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은 조선 영조 때의 화가 김윤겸이 1770년 영남 지역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린 14폭의 화첩이다. 이 화첩은 김윤겸의 대표작으로, 진주, 합천, 거창, 함양, 산청, 부산 등 경상남도 일대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정선 화풍의 영향을 받았지만 김윤겸 특유의 화풍을 보여준다. 영남 지역의 옛 실경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으며, 보물로 지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해제된 부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역사서로, 삼국 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역사, 신화, 설화, 불교 관련 기록 등을 담고 있으며, 《삼국사기》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단군 신화, 향가, 불교 설화 등이 기록되어 국어 국문학 및 불교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며, 고려 후기 민족의 자주 의식을 고취하려는 일연의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품 - 토기 융기문 발
토기 융기문 발은 부산 영선동 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 시대 초기의 토기로, 아가리에 주구가 있고 융기된 장식무늬가 있으며, 황갈색 점토질 바탕에 아래로 갈수록 검은색을 띤다. - 18세기 회화 작품 - 순천 송광사 십육조사진영
순천 송광사 십육조사진영은 1780년에 제작된 보조국사 지눌을 포함한 송광사 중심의 고려 후기 고승 16명의 초상화 16점으로, 조선 중기 불교 초상화 기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18세기 회화 작품 -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은 조선 후기 화가 신윤복이 당시 사회의 풍속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주제의 풍속화들을 모아 엮은 화첩으로, 〈월하정인〉, 〈단오풍정〉, 〈청금상련〉 등의 대표적인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이름 | 김윤겸 필 영남기행화첩 |
원어 | 金允謙 筆 嶺南紀行畵帖 |
소장 | 동아대학교박물관 |
위치 | 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 225 (부민동2가,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
재질 | 종이바탕에 수묵담채 |
규격 (cm) | 27.3∼31.1×21.1∼47.6 |
수량 | 1점 (14폭 화첩) |
지정 정보 | |
지정 번호 (보물) | 1929 |
지정 번호 (유형문화재) | 56 |
지정일 (보물) | 2017년 3월 8일 |
지정일 (유형문화재) | 2004년 10월 4일 |
해제일 (유형문화재) | 2017년 3월 8일 |
시대 | 조선시대 (18세기 후반) |
2. 생애와 활동
진재 김윤겸(1711-1775)은 조선 후기의 화가로, 정선과 함께 우리나라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김윤겸은 종조부인 김창협과 김창흡의 진경문화사상에 영향을 받아 실제 경치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김윤겸은 조선시대 문인화가 중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넓은 지역의 다양한 실경산수를 남겨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영남기행화첩>은 부산, 경남 일대 경승을 그린 14폭의 그림으로, 조선 후기 선비들의 여행과 예술 창작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영남 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기에, 지방 자치 시대에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1]
2. 1. 가계와 초기 생애
김윤겸은 김창업의 서자로, 문인화가이기도 한 아버지의 그림 취미를 이어받아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자는 극양(克讓), 호는 진재(眞宰)·산초(山樵)·묵초(默樵) 등이다.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높은 벼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소촌역(召村驛) 찰방을 지냈다.[1]2. 2. 진경산수화가로서의 활동
진재 김윤겸(1711-1775)은 정선과 더불어 18세기 우리나라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화가이다. 그는 종조부 김창협과 김창흡이 제시한 진경문화사상에 영향을 받아 실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냈다.[1]김윤겸은 정선의 화풍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으나, 표암 강세황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는 강세황과 함께 활동했으나, 화풍은 전혀 다른 개성과 특징을 보였다. 김윤겸은 사물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짧고 간결한 필선으로 묘사하고, 투명한 담채를 살짝 곁들여 추상미가 풍기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평생 전국을 유람하며 체득한 실경의 감흥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표현했는데, 그의 그림 중에는 진경산수화가 가장 많다.[1]
1770년(영조 46) 김윤겸은 소촌도찰방에 임용되어 진주를 중심으로 합천, 거창, 함양, 산청, 부산(동래) 등 소촌도 관할 인근 영남지역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14장의 화첩을 그렸는데, 이것이 바로 <영남기행화첩>이다. 이 화첩은 영남지방의 명승지를 그린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로, 여러 작품이 함께 모여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으며, 영남지역의 옛 실경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도 중요하다.[1]
3. <영남기행화첩>
진재 김윤겸(1711-1775)은 겸재 정선과 더불어 우리나라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18세기 화가이다. 그는 종조부 김창협과 김창흡의 진경문화사상에 영향을 받아 실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산수화가였다.[1]
이 작품은 김윤겸이 1770년(영조 46) 소촌도찰방에 임용되어 진주를 중심으로 한 소촌도 관할 인근인 합천, 거창, 함양, 산청과 부산(동래) 등 영남 지역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린 14장의 화첩이다.[1]
이 화첩은 정선 화풍이 유행하던 시대에 그려져 부분적으로 정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표암 강세황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1]
3. 1. 화첩의 구성과 특징
진재 김윤겸(1711-1775)은 18세기에 겸재 정선과 더불어 우리나라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화가이다. 그는 진경산수화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 종조부 김창협과 김창흡의 진경문화사상에 영향을 받아 실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낸 산수화가였다.[1]이 화첩은 김윤겸이 1770년(영조 46) 소촌도찰방에 임용되어 진주를 중심으로 한 소촌도 관할 인근인 합천, 거창, 함양, 산청과 부산(동래) 등 영남지역 명승지를 유람하고 그린 14장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1]
화첩의 작품 순서는 다음과 같다.[1]
순서 | 작품명 | 비고 |
---|---|---|
1 | 몰운대(沒雲臺) | |
2 | 영가대(永嘉臺) | |
3 | 홍류동(紅流?) | 가야산 |
4 | 해인사(海印寺) | 가야산 |
5 | 태종대(太宗臺) | |
6 | 송대(松臺) | |
7 | 가섭암(迦葉菴) | 가야산 |
8 | 가섭동폭(迦葉?瀑) | 가야산 |
9 | 월연(月淵) | |
10 | 순암(蓴巖) | |
11 | 사담(蛇潭) | |
12 | 환아정(換鵝亭) | |
13 | 하룡유담(下龍游潭) | |
14 | 극락암(極樂菴) |
이 그림들은 대부분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부지』 등에 기록된 해당 지역의 명소들이다. 부산 지역의 태종대와 영가대, 몰운대는 당시 문인들과 진경산수화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1]
이 작품은 정선의 화풍이 유행하던 시대에 그려졌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정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표암 강세황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1]
김윤겸의 이 화첩은 영남 지방의 명승지를 그린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여러 작품이 함께 모여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으며, 영남 지역의 옛 실경을 확인하는 역사적 자료로서 중요하다. 또한 김윤겸의 이전 화풍이 완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만년의 득의작으로도 주목된다.[1]
3. 2. 작품 목록 및 해설
화첩의 작품 순서는 다음과 같다.[1]
이들 기행사경지는 대부분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부지』 등에 기록된 해당 지역의 명소이다.[1] 부산 지방의 태종대, 영가대, 몰운대는 당시 문인들과 진경산수화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1]
김윤겸의 이 화첩은 영남 지방의 명승지를 그린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여러 작품이 함께 모여 있다는 점에도 의의가 있으며, 영남 지역의 옛 실경을 확인하는 역사적 자료로도 중요하다.[1] 김윤겸의 이전 화풍이 완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만년의 득의작으로도 주목된다.[1]
3. 3. <영남기행화첩>의 가치와 의의
김윤겸의 이 화첩은 영남 지방의 명승지를 그린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여러 작품이 함께 모여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영남 지역의 옛 실경을 확인하는 역사적 자료로 중요하며,[1] 정선 화풍이 유행하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정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강세황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1] 이 밖에 김윤겸의 이전 화풍이 완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만년의 득의작으로도 주목된다.[1]4. 화풍과 영향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은 조선 후기 문인화가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서자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었다. 그는 사물을 매우 간단하게 표현하고 짧은 선을 사용했으며, 맑은 담채를 곁들여 추상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렸다.[1]
김윤겸은 강세황(姜世晃, 1713~1791)과 동시대에 활동했으나, 화풍은 서로 달랐다. 그는 평생 전국을 여행하며 느낀 실경의 감흥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표현했는데, 그의 그림 중 가장 많은 소재는 진경산수화이다. 김윤겸은 조선시대 문인화가 중 독특한 개성과 넓은 지역의 다양한 실경산수를 남겨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
5. 보물 지정
김윤겸(1711~1775)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극양(克讓), 호는 진재(眞宰)·산초(山樵)·묵초(默樵)이다. 김창업(1658~1721)의 서자로 태어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개성적인 화풍을 이룩했다. 신분적 한계로 인해 소촌역(召村驛) 찰방이라는 낮은 벼슬에 머물렀다.[1]
5. 1. 보물로서의 가치
김윤겸(1711~1775)은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로, 강세황(1713~1791)과 함께 활동했지만, 화풍은 전혀 다른 개성과 특징을 보였다. 그는 사물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짧은 필선으로 묘사하고, 투명한 담채를 사용해 추상미가 돋보이는 그림을 그렸다. 진경산수화를 주로 그렸으며, 전국을 유람하며 느낀 실경의 감흥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표현했다.[1]〈영남기행화첩〉은 김윤겸이 부산, 경남 일대의 경승을 그린 14폭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일부는 현재 유적지가 남아있지 않아 조선 후기 선비들의 여행과 시문서화 예술 창작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영남 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담은 14폭의 작품은 지방 자치 시대인 현대에 매우 중요한 문화사적 가치를 지닌다. 작품 자체로도 김윤겸의 회화를 대표할 만한 높은 수준이며, 원래 화첩의 모습은 아니고 일부 결실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현 상태로도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