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저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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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저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1304년에 태어나 1389년에 사망했다. 1322년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순천부윤을 지냈으며, 공민왕의 배원정책에 반대하여 유배되었다가 돌아와 총애를 받았다. 이후 신돈을 배척하다 진도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공민왕 사후에는 은거하다가 우왕 복위를 꾀하다 이성계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그의 부인과 아들, 손자는 충절을 지켜 일문삼세의 충절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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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저 (고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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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원래 이름 | 김저(金佇) |
출생일 | 1304년 11월 |
사망일 | 1389년 11월 (향년 85세) |
본관 | 김해 |
군사 복무 정보 | |
복무 | 고려군 |
복무 기간 | 1372년 ~ 1389년 |
직책 | 고려국 중서문하성 대호군 |
최종 계급 | 종3품 대호군 |
정치 경력 | |
주군 | 고려 우왕 왕우 고려 창왕 왕창 |
임기 | 1388년 2월 15일 ~ 1389년 8월 18일 |
근무 | 중서문하성 |
2. 생애
1304년(충렬왕 30)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에서 태어났다. 15세가 되던 1318년 역동 우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1320년(충숙왕 7)에 생원시에 합격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진사시까지 통과했고, 1322년(충숙왕 9) 19세의 나이로 대과에 급제하여 통사랑(通仕郞)을 시작으로 1351년(충정왕 3)에는 통훈대부 순천부윤(通訓大夫順天府尹)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1352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정동행성을 혁파하고 기철 일당을 타도하는 배원정책을 펼치자, 원나라 조정에 찾아가 강력히 항의하다 남황(베트남)으로 유배되었다. 1355년 봄, 1년간의 유배를 끝내고 귀국하자 공민왕은 김저에게 '손(孫)'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총애하였다.
1352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정동행성을 혁파하고 기철 일당을 타도하는 배원정책을 펼치자, 원나라는 공민왕에게 불만을 품고 왕을 폐출하라고 위협했다. 이에 격분한 김저는 원나라 조정에 찾아가 이를 강력히 항의하다가 남황(베트남)으로 유배 당했다. 1355년(공민왕 4) 봄, 1년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환국하니 왕이 극진히 대접하여 손(孫)이라는 사명(賜名)을 내리고 자(字)를 충국(忠國)이라 하여 총애하였다.
왕의 신임 속에 성균관사성·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의 고위관직을 이어가던 1359년(공민왕 8) 겨울, 원나라의 농민반란군 홍건적이 창궐하여 서경이 함락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10월, 홍건적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침입했고, 고려군은 수세에 몰렸다. 김저는 왕을 모시고 예천 은풍현으로 향해 어림성(御臨城)을 쌓는 등 적의 침입에 대비했고, 이후 안동·상주·청주 등지를 거쳐 1363년(공민왕 12) 2월에 환도하기까지 충심으로 왕을 보필했다.
김저는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고 공민왕이 정사에서 손을 놓으면서 요승이라 일컬어지던 신돈이 등용되자, 1367년에 정당문학 이존오 등과 함께 신돈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진도에 유배되었다. 이색 등이 적극적으로 구명하여 6개월 만에 송환되었고, 이후 성균관대사성·예문관대제학에 올랐다.
김저는 1367년 정당문학 이존오 등과 함께 신돈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진도에 유배되었다. 이색 등이 적극적으로 구명하여 6개월 만에 송환되었고, 이후 성균관대사성·예문관대제학에 올랐으나, 공민왕이 시해되자 1375년(우왕 1) 1월에 은풍현 사동(巳洞)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김저는 그곳에 남하정(南下亭)을 짓고 밤나무를 심기 시작했는데, 밤나무가 근본을 잊지 않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1천여 그루가 넘는 밤나무를 심고 스스로 율은거사(栗隱居士)라 칭하였다.
1378년(우왕 4) 우왕의 요청으로 대호군(大護軍)을 제수받았으나, 이듬해 벼슬을 내놓고 은풍현 사동에 돌아왔다. 풍성군(豊城君)에 봉해졌으며, 학사고(學士庫)를 짓고 은거하였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폐위하고 최영이 처형되었다. 1389년 김저는 개경으로 올라가 정득후, 곽충보, 변안렬 등과 접촉, 황려현에서 우왕을 알현하여 이성계 암살 명령을 받았다. 팔관일(八關日)을 거사일로 잡았지만 거사 당일에 곽충보의 밀고로 붙잡혀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었다. 심문 끝에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고, 김저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이성계는 그의 시신을 저자로 끌고 나가 베어버리게 했다. 부인 김씨는 순사(殉死)하고, 아들 김전(金鈿)은 식음을 전폐하여 목숨을 끊었으며, 손자 김두(金㺶)는 두문동에 은거하여 사람들이 일문삼세(一門三世)의 충절이라 칭했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폐위하고 외숙부 최영이 처형되었다. 1389년 김저는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개경으로 올라가 우왕의 신임을 받았던 정득후, 곽충보, 변안렬 등과 접촉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황려현에서 우왕을 알현하여 이성계 암살 명령을 받고, 팔관일을 거사일로 잡았지만 거사 당일에 곽충보의 밀고로 붙잡혀 순군옥에 투옥되었다. 심문 끝에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고, 김저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성계는 그의 시신을 저자로 끌고 나가 베어버리게 했다.
부인 김씨는 순사하고, 아들 김전(金鈿)은 식음을 전폐하여 목숨을 끊었으며, 손자 김두(金㺶)는 두문동에 은거하여 사람들이 일문삼세의 충절이라 칭했다.
2. 1. 출생과 가계
1304년(충렬왕 30)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우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1320년(충숙왕 7)과 이듬해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 1322년(충숙왕 9) 19세에 대과에 급제했다. 1351년(충정왕 3) 통훈대부 순천부윤을 제수받았다.1352년 공민왕 즉위 후 정동행성 혁파, 기철 일당 타도 등 배원정책에 반발하는 원나라 조정에 항의하다 베트남으로 유배되었다. 1355년(공민왕 4) 봄, 1년간의 유배 후 환국하여 공민왕으로부터 '손(孫)'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충국(忠國)'이라는 자를 받았다.
1367년 신돈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에 유배되었으나, 이색 등의 구명으로 6개월 만에 송환되었다. 성균관대사성, 예문관대제학에 올랐으나 공민왕 시해 후 1375년 은풍현 사동으로 은거, 남하정을 짓고 밤나무를 심으며 율은거사라 칭했다.
1378년 우왕의 요청으로 대호군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은풍현으로 돌아갔다. 풍성군에 봉해지고 학사고를 짓고 은거하였다.
1389년 우왕의 명을 받고 이성계 암살을 모의했으나, 곽충보의 밀고로 실패, 순군옥에 투옥되어 처형당했다. 부인 김씨는 순사하고 아들 김전은 식음을 전폐하여 사망했으며, 손자 김두는 두문동에 은거하여 일문삼세의 충절이라 칭송받았다.
2. 2. 초기 관직 생활
1304년(충렬왕 30)에 장흥부 벽계리(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에서 태어났다. 15세가 되던 1318년 역동 우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1320년(충숙왕 7)에 생원시에 합격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진사시까지 통과했고, 1322년(충숙왕 9) 19세의 나이로 대과에 급제하여 통사랑(通仕郞)을 시작으로 1351년(충정왕 3)에는 통훈대부 순천부윤(通訓大夫順天府尹)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다.2. 3. 배원정책과 유배
김저는 1352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정동행성을 혁파하고 기철 일당을 타도하는 배원정책을 펼치자, 원나라 조정에 찾아가 강력히 항의하다 남황(베트남)으로 유배되었다. 1355년 봄, 1년간의 유배를 끝내고 귀국하자 공민왕은 김저에게 '손(孫)'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총애하였다.이후 1367년 신돈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이색 등의 구명으로 6개월 만에 송환되었다.
2. 4. 공민왕의 신임과 홍건적 격퇴
1352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정동행성을 혁파하고 기철 일당을 타도하는 배원정책을 펼치자, 원나라는 공민왕에게 불만을 품고 왕을 폐출하라고 위협했다. 이에 격분한 김저는 원나라 조정에 찾아가 이를 강력히 항의하다가 남황(베트남)으로 유배 당했다. 1355년(공민왕 4) 봄, 1년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환국하니 왕이 극진히 대접하여 손(孫)이라는 사명(賜名)을 내리고 자(字)를 충국(忠國)이라 하여 총애하였다.왕의 신임 속에 성균관사성·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의 고위관직을 이어가던 1359년(공민왕 8) 겨울, 원나라의 농민반란군 홍건적이 창궐하여 서경이 함락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10월, 홍건적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침입했고, 고려군은 수세에 몰렸다. 김저는 왕을 모시고 예천 은풍현으로 향해 어림성(御臨城)을 쌓는 등 적의 침입에 대비했고, 이후 안동·상주·청주 등지를 거쳐 1363년(공민왕 12) 2월에 환도하기까지 충심으로 왕을 보필했다.
2. 5. 신돈과의 갈등과 유배
김저는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고 공민왕이 정사에서 손을 놓으면서 요승이라 일컬어지던 신돈이 등용되자, 1367년에 정당문학 이존오 등과 함께 신돈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진도에 유배되었다. 이색 등이 적극적으로 구명하여 6개월 만에 송환되었고, 이후 성균관대사성·예문관대제학에 올랐다.2. 6. 은거와 우왕 복위 시도
김저는 1367년 정당문학 이존오 등과 함께 신돈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진도에 유배되었다. 이색 등이 적극적으로 구명하여 6개월 만에 송환되었고, 이후 성균관대사성·예문관대제학에 올랐으나, 공민왕이 시해되자 1375년(우왕 1) 1월에 은풍현 사동(巳洞)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김저는 그곳에 남하정(南下亭)을 짓고 밤나무를 심기 시작했는데, 밤나무가 근본을 잊지 않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1천여 그루가 넘는 밤나무를 심고 스스로 율은거사(栗隱居士)라 칭하였다.1378년(우왕 4) 우왕의 요청으로 대호군(大護軍)을 제수받았으나, 이듬해 벼슬을 내놓고 은풍현 사동에 돌아왔다. 풍성군(豊城君)에 봉해졌으며, 학사고(學士庫)를 짓고 은거하였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폐위하고 최영이 처형되었다. 1389년 김저는 개경으로 올라가 정득후, 곽충보, 변안렬 등과 접촉, 황려현에서 우왕을 알현하여 이성계 암살 명령을 받았다. 팔관일(八關日)을 거사일로 잡았지만 거사 당일에 곽충보의 밀고로 붙잡혀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었다. 심문 끝에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고, 김저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이성계는 그의 시신을 저자로 끌고 나가 베어버리게 했다. 부인 김씨는 순사(殉死)하고, 아들 김전(金鈿)은 식음을 전폐하여 목숨을 끊었으며, 손자 김두(金㺶)는 두문동에 은거하여 사람들이 일문삼세(一門三世)의 충절이라 칭했다.
2. 7. 최후
1388년(우왕 14)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폐위하고 외숙부 최영이 처형되었다. 1389년 김저는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개경으로 올라가 우왕의 신임을 받았던 정득후, 곽충보, 변안렬 등과 접촉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황려현에서 우왕을 알현하여 이성계 암살 명령을 받고, 팔관일을 거사일로 잡았지만 거사 당일에 곽충보의 밀고로 붙잡혀 순군옥에 투옥되었다. 심문 끝에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고, 김저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성계는 그의 시신을 저자로 끌고 나가 베어버리게 했다.부인 김씨는 순사하고, 아들 김전(金鈿)은 식음을 전폐하여 목숨을 끊었으며, 손자 김두(金㺶)는 두문동에 은거하여 사람들이 일문삼세의 충절이라 칭했다.
3. 가계
김저(金佇)를 중시조로 하는 김해김씨 율은공파(栗隱公派)로 분파하였다.
아버지는 김윤명(金允明)이며, 어머니는 동주 최씨(東州崔氏)로 사헌규정 최원직(崔元直)의 딸이다. 외숙부는 최영(崔瑩)이다.
부인은 청도 김씨(淸道金氏)로 대호군 김선장(金善莊)의 딸이다. 아들은 찬성사를 지낸 김전(金鈿)이고, 며느리는 풍천 임씨(豊川任氏)로 임자송(任子松)의 딸이다. 손자는 김두(金㺶)이며, 손부는 단양 우씨(丹陽禹氏)로 우현보(禹玄寶)의 딸이다. 증손은 김유의(金兪義)와 김상의(金尙義)이다. 딸은 구원충(具元忠)에게 출가하였다.
4. 평가
4. 1. 일문삼세(一門三世)의 충절
5. 김저가 등장하는 작품
- 1983년 KBS 드라마 '''개국'''에서는 배우 이현두가 김저 역을 연기했다.
- 1983년 MBC 드라마 '''추동궁 마마'''에서는 배우 오승명이 김저 역을 연기했다.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우 김경응이 김저 역을 연기했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최은석이 김저 역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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