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남양 전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남양 전씨는 고려 왕족의 후손인 전주를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조선 개국 후 왕씨 탄압으로 인해 시조의 손자 전흥이 공을 세워 사성받고 남양을 본관으로 삼아 시작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전흥, 전우치 등이 있으며, 조선 시대에 많은 문과 및 무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또한, 남양 전씨 종중 문서 일괄은 보물 제7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시대의 가족 제도, 상속 제도, 사회 경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남양 전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성씨남양 전씨
南陽田氏
관향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시조전주(田柱)
원시조왕건(王建)
중시조전흥(田興)
집성촌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
충청남도 부여군 양화면 시음리
충청남도 청양군 청남면 인양리
인구 (2000년)4,660명
순위 (2000년)551위

2. 역사

남양 전씨는 고려 왕족 출신인 전주(田柱)가 시조이나, 조선 개국 후 왕씨 탄압으로 유배되어 사망했다. 그의 손자 전흥(田興)은 조선 태종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워 정사좌명원종공신(定社佐命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올라 남양 전씨의 기틀을 마련했다.[1]

2. 1. 시조 및 유래

시조 '''전주'''(田柱)는 고려 왕족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의 아들로 본래 이름은 왕강(王康)이었다. 조선 개국과 동시에 시작된 왕씨(王氏) 탄압에 따라 그는 공주목(公州牧)의 일신역(馹新驛)에 유배되었다가 1394년(태조 3)에 참사를 당하였다.[1]

전주의 손자 전흥(田興) 또한 조선 태종 이방원(李芳遠)에게 억류되어 있었으나, 그의 능력을 높이 산 이방원이 1, 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공을 인정받아 태종은 그에게 전흥이라는 사성명(賜姓名)과 정사좌명원종공신(定社佐命原從功臣)에 책록하였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올라 남양 전씨의 기틀이 되었다. 그 후 조부인 전주가 강령부승(江寧府丞)을 지낸 연유로 지명을 따서 남양을 본관으로 하고 전흥을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1]

2. 2. 개성 왕씨에서 변성

개성 왕씨는 종모성(從母姓)하라는 왕명에 따라 어머니 성을 따른 이가 많았고, 옥(玉), 전(全), 전(田) 등으로 성이 변성되었다.

3. 주요 인물

'''남양 전씨'''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생몰년주요 경력 및 활동비고
전득우(田得雨)생몰년 미상한성부윤(漢城府尹) (추증)묘소: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5호
전흥(田興)1376년 ~ 1457년왕자의 난 공신, 형조참판(刑曹叅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 역임, 시호 경호(敬胡)태종과 세종의 측근
전가생(田稼生)생몰년 미상홍문관 부제학(副堤學), 공주목사(公州牧使) 역임명나라 사신
전조생(田稠生)생몰년 미상승문원 제조(承文院 提調) 역임명나라 사신
전지(田漬)생몰년 미상부사직(副司直) 역임
전림(田霖)생몰년 미상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역임, 시호 위절(威節)청백리(淸白吏)
전우평(田禹平)생몰년 미상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 역임
전우치(田禹治)생몰년 미상전우치전 주인공, 기묘사화(己卯士禍) 연루충청남도 기념물 제152호 은행나무 관련
전화(田華)생몰년 미상석성향교훈도(石城鄕校訓導) 역임
전경업(田敬業)생몰년 미상공조정랑(工曹正郞) (추증)
전홍업(田洪業)생몰년 미상예조좌랑(禮曹佐郞) 역임
전탄(田坦)1548년 ~ ?사재감 주부(司宰監 主簿) 역임
전돈(田墩)1550년 ~ 1630년부호군(副護軍) (추증)
전석규(田錫圭)1577년 ~ 1669년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석성향교 신주(神主) 구함, 김장생(金長生) 문하, 한호정사(閒湖精舍) 건립
전석형(田錫珩)1594년 ~ ?장사랑(將仕郞)
전석우(田錫瑀)? ~ 1706년군자감(軍資監) 감정(監正) 역임
전해(田瀣)1600년 ~ 1671년김집(金集) 문인, 용궁현감(龍宮縣監) 역임
전항(田沆)1602년 ~ ?효행
전택(田澤)1678년 ~ ?부호군(副護軍) 역임
전유성(田有成)1628년 ~ 1706년승사랑(承仕郞)
전일성(田一成)1632년 ~ 1694년윤선거(尹宣擧) 문하
전시성(田始成)1634년 ~ ?형제 4인 모두 통덕랑(通德郞)
전수원(田遂元)1704년 ~ 1756년생원시(生員試) 합격
전수형(田遂亨)1708년 ~ ?생원시(生員試) 합격
전필효(田必孝)1788년 ~ ?남양 전씨 족보 편찬 주관
전조(田鉏)1787년 ~ 1860년남양 전씨 족보 편찬 주관, 송내희(宋來熙) 서문
전상윤(田尙倫)1784년 ~ 1844년호조참판(戶曹叅判) (추증)
전상규(田尙圭)1844년 ~ 1893년승정원 승지(承旨) (추증)
전한대(田漢大)1779년 ~ 1836년호조참판(戶曹叅判) (추증)
전한구(田漢龜)1814년 ~ 1885년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 (추증)
전한범(田漢範)1827년 ~ 1867년호조참판(戶曹叅判) (추증)
전채룡(田采龍)1805년 ~ 1848년승정원 승지(承旨) (추증)
전채진(田采辰)1776년 ~ 1841년호조참판(戶曹叅判) (추증)
전한부(田漢富)1827년 ~ 1867년승정원 승지(承旨) (추증)
전만성(田晩成)1641년 ~ ?효자
전보성(田甫成)1645년 ~ ?효자
전수성(田守成)1648년 ~ ?효자
전동영(田東榮)1829년 ~ 1868년승정원 승지(承旨) (추증)
전동일(田東一)1843년 ~ 1896년호조참판(戶曹叅判) (추증)
전영환(田榮煥)1831년 ~ 1899년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역임
전장환(田章煥)1852년 ~ 1891년무과(武科) 급제
전동기(田東箕)1861년 ~ 1915년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역임
전세환(田世煥)1850년 ~ 1919년김지수(金志洙)와 교류
전창환(田昶煥)1846년 ~ ?참봉(叅奉) 역임
전승환(田昇煥)1877년 ~ 1955년남양 전씨 족보 편찬 참여
전지환(田芝煥)1865년 ~ 1934년참봉(叅奉) 역임
전창환(田昌煥)1866년 ~ 1932년비서감(秘書監) 역임
전인환(田璘煥)1865년 ~ 1933년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역임
전문환(田文煥)1847년 ~ 1916년참봉(叅奉) 역임
전창환(田彰煥)1864년 ~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역임
전기봉(田基鳳)1866년 ~ 1908년무과(武科) 급제
전기웅(田基雄)1891년 ~ 1954년오영선(吳榮善) 문인, 훈장(訓長)
전기옥(田基玉)1888년 ~ 1982년참봉(叅奉) 역임
전기순(田基順)1865년 ~ 1942년참봉(叅奉) 역임
전기욱(田基郁)1881년 ~ 1942년참봉(叅奉) 역임
전기로(田基魯)1885년 ~ 1966년문묘직원(文廟直員) 역임


3. 1. 조선 전기

전주(田柱)는 고려 왕족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의 아들로, 본래 이름은 왕강(王康)이었다. 조선 건국 후 왕씨(王氏) 탄압으로 공주목(公州牧)의 일신역(馹新驛)에 유배되었다가 1394년(태조 3)에 죽임을 당했다.[1]

전주의 손자 전흥(田興)은 조선 태종 이방원(李芳遠)에게 억류되었으나, 1, 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공으로 태종은 전흥에게 정사좌명원종공신(定社佐命原從功臣)을 내리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하여 남양 전씨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전주는 강령부승(江寧府丞)을 지낸 연유로 남양을 본관으로 하고, 전흥을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1]

전득우(田得雨)는 전흥이 1411년 정사좌명원종공신(定社佐命元從功臣)에 책록됨에 따라 간선대부 한성부윤(嘉善大夫 漢城府尹)에 추증(贈職)되었다. 묘계(墓界)에 설치된 하사비(下賜碑) 등은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전흥(田興, 1376년~1457년)은 1, 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1411년 정사좌명원종 1등공신으로 책록되었다. 1410년 태종의 명으로 북벌(北伐) 장수들을 위로하였고, 1412년에는 경상도 부산포(富山浦)에 정박 중인 왜선(倭船)의 동태를 보고하였다. 1416년 민무구(閔無咎) 등을 옹호했다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샀으나, 같은 해 형조참의에 임명되었고, 1418년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 재임 시 태종과 세종의 측근 신하가 되어 국문(鞠問) 등을 진행했다. 1430년(세종 12) 원주목사(原州牧使), 1434년 홍주목사(洪州牧使)를 거쳐 형조참판(刑曹叅判)에 올랐으며, 가정대부 경창부윤(嘉靖大夫 慶昌府尹)으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明)나라를 다녀와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35년(세종 17)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임명되었고, 1439년(세종 21) 중추원사에 재임되었다. 1457년(세조 3) 82세로 타계하여 시호(諡號) 경호(敬胡)가 내려졌다.

전가생(田稼生)은 전흥(田興)의 장남으로, 1434년 알성시(謁聖試)에 급제, 1436년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1454년 양녕대군(讓寧大君) 등이 온천에 가는 것을 중지하도록 간(諫)하였다. 1455년 좌익원종2등공신(佐翼原從二等功臣)에 책록,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堤學)에 임명되었고, 1463년(세조 9)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온 후 공주목사(公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전조생(田稠生)은 전흥(田興)의 차남으로, 1434년(세종 16) 형 전가생(田稼生)과 함께 알성시(謁聖試)에 급제, 1454년(단종 2) 공물(貢物) 감면안(減免案)을 시행토록 하였다. 좌익원종 2등공신(佐翼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 1461년 전라우도에 파견되어 호적과 군적(軍籍)을 개선하였고, 1462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1467년 승문원 제조(承文院 提調)로 있었다.

전지(田漬)는 전흥(田興)의 장손, 전가생(田稼生)의 장남으로, 1505년(연산군 11)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전림(田霖)은 전흥(田興)의 손자, 전조생(田稠生)의 아들로, 무과(武科)에 급제, 1486년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가 되었다. 이후 전라우도 수군절제사(全羅右道 水軍節制使) 등을 역임하였다. 1500년 해랑도 초무사(海浪島 招撫使)가 되어 해랑도를 평정,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이 되었고, 1506년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이 되었다. 1509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졸(卒)하였다. 중종(中宗)은 청백리(淸白吏)였던 그에게 위절(威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전우평(田禹平)은 전가생(田稼生)의 손자, 전지(田漬)의 장남으로, 1515년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을 역임하였다.

전우치(田禹治)는 전가생(田稼生)의 손자, 전지(田漬)의 4남으로, 전우치전의 주인공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산속에 은둔하며 도술을 익혔다. 도술로 빈민을 구제했으나,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로 옥사(獄死)했다고 전한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52호 은행나무는 전우치가 꽂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고 한다.

전화(田華)는 전흥(田興)의 4대손, 전우평(田禹平)의 장남으로, 1546년(명종 1) 석성향교훈도(石城鄕校訓導)를 역임하였다.

전경업(田敬業)은 전흥(田興)의 5대손, 전화(田華)의 장남으로, 공조정랑(工曹正郞)에 추증되었다.

전홍업(田洪業)은 전흥(田興)의 5대손, 전화(田華)의 차남으로,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전탄(田坦, 1548년~?)은 전흥(田興)의 6대손, 전경업(田敬業)의 장남이다.

전돈(田墩, 1550년~1630년)은 전흥(田興)의 6대손, 전경업(田敬業)의 차남으로, 부호군(副護軍)으로 추증되었다.

전석규(田錫圭, 1577년~1669년)는 전흥(田興)의 7대손, 전돈(田墩)의 장남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석성 성묘(石城 聖廟)에서 신주(神主)를 구했다.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수학, 한호정사(閒湖精舍)를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다.

전석형(田錫珩, 1594년~?)은 전흥(田興)의 7대손, 전돈(田墩)의 차남이다.

전석우(田錫瑀, ?~1706년)는 전흥(田興)의 7대손, 전우성(田禹成)의 4대손으로, 군자감(軍資監)의 감정(監正)을 역임하였다.

전해(田瀣, 1600년~1671년)는 전흥(田興)의 8대손, 전석규(田錫圭)의 장남으로, 1624년(인조 2) 김집(金集)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1656년(효종 7)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부임, 1657년 노부 봉양(老父奉養)을 위해 사퇴하였다.

전항(田沆, 1602년~?)은 전흥(田興)의 8대손, 전석규(田錫圭)의 차남으로, 효행으로 칭찬받았다.

전택(田澤, 1678년~?)은 전흥(田興)의 8대손, 전경업(田敬業)의 증손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전유성(田有成, 1628년~1706년)은 승사랑(承仕郞)에 임명되었다.

전일성(田一成, 1632년~1694년)은 전해(田瀣)의 차남으로, 윤선거(尹宣擧)에게서 수학하였다.

전시성(田始成, 1634년~?)은 전항(田沆)의 장남으로, 형제 4인 모두 통덕랑(通德郞)에 임명되었다.

전수원(田遂元, 1704년~1756년)은 전해(田瀣)의 3대손으로, 1740년 동생 전수형(田遂亨)과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하지 않았다.

전수형(田遂亨, 1708년~?)은 전해(田瀣)의 3대손으로, 1740년 형 전수원(田遂元)과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다.

전필효(田必孝, 1788년~?)는 전해(田瀣)의 4대손, 전수원(田遂元)의 장남으로, 1774년(영조 50) 남양 전씨 족보 편찬을 주관하였다.

전조(田鉏, 1787년~1860년)는 전항(田沆)의 4대손으로, 1852년 족보 편찬을 주관, 송내희(宋來熙)에게서 서문을 받았다.

전상윤(田尙倫, 1784년~1844년)은 전항(田沆)의 3대손으로, 호조참판(戶曹叅判)에 추증되었다.

전상규(田尙圭, 1844년~1893년)는 전우성(田禹成)의 9대손으로,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로 추증되었다.

전한대(田漢大, 1779년~1836년)는 전항(田沆)의 5대손으로, 호조참판(戶曹叅判)에 추증되었고, 아들 전채룡(田菜龍)은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 손자 전창환(田昶煥)은 참봉(叅奉)으로 추증되었다.

전한구(田漢龜, 1814년~1885년)는 전항(田沆)의 5대 손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로 추증되었다.

전한범(田漢範, 1827년~1867년)은 전석형(田錫珩)의 6대손으로, 호조참판(戶曹叅判)에 추증되었다.

전채룡(田采龍, 1805년~1848년)은 전항(田沆)의 5대손, 전한대(田漢大)의 장남으로, 승정원 승지로 추증되었다.

전채진(田采辰, 1776년~1841년)은 전항(田沆)의 6대손, 전한구(田漢龜)의 장남으로, 호조참판(戶曹叅判)으로 추증되었다.

전한부(田漢富, 1827년~1867년)는 전항(田沆)의 5대손으로,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로 추증되었다.

전만성(田晩成, 1641년~?), 전보성(田甫成, 1645년~?), 전수성(田守成, 1648년~?)은 전석형(田錫珩)의 손자 3형제로, 효자였다.

전동영(田東榮, 1829년~1868년)은 전석형(田錫珩)의 6대손 전한범(田漢範)의 아들로,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로 추증되었다.

전동일(田東一, 1843년~1896년)은 전우성(田禹成)의 11대손으로, 호조참판(戶曹叅判)으로 추증되었다.

전영환(田榮煥, 1831년~1899년)은 전해(田瀣)의 7대손으로,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전장환(田章煥, 1852년~1891년)은 전항(田沆)의 7대손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전동기(田東箕, 1861년~1915년)는 전우성(田禹成)의 11대손으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등을 역임하였다.

전세환(田世煥, 1850년~1919년)은 전해(田瀣)의 7대손으로, 김지수(金志洙)와 교류하였다.

전창환(田昶煥, 1846년~?)은 전항(田沆)의 7대손으로, 참봉(叅奉)을 역임하였다.

전승환(田昇煥, 1877년~1955년)은 전항(田沆)의 7대손으로, 족보 편찬에 참여하였다.

전지환(田芝煥, 1865년~1934년)은 전항(田沆)의 7대손으로, 참봉(叅奉)을 지냈다.

전창환(田昌煥, 1866년~1932년)은 전항(田沆)의 7대손으로, 비서감(秘書監)을 지냈다.

전인환(田璘煥, 1865년~1933년)은 전석형(田錫珩)의 8대손으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하였다.

전문환(田文煥, 1847년~1916년)은 전석형(田錫珩)의 8대손으로, 참봉(叅奉)을 역임하였다.

전창환(田彰煥, 1864년~?)은 전석형(田錫珩)의 8대손으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전기봉(田基鳳, 1866년~1908년)은 전해(田瀣)의 8대손, 전영환(田榮煥)의 차남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전기웅(田基雄, 1891년~1954년)은 전해(田瀣)의 8대손으로, 오영선(吳榮善)의 문인이 되어 훈장(訓長)으로 활동하였다.

전기옥(田基玉, 1888년~1982년)은 전항(田沆)의 8대손으로, 참봉(叅奉)을 역임하였다.

전기순(田基順, 1865년~1942년)은 전항(田沆)의 8대손으로, 참봉(叅奉)을 지냈다.

전기욱(田基郁, 1881년~1942년)은 전석형(田錫珩)의 9대손으로, 참봉(叅奉)을 지냈다.

전기로(田基魯, 1885년~1966년)는 전석형(田錫珩)의 9대손으로, 문묘직원(文廟直員)을 지냈다.

3. 2. 조선 중기 ~ 후기

전흥(田興, 1376년 ~ 1457년)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시호는 경호(敬胡)이다. 1398년(태조 7년) 제1,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워 1411년(태종 11년) 정사 좌명원종1등공신(定社佐命元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1] 이후 태종과 세종 대에 걸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왕의 측근에서 활동했다. 1439년(세종 21년)에는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재임되어 초헌(軺軒)을 타는 원로 훈신(元老勳臣)이 되었다. 1457년(세조 3년) 82세로 사망하여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고 예장(禮葬)으로 장례를 치렀다.[1]

전가생(田稼生)은 전흥의 장남으로, 1434년(세종 16년) 생원으로서 알성시 을과(乙科)에 급제하고, 1436년(세종 18년) 중시(重試) 을과 2등으로 합격하였다.[1] 1455년(세조 원년) 좌익원종2등공신(佐翼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堤學)에 임명되었고, 1463년(세조 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

전조생(田稠生)은 전흥의 차남으로, 1434년(세종 16년) 형 전가생과 함께 알성시 을과에 급제하였다.[1] 1454년(단종 2년) 호조정랑(戶曹正郞)으로 있으면서 공물(貢物) 감면안(減免案)을 작성 시행토록 하였고,[1] 교리(校理) 재직 시 좌익 원종 2등 공신(佐翼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다.[1] 1462년(세조 8년) 가선대부 인수부윤(嘉善大夫 仁壽府尹)으로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1]

전림(田霖)은 전흥의 손자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506년(중종 원년)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이 되었다.[1] 1509년(중종 4년) 병조참판(兵曹叅判)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졸(卒)하였다.[1] 공정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법을 집행하여 중종이 시호를 위절(威節)이라 내렸다.[1]

전우치(田禹治)는 전가생의 손자로, 전우치전의 주인공이다. 진사로서 문장과 시문에 뛰어났으나,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은둔 생활을 하던 중 도술을 얻어 빈민 구제에 나섰다고 전해진다.[1] 그의 시문은 해동이적과 지봉유설 등에 실려 있다.[1]

전석규(田錫圭, 1577년 ~ 1669년)는 전흥의 7대손으로, 자는 사수(士受), 호는 한호(閒湖)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석성 향교(石城 鄕校)의 신주(神主)를 화염 속에서 구해내고, 사재를 털어 서적을 구입하여 학궁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1] 1612년(광해군 4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대유(大儒)가 되었다.[1]

전해(田瀣, 1600년 ~ 1671년)는 전석규의 장남으로, 자는 원숙(元叔)이다. 1624년(인조 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김집의 문인이 되어 학문에 정진하였다.[1] 1650년(효종 1년) 목능참봉(穆陵叅奉)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1656년(효종 7년)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노부 봉양을 위해 사퇴하였다.[1]

전수원(田遂元, 1704년 ~ 1756년)은 전해의 3대손으로, 자는 사원(士元), 호는 모옥재(慕玉齋)이다. 1740년(영조 16년) 증광 생원시에 동생 전수형(田遂亨)과 함께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예(禮)에 힘썼다.[1]

전필효(田必孝, 1788년 ~ ?)는 전수원의 장남으로, 자는 백원(百源)이다. 학행과 문장을 겸비하여 1774년(영조 50년) 남양 전씨 최초의 족보인 갑오보(甲午譜) 편찬을 주관하고 발문(跋文)을 썼다.[1]

4. 남양전씨 종중 문서 일괄(南陽田氏 宗中 文書 一括)

남양 전씨 종중 문서 일괄(南陽田氏 宗中 文書 一括)은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문서류이다. 1981년 7월 1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727호로 지정되었고, 이 보물을 보존 관리하기 위하여 2004년 10월 충남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 서당 삼장산 중턱에 한옥단청의 고문서 보호각과 관리사를 국가에서 건립하였다.

남양 전씨 종중에 전해 내려온 문서들로 남양 전씨 6대에 걸친 왕지, 교지, 호적단자와 유서 등이다. 문서의 연대는 1416년(태종 16)에서 1565년(명종 20)까지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 전흥에게 태종이 내린 왕지 1건, 교지 1건
  • 전가생의 교지 2건
  • 전지의 교지 1건
  • 전우평의 교지 1건
  • 전화가 장자인 전경업에게 봉사조로 물려준 전답 및 노비를 나누어 준 기록 1건
  • 숙종 28년(1702)에 작성된 전유성의 호적단자 3장


왕지와 교지는 왕이 내리는 명령서로서 주로 관리 임명장을 뜻하며,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같고, 유서는 상속에 관한 서류이다. 조선 초기의 왕지는 세종 때에 이르러 교지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1416년의 왕지에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찍었으나, 교지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었다는 점이 다르다.[1]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1416년(태종 16) · 1417년의 왕지 2통, 1434년(세종 16) · 1463년(세조 9) · 1505년(연산군 11) · 1515년(중종 10)의 교지 5통, 1565년(명종 20)의 유서 1통 등 8통이 있다. 전흥이 받은 왕지와 교지 2통은 조선 초기 왕지와 교지 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조선 초기 태조와 정종 대에는 교지 대신 왕지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를 알려주는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1]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는 교지 16통, 준호구 3통이 있다. 교지는 1612년(광해군 4)에서 1668년(현종 9) 사이에 받은 것이며 그중 2통은 백패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능참봉고신과 산직고신이다. 준호구 3통은 모두 1700년대 초의 것이다.[1]

이 문서들은 8건 27매를 일괄하여 지정한 것으로, 조선 전기의 왕지와 교지의 문서 양식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1]

4. 1. 개요

남양 전씨 종중 문서 일괄(南陽田氏 宗中 文書 一括)은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에 있는 조선시대 문서들이다. 1981년 7월 1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727호로 지정되었으며, 이 보물을 보존 관리하기 위하여 2004년 10월 충남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 서당 삼장산 중턱에 한옥단청의 고문서 보호각과 관리사를 국가에서 건립하였다.

이 문서들은 남양 전씨 종중에 전해 내려온 문서들로, 남양 전씨 6대에 걸친 왕지, 교지, 호적단자, 유서 등이다. 문서의 연대는 1416년(태종 16)에서 1565년(명종 20)까지 해당한다.

임진왜란 이전의 왕지, 교지, 유서 등 8통과 임진왜란 이후의 교지 16통, 준호구 3통을 포함하여 총 8건 27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당시의 가족제도, 상속제도, 사회경제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특히 전흥이 받은 왕지와 교지 2통은 조선 초기 왕지와 교지 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565년 유서는 전화가 맏아들 전경업에게 봉사조로 전답과 노비를 내려주는 상속 내용을 담고 있어, 그 시대의 가족제도와 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4. 2. 주요 내용

남양 전씨 종중 문서 일괄(南陽田氏 宗中 文書 一括)은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문서들이다. 1981년 7월 1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727호로 지정되었고, 이 보물을 소장하고 보존 관리하기 위하여 2004년 10월 충남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 서당 삼장산 중턱에 한옥단청의 고문서 보호각과 관리사를 국가에서 건립하였다.[1]

남양 전씨 종중 문서 일괄은 남양 전씨 종중에 전해 내려온 문서들로, 남양 전씨 6대에 걸친 왕지, 교지, 호적단자, 유서 등이다.[1]

문서의 연대는 태종 16년(1416)에서 명종 20년(1565)까지이다. 전흥에게 태종이 내린 왕지 1건, 교지 1건, 전가생의 교지 2건, 전지의 교지 1건, 전우평의 교지 1건, 그리고 전화가 장자인 전경업에게 봉사조로 물려준 전답 및 노비를 나누어 준 기록 등 8건이 있다. 호적단자는 숙종 28년(1702)에 작성된 전유성의 것 3장이다.[1]

왕지와 교지는 왕이 내리는 명령서로서 주로 관리 임명장을 뜻하며,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같고, 유서는 상속에 관한 서류이다. 조선 초기의 왕지는 세종 때에 이르러 교지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1416년의 왕지에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찍었으나, 교지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었다는 점이 다르다.[1]

남양 전씨 종중 문서 중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1416년(태종 16) · 1417년의 왕지 2통, 1434년(세종 16) · 1463년(세조 9) · 1505년(연산군 11) · 1515년(중종 10)의 교지 5통, 1565년(명종 20)의 유서 1통 등 8통이 있다. 전흥이 받은 왕지와 교지 2통은 조선 초기 왕지와 교지 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조선 초기 태조와 정종 대에는 교지 대신 왕지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를 알려주는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 1565년의 유서는 전화가 맏아들 전경업에게 봉사조로 전답과 노비를 내려주는 상속 내용을 담고 있어, 그 시대의 가족제도와 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1]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는 교지 16통, 준호구 3통이 있다. 교지는 1612년(광해군 4)에서 1668년(현종 9) 사이에 받은 것이며, 그중 2통은 백패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능참봉고신과 산직고신이다. 준호구 3통은 모두 1700년대 초의 것이다.[1]

이 문서들은 8건 27매를 일괄하여 지정한 것으로, 왕지 및 교지 2건은 조선 전기의 왕지와 교지의 문서 양식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1]

이처럼 한 가문의 종중 문서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일 뿐만 아니라, 이 문서들은 당시의 가족제도와 상속제도, 사회경제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1]

4. 3. 가치 및 의의

남양 전씨 종중 문서 일괄은 조선시대의 문서들로, 1981년 7월 15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727호로 지정되었다.[1] 이 문서들은 남양 전씨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왕지, 교지, 호적단자, 유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1]

이 문서들은 조선 초기(1416년)부터 명종(1565년) 대까지 6대에 걸친 문서들과, 임진왜란 이후(1612년~1700년대 초)의 문서들로 나뉜다. 특히 전흥이 받은 왕지와 교지는 조선 초기 왕지와 교지 양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예를 들어, 1416년 왕지에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사용했지만, 이후 교지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사용했다는 점이 다르다.[1]

1565년의 유서는 전화가 맏아들 전경업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가족제도와 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1]

이처럼 한 가문의 문서가 오랜 기간 동안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며, 이 문서들은 당시의 가족제도, 상속제도, 사회경제 상황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1]

5. 대표적인 과거 급제자

대표적인 과거 급제자[1]
이름급제 이력 및 주요 관직
전흥1398년(태조 7년) 절제사 이방원 군영의 도진무, 1, 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움. 1411년 정사 좌명원종1등공신 책록, 원종공신전 및 록권 하사. 대호군, 중군호군, 순금사 대호군, 의금부 진무, 통정대부 형조참의, 의금부제조, 원주목사, 홍주목사, 형조참판, 가정대부 경창부윤, 하정사(명나라), 중추원사, 판한성부사 역임. 1457년(세조 3년) 타계 후 경호(敬胡) 시호.
전가생1434년 생원으로 알성방 을과 급제, 경복제공, 1436년 중시을과 2등. 1441년 조산대부 사섬시 주부, 1445년 사재감주부, 1454년 사헌부장령 역임. 1455년 한성소윤, 좌익원종2등공신 책록,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1463년 사은사(명나라), 공주진 병마절제사 겸 공주목사 겸 권농사 역임.
전조생1434년(세종 16년) 형 전가생과 함께 알성방을과 급제. 1454년(단종 2년) 호조정랑. 교리직, 좌익 원종 2등 공신 책록. 1456년(세조 2년) 봉렬대부 장령, 1461년 판승문원사, 1462년 가선대부 인수부윤, 사은사(명나라), 1463년 청주목사, 1467년 승문원 제조 역임.
전지1505년(연산군 11년) 충순위 어모장군, 부사직 역임.
전림무과 급제, 포도부장, 1482년 전주판관, 1485년 훈련원 판관, 1486년 통정대부 경원도호부사 역임. 전라우도 수군절제사, 첨지중추부사, 온성부사, 회녕부사, 가선대부, 상호군, 순변사, 조전절제사, 1500년 해랑도 초무사, 한성부 좌윤, 1505년 사은사(명나라), 1506년 한성부 판윤, 1508년 포도대장, 1509년 병조참판, 지중추부사 역임. 중종으로부터 위절(威節) 시호.
전우평1515년 충순위 보공장군, 충무위부사직 역임.
전우치진사, 문장과 시문에 뛰어남.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 연루, 산신으로부터 비서를 얻어 도술가. 빈민구제 활동, 혹세무민 죄로 신천옥에서 옥사.
전화1546년(명종 1년) 성균진사시 합격, 석성향교훈도 역임.
전경업성균진사, 통선랑 공조정랑 증직.
전홍업성균진사, 예조좌랑 역임.
전탄승의랑사재감 주부직.
전돈가선대부 부호군 증직.
전석규1612년(광해군 4년) 진사사마방.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발발 시 석성 성묘에서 신주를 모심.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 한호정사 건립, 후학 양성. 1665년(현종 6년) 통정대부, 1666년(현종 7년)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제수.
전석형장사랑 제수.
전석우통정대부 행군자감 감정 역임.
전해1624년(인조 2년) 생원사마방. 김집 문인. 1650년(효종 1년) 목능참봉,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1656년(효종 7년) 용궁현감 역임.
전항장사랑 제수.
전택부호군 역임.
전유성1651년(효종 2년) 장사랑, 1655년(효종 6년) 승사랑 제수.
전일성윤선거에게서 수학.
전시성통덕랑 제수.
전수원1740년 증광생원시 합격.
전수형1740년 증광생원시 합격.
전필효1774년(영조 50년) 남양 전씨 창간 갑오보 편찬 주관.
전조1852년 2간 임자보 편찬 주관, 송내희에게 서문 받음.
전상윤중추부사 겸 호조참판 증직.
전상규승정원 승지 증직.
전한대1904년(고종 41년) 중추부사호조참판 증직.
전한구승정원 좌승지 증직.
전한범중추부사호조참판 증직.
전채룡1904년 승정원 승지 증직.
전채진중추부사 겸 호조참판 증직.
전한부승정원 승지 증직.
전만성호 석포.
전보성호 석정.
전수성호 석당, 효행으로 정려.
전동영승정원 승지 증직.
전동일중추부사 겸 호조참판 증직.
전영환1859년 선략장군 용양위, 사과, 돈녕부도정 역임.
전장환1889년(고종 26년) 무과 급제, 선략장군 용양위 부사과 역임.
전동기궁내부주사, 중추원의관 역임.
전세환3간 신묘보 수보, 김지수와 교유.
전창환종사랑 제수, 1904년 홍능참봉 사위참서 역임.
전승환5간 무자보 교정.
전지환1904년 경능참봉 판임관.
전창환한말 궁내부주사 겸 비서감.
전인환1904년 종사랑 제수, 중추원의관 역임.
전문환1901년 홍능참봉, 1903년 사위참서관 역임.
전창환1904년 중추원의관.
전기봉1892년 무과 급제, 선략장군, 사과군직 역임.
전기웅5간 무자보 감정, 발문.
전기옥희능참봉 역임.
전기순종사랑 제수, 목능참봉.
전기욱1903년 지능참봉, 1905년 창덕궁왕비인산시 신련별배.
전기로문묘직원 역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