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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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홍욱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소현세자빈 강씨 옥사의 진실을 밝히려다 효종에 의해 장살된 인물이다. 그는 1624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생원과 진사가 되었으며, 이후 관직에 올라 대동법 시행을 지지하고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655년 황해감사로 재직하며 강빈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경안군의 석방을 요구하다가 효종의 미움을 사 고문을 받다 죽임을 당했다. 사후 신원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영조 때 영의정을 배출하는 등 번성했다.
김홍욱은 한성부 남부 훈도방 저포동(南部 薰陶坊 苧廛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해 바로 구절을 짓고 암송할 정도였으며, 15세에는 각종 경전을 암송하였다. 162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어떤 이유로 취소되었고, 1624년 다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었다. 이후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참봉을 지냈다.
2. 생애
1651년 김육이 대동법을 주장하자 적극 찬성하였고, 효종 즉위 초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홍주목사로 재직 시에는 청감염철소(請減鹽鐵疏)를 올려 서산·태안 지방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경감시켜 주었다.
1655년 황해감사 재직 중 강빈 옥사가 조작되었다며 강빈의 신원 회복과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회의 석방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2][3] 효종은 소현세자 문제에 대한 발언을 엄금하였는데, 김홍욱이 이 이야기를 꺼내자 국문장을 열고 직접 국문하였다. 김집을 비롯한 중신들과 산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문은 계속되었고, 결국 김홍욱은 국문 도중 장살되었다.[4][5] 김홍욱은 죽음에 이르러 "말하는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6]
이후 송시열 등은 김홍욱 복권 운동을 펼쳤다. 1659년 효종은 김홍욱을 신원(伸寃)하였다.
2. 1. 생애 초반
김홍욱은 한성부 남부 훈도방 저포동(南部 薰陶坊 苧廛洞)에서 김적(金積)과 화순 최씨(和順崔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적은 행안기도찰방(行安奇道察訪)을 지내고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화순 최씨는 동지중추부사, 좌윤을 지낸 최원(崔遠)의 딸이다. 김홍욱은 고려 태사 김인관(仁琯)의 후손이다.
김홍욱의 집안은 본래 한성부 저동(苧洞)에 살았으나, 증조부 김연(金堧)이 1500년 중반 충청남도 서산군 가야산 서쪽 취영봉 아래 한다리(현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 한다리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한다리 김씨로 불렸다. 김홍욱은 아버지 김적의 한성 남부 저포동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월사 이정귀(李廷龜)가 그를 특별히 아꼈으며, 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바로 구절을 짓고 암송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세에는 각종 경전을 암송하였다. 1618년 4월 26일 병조참의 오정(吳靖)의 딸 동복오씨와 혼인하였다. 그해 처조부 오억령의 문하에 들어가 글을 배웠으나, 10월에 오억령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162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어떤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다.[1] 그해 초시에 합격하고, 1624년 증광과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3등으로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었다. 이후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참봉(參奉)을 지냈다.
2. 2. 관료 생활과 대동법 시행
1651년 김육이 대동법을 주장하자 이를 적극 찬성하였다. 효종 즉위 초 승지를 거쳐 1651년 충청도 관찰사로 제수되었으며,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그 뒤 내직에 돌아와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다시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 이때 청감염철소(請減鹽鐵疏)를 올려 서산·태안 지방의 철물·소금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바쳐야 하는 세금 부담이 너무 과중해 염전업자들이 염전을 중단하거나 도망가는 일이 많고 생산이 감축된 실정에 있으니 이를 탕감해 줄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효종이 들어주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2. 3. 강빈 옥사 신원 운동과 죽음
1655년 (효종 6년) 김홍욱은 황해감사 재직 중, 강빈 옥사가 조작되었다며 인한재응지소(因旱災應旨疏)를 올려 강빈의 억울함을 호소하고,[2] 강빈의 신원 회복과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회의 석방을 요구하였다.[3]
효종은 즉위 초부터 소현세자 문제에 대한 발언을 엄금하였는데, 김홍욱이 이 이야기를 꺼내자 국문장을 열고 직접 국문하였다. 중신들의 만류와 산림의 반대, 김집과 그 문하생들의 사면 탄원서와 구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문은 계속되었다.
소현세자 일가의 무죄가 입증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고 판단한 효종은 김홍욱을 국문 끝에 장살로 살해하였다.[4][5] 김홍욱은 죽음에 이르러 "말하는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6] 김육 등도 차자를 올려 구언에 응한 김홍욱을 국문하면 구언한 일로 죽게 된다며 효종에게 만류를 청했다. 의정부좌의정 구인후는 원임대신 자격으로 국문장에 들어가 눈물흘리며 김홍욱의 사면을 청했으나 효종은 듣지 않았다. 송시열, 송준길 등도 상소를 올려 김홍욱의 사면, 석방을 청하였으나 효종은 거절했다. 김홍욱은 의금부에서 국문받던 도중 장살되었다.
1654년 말 남인 홍우원은 홍문관 수찬이 되었는데, 당색을 초월하여 김홍욱의 사면, 복권 여론을 주도하였다. 홍우원은 강빈 옥사의 허위를 직언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신원(伸寃)과 복권을 주장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656년(효종 7년) 송시열, 김익희 등이 상소를 올려 김홍욱의 복권을 청하였다. 같은 해 7월 부교리 이정기(李廷夔)가 김홍욱의 사면을 상소하고 사직을 청했으나 효종이 듣지 않았고, 부수찬 이단상이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김홍욱의 사면을 청하였다. 8월에는 전 승지 김응조가 김홍욱의 억울함을 상소하며 신원을 청하였다. 1657년(효종 8년) 송시열의 건의로 효종은 김홍욱의 자손들에 대한 금고형을 철회했다. 이때 김홍욱의 사면을 청하지 않은 신천익 등이 지탄을 받고 실록에 실리기도 했다.
1657년 송시열은 다시 여러 번 김홍욱의 사면을 상소했고, 효종은 자손들의 관직 금고를 취소했다. 이후에도 송시열은 계속 김홍욱의 사면을 요청했고, 1659년 효종은 그를 신원(伸寃)하였다.
1718년(숙종 44) 민진후의 상소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에 추증되고, 1721년(경종 1년) 서산(瑞山)의 성암서원(聖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이후 영조 즉위 초 서원철폐령에 의해 성암서원은 철폐되었으나 정순왕후에 대한 배려로 1760년(영조 36년) 특별히 복설되기도 했다. 충청북도 음성 지천 서원(陰城 知川書院)에도 제향되었다.[7] 민진후는 시장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문정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2. 4. 사후
그는 구언 상소를 올리기 전, 완남군 이후원(李厚源)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부모님 곁에 묻어줄 것을 부탁했고, 이후원이 그의 장례식을 주관했다. 분노한 효종은 김홍욱의 후손들을 금고형에 처했으나 그해 호조판서 허적이 차자를 올려 김홍욱의 자손들의 금고형을 취소해줄 것을 청했다. 1654년 김홍욱이 장살되자 우의정 구인후는 “전하께서 국사를 말하는 신하를 죽이고자 하시니, 후세에 전하를 비방하는 말은 어떻게 하시렵니까.(殿下欲殺言事之臣, 其於後世譏議何)”라고 하여, 김홍욱을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한편 김홍욱을 잡아온 금부도사는 바로 잡아오지 않고, 기간을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1668년(현종 9년) 10월까지 투옥당했다.
그해 9월 20일 그의 본가가 있던 충청남도 서산군 대교리(大橋里)에 임시로 장사했다가, 11월 충청남도 서산군 흑수촌 선영하에 장사지냈다. 그의 묘비는 1746년(영조 22) 박필주(朴弼周)가 썼는데, 후일 대한민국에 와서 1995년 후손들, 성암서원 등에 의해 다시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김홍욱이 고문으로 죽은 뒤 이상일(李尙逸) 등도 이에 연루되어 관직을 사직, 낙향했고, 지방관으로 있던 그의 외사촌도 파직당했다. 김홍욱의 구명을 청한 김집 등도 관직을 사퇴했다. 그가 죽자 송시열, 송준길은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 복권 외에 김홍욱 복권 운동을 당론으로 삼고, 여러 번 상소를 올려 효종에게 김홍욱의 신원 복권을 계속 상주하였다.
1674년(현종 15) 김홍욱의 맏아들 김세진(金世珍)이 당시 유배 중이던 송시열을 찾아가 신도비문을 청해 받아왔으며, 신도비문은 사헌부대사헌 겸 동지경연사 윤득화(尹得和)가 글씨를 썼다. 송시열은 그의 묘갈명도 지어주었다. 현재의 신도비는 1772년에 다시 세워졌다. 그의 아들 김세진의 손자 김흥경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김흥경의 아들이 김한신으로 영조의 서녀 화순옹주의 부마가 된다. 다른 아들 김계진의 증손자는 김한구이며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는 뒤에 영조의 계비가 된다.
1654년말 남인 홍우원은 홍문관 수찬이 되었는데, 그는 당색을 초월하여 김홍욱의 사면, 복권여론을 주청하였다. 홍우원은 강빈 옥사의 허위를 직언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신원(伸寃)과 복권을 주장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656년(효종 7년) 송시열, 김익희 등이 상소를 올려 김홍욱의 복권을 청하였다. 같은 해 7월 부교리 이정기(李廷夔)가 김홍욱의 사면을 상소하고 사직을 청했으나 효종이 듣지 않았고, 부수찬 이단상(李端相)이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김홍욱의 사면을 청하였다. 8월에는 전 승지 김응조(金應祖)가 김홍욱의 억울함을 상소하며 신원을 청하였다. 1657년(효종 8년) 송시열의 건의로 효종은 김홍욱의 자손들에 대한 금고형을 철회했다. 이때 김홍욱의 사면을 청하지 않은 신천익(愼天翊) 등이 지탄을 받고 실록에 실리기도 했다.
1657년 송시열은 다시 그의 사면을 여러번 상소했고, 효종은 자손들의 관직 금고를 취소했다. 뒤에도 송시열은 계속 김홍욱의 사면을 요청했고, 1659년 효종은 그를 신원(伸寃)하였다. 문집 학주문집은 1715년에 가서 간행되었다.
1718년(숙종 44) 민진후의 상소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에 추증되고 1721년(경종 1년) 서산(瑞山)의 성암서원(聖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이후 영조 즉위 초 서원철폐령에 의해 성암서원은 철폐되었으나 정순왕후에 대한 배려로 1760년(영조 36년) 특별히 복설되기도 했다. 충청북도 음성 지천 서원(陰城 知川書院)에 제향되었다.[7] 민진후는 시장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문정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그의 묘소와 신도비 등은 2010년 12월 3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0호로 지정되었다.
3. 저서
4.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
| 할아버지 | 김호윤(金好尹) |
| 아버지 | 김적(金積) |
| 어머니 | 최원(崔遠)의 딸 |
| 형님 | 김홍익(金弘翼) |
| 부인 | 오정(吳靖)의 딸 |
| 장남 | 김세진(金世珍) |
| 차남 | 김계진(金季珍) |
| 장녀 | 이기직(李基稷)에게 출가 |
| 차녀 | 한성열(韓聖悅)에게 출가 |
| 삼녀 | 조지한(趙持韓)에게 출가 |
| 사녀 | 이기서(李基敍)에게 출가 |
| 오녀 | 박상주(朴尙胄)에게 출가 |
| 손자 (김세진의 아들) | 김두성(金斗星), 김두정(金斗井), 김두규(金斗奎), 김두벽(金斗壁) |
| 손녀 (김세진의 딸) | 박전(朴錪)에게 출가, 윤명원(尹明遠)에게 출가 |
| 손자 (김계진의 아들) | 김두광(金斗光) |
5. 기타
그가 죽기 전에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한 말은 후세인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8][9]
조지운이 감사 김홍욱(金弘郁) 상에서 조문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동명(東溟) 정두경이 들어왔다. 조지운은 뒷걸음치며 물러나 길을 양보하였다. 그러자 정두경이 눈을 흘겨보며 말하였다.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조지운이 아버지의 이름을 들어 대답하자, 정두경이 말하였다. “성상께서 김문숙을 죽였으니, 이는 성세(聖世)의 누로다. 아깝도다. 아까워.” 그때에 상께서 몰래 대궐 안의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는 사람들을 보게 하였던 까닭으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감히 조문을 못하였다. 정두경은 짐짓 일부러 이런 말을 발설하여 그 사람들로 하여금 아뢰도록 하게 한 것이었다.[10]
참조
[1]
문서
김근(金近) 등 그 해의 사마시 응시자들은 인조 반정 직후 시험이 무효화, 파방되었다.
[2]
서적
학주전집
[3]
문서
그에 의하면 심한 가뭄이 소현세자빈을 사사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고 그 원통함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4]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5]
서적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6]
역사기록
효종실록
1654-07-13
[7]
간행물
문화유산학술연구정보지식포털
http://221.145.178.2[...]
[8]
웹사이트
김홍욱
http://koreandb.nate[...]
[9]
웹인용
김홍욱
https://web.archive.[...]
2011-12-18
[10]
서적
계서야담
국학자료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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