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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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사우는 프랑코니아 공국의 일부였던 지역으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몰락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독립 국가로 등장했다. 나사우 가문의 시조는 두도-헨리이며, 1090년경 라우렌부르크 성을 건설했다. 1255년 나사우 영지는 발람 2세와 오토 1세에 의해 분할되었고, 이후 나사우 가문의 여러 분파가 생겨났다.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통치했고, 오토 계열은 네덜란드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오라녜-나사우 가문을 이루었다. 오라녜-나사우 왕가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이끌었고, 현재 네덜란드의 국왕/여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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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우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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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금색으로 칠해진 푸른색 사자, 붉은색으로 무장하고 혀를 내민다 | |
가문 | 나사우 가문 |
영지 | 나사우 성 |
국가 |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나사우 오라녜 |
창시자 | 라우렌부르크의 두도 |
현 수장 | 앙리 룩셈부르크 대공 (모계 계승) |
설립 년도 | 기원전 1093년경 |
해체 년도 | 1985년 (부계 계승) |
분가 |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 오라녜나사우 가문 나사우-코로이 가문 |
작위 | |
작위 | 로마 왕 네덜란드 왕 잉글랜드 왕 스코틀랜드 왕 아일랜드 왕 룩셈부르크 대공 나사우 공작 림뷔르흐 공작 오라녜 공 오라녜나사우 공 나사우-오라녜-풀다 공 나사우-위징겐 공 나사우-바일부르크 공 및 백작 나사우-디츠 공 및 백작 나사우-지겐 공 및 백작 나사우-하다마르 공 및 백작 나사우 백작 라우렌부르크 백작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나사우-비스바덴-이드슈타인 백작 나사우-자르브뤼켄 백작 네덜란드 총독 |
2. 기원 및 초기 역사
나사우 백작령(나사우(주))이 된 지역은 프랑코니아 공국(프랑코니아 공국)의 일부였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몰락과 함께 프랑코니아가 분열되면서 나사우는 신성 로마 제국의 독립 국가로 등장하였다.[3][4]
나사우 가문의 창시자는 두도-헨리(두도 폰 라우렌부르크)(Dudo-Henry of Laurenburg) () (Dudo von Laurenburgde; Tuto de Lurinburgla)이다.[3][4] 두도는 마인츠 대주교의 푀크트(푀크트)였던 루프레히트의 아들이었다.[5] 두도는 1093년에서 1117년 사이에 ''투토 데 루린부르크''로 언급된다. 1090년경 라인 강변에 라우렌부르크 성을 건설했고,[6] 1093년 마리아 라아흐 수도원의 설립 헌장에 처음 언급되지만, 1159년 나사우 성이 통치 중심지가 되면서 가문의 이름이 되었다. 1134년 (두도의 사후) 헌장에서 그는 라우렌부르크 백작으로 언급된다.[3]
1117년 두도는 샤프하우젠 수도원에 리포른에 수도원을 건설하기 위한 토지를 기증했다. 라우렌부르크 백작 루프레히트 1세는 리포른의 푀크트가 되어 이 수도원을 별도의 독립 수도원으로 설립하였다.[7]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은 1126년에서 1145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수도원에는 수도사들을 위한 수도원과 수녀들을 위한 작은 별도의 수도원이 있었다.[8]
1122년 두도는 마인츠 대교구의 봉토로 타우누스의 이드슈타인 성을 받았다. 그는 또한 부유한 베네딕트회 블라이덴슈타트 수도원(타우누스슈타인)의 푀크트직을 받았다.[9]
라우렌부르크와 나사우 백작들은 형제인 로베르트 1세(1123~1154)와 라우렌부르크의 아놀드 1세(1123~1148) 치하에서 권력을 확장했다. 로베르트는 나사우 백작이라고 자칭한 최초의 인물이지만, 그 칭호는 로베르트 사후 5년 후인 1159년에야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로베르트의 아들 발람 1세(1154~1198)는 법적으로 나사우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라우렌부르크 백작들의 연대기는 확실하지 않으며, 로베르트 1세와 발람 1세 사이의 관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1148년 라우렌부르크 공동 백작으로 기록된 게르하르트를 아놀드 1세의 아들이라고 여기고 있다.[10] 그러나 에리히 브란덴부르크는 게르하르트가 로베르트 1세의 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말한다.[11] 라인강 중류의 나사우(Nassau)에 성을 쌓은 나사우 백작이 그 기원이며, 12세기 후반에 초대 나사우 백작이 된 발람 1세를 시조로 한다.
2. 1. 라우렌부르크 백작 가문 (1093년경 - 1159년)
나사우 백작령(나사우(주))이 된 지역은 프랑코니아 공국(프랑코니아 공국)의 일부였다.[3][4]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몰락과 함께 프랑코니아가 분열되면서 나사우는 신성 로마 제국의 독립 국가로 등장하였다.나사우 가문의 창시자는 두도-헨리(두도 폰 라우렌부르크)(Dudo-Henry of Laurenburg) () (Dudo von Laurenburgde; Tuto de Lurinburgla)이다.[3][4] 두도는 마인츠 대주교의 푀크트(푀크트)였던 루프레히트의 아들이었다.[5] 두도는 1093년에서 1117년 사이에 ''투토 데 루린부르크''로 언급된다. 1090년경 라인 강변에 라우렌부르크 성을 건설했고,[6] 1093년 마리아 라아흐 수도원의 설립 헌장에 처음 언급되지만, 1159년 나사우 성이 통치 중심지가 되면서 가문의 이름이 되었다.[3]
1117년 두도는 샤프하우젠 수도원에 리포른에 수도원을 건설하기 위한 토지를 기증했다. 라우렌부르크 백작 루프레히트 1세는 리포른의 푀크트가 되어 이 수도원을 별도의 독립 수도원으로 설립하였다.[7]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은 1126년에서 1145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수도원에는 수도사들을 위한 수도원과 수녀들을 위한 작은 별도의 수도원이 있었다.[8]
1122년 두도는 마인츠 대교구의 봉토로 타우누스의 이드슈타인 성을 받았다. 그는 또한 부유한 베네딕트회 블라이덴슈타트 수도원의 푀크트직을 받았다.[9]
라우렌부르크와 나사우 백작들은 형제인 로베르트(Ruprecht) 1세(1123~1154)와 라우렌부르크의 아놀드 1세(1123~1148) 치하에서 권력을 확장했다. 로베르트는 나사우 백작이라고 자칭한 최초의 인물이지만, 그 칭호는 1159년에야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라우렌부르크 백작들의 연대기는 확실하지 않으며, 로베르트 1세와 발람 1세 사이의 관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1148년 라우렌부르크 공동 백작으로 기록된 게르하르트를 아놀드 1세의 아들이라고 여기고 있다.[10] 그러나 에리히 브란덴부르크는 게르하르트가 로베르트 1세의 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말한다.[11]
1255년, 나사우 영지는 발람 2세(발람 2세)와 오토 1세(오토 1세)에 의해 분할되었다. 1783년, 나사우 가문의 여러 분파의 수장들은 나사우 가족 협약(''Erbverein'')에 서명했다.[13]
2. 2. 나사우 백작 가문 (1159년 - 1255년)
나사우 백작령은 프랑코니아 공국의 일부였다가 13세기 초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몰락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독립 국가로 등장하였다.[3][4] 나사우 가문의 창시자는 라우렌부르크 백작 두도-헨리 () (Dudo von Laurenburgde; Tuto de Lurinburgla)로 여겨진다. 두도는 마인츠 대주교의 푀크트(푀크트)였던 라우렌부르크의 루프레히트(루프레히트)의 아들이었다.[5] 두도는 리포른과 미엘렌의 영주 또는 푀크트였으며 리포른/라우렌부르크 지역의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나사우 가문의 가장 오래된 조상으로 알려진 인물은 881년 프륀의 토지 소유주로 언급된 드루트빈이다.[3]두도는 1090년경 라인 강변에 라우렌부르크 성을 건설했다.[6] 1093년 마리아 라아흐 수도원의 설립 헌장에 처음 언급되지만, 1159년 나사우 성이 통치 중심지가 되었고, 이 성의 이름을 따서 가문의 이름이 지어졌다. 1134년 헌장에서 그는 라우렌부르크 백작으로 언급된다.[3]
1117년 두도는 샤프하우젠 수도원에 리포른에 수도원을 건설하기 위한 토지를 기증했다. 라우렌부르크 백작 두도는 리포른에 코블렌츠의 성 플로리누스에게 봉헌된 베네딕트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이는 샤프하우젠의 베네딕트 수도원인 알러하일리겐 수도원에 속해 있었다.[7] 1126년경 그의 아들인 라우렌부르크 백작 루프레히트 1세는 리포른의 푀크트가 되어 이 수도원을 별도의 독립 수도원으로 설립하였다.[7]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은 1126년에서 1145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아마도 3개의 신랑이 있는 바실리카였을 것이다. 이 수도원에는 수도사들을 위한 수도원과 수녀들을 위한 작은 별도의 수도원이 있었다.[8]
1122년 두도는 마인츠 대교구의 봉토로 타우누스의 이드슈타인 성을 받았다. 이것은 이드슈타인-에프슈타인 백작 우달리히의 상속의 일부였다. 그는 또한 부유한 베네딕트회 블라이덴슈타트 수도원(오늘날 타우누스슈타인)의 푀크트직을 받았다.[9]
라우렌부르크와 나사우 백작들은 형제인 로베르트 1세(1123~1154)와 라우렌부르크의 아놀드 1세(1123~1148) 치하에서 권력을 확장했다. 로베르트는 나사우 백작이라고 자칭한 최초의 인물이지만, 그 칭호는 로베르트 사후 5년 후인 1159년에야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로베르트의 아들 발람 1세(1154~1198)는 법적으로 나사우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라우렌부르크 백작들의 연대기는 확실하지 않으며, 로베르트 1세와 발람 1세 사이의 관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1148년 라우렌부르크 공동 백작으로 기록된 게르하르트를 로베르트 1세의 형제인 아놀드 1세의 아들이라고 여기고 있다.[10] 그러나 에리히 브란덴부르크는 그의 저서 ''Die Nachkommen Karls des Großen''에서 게르하르트가 리무르크의 베아트릭스의 외할아버지의 이름이 게라르트였기 때문에 로베르트 1세의 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말한다.[11]
1255년, 하인리히 2세의 아들들인 발람 2세와 오토 1세가 나사우 영지를 분할했다. 발람의 후손들은 발람 계열, 오토의 후손들은 오토 계열로 알려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분열되었다. 1783년, 나사우 가문의 여러 분파의 수장들은 나사우 가족 협약(''Erbverein'')에 서명했다.[13]
나사우 백작 가문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발람 1세(1146년경 - 1198년)(재위: 1154년 - 1198년)
- 하인리히 1세(1158년 - 1167년)(재위: 1159년 - 1167년)
- 루프레히트 3세(?- 1191년)(재위: 1160년 - 1191년)
- 하인리히 2세(1180년 - 1251년)(재위: 1198년 - 1247년)
- 루프레히트 4세(?- 1240년경)(재위: 1198년 - 1230년)
- 오토 1세(?- 1290년)(재위: 1247년 - 1255년)
- 발람 2세(1220년 - 1276년)(재위: 1249년 - 1255년)
발람 1세┬하인리히 2세┬발람 2세
│ └오토 1세
└루프레히트 4세
(하인리히 1세와 루프레히트 3세는 위 계보도 참조)
3. 발람 계열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
발람 계열은 주로 독일 영토에 힘을 집중했다. 예외는 로마 왕 아돌프 ( – 1298년 7월 2일)로, 약 1276년부터 나사우 백작이었고 1292년부터 선제후들에 의해 1298년 폐위될 때까지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의 대관식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그에게 황제 칭호를 확보해 주었을 것이다. 그는 교황의 파문 없이 폐위된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상 최초의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통치자였다. 아돌프는 그의 후계자 합스부르크가의 알브레히트와 싸우다 괴르하임 전투에서 얼마 후 사망했다. 그는 호엔슈타우펜 멸망 후 로마-게르만 왕위를 갈망하는 여러 경쟁 백작 가문의 소위 백작-왕 계승에서 두 번째였다. 그러나 나사우 가문은 룩셈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에서 했던 것처럼 세습 권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더 큰 토지를 확보할 만큼 오랫동안 황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게를라흐가 죽은 후, 발람 계열의 소유물은 나사우-바일부르크와 나사우-비스바덴-아이슈타인으로 나뉘었다.
아돌프는 1292년에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1대에 그쳤고, 이후 아돌프의 가계는 독일의 소귀족으로 이어졌다. 아돌프의 손자 John I of Nassau-Weilburg영어는 1355년에 바일부르크 백작이 되었기 때문에, 이 가계는 나사우-바일부르크가라고 불린다.
1806년에 나사우 공국이 성립되어, 독일 연방 시대까지 나사우-바일부르크가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Friedrich Augustde, 빌헬름, 아돌프 3대의 나사우 공이 다스렸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기 때문에, 1866년에 나사우 공국은 프로이센 왕국에 병합되어 헤센-나사우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1890년, 아돌프는 룩셈부르크 대공으로 맞이되어, 이후 그 자손이 대공가로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샤를로트는 가명을 룩셈부르크가로 개칭했고, 또한 샤를로트가 부르봉-파르마가의 펠릭스를 배우자로 맞이함으로써, 현재의 룩셈부르크 대공가는 파르마-룩셈부르크가(부르봉-파르마가의 분가에 해당)이지만, 나사우-바일부르크가라는 명칭은 현재에도 사용된다.
3. 1. 나사우-바일부르크 백작 (1344년 - 1816년)
발람 2세 백작으로부터 시작된 나사우-바일부르크 백작령은 1816년까지 존속했다. 발람 계열은 1328년 메렌베르크 영지와 1353년 (결혼을 통해) 사르브뤼켄 영지를 받았다. 이 가문의 군주들은 이후 1806년 라인 연방의 일부로 나사우 공국이 설립된 이후 (1816년까지 나사우-우징겐과 공동으로) 통치했다.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은 1890년부터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통치했다. 1815년부터 1839년까지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네덜란드의 속령으로 네덜란드 국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런던 조약(1839)에 따라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독립되었지만 네덜란드와 인적 동군 연합을 유지했다.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는 아들이 사망한 후 남계 후계자가 없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지만, 룩셈부르크는 여성의 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 법을 따랐다. 따라서 빌헬름 3세의 사망 시 네덜란드의 왕위는 그의 외동딸인 빌헬미나에게, 룩셈부르크의 왕위는 나사우 가문 조약에 따라 아돌프에게 돌아갔다.
나사우-바일부르크 백작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아돌프 (1255년경 - 1298년)(재위: 1276년 - 1298년) - 신성 로마 황제 (1292년 - 1298년)
- 게를라흐 1세 (1285년 - 1361년)(재위: 1298년 - 1344년)
- 요한 1세 (1309년 – 1371년)(재위: 1344년 – 1371년)
- 필립 1세 (1368년 – 1429년)(재위: 1371년 – 1429년)
- 필립 2세와 요한 2세 (1423년 – 1472년) 공동 통치 (재위: 1429년 – 1442년)
- 필립 2세 (1418년 – 1492년)(재위: 1442년 – 1492년)
- 루트비히 1세 (1473년 – 1523년)(재위: 1492년 – 1523년)
- 필립 3세 (1504년 – 1559년)(재위: 1523년 – 1559년)
- 알브레히트 (1537년 – 1593년)(재위: 1559년 – 1593년)
- 필립 4세 (1542년 – 1602년)(재위: 1559년 – 1602년)
- 루트비히 2세 (1565년 – 1627년)(재위: 1593년 – 1625년)
- 빌헬름 루트비히 (1590년 – 1640년)과 요한 4세, 에른스트 카지미어 공동 통치 (재위: 1625년 – 1629년)
- 에른스트 카지미어 (1607년 – 1655년)(재위: 1629년 – 1655년)
- 요한 에른스트 (1664년 – 1719년)(재위: 1675년 – 1688년)
- 요한 에른스트(1664년 - 1719년)(재위: 1688년 - 1719년)
- 카를 아우구스트(1685년 - 1753년)(재위: 1719년 - 1753년)
- 카를 크리스티안(1735년 - 1788년)(재위: 1753년 - 1788년)
- 프리드리히 빌헬름(1768년 - 1816년)(재위: 1788년 - 1816년)
- 빌헬름(1792년 - 1839년)(재위: 1816년)
3. 2. 나사우 공작 (1816년 - 1866년)
요한 에른스트 (1664년 - 1719년)는 1688년부터 1719년까지 나사우-바일부르크 백작을 지냈다. 그의 뒤를 이어 카를 아우구스트 (1685년 - 1753년)가 1719년부터 1753년까지 통치했다. 카를 크리스티안 (1735년 - 1788년)은 1753년부터 1788년까지 재위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768년 - 1816년)은 1788년부터 1816년까지 나사우-바일부르크 백작이었다.1816년, 빌헬름 (1792년 - 1839년)이 나사우 공작이 되었다. 빌헬름은 1839년까지 재위했으며, 그의 아들 아돌프 (1817년 - 1905년)가 1839년부터 1866년까지 나사우 공작을 지냈다.
3. 3. 룩셈부르크 대공 (1890년 - 현재)
1890년 나사우바일부르크 가의 아돌프가 룩셈부르크 대공이 되면서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였다. 아돌프는 1817년에 태어나 1905년까지 재위하였다. 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1852년에 태어나 1905년부터 1912년까지 재위하였다. 빌헬름 4세의 뒤를 이어 그의 딸인 마리 아델라이드가 1894년에 태어나 1912년부터 1919년까지 통치했다.마리 아델라이드의 뒤를 이어 샤를로트가 1896년에 태어나 1919년부터 1964년까지 룩셈부르크를 통치하였다. 샤를로트의 아들 장은 1921년에 태어나 1964년부터 2000년까지 재위하였다. 현재 룩셈부르크 대공은 1955년에 태어난 앙리이며, 2000년부터 재위 중이다. 앙리의 아들 기욤이 왕위를 계승할 예정이다.
4. 오토 계열 (오라녜-나사우 가문)
오토 1세의 후손들은 14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주로 혼인을 통해 네덜란드에 영토를 늘렸으며, 브레다에 성을 쌓고 거점으로 삼았다. 오토 계열 나사우 가문은 부르고뉴 공작을 섬기며 세력을 확장하여 네덜란드에서 최고의 명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16세기 초에는 헤ንድ릭 3세 판 나사우-브레다가 부르고뉴 공작 샤를(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로부터 호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헤드릭 3세와 그의 동생인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빌헬름은 각각 네덜란드를 포함한 라인강 좌안의 영토와 나사우 가문의 전래 영토인 라인강 우안의 영토를 상속받았다. 헤드릭 3세의 아들 르네 드 샤롱은 아버지의 유산에 더해 외가 숙부로부터 남프랑스의 오랑주 공령도 상속받았으나, 1544년에 전사했다. 르네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빌헬름 1세의 장남 빌럼은 11세에 사촌 형제인 르네의 유산인 네덜란드의 영지와 오랑주 공령을 상속받았다. 이후 빌럼은 오라녜 공 빌럼 1세를 칭했고 (오라녜는 오랑주의 네덜란드어 명칭이다), 그의 가계는 오라녜-나사우 가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나사우 가문의 세력 확장을 꺼린 황제 카를 5세의 의향에 따라,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의 칭호와 영지는 아버지로부터 빌럼의 동생 요한 6세에게 상속되었다. 빌럼 1세는 80년 전쟁에서 중심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이 된 북부 네덜란드 각 주의 의회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되었지만, 그의 동생 요한도 또한 형을 따라 한 주의 총독이 되었다. 이후 오라녜-나사우 가문과 분가인 요한의 가계인 나사우-디츠 가문은 네덜란드 각 주의 총독직을 거의 세습하였다. 다른 주요 분가로는 나사우-지겐 가문(요한 6세의 차남 요한 7세의 가계), 나사우-그림하이젠 가문(빌럼 1세의 서자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a=on/Justinus van Nassau영어의 가계) 등이 있다.
빌럼 1세의 증손자이자 네덜란드 총독과 잉글랜드 국왕·스코틀랜드 국왕을 겸임했던 빌럼 3세(윌리엄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요한 6세의 현손이자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피를 이은 나사우-디츠 가문의 요한 빌럼 프라이소가 오라녜 공을 계승했다. 이후 오라녜-나사우 가문은 현재까지 요한 빌럼 프라이소의 후손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 네덜란드 진출과 오라녜-나사우 가문 ==
오라녜-나사우 왕가는 오토 왕가의 장자 계열에서 유래했다.[18] 엥겔베르트 1세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봉사했고, 1403년 브레다 영지, 덴 렉 영지 등 브라반트 공국 영토의 상속녀인 요한나 판 폴라넨과 결혼했다. 당시 스헬트 강은 부르고뉴/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주요 무역로였기 때문에, 네덜란드 나사우 가문은 상업으로 이익을 얻었다.[18]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면서 나사우 가문의 중요성은 커졌다. 나사우-브레다의 헨리 3세는 16세기 초 카를 5세 황제에 의해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헨리는 1515년 프랑스 부르고뉴 출신의 샬롱-오라녜의 클라우디아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샬롱의 르네는 1530년 어머니의 형제인 샬롱의 필리베르로부터 독립적인 오라녜 공국을 상속받았다. 오라녜 공이 된 최초의 나사우 가문 사람인 르네는 "오라녜-나사우"를 새로운 가문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의 삼촌은 유언에서 르네가 샬롱-오라녜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해야 한다고 명시했다.[18] 1544년 르네가 사망하자, 그는 그의 모든 영토를 나사우-딜렌부르크의 사촌 빌헬름에게 남겼다. 영어로는 침묵의 빌헬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빌헬름 1세 오라녜"는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창시자이자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가 되어 독립 주권 국가인 네덜란드 공화국의 건설로 이어졌다.[18]
== 네덜란드 독립과 번영 ==
오라녜-나사우 왕가는 오토 왕가의 장자 계열에서 유래했다.[18] 엥겔베르트 1세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봉사했고, 1403년 브레다 영지, 덴 렉 영지 등 브라반트 공국 영토의 상속녀인 요한나 판 폴라넨과 결혼했다. 당시 스헬트 강은 부르고뉴/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주요 무역로였기 때문에, 네덜란드 나사우 가문은 상업으로 이익을 얻었다.[18]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면서 나사우 가문의 중요성은 커졌다. 나사우-브레다의 헨리 3세는 16세기 초 카를 5세 황제에 의해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헨리는 1515년 프랑스 부르고뉴 출신의 샬롱-오라녜의 클라우디아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샬롱의 르네는 1530년 어머니의 형제인 샬롱의 필리베르로부터 독립적인 오라녜 공국을 상속받았다. 오라녜 공이 된 최초의 나사우 가문 사람인 르네는 "오라녜-나사우"를 새로운 가문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의 삼촌은 유언에서 르네가 샬롱-오라녜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해야 한다고 명시했다.[18] 1544년 르네가 사망하자, 그는 그의 모든 영토를 나사우-딜렌부르크의 사촌 빌헬름에게 남겼다. 영어로는 침묵의 빌헬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빌헬름 1세 오라녜"는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창시자이자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가 되어 독립 주권 국가인 네덜란드 공화국의 건설로 이어졌다.[18]
네덜란드 공화국 정부 내에서 오라녜 공은 네덜란드의 다른 귀족들과는 달랐다. 그는 스페인에 대한 전쟁과 반란에서 국가의 전통적인 지도자였으며, 도시, 마을, 주의 지역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그 자신의 권리로 주권 통치자였으며(오라녜 공 문서 참조), 공화국에서도 그에게 많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스튜어트 왕가와 부르봉 왕가와 같은 실제 궁정의 중심이었고, 프랑스어를 사용했으며, 엄청난 규모로 사치스러웠다. 외국 대사들과 고위 인사들이 그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그와 상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총회와 상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왕족들과 두 번이나 결혼 동맹을 맺은 왕자들의 결혼 정책은 그들을 통치자들의 왕족 계급에 받아들여지게 했다.[17]
오라녜-나사우 왕가는 세습 통치를 선호했던 시대에 세습 왕조를 세우는 데 비교적 운이 없었다. 스튜어트 왕가와 부르봉 왕가는 오라녜 왕가와 동시에 권력을 잡았고, 바사 왕가와 올덴부르크 왕가는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세습 왕위를 세울 수 있었고, 호엔촐레른 왕가는 독일 통치의 길을 열 수 있었다. 침묵의 빌헬름은 홀란트와 젤란트 백작령을 제안받았고, 그의 암살만이 그가 그 직책에 오르는 것을 막았다. 이 사실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잊혀지지 않았다.[18]
침묵의 빌헬름의 죽음부터 프랑스의 정복까지 211년 동안, 아들이 미성년이 아닌 상태에서 아버지를 오라녜 공, 총독, 육군 원수로 직접 계승한 경우는 빌헬름 2세 한 번뿐이었다. 오라녜 왕가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점점 도시의 통치자들을 화나게 하는 경향이 있는 외관보다는 실제 권력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빌헬름 3세는 겔더른 공국을 제안받았으나, 다른 주에서 너무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17]
오라녜-나사우 왕가는 여러 사생아 계열을 낳았다. 위트레흐트의 유스티누스는 빌헬름 오라녜의 유일한 사생아였으며, 스페인에 맞서 브레다를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더 렉과 베버베르트의 영주 루이 나사우는 모리스 공과 마르가레타 판 메켈렌의 사생아였으며, 그의 후손들은 나사우-라렉 백작이 되었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은 오버커크 영주 헨리 드 나사우였고, 윌리엄 3세의 마구간장이자 존 처칠, 몰버러 공작 1세의 가장 신뢰받는 장군 중 한 명이었다. 그의 후손들은 잉글랜드에서 그랜섬 백작이 되었다. 주일레스테인 영주 프레드릭 판 나사우는 오라녜의 프레드릭 헨리의 사생아였으며, 잉글랜드에서 로치포드 백작의 계보를 이었다. 로치포드 백작 4세는 유명한 영국 외교관이자 국무 장관이었다.
빌헬름 3세의 죽음으로 침묵의 빌헬름의 적통 남계가 끊기면서 최초의 오라녜-나사우 왕가가 멸망했다. 침묵의 빌헬름의 동생의 장자 계승자이자 빌헬름 3세의 조부인 프레드릭 헨리의 방계 후손인 요한 빌헬름 프리소는 저지대와 독일의 모든 소유지와 공작 작위를 상속받았지만, 오라녜 공국 자체는 상속받지 못했다.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중 1672년 루이 14세에게 침략당해 점령당했고, 1682년 8월 다시 한 번 점령당했지만, 빌헬름은 통치에 대한 그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고 평화 조약을 통해 공국을 회복했다. 루이는 1702년 다시 공국을 침략해 점령했다. 그는 샬롱 왕조의 부르봉 친척인 콩티 공 프랑수아 루이에게 오라녜 공국을 봉토로 주었기 때문에, 작위에는 세 명의 청구인이 있었다. 공국은 마침내 루이 14세와의 전쟁을 끝낸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공작 작위를 포기하지 않고 공국을 프랑스에 할양했지만, 공국에 대한 또 다른 청구자인 나사우-디츠의 요한 빌헬름 프리소는 동의하지 않았다. 1732년 분할 조약에서야 요한 빌헬름 프리소의 후계자인 오라녜 공 빌헬름 4세가 영토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했지만, 다시 한번 (프리드리히 1세처럼) 작위에 대한 그의 주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같은 조약에서 두 청구인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 두 왕가 모두 작위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19] 나사우-디츠 공이기도 했던 요한 빌헬름 프리소는 이로써 '''두 번째 오라녜-나사우 왕가'''를 세웠다 (결합된 이름 오라녜-나사우-디츠에서 "디츠" 접미사가 삭제되었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는 오토 왕가와 발람 왕가의 역사에서 격동의 시대였다. 프랑스의 국제 질서 지배는 나사우 왕가의 전통적인 국제 분쟁 해결 전략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나사우 왕가의 양쪽 계열이 해방의 해인 1812년에서 1814년 사이에 왕가 네트워크를 재활성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는 양쪽 계열이 다른 역사적 길을 걷게 했다.[20]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재편 후,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수장은 "네덜란드의 국왕/여왕"이 되었다.
4. 1. 네덜란드 진출과 오라녜-나사우 가문
오라녜-나사우 왕가는 오토 왕가의 장자 계열에서 유래했다. 엥겔베르트 1세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봉사했고, 1403년 브레다 영지, 덴 렉 영지 등 브라반트 공국 영토의 상속녀인 요한나 판 폴라넨과 결혼했다. 당시 스헬트 강은 부르고뉴/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주요 무역로였기 때문에, 네덜란드 나사우 가문은 상업으로 이익을 얻었다. 15세기와 16세기를 거치면서 나사우 가문의 중요성은 커졌다. 나사우-브레다의 헨리 3세는 16세기 초 카를 5세 황제에 의해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헨리는 1515년 프랑스 부르고뉴 출신의 샬롱-오라녜의 클라우디아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샬롱의 르네는 1530년 어머니의 형제인 샬롱의 필리베르로부터 독립적이고 주권적인 오라녜 공국을 상속받았다. 오라녜 공이 된 최초의 나사우 가문 사람인 르네는 "오라녜-나사우"를 새로운 가문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의 삼촌은 유언에서 르네가 샬롱-오라녜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1544년 르네가 사망하자, 그는 그의 모든 영토를 나사우-딜렌부르크의 사촌 빌헬름에게 남겼다. 영어로는 침묵의 빌헬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빌헬름 1세 오라녜"는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창시자이자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가 되어 독립 주권 국가인 네덜란드 공화국의 건설로 이어졌다.[18] 네덜란드 공화국 정부 내에서 오라녜 공은 네덜란드의 다른 귀족들과는 달랐다. 그는 스페인에 대한 전쟁과 반란에서 국가의 전통적인 지도자였으며, 도시, 마을, 주의 지역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17] 그는 또한 그 자신의 권리로 주권 통치자였으며,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사치스러웠다.[17] 외국 대사들과 고위 인사들이 그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그와 상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17]
오라녜-나사우 왕가는 세습 왕조를 세우는 데 비교적 운이 없었다. 침묵의 빌헬름은 홀란트와 젤란트 백작령을 제안받았으나 암살로 인해 그 직책에 오르지 못했다.[18]
빌헬름 3세의 죽음으로 침묵의 빌헬름의 적통 남계가 끊기면서 최초의 오라녜-나사우 왕가가 멸망했다. 침묵의 빌헬름의 동생의 장자 계승자이자 빌헬름 3세의 조부인 프레드릭 헨리의 방계 후손인 요한 빌헬름 프리소는 저지대와 독일의 모든 소유지와 공작 작위를 상속받았지만, 오라녜 공국 자체는 상속받지 못했다. 오라녜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중 루이 14세에게 점령당했고, 1702년 다시 점령당했다. 루이는 콩티 공 프랑수아 루이에게 오라녜 공국을 봉토로 주었기 때문에, 작위에는 세 명의 청구인이 있었다. 공국은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공작 작위를 포기하지 않고 공국을 프랑스에 할양했지만, 나사우-디츠의 요한 빌헬름 프리소는 동의하지 않았다. 1732년 분할 조약에서 요한 빌헬름 프리소의 후계자인 오라녜 공 빌헬름 4세가 영토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했지만, 작위에 대한 그의 주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같은 조약에서 두 청구인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 두 왕가 모두 작위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19] 나사우-디츠 공이기도 했던 요한 빌헬름 프리소는 이로써 '''두 번째 오라녜-나사우 왕가'''를 세웠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는 오토 왕가와 발람 왕가의 역사에서 격동의 시대였다. 프랑스의 국제 질서 지배는 나사우 왕가의 전통적인 국제 분쟁 해결 전략을 심각하게 훼손했다.[20]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재편 후,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수장은 "네덜란드의 국왕/여왕"이 되었다.
오라녜-나소 가문의 요약 가계도는 아래와 같다:[42]
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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