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군
1. 개요
고려군은 고려 시대의 군사 조직으로, 건국 초기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안보를 담당했다. 태조 왕건은 호족의 사병을 통합하여 중앙군을 창설하고 2군 6위 체제를 확립했으며, 지방에는 주현군과 주진군을 두어 이중 체제로 운영했다. 거란, 몽골, 왜구 등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며, 특히 최무선의 화약 무기 개발과 함포 해전은 고려 군사력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고려군은 중앙 집권 강화와 국방력 증대에 기여했으나, 무신정변과 몽골의 침략, 왜구의 약탈 등으로 인해 쇠퇴하며 조선 건국과 함께 해체되었다.
2. 역사
2.1. 건국 초기 (태조 ~ 성종)
태조 왕건은 즉위 후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918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장군들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고려가 건국되었다. 왕건은 궁예 휘하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900년 충주 지역 전투, 903년 나주 해상 전투 등에서 승리하여 명성을 얻었다. 특히 909년에는 2,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진도와 고이도를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나주에서 견훤의 해군을 격파하는 등 해상에서 큰 활약을 했다.
태조는 호족들의 사병을 통합하여 중앙군을 창설하고, 자신의 직속 부대와 호족들의 군대를 통합하여 중앙군을 편성했다.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 통일을 완수했다.
정종 때는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을 조직했는데, 이는 고려 최초의 지방군이었다. 광군은 중앙 조정과 지방 호족의 공동 지배하에 있었으며, 이후 주현군으로 개편되어 중앙의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광군을 통솔하는 부서로는 광군사(光軍司)가 설치되었다.
2.2. 중기 (현종 ~ 무신정권 이전)
고려는 중앙군으로 2군 6위를, 지방군으로 주현군과 주진군을 운영했다. 현종 대에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2군 6위 체제가 확립되어 중앙군이 강화되었다. 지방군은 주현군과 주진군으로 나뉘었는데, 주현군은 내륙 지방의 치안과 노역을, 주진군은 국경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는 상비군이었다.
고려는 거란과 세 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렀다.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는 외교 담판을 통해 송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요나라의 조공국이 되는 조건으로 강동 6주를 획득했다. 1009년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이 2차 침입을 감행하자 양규 등이 활약하며 거란군을 격퇴했다.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 때는 강감찬이 귀주 대첩에서 크게 승리하여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다. 이후 고려는 1033년부터 1044년까지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국방을 강화했다.
12세기 초, 윤관은 여진 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했다. 1107년,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여 동북 9성을 쌓았으나, 여진의 계속된 저항과 방어의 어려움으로 인해 1109년 여진에게 반환했다. 이후 고려는 금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1126년 이자겸이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척준경은 몰락했다. 이자겸은 득세하였으나, 얼마 후 인종에 의해 축출되었다.
2.3. 무신정권기 (의종 ~ 원종)
1170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옹립하면서 무신정권이 시작되었다. 무신들은 회의 기구인 중방을 통해 정치, 군사 전반을 장악했다. 1179년, 젊은 장군 경대승이 권력을 잡고 왕권 회복과 부정부패 척결을 시도하며 도방을 조직했으나, 1183년 사망하면서 노비 출신 이의민이 집권했다. 그러나 이의민의 잔혹 행위는 최충헌의 쿠데타를 불러왔고, 최충헌은 이의민을 암살하고 1197년 최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61년간 최씨 집안은 무인 정권을 세워 왕을 꼭두각시로 삼고 통치했다.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정치, 군사, 인사권을 장악했다.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이후 희종을 옹립했으나 희종의 반란은 실패했다. 이후 온순한 고종이 옹립되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최우, 손자 최항, 증손자 최의가 차례로 집권했다. 최씨 집안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강력한 사병들을 확보했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국방력이 약화되면서 권력이 쇠퇴했다.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까지 긴장이 계속되다가 몽골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1231년, 외제타이 칸(Ögedei Khan) 휘하의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고, 1232년, 왕실은 강화도로 천도했다. 당시 무신정권의 실권자였던 최우는 계속 저항할 것을 주장했다. 고려는 약 30년간 저항했지만, 결국 1259년에 강화를 청했다. 몽골은 1231년부터 1259년까지 경상도와 전라도 일부를 황폐화시키는 전쟁을 벌였다.
1258년 3월, 독재자 최의가 김준에 의해 암살된 후 왕권이 회복되었고 몽골과 강화를 맺었지만, 궁중 내 권력 다툼은 계속되었고, 무신 정권은 1270년까지 지속되었다. 고려는 몽골에게 정복되지 않았지만,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지쳐 원종을 원나라 수도로 보내 충성을 맹세했고, 쿠빌라이 칸(Kublai Khan)은 이를 받아들였다. 항복을 거부한 일부 무신들은 삼별초를 결성하여 한반도 남쪽 해안의 섬에서 저항했다.
2.4. 원 간섭기 (원종 ~ 공민왕)
원의 쿠빌라이 칸은 1266년부터 일본에 사신을 보내 복속을 요구하며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몽골은 고려에 군선 건조를 강요하여 일본 정복의 발판으로 삼았다.
1274년의 1차 일본 원정에서 원군은 1만 5천 명의 몽골, 한족, 여진족 병사와 6천~8천 명의 고려군, 7천 명의 고려 수군으로 구성되었다. 원군은 쓰시마와 이키를 정복하고 하카타 만에 상륙하여 분에이 전투를 벌였다. 원군은 하카타를 점령했으나, 사무라이들의 공격을 받았다. 원군은 초기에는 우세했으나, 화살 부족, 지형 미숙, 일본군 증원 예상, 큰 피해 등의 이유로 배로 돌아갔고, 그날 밤 태풍으로 병력의 약 3분의 1을 잃었다. 결국 원군은 재편성 대신 조선으로 후퇴했다.
1281년의 2차 일본 원정에는 1,500척이 넘는 배가 동원되었는데, 600척은 중국 남부에서, 900척은 고려에서 왔다. 고려에는 4만 명, 중국 남부에는 10만 명의 군대가 집결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281년 6월, 900척의 원나라 배가 고려에 집결한 동로군은 1만 7천 명의 선원과 1만 명의 고려군, 1만 5천 명의 몽골군과 중국인을 수송했다. 남로군은 3,500척의 배에 10만 명의 병력을 탑승했다고 전해진다. 쓰시마와 이키는 다시 함락되었고, 홍안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동로군은 6월 23일 하카타 만에 도착하여 남로군을 기다리지 않고 침략을 개시했으나, 일본군의 방어에 막혔다. 밤에는 사무라이들이 소규모 부대로 원나라 함대를 기습하여 소모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원나라 군대는 쓰시마로 후퇴하여 남로군을 기다렸으나, 폭염 속에서 3,000명이 사망했다. 7월 16일 남로군이 도착했고, 8월 12일까지 두 함대는 일본 공격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8월 15일, 쓰시마 해협을 강타한 큰 폭풍으로 원나라 함대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당시 일본 기록에 따르면 4,000척이 넘는 배가 파괴되었고, 원나라 병사들의 80%가 익사하거나 사무라이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1359년 12월, 홍건적 군대 일부가 요동반도에서 고려를 침입하여 평양을 함락했다. 1360년 1월, 안우와 이방실이 이끄는 고려군은 평양과 북부 지역을 탈환했다. 1360년 11월, 홍건적은 20만 명의 병력으로 다시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을 점령했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최영, 이성계, 정세운, 이방실 등이 홍건적을 격퇴했다. 고려군은 적을 추격하여 한반도에서 몰아냈다.
2.5. 고려 말기 (공민왕 ~ 조선 건국)
고려 공민왕은 14세기 중반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 요양 등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다. 고려군은 이자춘(훗날 조선 환조)과 그의 아들 이성계의 도움으로 이 지역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의 해안 방어 능력이 약화되면서 왜구의 약탈이 심해졌다. 1350년경부터 왜구는 전라도와 경상도 남부 지방을 거의 매년 침략했고, 이후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으로 북상했다. 정몽주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고, 그의 방문 중 규슈 총독 이마가와 사다요가 초기 왜구를 진압하여 약탈한 재산과 사람들을 고려로 돌려보냈다. 『고려사』에는 1380년 진포(군산)에서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이용해 왜구를 격퇴한 기록이 있다.
1388년, 고려 우왕과 최영 장군은 명나라의 요동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최영을 무찌르고 우왕을 폐위시켰다. 이후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세 왕을 폐위하고 1392년 조선을 건국했다.
3. 중앙군
태조의 직속군이 근본이 되어 편성된 고려군은 2군(二軍)과 6위(六衛)로 구성되었다. 2군은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을 말하며 왕의 친위군 역할을 하였다. 6위는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를 말하며, 성종 14년(995)에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936년(태조 19년) 후백제 군과의 통일 전쟁 당시 고려군은 중군(中軍), 좌강(左廂), 우강(右廂)으로 구성되었으며, 왕실의 정예 친위대는 중군을 구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군과 6위는 약 1,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영(領)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영의 지휘관은 장군이었다. 영은 병종(兵種)에 따라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해령(海領)·감문위령(監門衛領)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합해서 45령이 있었다. 이를 기준으로 고려의 정규 중앙군은 약 45,000명 규모였다.
6위의 주력은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였으며, 이들은 수도 개경의 수비는 물론 변방 경계 임무도 맡았다. 이 3위는 삼위(三衛)라고도 불렸으며, 중앙군의 주력으로 왕과 외국 사신 호위, 주요 국가 행사에 참여하였다. 금오위는 수도 치안, 천우위는 왕실 의장(儀仗), 감문위는 궁궐 성문 수비를 담당했다.
2군·6위에는 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과 부지휘관인 대장군(大將軍)이 있었고, 이들은 자문 기구인 중방을 구성했다. 공민왕 때에는 왕의 친위대인 충용위(忠勇衛)가 신설되었고 4령이 있었다.
2군과 6위 군인들은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세습되었다. 그러나 군공을 세워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던 중류층이었으나, 점차 토목 공사에 동원되거나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면서 몰락하거나 도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3.1. 2군 6위
태조의 직속군이 근본이 되어 편성된 고려군은 현종 때 2군 6위 체제가 확립되었다. 2군은 왕의 친위 부대로, 응양군과 용호군으로 구성되었다. 6위는 수도 개경의 방어와 치안을 담당했으며,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로 구성되었다.
2군은 왕의 호위와 궁궐 방어를 담당했다. 응양군은 1개 영, 용호군은 2~3개 영으로 구성되었는데, 1개 영은 1000명의 병사로 이루어져 2군은 총 3000명 규모였다. 6위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왕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6위 중 핵심인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는 수도 개경 수비와 변방 경계 임무를 맡았다. 금오위는 치안, 천우위는 의장, 감문위는 궁궐 성문 수비를 담당했다. 6위는 995년(성종 14년)경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998년(목종 1년)에는 전시과를 받을 자격을 갖도록 개정되었다. 중앙군은 4만 5천 명의 군사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4만 2천 명이 6위에 소속되었다. 6위의 주력은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였으며, 이들은 삼위(三衛)라고도 불렸다.
2군, 6위에는 지휘관인 상장군과 부지휘관인 대장군이 있었고, 이들은 중방을 구성하여 군사 정책을 논의했다. 각 영의 지휘관은 장군이었고, 이들은 장군방을 구성했다. 영은 병종에 따라 보승, 정용, 역령, 상령, 해령, 감문위령 등으로 구분되었고, 총 45령, 약 45,000명 규모였다. 공민왕 때에는 왕의 친위대인 충용위가 신설되었고 4령이 있었다.
2군과 6위에 소속된 군인은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세습되었다. 군공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했지만, 점차 몰락하거나 도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 계급 | 2군 | 6위 | 충용사위 (공민왕 때 친위부대) |
|---|---|---|---|
| 정3품 | 상장군 | 상장군 | |
| 종3품 | 대장군 | 대장군 | |
| 정4품 | 장군 | 장군 | 장군 |
| 정5품 | 중랑장 | 중랑장 | 중랑장 |
| 정6품 | 낭장 | 낭장 | 낭장 |
| 종6품 | 장사 | ||
| 정7품 | 별장 | 별장 | 별장 |
| 정8품 | 산원 | 산원, 녹사 | 산원 |
| 정9품 | 위 | 위 | 위장 |
| 종9품 | 수정 | 수정 | 수정 |
3.2. 충용 4위
공민왕 때 신설된 왕의 친위 부대로, 장군이 지휘하였으며 4개의 영(領)으로 구성되었다. 고려의 정규 중앙군은 약 45,000명 규모였으며, 이후 공민왕때 왕의 친위대인 충용위가 신설되었다.
3.3. 중앙군 조직
고려의 중앙군은 태조의 직속군이 근본이 되어 편성되었으며, 2군(二軍)과 6위(六衛)로 구성되었다. 2군은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을 말하며 왕의 친위군 역할을 하였다. 6위는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를 말하며, 성종 14년(995)에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936년(태조 19년) 후백제 군과의 통일 전쟁 당시 고려군은 중군(中軍), 좌강(左廂), 우강(右廂)으로 구성되었으며, 왕실의 정예 친위대는 중군을 구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군과 6위는 약 1,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영(領)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영의 지휘관은 장군이었다. 영은 병종(兵種)에 따라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해령(海領)·감문위령(監門衛領)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합해서 45령이 있었다. 이를 기준으로 고려의 정규 중앙군은 약 45,000명 규모였다.
6위의 주력은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였으며, 이들은 수도 개경의 수비는 물론 변방 경계 임무도 맡았다. 이 3위는 삼위(三衛)라고도 불렸으며, 중앙군의 주력으로 왕과 외국 사신 호위, 주요 국가 행사에 참여하였다. 금오위는 수도 치안, 천우위는 왕실 의장(儀仗), 감문위는 궁궐 성문 수비를 담당했다.
2군·6위에는 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과 부지휘관인 대장군(大將軍)이 있었고, 이들은 자문 기구인 중방을 구성했다. 공민왕 때에는 왕의 친위대인 충용위(忠勇衛)가 신설되었고 4령이 있었다.
2군과 6위 군인들은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세습되었다. 그러나 군공을 세워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던 중류층이었으나, 점차 토목 공사에 동원되거나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면서 몰락하거나 도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4. 지방군
초기 고려는 강력한 지방 호족들의 사병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고려의 군사 제도는 점차 중앙 집중적인 체제로 확대되었다. 전문적인 정규군과 의무 예비군으로 구성된 이중 체제가 채택되어 군사 상황에 대비하였다.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이 군적에 편입되었으며, 필요시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남성이 징집되었다. 따라서 각 도에는 최소한의 정규군만 유지되어 백성들의 생활을 보장하고, 비상시에만 동원되는 체제였다.
수도 지역에는 두 개의 군(軍)과 여섯 개의 위(衛)가 설치되었고, 지방에는 주현군(州縣軍) 또는 주진군(州鎭軍)이 편성되었다. 두 개의 군(軍)과 여섯 개의 위(衛)는 총 45개 영(營)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영(營)은 1,000명의 병사로 이루어졌다. 중앙군의 지휘관들은 정방(政房)이라는 장군들의 회의체를 구성했다. 시골의 주현군은 농민들로 구성되었고, 국경 지대 양계(楊界)의 주진군은 상비군이었다.
=== 주현군 ===
고려 때 2군·6위의 중앙군 외에 각 주·현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군으로 주현군(州縣軍)과 주진군(州鎭軍)이 있었다.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지방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초기에 조직된 광군이 주현군으로 개편되었다. 주현군은 지방 호족의 병력을 흡수하고, 중앙에서 지방에 배치한 군대가 지방군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주현군은 도(道)와 계(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계는 국경 지대의 군사 지역이었기에 상비군이 주둔했고 주진군으로도 불렀다. 반면, 각 도의 주현군은 보승·정용·1품(一品)으로써 구성되었는데 보승·정용은 치안·방술(防戌)의 역(役)을 부담했고 일품군은 공역(工役)에 동원되는 노동 부대였다.
고려 초기, 경기 지역을 포함한 남부 5개 도에 지역 군사 조직인 주현군(州縣軍) 제도가 설치되었다. 광군(匡軍)과 진수군(鎭戍軍)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 군사 조직으로, 국가 건설 초기 각 지역에 파견되었는데, 이것이 주현군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성종과 현종대에 설치된 지역 군사 제도가 재편되면서 새로운 지역 군사 조직이 형성되었고, 주현군 조직은 현종 9년(1018년)경에 정비된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 단위는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을 중심으로 한 지역 행정 구역에 배속되었으며, 각 지역에는 관리가 파견되었다. 주현군은 보승군(保勝軍), 정용군(精勇軍), 입읍군(立邑軍)으로 구성되었는데, 보승군은 8,601명, 정용군은 19,745명, 입읍군은 19,882명으로 총 병력은 48,237명에 달했다. 또한, 농민으로 구성된 2,3품군(品軍)이 지원하는 체제였다. 주현군의 주력은 보승군과 정용군이었으며, 주로 전투에 투입되고 국경 방위를 담당하였고, 매년 순환 배치되었다. 입읍군은 일반적인 군사적 의무를 담당하는 노무 부대였다. 주현군의 대부분은 주요 전투에 투입되었다. 주현군은 주로 군역을 감당할 수 있는 농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지방 관리들도 징집 대상이었다. 주현군의 지휘는 지방 관리나 장교가 맡았다. 주현군 제도는 몽골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유지되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유지가 어려워지면서 점차 해체되었고, 몽골과의 전쟁 후기에 소멸되었다.
=== 주진군 ===
고려 시대에는 중앙군인 2군 6위 외에 지방군으로 주현군과 주진군이 있었다. 주진군은 양계(북계와 동계)에 설치된 지방군으로,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상비군이었다.
주진군은 남도 지역의 주현군보다 규모가 크고 전투력이 강했으며, 다양한 병과로 구성되었다. 북계의 주진군은 초군, 정용, 좌군, 우군, 보창, 신기, 보반, 백정 등으로, 동계의 주진군은 초군, 좌군, 우군, 영새, 공장, 전장, 투화, 생청군, 사공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초군(정용), 좌군, 우군, 보창, 영새 등이 주진군의 주력 군사였다.
양계의 군사력은 방어사와 진장이 지휘했으며, 중낭장에서 대장 사이의 품계를 가진 장교들이 주진군을 직접 지휘했다. 각 군영의 상비군 최고 지휘관은 도령이라 불렸으며, 도령은 방어사나 진장에게 소속되어 군사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방어사와 진장은 양계 주진군의 최고 지휘관인 병마사에게 소속되었다.
북계에는 4만 명, 동계에는 1만 1천 명의 군사가 있었고, 백정과 동계의 신기, 보반, 공장, 전장, 투화, 생청군, 사공 등이 주력 전투 부대를 지원하여 총 병력은 약 7만 5천 명에 달했다. 지휘관을 포함한 양계의 군사력은 약 14만 명이었다. 주진군은 몽골과의 전투로 인해 점차 쇠퇴하였다.
=== 광군 ===
광군(光軍)은 고려에서 조직된 최초의 지방군이다. 지방 호족들의 군대를 연합하여 중앙에서 통제하도록 조직되었으며, 중앙 조정과 지방 호족이 농민 역역(力役)을 공동 지배하는 형태였다.
정종 2년(947)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조직된 광군은, 고려의 집권화 정책이 진전되고 지방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주현군(州縣軍)으로 개편되어 중앙 조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전국 광군 조직을 통제하는 통수부(統帥部)로는 광군사(光軍司)가 설치되었다.
4.1. 주현군
고려 때 2군·6위의 중앙군 외에 각 주·현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군으로 주현군(州縣軍)과 주진군(州鎭軍)이 있었다.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지방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초기에 조직된 광군이 주현군으로 개편되었다. 주현군은 지방 호족의 병력을 흡수하고, 중앙에서 지방에 배치한 군대가 지방군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주현군은 도(道)와 계(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계는 국경 지대의 군사 지역이었기에 상비군이 주둔했고 주진군으로도 불렀다. 반면, 각 도의 주현군은 보승·정용·1품(一品)으로써 구성되었는데 보승·정용은 치안·방술(防戌)의 역(役)을 부담했고 일품군은 공역(工役)에 동원되는 노동 부대였다.
고려 초기, 경기 지역을 포함한 남부 5개 도에 지역 군사 조직인 주현군(州縣軍) 제도가 설치되었다. 광군(匡軍)과 진수군(鎭戍軍)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 군사 조직으로, 국가 건설 초기 각 지역에 파견되었는데, 이것이 주현군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성종과 현종대에 설치된 지역 군사 제도가 재편되면서 새로운 지역 군사 조직이 형성되었고, 주현군 조직은 현종 9년(1018년)경에 정비된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 단위는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을 중심으로 한 지역 행정 구역에 배속되었으며, 각 지역에는 관리가 파견되었다. 주현군은 보승군(保勝軍), 정용군(精勇軍), 입읍군(立邑軍)으로 구성되었는데, 보승군은 8,601명, 정용군은 19,745명, 입읍군은 19,882명으로 총 병력은 48,237명에 달했다. 또한, 농민으로 구성된 2,3품군(品軍)이 지원하는 체제였다. 주현군의 주력은 보승군과 정용군이었으며, 주로 전투에 투입되고 국경 방위를 담당하였고, 매년 순환 배치되었다. 입읍군은 일반적인 군사적 의무를 담당하는 노무 부대였다. 주현군의 대부분은 주요 전투에 투입되었다. 주현군은 주로 군역을 감당할 수 있는 농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지방 관리들도 징집 대상이었다. 주현군의 지휘는 지방 관리나 장교가 맡았다. 주현군 제도는 몽골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유지되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유지가 어려워지면서 점차 해체되었고, 몽골과의 전쟁 후기에 소멸되었다.
4.2. 주진군
고려 시대에는 중앙군인 2군 6위 외에 지방군으로 주현군과 주진군이 있었다. 주진군은 양계(북계와 동계)에 설치된 지방군으로,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상비군이었다.
주진군은 남도 지역의 주현군보다 규모가 크고 전투력이 강했으며, 다양한 병과로 구성되었다. 북계의 주진군은 초군, 정용, 좌군, 우군, 보창, 신기, 보반, 백정 등으로, 동계의 주진군은 초군, 좌군, 우군, 영새, 공장, 전장, 투화, 생청군, 사공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초군(정용), 좌군, 우군, 보창, 영새 등이 주진군의 주력 군사였다.
양계의 군사력은 방어사와 진장이 지휘했으며, 중낭장에서 대장 사이의 품계를 가진 장교들이 주진군을 직접 지휘했다. 각 군영의 상비군 최고 지휘관은 도령이라 불렸으며, 도령은 방어사나 진장에게 소속되어 군사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방어사와 진장은 양계 주진군의 최고 지휘관인 병마사에게 소속되었다.
북계에는 4만 명, 동계에는 1만 1천 명의 군사가 있었고, 백정과 동계의 신기, 보반, 공장, 전장, 투화, 생청군, 사공 등이 주력 전투 부대를 지원하여 총 병력은 약 7만 5천 명에 달했다. 지휘관을 포함한 양계의 군사력은 약 14만 명이었다. 주진군은 몽골과의 전투로 인해 점차 쇠퇴하였다.
4.3. 광군
광군(光軍)은 고려에서 조직된 최초의 지방군이다. 지방 호족들의 군대를 연합하여 중앙에서 통제하도록 조직되었으며, 중앙 조정과 지방 호족이 농민 역역(力役)을 공동 지배하는 형태였다.
정종 2년(947)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조직된 광군은, 고려의 집권화 정책이 진전되고 지방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주현군(州縣軍)으로 개편되어 중앙 조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전국 광군 조직을 통제하는 통수부(統帥部)로는 광군사(光軍司)가 설치되었다.
5. 해군
고려 정부는 해군 체계를 정식으로 수립하지는 않았지만, 전시부(兵部)에 수군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수시(司水寺)가 있었다. 그러나 사수시는 공양왕 2년(1390년)에 설치되어 고려 말기에 존재했던 기관이었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고려 왕조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했다. 해적의 침입이 잦거나 해상 방위가 필요한 지역에는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를 설치하여 운영했다.
=== 선병도 ===
선병도(船兵都)는 해적을 소탕하고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고려시대의 해군 부대였다. 주요 임무는 해군 주력으로서 바다를 방어하고 경비하는 것이었으며, 해적선을 무찌르거나 나포하고, 해적을 사로잡거나 처형하며 표류민을 송환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선병도는 주로 북계(北界)와 남해(南海) 지역의 진명(珍明), 원흥(元興), 동계(東界), 통주(通州), 아강(阿江) 등의 행정구역에 배치되었다. 선병도의 공식 직책은 선병별감(船兵別監), 사(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등이 있었으나, 일정하지 않았다. 정부는 특정 기간 동안 필요에 따라 선병도를 설치하기도 했으며 영구적으로 설치하지는 않았다. 북쪽 바다는 각 군사 수령이, 남쪽 바다는 안찰사(按察使)가 각각 관할하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의 해안 방어 능력이 약화되었고, 왜구의 약탈이 점차 고려 해안에서 심해졌다. 고려 초기, 동해안 지역을 자주 침략하던 동여진(東女眞)의 해적들은 겨울철 선병도의 해군에 의해 패퇴하였다. 북계 지역의 선병도 해군은 거란과 여진 등 외적과 싸웠다. 예종 때 윤관(尹瓘) 장군은 도린포(都隣浦) 현에서 활동하던 여진을 토벌하기 위해 선병도 소속 2600명의 해군을 이끌고 겨울 원정을 감행하였다. 1275년(원종 15년)에는 몽골과 함께 일본을 침략하였는데, 고려군 5300명과 수수(蜀黍)를 운반하는 초공(梢工) 900명이 탑승한 병선(兵船)이 참전하였다. 1281년(충렬왕 7년) 제2차 일본 원정 때는 몽골의 요청에 따라 전선(戰船) 900척, 향병(鄕兵) 1만 5천 명, 정병(正兵) 1만 명, 그리고 석(石, 짚자루) 11만 개를 준비하였으나, 수수 운반선이 해군의 일부를 구성했기 때문에 실제 원정 인원과 큰 차이가 없었다.
왜구는 1350년경부터 특히 기승을 부렸다. 전라도와 경상도 남부 지방을 거의 매년 침략한 후,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으로 북상했다. 정몽주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고, 그의 방문 중 규슈 총독 이마가와 사다요가 초기 왜구를 진압하여 약탈한 재산과 사람들을 고려로 돌려보냈다. 1380년대 고려는 왜구의 위협에 주목하여 최무선이 개발한 군함포를 이용하여 수백 척의 해적선을 섬멸했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가 해안과 내륙 지역을 약탈하고 살인 및 방화를 저질렀다. 해군 육성을 주장한 정지 장군은 해도병마사(海島兵馬使)가 되어 군산도 진포(鎭浦) 등지에서 왜선을 무찔렀다. 박위(朴威) 장군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정복하고 100척의 전선으로 왜선 300척을 불태우는 등 큰 공을 세우며 고려 말 해군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고려 말기 정부가 선병도를 폐지했기 때문에 고려 말기 선병도의 활동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사』에는 1380년 진포(군산)에 전함 100척을 보내어 일본 해적을 무찌르고 334명의 포로를 석방한 해전 기록이 있으며, 그 이후 일본의 출병이 감소했다. 왜구는 고려가 1377년(12년 후 폐지되었지만) 화약 무기 제조소를 설립한 후 왜구가 보유하지 못했던 화약 기술을 통해 효과적으로 몰락했다.
=== 함선 ===
고려 시대의 조선 기술은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초기 해군에서는 과선(戈船)과 대누선(大樓船)이 주로 사용되었다. 대누선은 큰 정자와 두 개의 돛대를 가진 대형 군함으로, 태조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해전에 사용하였다. 1010년, 고려 조선 기술자들은 빠른 속도로 항해하여 선수에 부착된 창으로 일본과 여진 해적선을 격파하도록 설계된 과선을 개발하였다.
후기 해군에서는 누전선(樓戰船)과 평전선(平戰船)이 주로 사용되었다. 누전선과 평전선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건조된 군함으로, 일본 원정에도 참여하였다. 이 군함들은 200명 이상의 군사를 수송할 수 있을 만큼 컸으며, 카미카제에도 견딜 수 있었다. 최무선은 이 함선들에 대포와 화포를 장착하여 왜구 함대가 접근하기 전에 원거리에서 침몰시키거나 불태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누전선에는 갑판에 대포 4문과 화포 2문(양쪽에 각각 대포 2문, 화포 1문)이 있었고, 평전선에는 갑판에 대포 4문과 화포 6문(양쪽에 각각 대포 2문, 화포 3문)이 있었으나, 평저선체 덕분에 반동이 적어 최대 10문의 대포와 8문의 화포를 탑재할 수도 있었다.
1373년, 공민왕은 왜구에 대항하여 사용할 새로 건설된 함대를 시찰했는데, 여기에는 대포 사격도 포함되었다. 1378년 함대가 대포 사용 훈련을 받았다. 1380년, 고려 해군은 진포 전투에서 함선에 대포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500척의 대규모 왜구 함대를 공격, 거의 모든 왜구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는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으로 기록된다. 1383년 정지 장군은 함상 대포를 사용하여 왜구선 17척을 격파했다. 1389년에는 이성계의 명령으로 쓰시마섬을 급습하여 왜구선 300척을 파괴하고 한국 포로 100명 이상을 해방시켰다.
5.1. 선병도
선병도(船兵都)는 해적을 소탕하고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고려시대의 해군 부대였다. 주요 임무는 해군 주력으로서 바다를 방어하고 경비하는 것이었으며, 해적선을 무찌르거나 나포하고, 해적을 사로잡거나 처형하며 표류민을 송환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선병도는 주로 북계(北界)와 남해(南海) 지역의 진명(珍明), 원흥(元興), 동계(東界), 통주(通州), 아강(阿江) 등의 행정구역에 배치되었다. 선병도의 공식 직책은 선병별감(船兵別監), 사(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등이 있었으나, 일정하지 않았다. 정부는 특정 기간 동안 필요에 따라 선병도를 설치하기도 했으며 영구적으로 설치하지는 않았다. 북쪽 바다는 각 군사 수령이, 남쪽 바다는 안찰사(按察使)가 각각 관할하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의 해안 방어 능력이 약화되었고, 왜구의 약탈이 점차 고려 해안에서 심해졌다. 고려 초기, 동해안 지역을 자주 침략하던 동여진(東女眞)의 해적들은 겨울철 선병도의 해군에 의해 패퇴하였다. 북계 지역의 선병도 해군은 거란과 여진 등 외적과 싸웠다. 예종 때 윤관(尹瓘) 장군은 도린포(都隣浦) 현에서 활동하던 여진을 토벌하기 위해 선병도 소속 2600명의 해군을 이끌고 겨울 원정을 감행하였다. 1275년(원종 15년)에는 몽골과 함께 일본을 침략하였는데, 고려군 5300명과 수수(蜀黍)를 운반하는 초공(梢工) 900명이 탑승한 병선(兵船)이 참전하였다. 1281년(충렬왕 7년) 제2차 일본 원정 때는 몽골의 요청에 따라 전선(戰船) 900척, 향병(鄕兵) 1만 5천 명, 정병(正兵) 1만 명, 그리고 석(石, 짚자루) 11만 개를 준비하였으나, 수수 운반선이 해군의 일부를 구성했기 때문에 실제 원정 인원과 큰 차이가 없었다.
왜구는 1350년경부터 특히 기승을 부렸다. 전라도와 경상도 남부 지방을 거의 매년 침략한 후,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으로 북상했다. 정몽주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었고, 그의 방문 중 규슈 총독 이마가와 사다요가 초기 왜구를 진압하여 약탈한 재산과 사람들을 고려로 돌려보냈다. 1380년대 고려는 왜구의 위협에 주목하여 최무선이 개발한 군함포를 이용하여 수백 척의 해적선을 섬멸했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가 해안과 내륙 지역을 약탈하고 살인 및 방화를 저질렀다. 해군 육성을 주장한 정지 장군은 해도병마사(海島兵馬使)가 되어 군산도 진포(鎭浦) 등지에서 왜선을 무찔렀다. 박위(朴威) 장군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정복하고 100척의 전선으로 왜선 300척을 불태우는 등 큰 공을 세우며 고려 말 해군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고려 말기 정부가 선병도를 폐지했기 때문에 고려 말기 선병도의 활동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사』에는 1380년 진포(군산)에 전함 100척을 보내어 일본 해적을 무찌르고 334명의 포로를 석방한 해전 기록이 있으며, 그 이후 일본의 출병이 감소했다. 왜구는 고려가 1377년(12년 후 폐지되었지만) 화약 무기 제조소를 설립한 후 왜구가 보유하지 못했던 화약 기술을 통해 효과적으로 몰락했다.
5.2. 함선
고려 시대의 조선 기술은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초기 해군에서는 과선(戈船)과 대누선(大樓船)이 주로 사용되었다. 대누선은 큰 정자와 두 개의 돛대를 가진 대형 군함으로, 태조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해전에 사용하였다. 1010년, 고려 조선 기술자들은 빠른 속도로 항해하여 선수에 부착된 창으로 일본과 여진 해적선을 격파하도록 설계된 과선을 개발하였다.
후기 해군에서는 누전선(樓戰船)과 평전선(平戰船)이 주로 사용되었다. 누전선과 평전선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건조된 군함으로, 일본 원정에도 참여하였다. 이 군함들은 200명 이상의 군사를 수송할 수 있을 만큼 컸으며, 카미카제에도 견딜 수 있었다. 최무선은 이 함선들에 대포와 화포를 장착하여 왜구 함대가 접근하기 전에 원거리에서 침몰시키거나 불태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누전선에는 갑판에 대포 4문과 화포 2문(양쪽에 각각 대포 2문, 화포 1문)이 있었고, 평전선에는 갑판에 대포 4문과 화포 6문(양쪽에 각각 대포 2문, 화포 3문)이 있었으나, 평저선체 덕분에 반동이 적어 최대 10문의 대포와 8문의 화포를 탑재할 수도 있었다.
1373년, 공민왕은 왜구에 대항하여 사용할 새로 건설된 함대를 시찰했는데, 여기에는 대포 사격도 포함되었다. 1378년 함대가 대포 사용 훈련을 받았다. 1380년, 고려 해군은 진포 전투에서 함선에 대포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500척의 대규모 왜구 함대를 공격, 거의 모든 왜구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는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으로 기록된다. 1383년 정지 장군은 함상 대포를 사용하여 왜구선 17척을 격파했다. 1389년에는 이성계의 명령으로 쓰시마섬을 급습하여 왜구선 300척을 파괴하고 한국 포로 100명 이상을 해방시켰다.
6. 군사 제도
초기 고려는 지방 호족들의 사병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고려의 군사 제도는 점차 중앙 집중적인 체제로 확대되었다. 전문적인 정규군과 의무 예비군으로 구성된 이중 체제가 채택되어 군사 상황에 대비하였다.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이 군적에 편입되었으며, 필요시 16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남성이 징집되었다. 따라서 각 도에는 최소한의 정규군만 유지되어 백성들의 생활을 보장하고, 비상시에만 동원되는 체제였다.
수도 지역에는 2군 6위가 설치되었고, 지방에는 주현군 또는 주진군이 편성되었다. 2군 6위는 총 45개 영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영은 1,000명의 병사로 이루어졌다. 중앙군의 지휘관들은 정방이라는 장군들의 회의체를 구성했다. 시골의 주현군은 농민들로 구성되었고, 국경 지대 양계의 주진군은 상비군이었다.
6.1. 병농일치제
6.2. 군인전
6.3. 군호
군호(軍戶)는 고려 시대의 군대 편성 중 하나이다. 고려 초기부터 있었던 듯한데 군호는 군인과 양호(養戶)로 구성되었다. 이들에게는 군인전이 지급되어 2인의 양호로 하여금 이것을 경작하여 군인의 장비와 생활비를 제공케 하였다. 군인에 결원이 생기는 때는 선군(選軍)하여 보충하였는데 선군하면서 군호로 만들어 군인전을 주었다. 이 선군은 백정과 같은 농민 중에서 젊고 용력 있는 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나 천민도 많이 뽑혔고 이것은 군인의 사회 신분을 저하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7. 군사 장비
7.1. 갑옷
고려 초기 군대와 해군은 두루마기 형태의 갑옷, 쇄자갑(鎖子甲)), 찰갑(札甲)), 경번갑(鏡幡甲))을 15세기 조선 초기까지 착용했다. 장교와 기병은 경번갑을, 일반 병사들은 두루마기, 찰갑, 쇄자갑을 착용했다.
군대는 넓은 가장자리 투구와 송나라(송나라 군사사)의 영향을 받은 투구를 착용했는데, 때로는 찰갑으로 된 목 부분 방어구를 갖추기도 했다. 찰갑의 갑옷은 허벅지 또는 무릎까지 내려온다. 궁수와 보병은 다리와 몸통을 덮는 찰갑을 착용했다.
수은갑(水銀甲), 유엽갑(柳葉甲), 피갑(皮甲), 지갑(紙甲)은 찰(札)을 만드는 재료가 다르지만, 모두 찰에 구멍을 뚫고 사슴가죽으로 엮는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앞이 트인 두루마기 형태를 하고 있다. 서긍의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 군사들이 착용한 갑옷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연결된 두루마기[逢掖]와 비슷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3세기~14세기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고려의 군사 장비는 여러 변화를 겪었다. 고려는 몽골식 요소들을 채택했는데, 갑옷은 원나라의 표준적인 징갑(brigandine)과 유사하며, 원뿔 모양의 투구와 투구의 측면과 후면에 부착된 세 개의 징갑 목 가리개로 구성되었다. 이는 조선 초기 두정갑(dujeonggap)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7.2. 무기
고려의 무기는 삼국 시대의 것을 계승한 창, 활, 투석기, 검 등이었으며, 후삼국 통일 전쟁 당시에도 사용되었다. 고려의 칼은 전통 무기 중 대표적인 근접 무기로, 주로 근접전에서 사용되었다. 도(刀)는 한쪽에만 칼날이 있는 곡선형으로 베는 데 사용되었고, 검(劍)은 양쪽에 칼날이 있는 직선형으로 베고 찌르는 데 효과적이었다. 전투에서는 도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의 칼은 삼국시대의 환두대도와 달리 손가드가 없었고, 칼날과 손잡이 사이에 손을 보호하기 위한 타원형 가드가 특징이었다.
고려는 북방 기마 유목민족과의 성곽 중심 전쟁에서 과(戈, 갈고리창)와 모(鉾, 창)를 사용했다. 갈고리창은 찌르거나 베는 데 사용할 수 있었고, 창은 기병전에서 효과적이었다.
고려 보병과 기병은 사거리가 450m에 달하는 활을 사용하는 궁병으로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잦은 외세 침입을 경험한 고려 시대에는 활이 다른 어떤 무기보다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왕이 직접 병사들을 사격 훈련시키기도 했다. 쇠뇌와 연발 쇠뇌 또한 고려의 외적 저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쇠뇌는 방아쇠를 당겨 발사체를 발사하는 것만으로도 제한된 공간에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방어 작전과 매복 전술에 편리했다.
고려에서 화약 무기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1104년 화약을 이용한 화염방사기일 가능성이 있는 무기와 1135년 폭발성 폭탄에 대한 기록이다. 1356년에는 대형 화살을 발사하는 대포가 시험되었다.
고려의 군 지휘관들은 국방을 위해, 특히 1350년 이후 해안 마을을 약탈한 왜구를 막기 위해 화기를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1373년, 공민왕은 왜구에 대항하여 사용할 새로 건설된 함대를 시찰했는데, 여기에는 대포 사격도 포함되었다. 최무선은 중국에서 온 화약 상인으로부터 질산칼륨 정제 방법을 배워 화약 무기 생산을 시작했다. 1377년 화약 무기 생산 및 개발을 감독하기 위한 화약 무기 개발 관청이 설치되었다.
최무선은 14세기에 고려의 대포를 개발했다. 이들은 곧 고려 전함에 사용되도록 개발되었고, 몽골 침입에 맞서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다. 1395년까지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와 같은 수통총, 탄환을 발사하는 박격포인 질려포, 여러 종류의 유화, 주화, 촉천화 로켓(이는 신기전의 전신이었다), 신포라 불리는 신호총 등이 개발되어 사용되었다.
1378년 함대가 대포 사용 훈련을 받았다. 1380년, 고려 해군은 함선에 대포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금강에서 대규모 왜구 함대를 공격하여 거의 모든 왜구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는 세계 최초의 해전 중 하나로 기록된다. 진포 전투(1380)에서 최무선이 발명한 화기를 장착한 고려 전함 80척이 왜구선 500척을 격침시켰다. 1383년 정지 장군은 함상 대포를 사용하여 왜구선 17척을 격파했다. 1389년에는 이성계의 명령으로 쓰시마 섬을 급습하여 왜구선 300척을 파괴하고 한국 포로 100명 이상을 해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