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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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광찬은 장단부사 김상관의 아들로 태어나 좌의정 김상헌의 양자가 되었다. 인조 반정 이후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형조낭청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강화도 통진현감을 거쳐 청나라에 인질로 간 아버지 김상헌을 따라갔다가 귀국했다. 이후 교하현감, 청풍군수, 파주목사를 역임했으며, 아들 김수흥과 김수항의 출세로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사후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서예에도 능했다.
본래 장단부사 증 좌찬성 김상관의 아들이었으나, 할아버지 도정 김극효(金克孝)에 의해 삼촌인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김제남의 아들 김내(金琜)의 딸인 연안 김씨와 혼인하였는데, 김제남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였으므로 김광찬은 인목대비의 조카사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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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인조 반정 이후 관직에 나아가 1627년(인조 5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김상헌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아버지 김상헌이 청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하며 자결을 시도했을 때 이를 말리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병자호란 이후 통진현감을 지냈으며, 아버지 김상헌과 세자 등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갈 때 함께 갔다가 1645년 2월에 귀국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아들 김수흥과 김수항 형제가 높은 벼슬에 오르면서 그의 품계도 함께 올랐다.
1668년 2월 24일 향년 72세로 사망하였으며, 그해 4월 양주군 석실산(石室山)에 있는 양아버지 김상헌 묘소 오른쪽에 안장되었다. 묘비명과 행장은 장유(張維)가 지었다. 현재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에 있다.
2. 1. 관직 생활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인조 반정 이후 생각을 바꾸어 시험에 응시했다. 1627년(인조 5년)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진사시에도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후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낭청(刑曹郎廳)을 지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김상헌을 따라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637년 아버지 김상헌이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며 자결을 시도했을 때 이를 말리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통진현감(通津縣監)을 지냈다. 이후 아버지 김상헌과 세자 등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갈 때 함께 갔다가 1645년 2월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로 임명되었다.
1651년에는 중추부첨지를 거쳐 교하현감(交河縣監)으로 부임했다. 1652년 아버지 김상헌이 세상을 떠나 3년상을 치렀고, 1655년 상을 마친 뒤 이듬해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가 되었다. 현종 즉위 후 아들 김수흥과 김수항 형제가 높은 관직에 오르자, 1661년 특별히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후 청풍군수(淸風郡守)와 파주목사(坡州牧使)를 지냈다. 아들 김수흥과 김수항이 판서와 좌찬성, 우찬성 등 최고위직에 오르면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사후에는 아들 김수흥과 김수항이 영의정을 지내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아버지 김상헌의 영향으로 동기창체(董其昌體)에도 능숙했다.
3. 가족 관계
3. 1. 조부모와 양부모
3. 2. 생부모와 형제
3. 3. 처와 자녀
3. 4. 서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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