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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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현보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다. 135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집의, 좌사의대부 등을 역임했다. 1374년 우왕 즉위 후 밀직대언, 제학, 대사헌 등을 거쳐 정당문학, 문하찬성사, 찬성사 등을 지냈다.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파직되었고, 공양왕 때 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기도 했다. 조선 건국 후 1398년 정도전 일파 제거 후 복관되었으며,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정보를 제공한 공으로 추충보조공신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이며, 말년에는 은거하며 독락당을 당호로 사용했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우왕 대에는 대사헌, 문하찬성사 등 여러 고위 관직을 거쳤다.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공양왕 즉위 후 장손 우성범이 공양왕의 부마가 되면서 단양부원군에 봉해지며 복권되었다. 1390년 판삼사사가 되었으나 이초(彛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단산부원군으로 다시 봉해졌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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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은거하며 지냈다.[3] 조선 건국 후 1398년(태조 7년) 정도전 일파가 제거된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복관되었다. 1400년(정종 2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문인 이래(李來)를 통해 반란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이방원에게 알린 공으로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봉해졌다.[2] 사후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고려 시대 활동
1355년(공민왕 4년)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檢閱)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승진하였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임명되었을 때, 정언(正言) 윤소종(尹紹宗)이 김흥경(金興慶) 제거, 김사행(金師幸) 참수, 영전(影殿) 공사 중지 등을 주장하는 상소를 준비했다. 우현보는 이를 미리 알고 청탁을 받아, 윤소종이 직무를 태만히 한다는 구실로 탄핵하여 축출하였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밀직대언(密直代言)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제학(提學)으로 승진했으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겸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우왕의 유모 장씨(張氏)가 송악산(松岳山)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자, 우왕은 환관 정난봉(鄭鸞鳳)을 통해 우현보에게 의견을 물었다. 당시 금주령이 엄격했음에도 우현보는 "술은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쓰는 물품이니 사온(司醞)의 증명서를 받으면 가능할 것"이라고 답하여 제사를 지낼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하고 대사헌을 겸임했으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정방제조(政房提調)로 임명되었다.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左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1388년(우왕 14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우시중(右侍中)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한 후, 장손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사위가 되면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1390년(공양왕 2년)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나, 이초(彛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다시 봉해졌다.[1]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당호를 독락당(獨樂堂)으로 고쳤다. 그는 “지난 것은 모두 꿈이고 진실이 아니니, 앞으로 오는 것도 어떻게 진실임을 보증하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3]
2. 2. 조선 시대 활동
고려가 무너진 뒤 은거하면서 당호를 독락당(獨樂堂)으로 고쳤다. 그는 “지난 것은 모두 꿈이고 진실이 아니니, 앞으로 오는 것도 어떻게 진실임을 보증하겠는가”라고 했다.[3]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 등 개국공신 세력이 숙청된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복관되었고, 1399년(정종 1) 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문인 이래(李來)로부터 반란 계획을 듣고 이를 이방원(훗날 태종)에게 알려준 공으로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책록되었다.[2] 사후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3. 은거와 죽음
1398년(태조 7년) 정도전(鄭道傳) 일파가 제거된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복관되었고, 1399년에는 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년)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을 때, 문인 이래(李來)로부터 반란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에게 알린 공으로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봉해졌다.[2]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지냈고, 자신의 거처 이름을 독락당(獨樂堂)이라 고쳤다. 그는 “지난 것은 모두 꿈이고 진실이 아니니, 앞으로 오는 것도 어떻게 진실임을 보증하겠는가”라고 했다.[3] 사후에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증조부 우천석(禹天錫) 조부 우칭(禹偁) 아버지 우길생(禹吉生) 부령(副令) 역임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金氏) 부인 죽산 박씨(竹山朴氏) 아들 우홍수(禹洪壽) 아들 우홍부(禹洪富) 아들 우홍강(禹洪康) 아들 우홍득(禹洪得) 아들 우홍명(禹洪命) 딸 우씨(禹氏) 김두(金㺶)에게 출가
4. 우현보가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서적
고려사 권115, 열전28
[2]
간행물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2월 13일 무신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3]
뉴스
‘杜門不出’ 두문동 72현을 찾아서(18)|단양 우씨와 우현보 세 아들 ·큰손자 잃고 멸문당할 뻔
http://weekly.donga.[...]
주간동아
200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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