 설정
[5] 서적 The Land of Scholars: Two Thousand Years of Korean Confucianism https://books.google[...] Homa & Sekey Books 2006-01-01 # 날짜 정보가 연도만 있으므로 01-01로 설정
[6] 논문 Collusive oligopolistic politics : sedo and the political structure of early-nineteenth-century Chosŏn Korea https://open.library[...]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2012-01-01 # 날짜 정보가 연도만 있으므로 01-01로 설정
[7] 서적 https://books.google[...] 민음사 2016-11-29
[8] 서적 https://books.google[...] 거송미디어 2003-01-01 # 날짜 정보가 연도만 있으므로 01-01로 설정
[9] 백과사전 양반정치의 파탄 글로벌세계대백과
[10] 문서 김태희 (2015)
[11]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12]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13]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14]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15] 문서 김태희 (2015)
[16] 문서 김태희 (2015)
[17]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18]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19] 문서 김태희 (2015)
[20] 문서 김상헌
[21] 문서 김태희 (2015)
[22]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23]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24] 문서 김태희 (2015)
[25]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26]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27]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28] 문서 김종수, 심환지
[29] 문서 조선왕조실록 순조대왕실록 1824-09-07
[30] 문서 조선왕조실록 순조대왕실록 1833-04-12
[31] 문서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32] 문서 천생오태사
[33] 문서 <次韻楓皐太史>「斗室存稿」卷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