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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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중만은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김해에서 유아기를 보낸 사진작가이다. 아프리카와 프랑스 유학 시절을 거쳐 1977년 프랑스 아를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젊은 작가상을 수상하며 사진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영화 포스터, 패션,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1000여 명의 스타 사진을 촬영했다. 2006년 상업 사진 중단을 선언하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예술 사진에 전념하다가 2022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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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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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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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김중만 |
한자 이름 | 金重晩 |
로마자 표기 | Gim Jung-man |
다른 이름 | 김충만(金沖晩)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954년 10월 30일 |
사망일 | 2022년 12월 31일 |
출생지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 |
학력 | 니스 국립장식미술학교 서양화과 |
직업 | 사진작가 |
배우자 | 오수미(이혼, 1978~1986) |
자녀 | 2남 (애니, 네오) |
수상 | |
수상 내역 | '아를 국제 사진 페스티벌' 젊은 작가상 |
2. 생애
김중만은 10대 시절 아버지(부르키나파소에 파견된 정부 의사)를 따라 한국을 떠났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순수 미술을 공부했으며, 프랑스 국립 장식 미술학교에서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9년 아를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젊은 사진작가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오늘날의 프랑스 사진작가 80인"에 최연소로 선정되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상업 사진 분야에서 활동했다. 2000년에는 korea.com에 의해 "대한민국 문화계 33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올해의 패션 사진작가상을 수상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강원특별자치도 철원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상남도 김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고, 그의 아버지는 소아과 의사 및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위였다. 1971년 중학교 3학년 때 정부파견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떠나 아프리카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4] 1970년대 기술지원으로 파견된 의사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마땅한 고등교육기관이 없어 프랑스나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도 1972년 프랑스로 떠났다.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 들어가 서양화를 전공했으나[5],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중 사진작가로 진로를 바꾸었다. 1977년 프랑스 '아를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고, 만 23세에 프랑스 '오늘의 사진작가 80인'에 최연소 작가로 선정되었다.[6]
김중만은 10대 시절 아버지(부르키나파소에 파견된 정부 의사)를 따라 처음으로 한국을 떠났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순수 미술을 공부했으며, 프랑스 국립 장식 미술학교에서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9년, 아를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젊은 사진작가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그는 "오늘날의 프랑스 사진작가 80인"에 선정되었으며, 목록에서 가장 젊은 사진작가였다.
2. 2. 사진작가로서의 경력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중 사진작가로 진로를 바꾸었다. 1977년 프랑스 '아를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젊은 작가상을 받았고, 만 23세에 프랑스 '오늘의 사진작가 80인'에 최연소 작가로 선정되었다.[6]1977년 서울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17] 1979년 귀국해 1984년 영화 《고래사냥》의 포스터 사진감독으로 데뷔하였다. 1985년과 1986년 두 차례 국외로 추방되었다가, 1988년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사진작가 최초로 아프리카 사진집을 출판하여 인기작가가 되었다. 1990년 김현식 6집 앨범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2000년부터는 상업 사진을 찍기 시작하여, 영화 《괴물》, 《타짜》, 《달콤한 인생》 등의 영화 포스터와 전도연, 비, 원빈, 정우성, 배용준, 이병헌, 고소영, 강수연, 김정은, 손예진 등 1000여 명의 스타와 함께 패션, 광고 등 다양한 분야의 사진을 찍었다.
2006년, 김중만은 더 이상 사진으로 돈을 벌지 않겠다며 상업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이후 기아와 질병으로 고생하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후원하며 세계 오지와 극지를 오가며 예술 사진에 전념했다. 그는 한국적, 아시아적 정체성을 주제와 기술적 수준에서 탐구하고자 했으며, 한지에 사진을 인쇄하는 방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2. 3. 사망
김중만은 2022년 12월 31일, 68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1]3. 작품 세계 및 철학
김중만은 자연 사진에서 촬영 대상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사자를 4.5m 거리까지 접근하여 촬영한 적도 있다. 오랜 시간 야생동물을 촬영하면서 그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야생동물 사진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색다른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에, 촬영 첫날부터 강렬한 흥미를 느껴 빠져들었다고 한다.[17] 김중만은 100만 장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그중 1,000장 정도는 가족에게 주고 나머지는 국가에 기증하여 도서관에 전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열람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7] 또한 한 시대를 기록하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언급했다.[17] 그는 37년간 사진 작업을 하며 50만 장 이상의 사진을 촬영했다.
2006년, 김중만은 예술적 실험에 몰두하며 작업 방향을 전환했다. 그는 주제 및 기술적 측면에서 한국적, 아시아적 정체성을 탐구하고자 했으며, 한지(韓紙)에 사진을 인쇄하는 방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4. 수상 및 경력
연도 | 수상 및 경력 |
---|---|
1975년 | 니스 쟝 피에르 소아르니 데뷔 개인전[17] |
1976년 | 프랑스 오늘의 사진 80인 중 최연소 작가로 선정[17] |
1977년 | 프랑스 ARLES 국제사진페스티벌 젊은 작가상 수상[17] |
1995년 |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사진학 강의 |
2000년 | 패션사진가상, KOREA.COM 33인의 문화인에 선정 |
2002년 | 모델라인 2002 베스트 드레서 백조상 |
2005년 | SIPA 2005 참여 |
2009년 | 플랜코리아 홍보대사, 인천공항 명예홍보대사 |
2010년 | G20 정상회의 성공기원 스타 서포터즈, 한국국제협력단 홍보대사, 국제개발협력의 날 홍보대사, 제5회 마크 오브 리스펙트상 |
2011년 | 한국 문화원 연합회 홍보대사, 문화예술 명예교사 |
5. 저서 및 사진집
- 《넋두리 김현식》 (1991년 2월 1일) ISBN 2005436000059
- 《인스턴트 커피》 (1996년 10월 1일)
- 《동물왕국》 (1999년 12월 31일)
- 《대한민국 헌법을 읽자》 (2002년 11월 30일)
- 《AFTER RAIN》 (2003년 5월 15일)
- 《AFTER RAIN 2》 (2003년 5월 15일)
- 《아프리카 여정》 (2005년 3월 18일)
- 《김중만 사진집 It's Alive for Every Child》 (2005년 1월 15일)
- 《네이키드 소울》 (2005년 8월 30일)
- 《아프리카 아프리카》 (2005년 10월 30일)
- 《Sexually Innocent 섹슈얼리 이노선트》 (2006년 7월 25일)
- 《오키드》 (2007년 4월 27일)
- 《대한민국 헌법 The Constitution of Korea》 (사진참여, 2007년 1월 10일)
- 《이야기가 있는 종이박물관》 (2007년 11월 13일)
- 《INFINITY YOO SEUNG JUN》 (2010년 9월 30일)
- 《김점선 그리다 : 김중만이 꾸민 김점선의 모든 것》 (2011년 6월 25일)
- 《WILD : 신화 누드집》
6. 일화
- 부르키나파소로 가게 되었을 때, 김중만은 정글과 야생동물이 가득한 낭만적인 세계를 상상했지만, 나무 한 그루 없는 사막뿐인 환경에 실망했다. 그는 아버지가 자유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그런 곳으로 파견을 간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의 아버지는 1999년에 사망했으며, 유언에 따라 유해는 아프리카와 고향에 나뉘어 안치되었다.[4]
- 프랑스 유학 시절, 김중만은 아버지의 동료가 다녔던 학교에 홀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수입이 없어 학비를 지원받지 못했다.[8] 주에서 가장 큰 고등학교에 진학한 김중만은 유일한 외국인으로서 차별받을 것을 예상했으나, 시골 학교 친구들은 오히려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1500명의 학생 중 천 명가량은 와인 농장 자녀들이었고, 프랑스에서는 미성년자도 와인을 마실 수 있었기에 다들 와인을 물처럼 마셨다. 학교에서는 여자친구들이 프랑스어를 가르쳐주겠다며 접근했고, 덕분에 1년 만에 프랑스어를 습득했다.[9] 김중만을 질투하는 남학생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더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10] 방학 및 주말에는 식당에서 그릇 닦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기숙사 비용과 학비를 모두 충당했다. 점심 식사 후 쌓이는 식기를 닦고 나면 저녁 식사 그릇이 들어오는 등 일감이 많았다.[8]
- 미대 재학 중, 법대 친구가 암실에서 인화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김중만은 5분 만에 인화지에 그림이 나타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7] 그 후 친구에게 카메라를 빌려 사진을 찍기 시작했으며, 처음 찍은 것은 여자친구의 사진이었다.[11] 길에서 누드를 찍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변태로 오해받았지만 뛰어난 사진 실력으로 오해를 풀었다.
- 대학 시절 교수들은 "그림이 더 힘이 있다"며 김중만의 사진 활동을 만류했다. 당시에는 사진 예술이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였지만, 20년 후 교수를 찾아갔을 때 "네가 그때 사진 하길 잘했다"는 격려를 받았다.[12]
- 1977년 서울에서 첫 전시회를 열게 된 계기는, 칸 미술제 참석차 프랑스에 온 대한민국 대표 화가들이 김중만의 사진을 보고 전시회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다.[17]
- 1985년, 김중만은 외모 때문에 국외로 추방당했다. 당시 외국 국적자가 사전 신고 없이 전시회를 하면 추방당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김중만은 장발에 귀고리를 한 파격적인 모습 때문에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13] 추방 당시 공무원들은 짐을 싸서 즉시 출국해야 한다고 말하며, 목적지와 상관없이 첫 비행기에 태워 보냈다. 일본으로 가게 된 김중만은 하네다 공항 근처 호텔에서 "돈이 없으니 내일 친구가 갚을 테니 재워달라"고 부탁해 하룻밤을 묵었다. 창밖 수영장 바닥 틈새로 잡초가 난 것을 보며 자신과 같다고 느꼈고, 이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진을 찍는 전환점이 되었다.[14]
- 1986년, 신상옥 감독의 아이들을 돌보던 김중만은 안기부 직원들에 의해 두 번째 추방을 당했다. 이유도 모른 채 미국 LA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8개월간 머물렀다.[16] 김중만은 정신적 고통을 받았지만, 우연히 만난 프랑스계 흑인의 도움으로 LA에서 가장 싼 호텔에 머물며 사진 현상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다.[17] 어느 날, 헤드라이트가 하나 고장 난 차를 보고 죽으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18] 김중만은 두 번의 추방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자랑스러우며, 추방은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18]
- 김중만은 2000년 이전까지 사진을 상업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나, 마흔이 넘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명함을 만들었다.[19] 많은 스타들과 패션, 광고, 영화 포스터 등 다양한 분야의 사진을 찍었다.[20]
- 김중만은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로 전도연을 꼽았다.[19]
- 2006년, 김중만은 50대가 넘은 나이에 새로운 사진가의 길을 걷고자 상업 사진 중단을 선언했다. 한국관광공사의 엽서 제작, 문화재청 관련 일 등을 통해 수입을 얻으며 한국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반성했다.[21]
- 김중만의 사진은 대한민국 사진작가 최초로 소더비 경매에 등재되어 최소 20000USD 이상의 가격에 팔리고 있다.[22]
- 조선희를 가르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7. 평가
김중만은 1988년 한국 국적을 회복한 후 사진작가 최초로 아프리카 사진집을 출판하여 인기 작가로 발돋움했다. 2000년부터 상업 사진을 찍기 시작했으며, 영화 《괴물》, 《타짜》, 《달콤한 인생》 등의 영화 포스터와 전도연, 비, 원빈, 정우성, 배용준, 이병헌, 고소영, 강수연, 김정은, 손예진 등 1000여 명에 이르는 스타와 함께 패션, 광고 등 다양한 분야의 사진을 찍었다.[17] 2006년에는 상업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이후 기아와 질병으로 고생하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후원하면서 세계 오지와 극지를 오가며 예술 사진에 전념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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