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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공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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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한산성 공성전은 1636년 청나라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1637년 정축하성으로 종료된 사건이다. 인조는 청군의 개성 점령 보고를 받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으나, 강화도 피난 시도를 눈보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청군과의 교전, 강화 실패, 식량 부족, 혹한 등의 어려움 속에서 항전 의지를 다졌으나, 강화도 함락과 청의 항복 요구로 인해 결국 굴복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청과의 강화 조약을 맺으며 공성전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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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공성전
기본 정보
남한산성의 모습
전투가 벌어진 남한산성의 모습
전투 정보
분쟁남한산성 전투
전체병자호란
날짜1637년 1월 13일~2월 24일
장소조선 남한산성
결과조선의 항복 (정축하성)
교전 세력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홍타이지, 도르곤
지휘관 2인조
병력 규모
병력 1미상
병력 212,000명
사상자 규모
사상자 1미상
사상자 2미상

2. 1636년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입하자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결정했다. 최명길은 청군 진영으로 가 강화를 시도했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이동했다.[1] 그러나 김류 등이 강화도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인조는 일시적으로 강화도로 향하기도 했다.[2]

2. 1. 음력 12월 14일

청군이 송도(松都)를 지났다는 보고에 조선 조정은 파천을 결정하였다.[1] 최명길이 청군 진영으로 가 강화를 시도하였다. 인조남한산성으로 이동했는데, 김류강화도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강화도로 출발하려 했다.[2]

2. 2. 음력 12월 15일 ~ 16일

인조는 음력 12월 15일 새벽에 남한산성을 출발하여 강화도로 가기로 했으나 눈보라가 심해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아왔다. 양사는 도원수 김자점, 부원수 신경원, 평안 병사 유림, 의주 부윤 임경업 등을 죄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인조는 따르지 않았다.[3] 최명길은 적진에서 돌아와 청군이 왕제(王弟) 및 대신을 인질로 삼기를 요구한다고 보고했고, 이에 능봉수(綾峯守) 칭(偁)을 왕의 아우로, 심집(沈諿)을 대신으로 하여 보낼 것을 의논하였다.[4] 김류 등은 다시 강화도로 갈 것을 주장하였지만 묵살되었다.[5]

음력 12월 16일, 청군 진영에 간 능봉군(綾峯君) 칭(偁)과 심집(沈諿)은 가짜 왕제와 대신임이 드러나 살해당했다.[6]

2. 3. 음력 12월 18일 ~ 24일

인조는 12월 18일에 백관을 직접 교유(敎諭)하여 병사들을 격려하였다.[7] 인조는 정묘호란 당시 임시방편으로 강화를 허락했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으며, 이번에 오랑캐(청)가 대호(大號)를 참칭(僭稱)하고 조선을 업신여기므로 천하의 대의를 위해 그들의 사자(使者)를 배척한 것이 화란의 원인이라고 밝혔다. 그는 군신 상하가 함께 성을 지키며 싸워서 이기면 함께 살고 지면 함께 죽을 것이니, 죽음 가운데에서 삶을 구하고 위험 속에서 안녕을 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마음과 힘을 합쳐 적을 상대하면 깊이 들어온 오랑캐의 고립된 군사는 약화될 것이고, 사방의 원병이 계속 올 것이니 하늘이 도와 전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7]

12월 19일, 청군이 남성(南城)에 육박했으나, 조선군은 화포로 공격하여 물리쳤다.[8] 12월 20일, 청나라 측은 '지난번 대신이 돌아간 뒤로 소식이 없는데, 이제 한(汗)이 송경(松京)에 도착하였으니 양국 백성을 위해 계책을 베풀 수 없게 되었다.'고 전했다.[9]

12월 21일, 충청도 원병이 헌릉에 도착하여 불화살로 신호를 주고받았다.[10] 12월 24일, 인조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성절(聖節)을 기념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나,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자 땅에 엎드려 통곡하였다.[11][12] 이날 김류죽산(竹山)에 있는 충청도 원병에게 적군의 형세를 알리려 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을 지키는 병력은 1만 4천 명이었다.[13] 조선군은 4백여 명을 출전시켜 청군과 전투를 벌였고, 어영청은 적을 1백 명 넘게 죽였다고 보고하며 호전(胡箭) 1백 4개, 호궁(胡弓) 4개, 검 1자루, 궁대(弓帒) 1부, 갑주(甲胄) 1부, 양구(羊裘) 1벌을 전리품으로 얻었다고 보고하였다.[14]

2. 4. 음력 12월 25일 ~ 29일

온조왕|온조왕중국어 사당에 대한 제사가 예조의 건의로 거행되었다.[15]

청군 진영에 고기와 술을 보내기로 결정하였으나,[16] 다음 날 청군 장수는 "팔도의 주육(酒肉) 등 모든 물건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며 조롱하고 돌려보냈다. 그는 "국왕이 현재 석혈(石穴)에 처해 있고 내외가 통하지 않아서, 종신(從臣) 이하가 모두 굶주릴 것인데, 이것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모르겠다."라며 조선의 어려운 상황을 비꼬았다.[18]

강원도 영장(營將) 권정길(權井吉)이 병사를 이끌고 검단산에 도착, 횃불로 신호를 보냈으나, 검단산 전투에서 청군의 습격을 받아 패배하였다.[17] 험천 전투에서도 조선군이 패배했다.[19]

선전관 민진익(閔震益)은 남한산성 밖으로 나가 각 도에 왕명을 전달하고, 그 장계를 받아 성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20]

김류의 지휘 아래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으나, 청군은 응전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체찰사 김류가 군사를 성으로 불러들였는데, 이 과정에서 청군의 기습을 받아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전사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21]

3. 1637년

崇德二年중국어 (丙子年중국어) 1월 1일(양력 1월 26일), 청군이 빠르게 한양 근교에 도착하자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이미 청군이 길을 막고 있었다. 이에 인조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2] 인조가 남한산성에 도착한 것은 전년 12월 14일(양력 1637년 1월 9일)이었다.[2]

1월 2일(양력 1월 27일),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인조는 이를 거부하였다.[2] 남한산성에는 1만 3천여 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50일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2] 그러나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각지의 조선군에게 남한산성을 지원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2]

1월 3일(양력 1월 28일), 홍타이지는 다시 항복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였다.[2]

1월 5일(양력 1월 30일), 청군은 강화도 공격을 시작했다.[2]

1월 10일(양력 2월 4일), 홍타이지는 조선에게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2]

1월 12일(양력 2월 6일), 인조는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지만, 남한산성 내부에서는 주화파와 주전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2]

1월 15일(양력 2월 9일),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직접 항복하라는 서신을 보냈다.[2]

1월 22일(양력 2월 16일),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되었다.[2] 김경징은 강화도 수비에 실패한 죄로 사형당했다.[2]

1월 24일(양력 2월 18일),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항복을 강요하며, 항복하지 않으면 남한산성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2]

1월 27일(양력 2월 21일),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마지막 항복 권고 서신을 보냈다.[2]

1월 30일(양력 2월 24일), 인조는 결국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였다.[2] 삼전도는 현재의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다.[2]

참조

[1] 웹인용 적병이 송도를 지나자 파천을 논의, 신주와 빈궁을 강도로 가게 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 웹인용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3] 웹인용 대가가 강도로 떠났다가 되돌아오다. 양사가 김자점 등을 정죄하길 청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4] 웹인용 최명길이 적진에서 돌아오자 인질에 대해 논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5] 웹인용 노적의 사신이 오다. 김류 등이 강도로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6] 웹인용 가짜 왕제와 대신을 보낸 것이 탄로나 박난영이 오랑캐에게 죽임을 당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7] 웹인용 전 참봉 심광수가 최명길을 베길 청하다. 하교하여 전승의 결의를 다지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8] 웹인용 적병의 진격을 격퇴하다. 성을 순시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9] 웹인용 사신이 와서 한이 송경에 도착했다고 하다. 납서를 도원수 등에게 보내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0] 웹인용 충청도 원병이 헌릉안에 도착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1] 웹인용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망궐례를 행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2] 웹인용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자 향을 사르고 사배하고 기도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3] 웹인용 김류의 건의로 충청 병사에게 적의 형세를 알려주게 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4] 웹인용 출전한 군사들에게 상을 내리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5] 웹인용 예조가 온조에게 제사지낼 것을 아뢰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6] 웹인용 삼공·비국 당상과 의논하여 적진에 술과 소를 보내기로 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7] 웹인용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검단산에 도착했으나 적의 습격으로 패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8] 웹인용 이기남이 소와 술을 가지고 갔으나 노장이 받지 않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9] 웹인용 공청 감사 정세규가 험천에 진을 쳤으나 전군이 패몰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0] 웹인용 민진익이 제도에 명을 전한 뒤 돌아오자 포상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1] 웹인용 김류의 지휘로 북문 밖에 진을 친 군대가 크게 패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2] 웹인용 망궐례를 행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3] 웹인용 청나라 한이 탄천에 진을 쳤다고 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4] 웹인용 귀순하라는 내용의 황제의 글과 그에 대한 의논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5] 웹인용 완풍 부원군 이서의 졸기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6] 웹인용 동양위 신익성이 오랑캐의 글을 태울 것을 상소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7] 웹인용 홍서봉 등이 오랑캐 진영에 가지고 간 국서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8] 웹인용 전라 병사 김준룡이 치계하여 승전 소식을 전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29] 웹인용 강원 감사 조정호가 장계하여 전투 상황을 전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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