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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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선거는 1610년에 태어나 1669년에 사망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그는 김집, 송시열 등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특히 예학에 정통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부인을 잃고 살아남은 죄책감으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송시열, 윤휴와의 학문적, 정치적 갈등 속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어려움을 겪었으며, 사후 노론과 소론의 분당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서로는 《노서유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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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선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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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파평(坡平) |
| 자 | 길보(吉甫) |
| 호 | 미촌(美村) 노서(魯西) 산천재(山泉齋) |
| 시호 | 문간(文簡) |
| 출생 | |
| 출생일 | 1610년 |
| 출생지 | 조선충청남도논산군 노성면 노성리 |
| 사망 | |
| 사망일 | 1669년 4월 21일 |
| 사망지 | 조선충청남도논산군 노성면 노성리 |
| 사인 | 병사 (노환)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윤황 |
| 어머니 | 창녕 성씨 |
| 형제자매 | 윤원거 윤순거 윤문거 |
| 배우자 | 미상 |
| 자녀 | 아들 윤증 아들 윤추 |
| 친척 | 외할아버지 성혼 외증조부 성수침 |
| 사돈 | 권시 송시열 윤휴 박세채 |
| 외손자 | 박태보 |
| 사위 | 박세당 |
| 학력 및 경력 | |
| 학력 | 한학 수학 |
| 직업 | 문신 사상가 작가 시인 학자 정치인 |
| 종교 | 유교 성리학 |
2. 생애
윤선거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외할아버지 성혼과 스승 김집을 통해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 학맥의 중요 인물이다. 젊은 시절 송시열과 깊은 교우 관계를 맺었으나, 1636년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함락 후 홀로 탈출한 경험은 그에게 평생의 자책감을 안겨주었고, 이후 관직을 거부하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는 계기가 되었다.[3] 그는 성리학, 특히 예학과 역학 연구에 힘썼으며, 송시열, 송준길, 권시, 윤휴 등 당대의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고 논쟁했다. 특히 윤휴의 주자학 비판 문제와 예송 논쟁 과정에서 송시열과 다른 입장을 보이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그는 남인과의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으나(기유의서), 송시열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이러한 학문적, 정치적 갈등은 사후 아들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으로 이어져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노소분당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2. 1. 초기 생애
1610년 태어난 윤선거는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윤황(尹煌)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서인의 학자 성혼(成渾)의 딸이다. 그는 초기에 아버지 윤황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신독재 김집(金集)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이를 통해 외할아버지인 성혼의 학맥과 스승 김집을 통해 이이의 학맥을 계승하였다.김집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 송시열(宋時烈)을 만나 가까이 지냈으나, 훗날 두 사람은 정치적 입장 차이로 인해 친구에서 정적으로 관계가 변하게 된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윤돈(尹暾) 대에 처가가 있는 충청남도 노성에 정착하면서 '노성 윤씨'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2]
1633년(인조 11)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1610년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현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에서 태어났다.[2] 본관은 파평 윤씨(坡平 尹氏)이며, 아버지는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윤황(尹煌)이고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서인의 학자 성혼(成渾)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다.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윤곤(尹坤)의 10대손이다. 세종대왕의 서녀 정현옹주와 결혼한 윤사로(尹師路)는 그의 7대 방조(傍祖)이며, 윤필상(尹弼商), 정현왕후(貞顯王后) 등도 그의 7대 방조가 된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윤돈(尹暾)이 처가가 있는 충청남도 노성에 처음 정착하면서 '노성 윤씨'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2]
형은 윤순거(尹舜擧), 윤문거(尹文擧)이며, 사촌은 윤원거(尹元擧)이다. 아들은 후일 소론의 영수가 되는 윤증(尹拯)이다. 또한 오랜 친구이자 후에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게 되는 송시열(宋時烈)은 그의 고모부 송희조(宋熙祚)의 5촌 조카로, 훗날 두 집안은 이중, 삼중으로 겹사돈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 관계 | 이름 | 비고 |
|---|---|---|
| 할아버지 | 윤창세(尹昌世) | |
| 아버지 | 윤황(尹煌) | 호 팔송(八松), 대사간, 이조참의, 시호 문정(文正) |
| 어머니 | 창녕 성씨(昌寧成氏) | 성혼의 딸 |
| 외할아버지 | 성혼(成渾) | |
| 외증조부 | 성수침(成守琛) | |
| 외종증조부 | 성세순(成世純) | |
| 고모 | 파평 윤씨 | |
| 고모부 | 송희조(宋熙祚) |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의 사촌[15] |
| 형 | 윤순거(尹舜擧) | 1596년 ~ 1668년, 호 동토(童土) |
| 형 | 윤문거(尹文擧) | 1606년 ~ 1672년 10월, 호 석호(石湖), 시호 충경(忠敬) |
| 조카 | 윤박(尹搏) | 송시열의 사위 |
| 숙부 | 윤전(尹烇) | 세자시강원 필선, 호 후촌(後村), 시호 충헌(忠憲) |
| 숙모 | 해평 윤씨(海平尹氏) | 윤근수의 손녀, 윤환(尹晥)의 딸 |
| 사촌 형 | 윤원거(尹元擧) | 1601년 ~ 1672년, 호 용서(龍西) |
| 사촌 누이 | 파평 윤씨 | |
| 사촌 매부 | 송시형(宋時瑩) | 송시열의 사촌 형[16] |
| 부인 | 공주 이씨(公州李氏) | 이장백(李長白)의 딸 |
| 아들 | 윤증(尹拯) | 호 명재(明齋), 소론의 영수 |
| 손자 | 윤행교(尹行敎) | 송기후(宋基厚, 송시열의 5촌 조카)의 사위 |
| 아들 | 윤추(尹推) | 호 농은(農隱) |
| 아들 | 윤발(尹撥) | |
| 아들 | 윤졸(尹拙) | |
| 아들 | 윤읍(尹挹) | |
| 사위 | 박세후(朴世垕) | 박세당(朴世堂)의 형 |
| 외손자 | 박태보(朴泰輔) | 1654년 ~ 1689년 5월 4일[17] |
| 사돈 | 송기후(宋基厚) | 송시열의 5촌 조카 |
| 사돈 | 윤근수(尹根壽) | 숙모 해평 윤씨의 할아버지 |
송시열과는 여러 겹의 복잡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윤선거의 고모부는 송시열의 당숙(송희조)이고, 사촌 매부(송시형)는 송시열의 사촌 형이며, 조카(윤박)는 송시열의 사위가 되었다. 또한 윤선거의 손자(윤행교)는 송시열의 5촌 조카(송기후)의 사위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윤선거와 송시열 개인의 관계뿐만 아니라, 후대의 정치적 대립 구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2. 1. 2. 성균관 수학
1633년(인조 11)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기개와 절개가 뛰어나고 언론이 강개하여 동료 유생들의 추앙과 존중을 받았다.[3] 성균관 유생 시절인 1634년(인조 12), 인조가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여 종묘에 모시기로 결정하자, 이를 예법에 어긋난다고 정면으로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윤선거는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을 이끌었으며, 유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성균관을 나와 상소에 동참하는 등 적극적으로 행동했다.[3]
상소에서 그는 원종을 종묘에 모시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며 임금이 마음 내키는 대로 결정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3] 그는 "이번에 종묘에 들이는 예야 말로 옛날 제왕들이 행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효성이 지극하여 융숭한 전례(典禮)를 거행하려 한다 하더라도 예법을 상고하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곧장 행한다면, 이는 융숭한 이름을 갖게 되지만 도리어 융숭한 실상을 잃게 됩니다."[4]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원종을 종묘에 모실 수 없는 이유로 "대저 왕위에 서지 않았으면 종묘에 들이지 않는 것이 고금의 떳떳한 법인데, 원종은 이미 왕위에 선 적 없으니 이것이 종묘에 들여서는 안되는 첫째 이유입니다. 임금과 신하가 한 자리에서 제사를 받으면 예경(禮經)을 어지럽히는 일이 된다는 것이 명유들의 정론인데, 원종은 열성(烈聖)들에 대해 신하의 처지이니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5]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또한 "종묘는 조종(祖宗)의 종묘이지 전하의 종묘가 아닙니다. 원종 대왕이 아무리 전하를 낳아 길러준 은혜가 있다 하더라도 조종에 대해서는 실제로 왕통을 잇고 작위를 이어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하 개인적으로 망극한 은혜가 있다고 하여 조종의 덕을 살피는 종묘에 마음대로 들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비판하며, 인조 개인의 효심이 종묘의 원칙보다 우선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조는 "이번에 종묘에 들이는 예는 조금도 안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는 그대들이 간여해 논할 바가 아니다.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에 열중하라"는 답을 내려 유생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6]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윤선거 등 성균관 유생들은 재차 상소하여 왕명을 거두기를 청했으나, 인조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6]
2. 2. 성리학 연구
1638년 충청남도 금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윤선거는 송시열, 권시(權諰), 송준길,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 이유태(李惟泰) 등 당대의 주요 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이 시기 그는 평생에 걸쳐 예학(禮學)과 역학(易學) 등 성리학 연구에 깊이 몰두했다. 이들과의 교류는 단순한 학문적 토론을 넘어,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 청나라에 대한 태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 문제 등 당시의 중요한 사상 및 시사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학문적 교류와 논의는 이후 예송 논쟁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사상적 논쟁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2. 2. 1. 병자호란과 그 이후
1636년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협상을 요구하자, 윤선거는 청나라와의 수교를 강력히 반대하며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사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가서 권순장(權順長), 김익겸(金益謙) 등과 함께 성문을 지켰다.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권순장, 김익겸과 그의 아내 이씨(李氏)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윤선거는 평민 복장으로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이때 강화도를 탈출하지 못한 아들 윤증과 딸이 있었는데, 딸은 여진족의 노비로 끌려갔다. 이후 여러 사람을 거쳐 의주에서 노비 생활을 하던 중, 동생 윤증이 미리 자신의 족보를 적어 외우게 한 수첩 덕분에 신분이 밝혀져 구제될 수 있었다.[7]
같은 해 3월, 아버지 윤황이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척화, 斥和)했다는 이유로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충청북도 영동으로 유배되자, 윤선거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1638년에는 충청남도 금산으로 옮겨 송시열, 권시(權諰), 송준길, 윤휴, 윤선도, 이유태(李惟泰)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평생 예학과 역학 연구에 몰두했다. 이들과 사상, 시사 문제 등을 활발히 토론했는데, 초기에는 청나라의 침략 이후 조선이 나아갈 방향이나 명나라에 대한 의리 문제 등을 격의 없이 논의했으나, 점차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학문적 논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친구이자 사돈 관계이기도 했던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홀로 살아나온 것을 이유로 그를 비판적으로 보았고, 이후 윤휴, 윤선도 문제까지 겹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윤선거는 아버지를 따라 충청남도 예산군 이산(尼山)의 선영 아래로 이주하여 은거했다. 그는 친구들과 아내를 뒤로하고 혼자 살아남은 것을 평생의 큰 죄로 여기며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스스로 죄인이라 칭하며 도성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효종 때부터 현종 때까지 수십 차례 관직 제수를 받았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3]
1651년(효종 2) 이후 장령, 집의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강화도에서의 일에 대한 자책감으로 모두 사양했다. 효종 3년(1652년)에는 부교리 민정중(閔鼎重[6])의 천거를 받아[8] 세자시강원 자의(諮議)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아갈 기회를 얻었으나, 즉시 사직 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8]
이후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다시 그를 천거했으며, 특별 천거인 별천(別薦)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아 6품직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당시 이조판서 심지원은 "별천 중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자는 특별히 기용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지금 윤선거를 천거한 사람이 가장 많으니, 품계를 뛰어넘어 6품으로 올려야 합니다."라고 건의했고, 효종이 이를 윤허했다.[8] 그 뒤 지평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역시 사직했으며,[8] 이어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다.
2. 2. 2. 예학과 사문난적 논쟁
남인 윤휴가 "사물의 진리를 주자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 있느냐"는 발언을 하여 서인과 사림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같은 남인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1653년(효종 4년) 윤선거는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송시열, 유계(兪棨), 권성원(權聖源) 등과 함께 윤휴가 주자의 경전 주해에 얽매이지 않고 북송(北宋) 이전 유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송시열은 이를 주자학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했다. 이때 윤선거는 윤휴의 견해도 일단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논쟁이 길어지면서 점차 윤휴를 변호하게 되어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었다.1665년(현종 6)에는 공주 동학사(東鶴寺)에서 이이(李珥)의 연보 간행 문제로 송시열과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서 윤선거는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사문난적 주장과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시작된 예송(禮訟) 시비를 놓고 송시열과 다시 한번 논쟁을 벌였다.
1669년,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보내는 서신인 〈기유의서(己酉擬書)〉를 작성했다. 이 글에서 그는 남인과 서인 간의 당쟁을 멈추어야 한다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며, 윤휴와 허목(許穆) 같은 인물들을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송시열에게 "예론(禮論) 문제로 얽힌 윤휴, 허목 등과 화해하여 그들이 감복하게 해야 한다"고 권고하며 그들의 등용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허목은 과거 윤선도와 함께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며 사형까지 주장했던 인물이었기에, 송시열은 윤선거의 이러한 제안을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윤휴 등 남인의 학문적 견해와 정치적 태도에 대한 서인 내부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송시열과의 갈등은 이후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이는 노소분당의 한 원인이 되었다.
2. 3. 생애 후반
윤선거는 생애 후반기에 남인 윤휴의 주자학 비판으로 촉발된 사림 내의 격렬한 학문적, 정치적 논쟁에 휘말렸다. 1653년 황산서원과 1665년 동학사 모임 등에서 윤선거는 송시열 등 서인 강경파와 윤휴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는 윤휴의 견해에 대해 일정 부분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며 송시열의 사문난적 규정에 동조하지 않았고, 이는 송시열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10] 윤선거는 송준길과 함께 송시열과 윤휴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오히려 송시열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669년에는 송시열에게 편지(〈기유의서(己酉擬書)〉)를 보내 남인 윤휴, 허목과의 화해 및 등용을 권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은 훗날 그의 아들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으로 이어져 노소분당의 한 원인이 되었다.한편, 윤선거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의 경험으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효종과 현종의 거듭된 출사 요구에도 불구하고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3][11]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상소를 올려 자신과 아들 윤증을 관직에서 제외해 달라고 청하며 벼슬을 사양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11][12] 1669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현종과 송준길 등은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13]
2. 3. 1. 윤휴와 송시열 사이의 중재 노력
남인 윤휴가 주자만이 사물의 진리를 아는 것은 아니며[9] 중용 주석 등에 오류가 많다고 선언하자[10], 이는 서인뿐만 아니라 같은 남인에게도 충격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사림 전체에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학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1653년(효종 4년) 윤선거는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송시열, 유계(兪棨), 권성원(權聖源) 등과 만나 윤휴의 주자 경전 주해 변경 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이 논쟁은 윤휴가 주자의 경전 주해에 얽매이지 않고 북송 이전 유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자, 송시열이 이를 사문난적으로 규정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때 윤선거는 윤휴의 주장을 전면 부정하기보다는 일단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논쟁 과정에서 점차 윤휴를 옹호하며 송시열과 다른 입장을 분명히 했다.
1665년(현종 6) 공주 동학사(東鶴寺)에서 이이(李珥)의 연보를 간행하기 위해 송시열과 다시 만났을 때도, 윤선거는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사문난적론과 자의대비 복상 문제로 비롯된 예송(禮訟) 시비를 놓고 재차 논쟁을 벌였다.
1669년에는 송시열에게 보내는 서신인 〈기유의서(己酉擬書)〉를 작성하여, 남인과 서인 간의 당쟁을 지양하는 정견을 제시하며 윤휴와 허목(許穆)의 등용을 주장했다.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예론(禮論)에 관계된 윤휴(尹鑴)·허목(許穆) 등과 화해하여 그들이 감복하게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허목은 과거 윤선도와 함께 송시열을 강하게 비난하며 사형까지 주장했던 인물이기에, 송시열은 윤선거의 제안을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다.
송시열은 윤휴와 가깝게 지내는 윤선거를 향해 "윤휴는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오. 혈기를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죄를 성토해야 하거니와 춘추의 법에 따르면 난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붙좇는 무리부터 다스리라고 하였으니 참임금이 일어난다면 그대가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죄를 받을 것이오."[10] 라고 말하며, 윤선거의 입장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윤선거는 송준길과 더불어 윤휴와 송시열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송시열로부터 위와 같은 날카로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윤휴 등 남인의 학문적 견해와 정치적 태도에 대한 서인 내부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된 윤선거와 송시열의 갈등은, 훗날 아들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으로 이어져 노소분당의 한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2. 3. 2. 황산서원과 동학사 모임
남인 윤휴가 주자만이 사물의 진리를 아는 것은 아니며 다른 사람도 알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서인과 사림 전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같은 남인에게도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윤휴는 중용 주석 연구 끝에 주자의 주석에 오류가 많다고 보고, 이를 바로잡겠다고 주장했다.[10] 그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 "공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공자도 잘못된 것이 있다" 와 같은 발언을 통해 주희 학설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경전 해석을 시도했다.1653년(효종 4년) 7월, 윤선거는 논산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송시열, 유계(兪棨), 권성원(權聖源), 권시, 이유태 등 대전 부근의 저명한 서인 학자 10여 명과 함께 시회(詩會)를 가졌다.[10] 황산서원은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송시열은 이곳에서 윤휴의 주자 경전 주해 변경 문제를 공론화하며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 윤선거는 윤휴의 학문이 높고 깊다고 평가하며,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물(公物)인데, 그대는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도 못하게 함은 무엇 때문인가. 주자 이후에도 경전에 대하여 조금씩 주해한 것이 많이 있지 않은가"라고 반박하며 윤휴의 견해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송시열은 주자의 논설은 명확하며 의심이 있다면 주자의 글에서 지적해야지, 왜 윤휴가 마음대로 주자의 주석을 버리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냐고 따졌다. 윤선거가 "그것은 윤휴가 고명(高明)함이 지나쳐서 실수한 것이다"라고 답하자, 송시열은 격분하여 "그대는 주자가 윤휴만큼 고명하지 못하단 말인가?"라고 몰아세웠다. 윤선거가 '고명'이라는 표현은 실수였고 윤휴의 행동은 경솔한 것이었다고 해명하자, 송시열은 자신이 '사문난적'이라 한 것이 바로 그 '경솔함'을 지적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했다.
"윤휴는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適)이오. 혈기를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죄를 성토해야 하거니와 춘추의 법에 따르면 난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붙좇는 무리부터 다스리라고 하였으니 참임금이 일어난다면 그대가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죄를 받을 것이오."[10]
송시열은 윤휴를 왕망, 동탁, 조조 같은 글도둑에 비유하고 윤선거 역시 그에 협조했으니 춘추의 법에 따라 윤휴보다 먼저 죄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0] 결국 윤선거는 그 자리에서 윤휴와 결별할 것을 선언했으나, 이후에도 교제를 이어갔다.
1665년(현종 6년) 공주 동학사(東鶴寺)에서 이이(李珥)의 연보 간행을 위해 윤선거는 송시열, 이유태 등과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서도 윤휴에 대한 사문난적론과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 문제로 촉발된 예송(禮訟) 시비를 두고 다시 격론이 벌어졌다. 종일 이어진 논쟁 끝에 송시열이 "주자가 옳으냐, 윤휴가 옳으냐?"라며 명확한 답변을 요구하자, 윤선거는 "옳고 그름(是非) 보다도 흑백으로 본다면 주희는 백(白), 윤휴는 흑(黑)이며 음양(陰陽)으로 본다면 주희는 양(陽), 윤휴는 음(陰)이다"라고 답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에 이유태는 윤선거가 비겁하다며 그의 말을 믿을 수 없고 윤휴와 절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1655년 봄,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 황산서원에서의 흑백론과 음양론은 표현상의 문제였을 뿐 윤휴의 인격을 평가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고 그를 잠재적인 논적으로 경계하게 되었다.
윤선거는 송준길과 함께 윤휴와 송시열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10], 오히려 송시열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1669년에는 송시열에게 〈기유의서(己酉擬書)〉라는 서신을 보내 남인과 서인 간의 당쟁을 지양하고 윤휴와 허목(許穆)을 등용할 것을 주장하며 화해를 권고했다. 그러나 허목은 과거 윤선도와 함께 송시열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었기에, 송시열은 윤선거의 권고를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윤휴의 학문적 견해와 정치적 태도에 대한 서인 내부의 이견에서 비롯된 윤선거와 송시열의 갈등은, 훗날 윤선거의 아들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으로 이어져 노소분당의 한 원인이 되었다.
2. 3. 3. 최후
효종과 현종은 여러 차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끝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3][11] 스승 김집이 그의 잘못이 없다며 받아주었으나, 윤선거는 평생 이에 대한 자책감을 안고 살았다.1669년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현종은 관직에 나오기를 계속 명했으나, 그는 끝내 상소만 올리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11] 그는 상소를 통해 자신과 같은 부족한 인물에게 계속 은전을 베푸는 것과 아들 윤증에게까지 벼슬을 내린 것은 조정의 인재 등용 원칙을 해치고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며, 자신과 아들의 이름을 관직 명단에서 삭제하고 다시는 부르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11][12] 이처럼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을 결코 꺾지 않았다.[12]
1669년(현종 10년) 4월, 윤선거는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를 들은 현종은 "윤선거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슬픈 일이다"라며 애석해했다. 또한 참찬 송준길은 "사우(스승과 동료)들이 윤선거를 엄탄지신(嚴憚之臣, 엄격하고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하는 신하)이 될 만하다고 여겼는데, 불행히 일찍 죽었으니 참으로 국가의 불행이다"라고 탄식했다.[13]
2. 4. 사후
윤선거는 죽기 전 송시열에게 윤휴, 허적 등 남인과의 화해를 권유하는 편지('기유의서')를 남겼으나 전달하지 못했다. 훗날 아들 윤증이 이 편지를 송시열에게 전했으나, 송시열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악감정을 품어 두 사람의 관계가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사후 송준길의 건의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고,[12] 이후 아들 윤증의 영귀(榮貴)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한편, 그의 장례식에 윤휴가 찾아와 조문하며 남긴 제문 내용과, 윤선거가 생전에 윤휴와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과 달리 그와 교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송시열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훗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중요한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2. 4. 1. 추증과 추탈
사후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12] 이는 당시 의정부 좌참찬이었던 송준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송준길은 윤선거가 생전에 스스로 죄인이라 칭하며 관직명을 쓰지 않았고, 사후 명정(銘旌)에도 '성균 생원'이라 쓴 점을 들어 국가에서 예우하던 신하로서 증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12]이후 아들 윤증이 높은 벼슬에 오르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710년(숙종 36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711년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그의 관작과 시호는 여러 차례 추탈(追奪)과 복권(復權)을 반복했다. 1714년 1월 그의 문집인 노서유고(魯西遺稿)가 간행되자, 그해 7월 신구(申球)가 상소를 올려 문집에 효종을 무함(誣陷, 없는 사실을 꾸며 남을 함정에 빠뜨림)하는 내용이 있다고 고발했다. 이듬해인 1715년(숙종 41년)에는 유계(兪棨)와 함께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과 저자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격렬한 당쟁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노론 세력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결국 노서유고에 효종을 모함했다는 내용이 문제가 되어 치열한 논란 끝에 문집은 압수되어 소각당하고 인쇄용 활자는 파괴되었다(훼판, 毁板). 또한 서원의 사액(祠額,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편액)이 철거되고 선정(先正, 학문과 덕행이 높아 모범이 되는 옛사람)이라는 칭호도 박탈당했다. 1717년에는 아들 윤증의 관작이 삭탈되면서 함께 추증되었던 관작마저 모두 박탈되었다.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면서 1722년(경종 2년), 윤선거와 아들 윤증은 함께 관작을 회복했다. 그러나 1776년(정조 즉위년) 5월, 정조의 특별 명령으로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782년(정조 6년)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복권되었다. 이후에도 노론 계열에서는 윤선거와 윤증 부자의 관작을 다시 추탈해야 한다는 상소를 고종 때까지 계속해서 올렸다.
2. 4. 2. 노론-소론 분당에 미친 영향
윤선거는 죽기 전 오랜 친구였던 송시열에게 남인 윤휴나 허적 등에 대해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를 버리고 화해를 청하라는 내용의 편지('기유의서')를 남겼다. 그러나 편지를 보내기 전에 사망했고, 1673년 아들 윤증이 이 편지를 스승인 송시열에게 전달했다. 윤증은 스승과 아버지 사이에 원한이나 의혹이 없기를 바랐으나, 송시열은 편지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악감정을 품게 되어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윤선거의 장례식 때 윤휴가 찾아와 문상했는데, 이때 남긴 제문에서 윤선거가 주관 없이 송시열에게 끌려다녔다고 비판했다. 윤증은 윤휴의 문상을 받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또한 윤선거가 생전에 윤휴와 만나지 않겠다고 송시열 등에게 약속했음에도 몰래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송시열이 윤선거에 대해 가졌던 오랜 친구로서의 감정은 실망과 증오로 바뀌었다.
이러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황에서 윤증은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 작성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다.[14] 하지만 송시열은 매우 무성의하게 글을 작성했을 뿐 아니라,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윤선거가 홀로 살아남은 일(윤선거가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사건)을 언급하며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이 일로 윤증과 송시열의 감정 대립은 극으로 치달았고, 이는 결국 서인이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나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본래 가까운 친구 사이였던 윤선거와 송시열의 관계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의 일을 계기로 송시열이 윤선거를 비판적으로 보면서 소원해졌으며, 이러한 개인적인 갈등이 아들 세대인 윤증과의 극심한 대립으로 이어져 회니논쟁과 함께 서인 분당의 핵심적인 배경이 된 것이다.
3. 가족 관계
우암 송시열과는 이중, 삼중으로 겹사돈 관계를 맺고 있었다. 윤선거의 손자 윤행교는 송시열의 친척인 송기후의 사위였고, 아들 윤증은 권시의 사위였는데, 권시의 다른 딸은 송시열의 며느리였다. 또한, 윤선거의 조카 윤박은 송시열의 사위였으며, 사촌 누이는 송시열의 사촌형인 송시형에게 시집갔다. 고모부인 송희조는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의 사촌 형제였다.[15]
| 구분 | 관계 | 이름 | 비고 |
|---|---|---|---|
| 조부 | 할아버지 | 윤창세(尹昌世) | |
| 부모 | 아버지 | 윤황(尹煌) | 호 팔송(八松), 대사간, 이조참의, 시호 문정(文正) |
| 어머니 | 창녕 성씨 | 우계 성혼의 딸 | |
| 고모 | 고모 | 파평 윤씨 | |
| 고모부 | 고모부 | 송희조(宋熙祚) |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의 사촌[15] |
| 형제 | 형 | 윤순거(尹舜擧) | 1596년 ~ 1668년, 호 동토(童土) |
| 형 | 윤문거(尹文擧) | 1606년 ~ 1672년 10월, 호 석호(石湖), 시호 충경(忠敬) | |
| 숙부 | 숙부 | 윤전(尹烇) | 세자시강원 필선, 호 후촌(後村), 시호 충헌(忠憲) |
| 숙모 | 해평 윤씨 | 해평부원군 윤근수의 손녀, 윤환(尹晥)의 딸 | |
| 사촌 | 사촌 형 | 윤원거(尹元擧) | 1601년 ~ 1672년, 호 용서(龍西) |
| 사촌 누이 | 파평 윤씨 | ||
| 사촌 매부 | 송시형(宋時瑩) | 송시열의 사촌 형[16] | |
| 조카 | 조카 | 윤박(尹搏) | 송시열의 사위 |
| 배우자 | 부인 | 공주 이씨 | 이장백(李長白)의 딸 |
| 자녀 | 아들 | 윤증(尹拯) | 호 명재(明齋) |
| 아들 | 윤추(尹推) | 호 농은(農隱) | |
| 아들 | 윤발(尹撥) | ||
| 아들 | 윤졸(尹拙) | ||
| 아들 | 윤읍(尹挹) | ||
| 사위 | 박세후(朴世垕) | 박세당의 형 | |
| 손주 | 손자 | 윤행교(尹行敎) | 송기후(宋基厚)의 사위 (송기후는 송시열의 5촌 조카) |
| 외손자 | 박태보(朴泰輔)[17] | 1654년 ~ 1689년 5월 4일[17] | |
| 외가 | 외할아버지 | 성혼(成渾) | |
| 외증조부 | 성수침(成守琛) | ||
| 외종증조부 | 성세순(成世純) | ||
| 사돈 | 사돈 | 윤근수(尹根壽) | 숙모 해평 윤씨의 조부 |
| 사돈 | 권시(權諰) | 아들 윤증의 장인 | |
| 사돈 | 송기후(宋基厚) | 손자 윤행교의 장인, 송시열의 5촌 조카 |
4. 평가
성리학에는 당대의 대가였으며, 예학에도 정통하였다.[1] 절친한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鑴)가 학문으로 대립하자, 윤휴의 사상에 비판적이었으나 그의 사상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가 송시열과 논쟁하게 되었다.[1] 이후 송시열과 윤휴 사이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하여 오히려 송시열은 물론이고 같은 서인 측으로부터도 오해를 사게 되었다.[1]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1]
5. 사상과 신념
백호 윤휴와는 사돈 관계이자 광해군 시절부터 오랜 친구 사이였다.[1] 그의 누이가 권준과 결혼했는데, 권준의 누이동생이 윤휴와 결혼한 것이다.[1] 그러나 윤휴가 주자 중심의 성리학에 의문을 제기하며 "사물의 도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느냐"고 주장하자, 윤선거는 이를 경계하였다.[1] 처음에는 토론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논쟁으로 번졌고, 윤선거는 윤휴의 주장이 과격하다고 여겨 조심할 것을 권고했다.[1]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 설득하려 했지만 윤휴가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절교를 선언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송시열과 윤휴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자,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꾸준히 서신을 보내 윤휴와 허목 등을 등용하도록 설득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우암 송시열과도 오랜 친구이자 복잡한 인척 관계였다.[2] 윤선거의 아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했다.[2]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윤선거가 홀로 살아남은 사건을 계기로 송시열이 윤선거를 비판하고 경멸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졌다.[2] 이 갈등은 훗날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회니논쟁으로 이어졌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2]
송시열과의 인척 관계를 살펴보면, 윤선거의 고모는 송시열의 당숙모였고, 윤선거의 사촌 누이는 송시열의 사촌 형수였다.[2] 또한 윤선거의 조카 윤박은 송시열의 사위였으며, 윤선거의 손자 윤행교는 송시열의 5촌 조카사위가 되는 등 여러 겹의 혼인 관계로 얽혀 있었다.[2]
6. 저서 및 작품
7. 행력
- 1610년(광해군 2) 5월 28일, 아버지 윤황의 임지였던 영광 관아에서 태어났다.
- 1626년(인조 4) 17세에 공주 이씨와 혼인했다.
- 1633년(인조 11) 24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했다.
- 1634년(인조 12) 25세에 성균관 유생(태학생)으로서 원종의 종묘 부묘(祔廟)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 1636년(인조 14) 27세에 성균관 유생들의 대표(소두, 疏頭)가 되어 후금 사신의 목을 베고 화의를 배척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 1637년(인조 15) 28세 때 1월 23일, 부인 이씨가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윤선거는 권순장, 김익겸, 김상용 등과 함께 성을 지키며 죽기를 각오했으나, 성이 함락되자 홀로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3월에는 아버지 윤황이 영동으로 유배되자 그를 따라갔다.
- 1638년(인조 16) 29세에 영동에서 돌아온 후, 아버지의 명에 따라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금산에 은거하기 시작했다.
- 1639년(인조 17) 30세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형제들과 함께 시묘살이를 했다.
- 1641년(인조 19) 32세에 삼년상을 마치고 금산으로 돌아왔다.
- 1642년(인조 20) 33세에 시남(市南) 유계(兪棨)와 함께 마하산에 산천재(山泉齋)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유계와 함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 1644년(인조 22) 35세 여름, 송시열, 이유태, 유계와 함께 신안사(新安寺)에 모여 고례(古禮)를 연구하고 『심경』을 강론했다.
- 1645년(인조 23) 36세에 아들 윤증의 관례를 『가례(家禮)』에 따라 행했다. 조정으로 돌아가는 유계를 전송했다.
- 1646년(인조 24) 37세에 니산(尼山) 석강(石江)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다. 신독재(愼獨齋) 김집을 찾아 뵙고, 송시열, 이유태와 돈암서원에서 만났다.
- 1647년(인조 25) 38세에 분암(墳庵)에서 종회(宗會)를 열었다. 김집을 찾아가 외할아버지인 우계(牛溪) 성혼의 비문을 수정했다.
- 1648년(인조 26) 39세에 『우계년보(牛溪年譜)』를 편찬하여, 후에 율곡(栗谷)의 연보와 함께 묶어 강릉 송담서원(松潭書院)에서 간행했다. 또한 안방준의 『혼정록(混定錄)』과 정철의 『관시록(觀時錄)』을 참고하여 선조 연간의 붕당과 왜란의 전말을 기록한 『계갑록(癸甲錄)』 4책을 편찬했다. 9월에는 어머니상을 당했다.
- 1649년(인조 27) 40세에 김집에게 성혼의 묘표(墓表)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 1650년(효종 1) 41세에 유계와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 양현종사(兩賢從祀)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정철의 연보를 교정하고 일부 내용을 삭제했다.
- 1651년(효종 2) 42세 3월, 전설사 별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유계에게 편지를 보내 후천설(後天說)에 대해 논했다. 왕자 사부(師傅)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 1652년(효종 3) 43세에 청음(淸陰) 김상헌의 죽음을 애도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조정의 부름(소명, 召命)을 받았다.
- 1653년(효종 4) 44세에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죽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물어(인구, 引咎) 관직 제수가 철회되었다. 형 용서(龍西) 윤원거와 함께 유계를 찾아가 『주역』을 강론했다. 5월에는 니산 노서서원(魯西書院)에서 향약을 강론했다. 송시열과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만나 윤휴의 배척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형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1654년(효종 5) 45세에 유계, 송시열, 이유태 등과 고란사(皐蘭寺)에 모여 호암(虎巖)에서 뱃놀이를 했다. 미촌(美村)에 새로 거처를 정했다.
- 1655년(효종 6) 46세에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정했다. 포저(浦渚) 조익의 죽음을 애도했다. 10월, 사헌부 지평으로 부름을 받자 과천까지 올라가 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 1656년(효종 7) 47세에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윤5월, 스승 김집의 죽음을 애도했다.
- 1657년(효종 8) 48세에 박지계(朴知誡)의 아들 박유연(朴由淵)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월,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에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직했다.
- 1658년(효종 9) 49세에 조정의 부름이 있자 궁궐 아래까지 나아가 진정소(陳情疏)를 올렸다. 4월, 강항의 문집 『수은집(睡隱集)』을 교정했다. 송준길에게 편지를 보내 정개청(鄭介淸)의 일에 대해 의논했다. 7월, 유계와 칠산서원(七山書院)에서 만나 『근사원류(近思源流)』를 편찬했다.
- 1659년(효종 10) 50세에 성균관 사업(司業)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에 붕당 대립의 조짐이 보이자 이유태와 유계에게 편지를 보내 경계했다. 5월, 효종이 승하하자 달려가 곡하고 돌아왔다. 송시열과 거취 문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상의원 정(正)에 제수되어 부름이 있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직했다.
- 1660년(현종 1) 51세에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예송논쟁)에 대해 윤휴에게 답하는 편지를 보냈다. 윤휴가 송시열의 기년설(기년설, 四種說)에 반대하고 삼년설(삼년설, 宗統說)을 지지하자,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윤휴와 절교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 1661년(현종 2) 52세에 윤휴 배척 문제에 관해 송시열, 권시(權諰)와 편지로 의논했다. 『근사후록(近思後錄)』과 『연원록(淵源錄)』을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 1664년(현종 5) 55세에 유계의 죽음을 애도했다. 금강산, 두타산, 태백산을 유람하고 구담(龜潭), 도담(島潭)을 둘러보았다.
- 1665년(현종 6) 56세에 정철의 묘를 이장할 때 만사(挽詞)를 지었다. 4월, 왕이 온천에 행차하자 행궁에 나아가 인사를 올리고 돌아왔다. 민유중의 부탁으로 중봉(重峯) 조헌의 유고를 교정했다.
- 1666년(현종 7) 57세에 이원록(李元祿)이 왕명을 받고 찾아와 『소학언해』의 개찬에 대해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 1667년(현종 8) 58세에 왕으로부터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하사받았다. 『우계속집(牛溪續集)』을 편찬했다. 창랑(滄浪) 성문준의 문집을 교정했다.
- 1668년(현종 9) 59세에 둘째 형 윤상거(尹商擧)의 상을 당했다. 창강(滄江) 조속(趙涑)과 정홍명(鄭弘溟)의 조카인 정양(鄭瀁)의 죽음을 애도했다. 왕이 온천 행차 중에 불렀으나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 1669년(현종 10) 60세에 셋째 형 동토(童土) 윤순거의 죽음을 애도했다. 〈의여회천서(擬與懷川書)〉를 지었다. 4월, 병으로 죽리(竹里)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명으로 장례에 필요한 물품(상수, 喪需)과 인력(역군, 役軍)이 지급되었다. 사후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8월 24일, 교하현 법흥향(法興鄕)에 장사 지냈다.
이후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 1671년(현종 12) 아들 윤증이 아버지의 연보를 지었다.
- 1675년(숙종 1) 노강서원(魯岡書院)에 배향되었다.
- 1710년(숙종 36)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1711년(숙종 37)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1712년(숙종 38) 아들 윤증이 문집 『노서유고(魯西遺稿)』를 간행했다.
- 1716년(숙종 42) 문집 중 효종을 무함한 글이 있다는 노론 측의 주장으로 인해 문집 판각을 훼손하고, 사액서원을 철거하며, 선현(先正) 칭호를 금지하는 이른바 ‘병신처분’이 내려졌다. 다음 해 아들 윤증과 함께 관작이 추탈되었다. 이는 소론의 영수였던 윤선거 부자에 대한 노론의 정치적 탄압 성격이 짙었다.
- 1722년(경종 2) 소론이 집권하면서 관작이 회복되고 서원도 다시 세워졌다.
- 1776년(영조 52) 정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다시 득세하면서 또다시 관작 추탈, 사액서원 철거, 문집 훼손의 명이 내려졌다.
- 1782년(정조 6) 아들 윤증과 함께 관작이 최종적으로 회복되었다.
참조
[1]
문서
송시열과 윤휴의 관계 악화
[2]
서적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위즈덤하우스
2008
[3]
서적
발칙한 조선의 지식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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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실록
인조실록
1634-08-15
[5]
문서
위와 같음
[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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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비앤피 애플북스
2009
[7]
문서
윤씨의 석방
[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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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9]
서적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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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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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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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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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실록
현종실록
1669-04-23
[14]
문서
송시열과 윤증의 관계
[15]
문서
송시열 가계
[16]
문서
송시열의 출생
[17]
웹사이트
박태보의 졸기
http://www.bannamp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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