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나카무라 구니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카무라 구니오는 일본의 기업인으로, 파나소닉(구 마쓰시타 전기산업)의 사장과 회장을 역임했다. 1962년 마쓰시타 전기산업에 입사하여 미국, 영국 법인 사장을 거쳐 2000년 사장, 2006년 회장에 취임했다. 회장 재임 중 회사명을 파나소닉으로 변경하고 구조 조정을 단행했으며, 2012년 퇴임 후에는 게이단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파괴와 창조'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나, 과도한 투자를 지속하여 회사에 손실을 입혔다는 비판도 받았다. 2022년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종삼위에 추서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파나소닉홀딩스 - 감바 오사카
    감바 오사카는 1980년 창단된 J리그 원년 멤버의 프로 축구 클럽으로, J1리그 우승,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FIFA 클럽 월드컵 3위 등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세레소 오사카와의 오사카 더비로 유명하고 수이타 시티 풋볼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 파나소닉홀딩스 - 마쓰시타 고노스케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파나소닉의 창업자로서, 독창적인 디자인과 경영철학으로 일본 전기 제조 및 소매업계에 큰 영향을 미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인재 육성에도 기여했다.
  • 오사카 대학 동문 - 데즈카 오사무
    일본의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는 700권이 넘는 작품을 남기고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무시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애니메이션 제작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 오사카 대학 동문 - 천병규
    천병규는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금융인, 관료, 정치인,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은행 부총재, 재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고 6.10 통화 개혁을 주도하며 제10대 국회의원을 지내다 사망했다.
  • 일본의 기업인 - 안토니오 이노키
    안토니오 이노키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황금기를 이끈 프로레슬러이자 정치인, 격투기 프로모터로, 역도산의 제자로 프로레슬링에 입문하여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설립하고 무하마드 알리와의 격투기 이벤트, 스포츠 평화당 창당 및 참의원 당선 등의 활동을 펼치며 프로레슬링계에 큰 공헌을 남겼다.
  • 일본의 기업인 - 아소 다로
    아소 다로는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아소 시멘트 사장을 역임하고 1979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여러 요직을 거쳐 제92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현재 자유민주당 부총재 및 최고 고문이다.
나카무라 구니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나카무라 구니오
본명나카무라 구니오
출생일1939년 7월 5일
사망일2022년 11월 28일
사망 장소일본 오사카부 모리구치시
국적일본
출생지일본 시가현
학력
출신 학교오사카 대학 경제학부 졸업
경력
직업마쓰시타 전기 산업 사장
파나소닉 사장2000년 ~ 2005년
개인 정보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정보 없음
부모정보 없음
친척정보 없음
수상
훈장욱일대수장

2. 생애

나카무라 구니오는 1939년 일본 시가현에서 태어나 오사카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1962년 마쓰시타 전기산업(현 파나소닉)에 입사하여 평생을 바친 기업인이다.[1][2] 그는 해외 지사 근무 등 다양한 경력을 쌓으며 1997년 전무이사 자리에 올랐다.

2000년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파괴와 창조'''를 내걸고 대대적인 구조 개혁을 단행했으며, 마쓰시타 고노스케 창업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회사를 '파나소닉'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과감한 사업 재편, 브랜드 통합, 마케팅 강화 등을 추진하며 한때 회사의 성장을 이끌었으나, 플라즈마 디스플레이(PDP) 사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 등으로 인해 회사가 막대한 손실을 입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16][17][18]

2006년 회장으로 승진했으며, 2012년 실적 악화 속에 회장직에서 물러나 상담역이 되었다. 은퇴 후에는 게이단렌 부회장 활동 및 중일 관계 개선에 힘쓰다가 2022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마쓰시타 전기산업의 혁신과 위기를 동시에 상징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39년 7월 5일 일본 시가현에서 태어났다.[1][2] 1962년 3월 오사카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1][2]

2. 2. 마쓰시타 전기산업 입사 및 경력

오사카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62년 4월 마쓰시타 전기산업 주식회사(현 파나소닉)에 입사했다. 그는 마쓰시타 전기산업을 근본적으로 개혁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 생존 시에 '마쓰시타'라는 이름을 회사명에서 떼어낼 것을 제안하여 고노스케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훗날 2008년 사명을 '파나소닉 주식회사'로 변경하는 기반을 마련하여 "구래의 고노스케 신화를 깬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제로 고노스케가 사망하기 직전인 1989년, 미국 마쓰시타 전기 사장으로 발령받았는데, 이는 영전의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좌천에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도주요 경력
1962년 4월마쓰시타 전기산업 주식회사 입사
1985년 11월동사 가전 영업 본부 수도권 가전 총괄부 도쿄 상사 영업소 소장 취임
1989년 4월미국 마쓰시타 전기 주식회사(현 파나소닉 노스 아메리카 주식회사) 파나소닉 사 사장 취임
1992년 6월영국 마쓰시타 전기 주식회사(현 파나소닉 영국 주식회사) 사장 취임
1993년 6월마쓰시타 전기산업 주식회사 이사 취임, 미주 본부장 겸 미국 마쓰시타 전기 주식회사 회장
1996년 6월마쓰시타 전기산업 주식회사 상무이사 취임
1997년 6월동사 전무이사, 사내 컴퍼니인 AVC사(현 커넥티드 솔루션즈사) 사장 취임


2. 3. 마쓰시타 전기산업 사장 및 회장 재임

2000년 6월, 나카무라 구니오는 마쓰시타 전기산업(현 파나소닉)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사장 취임과 함께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손자인 마쓰시타 마사유키 부사장이 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사실상 마쓰시타 가문에 의한 세습 경영은 막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카무라는 '''파괴와 창조'''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성역 없는 구조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이전부터 마쓰시타 고노스케 생존 시에도 회사명에서 '마쓰시타'를 떼어낼 것을 주장했던 일화로 유명하며, 이는 훗날 2008년 10월 사명을 "파나소닉 주식회사"로 변경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로 인해 '''구래의 고노스케 신화를 깬 남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나카무라 사장 체제 하에서 마쓰시타 전기는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 2001년 4월, 국내 가전 영업 체제를 개혁하고, 창업 이래 처음으로 조직명에 "마케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파나소닉 마케팅 본부"와 "내셔널 마케팅 본부"를 도쿄에 설치했다. 또한, 과거 필립스와의 합작 회사였던 마쓰시타 전자공업을 흡수 합병했다.
  • 2002년에는 마쓰시타 통신공업, 큐슈 마쓰시타 전기 등 5개 주요 자회사를 주식 교환 방식으로 완전 자회사화하고, 이후 사업 부문별로 분할, 통합, 사명 변경 등을 통해 중복 사업의 효율화를 추진했다.
  • 2002년 9월에는 그룹의 종합 정보 발신 거점으로 도쿄도 고토구 아리아케에 "파나소닉 센터"(현 파나소닉 센터 도쿄)를 설립했다.
  • 2003년 4월 1일에는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구축했던 계열점 제도를 대폭 수정하여, 모든 점포를 일률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매출 증대 의지가 있는 우수 점포(슈퍼 프로 숍, SPS)를 선별하여 집중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했다.[15]
  • 2003년 5월에는 글로벌 브랜드를 "Panasonic"으로 통일하고, "Panasonic ideas for life"라는 새로운 브랜드 슬로건을 발표하며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기존의 "National" 브랜드는 일본 내수용으로 한정되었다.
  • 2004년 4월에는 오랫동안 경쟁 관계에 있던 마쓰시타 전공을 TOB(공개매수)를 통해 연결 자회사화했으며, 이는 훗날 완전 자회사화 및 흡수 합병으로 이어졌다.
  • 2006년 8월에는 어린이들의 과학 기피 현상에 대한 위기감으로 파나소닉 센터 도쿄 내에 체험형 박물관 "리스피아"를 설립하게 했다.


2006년 6월, 나카무라는 회장으로 취임했으며, 2008년 10월 1일에는 회사명을 공식적으로 파나소닉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회장직을 이어갔다. 2011년 4월 1일에는 산요 전기를 완전 자회사로 편입시키고, 이후 중복 사업 부문을 정리하는 구조 조정을 단행하여 백색 가전 부문을 중국의 하이얼 그룹에 매각했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은 논란과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한국 삼성전자 등과의 경쟁이 심화되고 지상파 디지털 방송 전환 완료로 수요 감소가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사업, 특히 플라즈마 디스플레이(PDP) 분야에 대한 과도한 설비 투자(효고현 아마가사키시의 대규모 공장 신설 등)를 강행했다는 비판이 있다.[16] 이러한 투자는 상품 개발 및 개량에 필요한 연구 개발비를 잠식했고, 이는 기술자의 대량 유출과 기술력 후퇴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2011년 10월, 2012년 3월기 제2분기 결산 발표에서 아마가사키 PDP 공장의 대폭 축소 등 TV 사업 구조 개혁안이 발표되었으나, 이미 막대한 손실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구조 조정 비용까지 더해져 해당 회계연도 결산에서 파나소닉 창업 이래 최대인 7200억의 적자를 기록했다. 나카무라는 이러한 실적 악화의 책임을 사실상 차기 경영진에게 넘기며 2012년 6월 27일 회장직에서 물러나 상담역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독단적인 경영 스타일과 자신에게 반대하는 임원들을 배제하여 주변을 예스맨으로 채운 것이 이러한 경영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17] 파나소닉이 2012년부터 2년 연속으로 총 1.5조에 달하는 최종 적자를 기록하면서, 일부에서는 나카무라를 "전범 중의 전범", "인간으로서 타락한 경영자"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18]

한편, 2009년부터 의무화된 임원 보수 공개 제도에 따라 공개된 그의 보수는 2009년도에 1.22억, 2012년도에 1.33억였다.

2. 4. 은퇴 이후

2012년 6월 27일 파나소닉 회장에서 퇴임하고 상담역으로 취임했다.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재계 활동과 중일 관계 구축에 힘썼는데, 2007년부터 2011년까지 게이단렌(일본경제단체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중일 우호 협회로부터 '중일 우호의 사자' 칭호를 받기도 했다.

2020년 11월 3일에는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2022년 11월 28일 오전 8시 20분, 폐렴으로 오사카부 모리구치시의 한 병원에서 향년 83세로 사망했다. 사망 당일 종삼위에 추서되었다.

3. 나카무라 개혁

2000년 6월 마쓰시타 전기산업(현 파나소닉)의 사장으로 취임한 나카무라 구니오는 '''"파괴와 창조"'''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대적인 구조 개혁을 시작했다. 그의 사장 취임과 함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손자인 마쓰시타 마사유키 부사장이 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마쓰시타 가문에 의한 세습 경영은 사실상 막을 내린 것으로 평가된다. 나카무라는 2008년 10월 사명을 "파나소닉 주식회사"로 변경하는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회장으로 물러난 후에는 2007년부터 게이단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재계 활동에도 참여했다.

3. 1. 주요 개혁 내용

2000년 6월 마쓰시타 전기산업 사장으로 취임한 나카무라는 '''"파괴와 창조"'''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구조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창업주 시대로부터 이어진 경영 방식에 과감히 도전하며 "'''구래의 고노스케 신화를 깬 남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 2001년 4월, 국내 가전 영업 체제를 개혁하며 마쓰시타 전기 역사상 처음으로 '마케팅' 명칭을 사용한 '파나소닉 마케팅 본부'와 '내셔널 마케팅 본부'를 도쿄에 설치했다. 이는 정보 집적지인 도쿄를 중심으로 마케팅 역량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같은 시기, 과거 필립스와의 합작 회사였던 마쓰시타 전자공업 주식회사를 흡수 합병했다.
  • 2003년에는 주식 교환 방식을 통해 '마쓰시타 통신공업 주식회사', '큐슈 마쓰시타 전기 주식회사', '마쓰시타 수명 전자공업 주식회사', '마쓰시타 정공 주식회사', 그리고 비상장 회사인 '마쓰시타 전송 시스템 주식회사' 등 5개사를 완전 자회사로 편입했다. 이후 이들 회사는 사업 분야별로 분할되거나 통합되었으며(예: 마쓰시타 통신공업은 파나소닉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즈 등으로 분할, 큐슈 마쓰시타 전기 등은 파나소닉 커뮤니케이션즈로 통합), 사명 변경(예: 마쓰시타 정공은 파나소닉 에코시스템즈로 변경) 등을 통해 중복 사업을 정리하고 효율성을 높였다.
  • 2002년 9월에는 그룹의 정보 발신 거점 역할을 할 도쿄도 고토구 아리아케 지역에 '파나소닉 센터'(현 파나소닉 센터 도쿄)를 설립했다.
  • 2003년 4월 1일에는 창업주가 구축한 계열점 제도를 대폭 수정했다. 기존의 모든 파나소닉 숍(구 내셔널 숍)을 일률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판매 증진 의지가 있는 우수 매장을 선별하여 집중 지원하는 '슈퍼 프로 숍(SPS)' 제도를 도입했다.[15] 같은 해 5월, 글로벌 브랜드를 "Panasonic"으로 통일하고 브랜드 슬로건으로 "Panasonic ideas for life"를 채택하며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다만, 'National' 브랜드는 당분간 일본 내수용으로 유지되었다.
  • 2004년 4월에는 오랫동안 경쟁 관계에 있던 마쓰시타 전공 주식회사를 TOB를 통해 연결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마쓰시타 전공은 이후 2011년 파나소닉의 완전 자회사가 되었고, 2012년 1월 파나소닉에 흡수 합병되어 해산했다.
  • 2006년 8월에는 일본 내 어린이들의 이과 기피 현상 심화와 그로 인한 기술 강국 일본으로서 산업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여, 과학기술의 즐거움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파나소닉 센터 도쿄' 내에 체험형 박물관 '리스피아'를 개설했다.


그러나 나카무라 사장의 '성역 없는 개혁'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특히 텔레비전 사업 분야에서는 삼성전자 등 해외 기업과의 경쟁 심화 및 지상파 디지털 방송 전환 완료로 인한 수요 감소 예측에도 불구하고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지속했다.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 건설된 대규모 플라즈마 공장 등은 막대한 설비 투자 부담으로 작용했으며,[16] 이는 결과적으로 연구 개발비 축소와 기술 경쟁력 약화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있다. 2011년 10월, 결산 발표 자리에서 뒤늦게 아마가사키 플라즈마 공장 대폭 축소 등 TV 사업 구조조정이 발표되었지만, 이미 대규모 적자가 예상되던 상황에서 구조조정 비용까지 더해져 파나소닉은 창사 이래 최대인 7.2조 규모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러한 경영 실적 악화는 차기 경영진에게 부담을 넘겼다는 평가와 함께, 그의 개혁 노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어졌으며, 사장 및 회장 시절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임원을 배제하여 주변이 예스맨으로 채워진 것이 이러한 경영 악화의 한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17][18]

3. 2. 개혁의 명암

2000년 6월 마쓰시타 전기산업(현 파나소닉)의 사장으로 취임한 나카무라 구니오는 '''"파괴와 창조"'''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성역 없는 구조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경영 방식에서 벗어나 회사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주요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

  • 2001년 4월, 국내 가전 영업 체제 개혁에 이어 창사 이래 처음으로 조직명에 "마케팅"을 사용한 "파나소닉 마케팅 본부"와 "내셔널 마케팅 본부"를 도쿄에 설치했다. 같은 시기 필립스와의 합작 회사였던 마쓰시타 전자공업을 흡수 합병했다.
  • 2002년부터 2003년에 걸쳐 마쓰시타 통신공업, 큐슈 마쓰시타 전기 등 5개 자회사를 주식 교환 방식으로 완전 자회사화하고, 이후 사업 부문별로 분할·통합하여 중복 사업의 효율화를 꾀했다.
  • 2002년 9월, 도쿄도 고토구 아리아케에 그룹의 종합 정보 발신 거점인 "파나소닉 센터 도쿄"를 설립했다.
  • 2003년 4월 1일,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구축한 계열점 제도를 대폭 수정하여, 모든 파나소닉 숍을 일률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매출 증대 의욕이 있는 점포를 선별하여 판촉 지원하는 '''"슈퍼 프로 숍(SPS)"''' 제도를 도입했다.[15] 같은 해 5월에는 글로벌 브랜드를 "Panasonic"으로 통일하고, 브랜드 슬로건을 "Panasonic ideas for life"로 정했다.
  • 2004년 4월, 오랫동안 경쟁 관계에 있던 마쓰시타 전공을 TOB를 통해 연결 자회사화했으며, 이는 훗날 완전 자회사화 및 흡수 합병으로 이어졌다.
  • 2006년 8월, 어린이들의 이과 기피 현상과 일본 제조업의 미래에 대한 위기감 속에서 과학기술의 즐거움을 알리기 위해 파나소닉 센터 도쿄 내에 "리스피아"를 설립했다.


그러나 나카무라의 개혁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성역 없는 구조 개혁"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 등과의 경쟁이 심화되고 지상파 디지털 방송 전환 완료로 수요 감소가 예상되던 텔레비전 사업에 대해서는 "부가 가치로 경쟁력 확보가 가능하다"며 장기간 개혁을 미뤘다. 오히려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 대규모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공장을 신설하는 등 과도한 설비 투자를 단행했다.[16] 이 과정에서 상품 개발 및 개량에 필요한 연구비까지 설비 투자로 돌려 기술자가 대량 유출되고 기술력 후퇴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결국 2011년 10월, 아마가사키 플라즈마 공장의 대폭 축소 등 뒤늦은 구조 개혁안이 발표되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구조 개혁 비용까지 더해지면서 2012년 3월기 결산에서 파나소닉은 창업 이래 최대인 7200억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개혁 첫 해였던 2001년 3월기의 적자액을 크게 웃도는 수치였다. 나카무라는 실적 회복을 차기 경영진에게 넘기고 상담역으로 물러났다. 사장 및 회장 재임 시절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임원을 배제하여 주변이 예스맨으로 채워진 것이 이러한 경영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17]

파나소닉은 2012년부터 2년 연속으로 총 1.5조에 달하는 최종 적자를 기록했으며, 이로 인해 나카무라 구니오는 일부로부터 "전범 중의 전범", "인간으로서 타락한 경영자"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18]

4. 평가 및 비판

나카무라 구니오는 마쓰시타 전기산업(현 파나소닉)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려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생존 시부터 회사명 변경을 제안했을 정도로 기존 체제에 도전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2008년 회사명을 "파나소닉 주식회사"로 변경하는 기반을 마련하여 "구래의 고노스케 신화를 깬 남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2000년 사장 취임 후에는 "파괴와 창조"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성역 없는 구조 개혁을 추진했다. 국내 가전 영업 체제 개혁, 마케팅 본부 신설 및 도쿄 이전, 자회사 흡수 합병 및 주식 교환을 통한 완전 자회사화, 글로벌 브랜드를 'Panasonic'으로 통일, 파나소닉 전공 자회사화 및 흡수 합병 등 사업 구조 재편과 효율화에 힘썼다.[15]

그러나 그의 경영 방식과 결과에 대한 비판도 상당하다. 특히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과의 경쟁이 심화되고 지상파 디지털 방송 전환 완료로 수요 감소가 예상되었음에도, 텔레비전 사업, 특히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사업에 대한 설비 투자를 과도하게 진행했다는 지적이 있다.[16]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 건설한 대규모 플라즈마 공장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러한 과잉 투자는 상품 개발 및 개량에 필요한 연구비를 잠식했고, 이는 기술자의 대량 유출과 기술력 후퇴를 초래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16]

결국 텔레비전 사업의 구조 개혁은 뒤늦게 발표되었고, 2012년 3월기 결산에서는 구조 개혁 비용까지 더해져 파나소닉 창업 이래 최대인 7200억의 적자를 기록했다.[16] 나카무라는 실적 회복의 과제를 다음 경영진에게 넘기고 상담역으로 물러났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사장, 회장 시절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임원을 배제하고 주변을 예스맨으로 채운 것이 회사의 쇠퇴를 심화시킨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17] 파나소닉이 2012년부터 2년 연속 총 1.5조에 달하는 최종 적자를 기록하자, 일부에서는 나카무라를 "전범 중의 전범", "인간으로서 타락한 경영자"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18] 계열점 제도 개혁 당시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구축한 공존공영 원칙을 뒤집고, 매출 증대 의욕이 있는 점포만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슈퍼 프로 숍' 제도를 도입한 것[15] 역시 성과주의적 경영 방식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5. 저서


  • 모리 카즈오. 나카무라 쿠니오 「코노스케 신화」를 무너뜨린 남자. 닛케이 비즈니스 문고. 닛케이 BP 마케팅. 2006년 10월 1일.
  • '''나카무라 구니오''', 마쓰시타 정경숙, PHP 연구소 (편집). 앞으로의 리더가 알아두면 좋을 것. PHP 연구소. 2011년 8월 24일.

참조

[1] 웹사이트 Nakamura, Kunio 1939– {{!}} Encyclopedia.com https://www.encyclop[...] 2020-08-28
[2] 웹사이트 Nakamura Kunio https://www.bloomber[...]
[3] 뉴스 Matsushita appoints Kunio Nakamura as new president - https://www.eetimes.[...] EETimes 2000-04-27
[4] 뉴스 침몰하는 파나소닉…리틀 경영의 神 독재 'PDP 재앙'을 부르다 http://www.hankyung.[...] Korea Economy (newspaper)
[5] 뉴스 中村邦夫氏死去、83歳 元松下電器社長、難局に改革断行 https://www.jiji.com[...] Jiji 2022-11-30
[6] 뉴스 続投が「ニュースになってしまった」パナソニック・津賀社長が迎える正念場 https://www.j-cast.c[...] Jキャストニュース 2020-03-09
[7] 문서 「パナソニックにおけるプラズマテレビ事業の失敗に関する研究」 http://www2.econ.osa[...] 大阪大学
[8] 문서 「社員も知らないパナソニック-1 創業4代目がぶつかる“国内弁慶企業”の壁」 http://www.mynewsjap[...]
[9] 웹사이트 NHK https://web.archive.[...]
[10] 웹사이트 産経 https://www.sankei.c[...]
[11] 웹사이트 松下電器産業元社長の中村邦夫氏が死去 https://www.nikkei.c[...] 2022-11-30
[12] 간행물 『官報』第891号9頁 令和5年1月6日
[13] 뉴스 秋の叙勲4100人 旭日大綬章に仲井真元沖縄知事ら https://www.nikkei.c[...] 日経電子版 2020-11-03
[14] 간행물 『官報』号外第230号、令和2年11月4日
[15] 문서
[16] 뉴스 巨艦パナソニック、幸之助の影と戦った中村改革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7-10-21
[17] 뉴스 「家電の王様」テレビでの凋落 イエスマンだらけの採用が仇に https://web.archive.[...] msn産経ニュース 2013-01-25
[18] 뉴스 人間として劣化した経営者が後を絶たない電機業界の悲劇 https://gendai.media[...] 2013-06-11
[19] 뉴스 침몰하는 파나소닉…리틀 경영의 神 독재 'PDP 재앙'을 부르다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