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리코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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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쿨리코보 전투는 1380년 9월 8일,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루스 연합군과 골든 호드 군벌 마마이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몽골 제국 지배 하에 있던 루스 지역에서 타타르 세력에 대항한 중요한 승리로 평가받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위상을 높이고 러시아 민족 의식 형성에 기여했다. 전투 결과는 모스크바의 승리였지만, 이후 킵차크 칸국의 토크타미쉬의 반격으로 모스크바는 약탈당하고 지배는 이어졌다. 쿨리코보 전투는 러시아 역사에서 몽골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1480년 우그라 강 대치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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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리코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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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전투 명칭 | 쿨리코보 전투 |
다른 이름 | 마마예프의 대학살 돈 대학살 |
전투 기간 | 1380년 9월 8일 |
전투 장소 | 쿨리코보 평원 (툴라주) |
전투 결과 | 러시아의 승리 |
관련 전쟁 | 대동란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모스크바 대공국 벨로오제로 공국 야로슬라블 공국 로스토프 공국 스타로두프 공국 몰로가 공국 카신 공국 뱌지마와 도로고부시의 공국 오카 강 상류 공국 일부 폴로츠크 공국과 브랸스크의 망명 리투아니아 공자들 |
교전 세력 2 | 마마이가 통제하는 황금 орда 서부 지역 유럽 용병 랴잔 공국 제노바 용병 쿠만족 체르케스인 |
추가 세력 | 리투아니아 대공국 (마마이를 지원하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하여 마마이 패배 소식에 후퇴)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드미트리 돈스코이 블라디미르 안드레예비치 용감공 |
지휘관 2 | 마마이 무함마드 볼라크 |
병력 규모 | |
병력 1 | 30,000 – 150,000명 |
병력 2 | 30,000 – 300,000명 |
결과 및 영향 | |
결과 | 모스크바 대공국의 승리 |
영향 | 모스크바 공국이 러시아의 다른 공국들보다 우위를 점하게 됨. 모스크바의 힘이 계속 성장함. 러시아에 대한 몽골 지배의 종말의 시작을 알림. 모스크바의 미래 지배를 위한 중요한 기반을 마련함. 러시아 민족 탄생의 계기가 됨. |
기타 | |
러시아어 명칭 | Куликовская битва Битва на Куликовом поле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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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13세기 몽골의 러시아 침략 이후, 루스 지역은 몽골 제국의 속국인 킵차크 칸국(골든 호드)의 지배를 받았다.[3] 14세기 중반, 킵차크 칸국 내 권력 다툼과 대혼란이 발생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은 성장했고, 트베리, 랴잔, 리투아니아 대공국 등 주변국과의 경쟁이 심화되었다. 특히 트베리와는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
1378년 보쟈 강 전투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킵차크 칸국 군대에 첫 승리를 거두었다.[31] 이는 마마이가 쿨리코보 전투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2. 1. 킵차크 칸국의 상황
1359년 골든 호드의 칸 베르디벡이 살해된 후, 킵차크 칸국에는 대혼란이 일어났다.[38] 베르디벡의 사위이자 베일레르베이였던 군벌(''템니크'') 마마이는 곧 골든 호드 서부의 권력을 장악했다. 마마이는 1361년 압둘라 칸을 옹립했고, 1370년 그의 의문의 죽음 이후 무함마드 볼락을 옹립하였다.[38]하지만 마마이는 칭기즈 칸의 후손(징기스칸의 후예)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의 권력 장악은 불안정했으며, 지배권을 주장하는 진정한 칭기즈 칸의 후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끊임없이 최고 권력을 위해 싸우고 동시에 분리주의와 싸워야 했다. 쇠퇴하는 골든 호드에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리투아니아 대공국, 모스크바 공국, 랴잔 공국과 같은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이 무렵의 골든 호드는 장기간의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38] 1357년 베르디벡의 아버지 살해에 의한 칸위 탈취 이후 혼란에 빠져, 러시아 내정에 대해 조직적으로 개입할 힘을 상대적으로 잃었지만, 드미트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38][39]
2. 2. 모스크바 대공국의 성장
1359년 골든 호드에서 대혼란이 시작된 것과 동시에 모스크바의 공작 이반 2세가 죽었고, 호드의 새로운 칸은 자를리크(법령)에 의해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옥좌를 니즈니노브고로드 공에게 넘겼다. 그러나 당시 새로운 공작 드미트리는 겨우 9세였기 때문에 모스크바 엘리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장한 군대와 여러 칸에게 뇌물을 사용하여 1365년 니즈니 노브고로드 공작들이 블라디미르 대공국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3]1368년 모스크바와 트베리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미하일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도움을 받았고, 1371년 마마이는 그에게 블라디미르 대공국에 대한 자를리크를 주었다. 그러나 타타르 사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군대는 새로운 "대공"이 블라디미르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군대의 원정도 실패했고, 자를리크는 드미트리에게 돌아왔다. 1372년 리투아니아와의 휴전 결과, 블라디미르 대공국은 모스크바 공작들의 세습 재산으로 인정되었다.[3]
1375년 트베리 공작은 마마이로부터 대공국의 자를리크를 다시 받았다. 그러자 드미트리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트베리로 이동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미하일은 자신을 모스크바 공작의 "아우"로 인정하고 타타르와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했다.[3]
2. 3. 드미트리와 마마이의 갈등
1359년 골든 호드의 칸 베르디벡이 살해된 후, 대혼란이 일어났다. 베일레르베이였던 군벌(''템니크'') 마마이는 골든 호드 서부의 권력을 장악했다. 마마이는 칭기즈 칸의 후손이 아니었기에 그의 권력은 불안정했다.[3] 쇠퇴하는 골든 호드에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리투아니아 대공국, 모스크바 공국, 리아잔 공국과 같은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의 러시아 침략 이후 골든 호드의 속국이었으나, 이 시기 세력이 커지면서 종종 영토를 놓고 이웃과 다투곤 했다. 1368년 모스크바와 트베리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371년 마마이는 미하일에게 블라디미르 대공국에 대한 자를리크를 주었으나, 모스크바 군대는 새로운 "대공"이 블라디미르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군대의 원정도 실패했고, 따라서 자를리크는 드미트리에게 돌아왔다. 1375년 트베리 공작은 마마이로부터 대공국의 자를리크를 다시 받았으나, 드미트리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트베리로 이동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드미트리와 마마이 사이의 공개적인 갈등은 1374년에 시작되었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마이는 골든 호드의 왕위를 위한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몇 년 동안 타타르인들은 드미트리의 동맹국들을 습격했고, 모스크바 군대는 1376년 오카 강을 따라 타타르인들에 대한 원정을 감행했고 1377년 볼가르를 점령했다.[5] 같은 해 "마마이의 타타르인들"은 표나 강 전투에서 드미트리가 남겨둔 보조 부대와 함께 니즈니 노브고로드 군대를 물리쳤다. 그 후 타타르인들은 니즈니 노브고로드와 리아잔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마마이는 킵차크 칸국에 조공을 요구하며 자신의 지배력을 재확인하려 했다. 1378년 그는 보자 강 전투에서 무르자 베기치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하여 드미트리 공의 복종을 확보하려 했지만, 이 군대는 패배했다.[31]
3. 전투의 전개
초기 자료에는 전투 경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16세기에 작성된 "마마이 패배의 이야기"는 병력 배치와 전장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지만, 이 자료가 이전의 알려지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16세기의 전술과 관행을 바탕으로 전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른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야기"에 따른 전투 경과는 이후 전투 재구성의 기초로 채택되었다.[15]
1380년 9월 8일, 쿨리코보 평원에서 드미트리가 이끄는 러시아 군대와 마마이가 이끄는 킵차크 칸국 군대가 격돌했다. 러시아군은 돈 강을 건너 배수의 진을 쳤다. 전투 시작 전, 러시아 용사 페레스베트와 킵차크 칸국의 용사 첼루베이가 일기토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두 용사 모두 전사했다.[15]
양측 주력 부대가 격돌하면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초기에는 킵차크 칸국 군대가 우세하여 러시아군 대연대의 깃발을 넘어뜨리고 보야르 브레녹을 죽였으며, "왼쪽" 연대를 무너뜨리는 등 러시아군의 패배가 가까워 보였다.[34]
그러나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매형인 블라디미르 대담한과 드미트리 보브록이 이끄는 러시아군 매복 부대가 킵차크 칸국 군대의 측면을 기습 공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34] 이 기습으로 킵차크 칸국 군대는 패주하기 시작했고, 러시아군은 크라시바야 메차 강까지 50km 이상 추격하여 승리했다.[34]
3. 1. 양측의 준비
1380년 8월, 드미트리 공은 마마이의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랴잔의 올레그가 이 소식을 전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올레그가 마마이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과 드미트리를 위협하려 했다는 해석이 있다. 과거 러시아 공작 중 누구도 칸과 직접 전투를 벌이려 하지 않았지만, 드미트리는 콜롬나에 신속하게 군대를 집결시켰다.[7] 콜롬나에서 드미트리는 마마이의 사신을 만나 더 많은 공물을 요구받았으나, 이전 계약에 규정된 금액만 지불하는 데 동의했다.[7]드미트리는 콜롬나에서 마마이의 이동 경로와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 군대의 접근 정보를 입수했다. 8월 20일, 군대를 점검한 후 오카 강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 8월 24~25일 로파스냐 마을에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 진군했다. 9월 6일, 러시아 군대는 돈 강에 도착하여 재편성되었다. 협의회에서 적들이 병력을 합치기 전에 돈 강을 건너기로 결정했지만, 이는 패배 시 후퇴 경로를 차단하는 조치였다.[7]
초기 연대기에는 러시아 군대 구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없다. 벨로제로 왕자들, 모스크바 귀족, 페레스베트만이 언급된다.[7] 서사시 "자돈슈치나"는 수많은 사망자를 언급하지만, 이 데이터는 의심스럽다. 랴잔 공국은 타타르의 강제 동맹국이었지만, 70명의 랴잔 보야르가 전사했다는 언급도 있다.[7]
역사가 고르스키에 따르면, "'마마이 패배 이야기'"와 그 파생 자료에 인용된 왕자와 지휘관 목록은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신뢰성이 높은 두 개의 연대기를 확인했다. 그의 재구성에 따르면, 드미트리 군대에는 북동 러시아 대부분의 분견대, 스몰렌스크 지역과 상류 오카 공국 일부 왕자들이 포함되었지만, 니즈니 노브고로드와 트베리 공국 군대는 없었다. 벨리키 노브고로드 분견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랴잔 대공국은 프론스크 공국 군대로 대표될 수 있었다. 무롬, 엘레츠, 메슈체라 국경 지역 소규모 분견대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드미트리 군대는 폴로츠크의 안드레이와 브랸스크의 드미트리에 의해 강화되었을 것이다.[7]
드미트리가 모은 총 병력에 대한 최초 자료는 "확장된 연대기 이야기"에 나타나는데, 15만~20만 명으로 추정되나, 이는 신뢰할 수 없다. 10만 명조차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후대 문헌에서는 러시아 군의 수를 30만 명 또는 40만 명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당시 기준으로 매우 큰 규모였으며, 15세기에도 모스크바 공작은 이와 동등한 병력을 소집할 수 없었기에 수십만 명의 전사에 대한 이야기가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8]
역사가들은 연대기와 중세 문헌의 수십만 명 병사라는 수치에서 벗어나, 군사 역사가 마슬로프스키는 10만~15만 명, 군사 예술 역사가 라진은 5만~6만 명, 중세 전쟁 전문가 키르프치니코프는 최대 3만 6천 명, 고고학자 드부레첸스키는 6천~7천 명으로 추정했다. 현대 러시아 역사가 펜스코이와 뷸리체프도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군대 규모 축소는 인구 통계 및 동원 잠재력 분석, 짧은 동원 기간 등을 근거로 한다.[9][10][11][12][13]
러시아 자료에서 타타르 병력 규모 추정치 역시 신뢰할 수 없으며, 압도적인 수적 우세만을 보여준다. 마마이의 동맹국인 랴잔 대공과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는 전투에 늦었기 때문에 그들의 군대 수는 무시해도 된다.[7]
보쟈 강 패전 이후, 마마이는 모스크바 대공국 정벌을 위해 철저한 군사적·외교적 준비를 진행했다.[34] 제노바 공화국 출신 용병, 체르케스인, 야스인 병사들로 군대를 보강하고, 리투아니아 대공국 및 랴잔 공국과 동맹을 맺었다.[34] 리투아니아 대공 외기엘로는 마마이와 동맹을 맺었다.[34]
랴잔 공국은 1373년과 1377년 타타르 군대의 침입으로 황폐해져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34] 랴잔 공 오레그 이바노비치는 마마이를 지원하면서도 모스크바의 드미트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34]
킵차크 칸국의 속국이 될 것과 우즈베크 칸 시대 수준의 조공을 요구하는 마마이의 최후통첩에 드미트리는 여러 공국에 군대 동원을 촉구했다.[34] 루스 공국 군대는 1380년 8월 15일 콜롬나(현 모스크바주)에 집결하기로 했다.[34]
모스크바 대공국 측은 마마이 군, 리투아니아 대공 야기에우워 군, 랴잔 공 올레그 군이 집결할 것으로 예상되는 오카 강을 넘어 남쪽으로 진출하여 마마이 군을 요격할 계획을 세웠다.[34]
3. 2. 병력 규모
초기 연대기에는 러시아 군대의 구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 중에는 벨로제로의 왕자들과 모스크바 귀족, 알렉산더 페레세베트만이 언급되었다.[7] "자돈슈치나"는 전사자가 25만 3천 명이라고 하지만, 이는 의심스럽다. 랴잔 공국은 타타르의 동맹이었지만, 70명의 랴잔 보야르가 전사했다는 언급도 있다.[7]역사가 고르스키는 "'마마이 패배 이야기'와 그로부터 파생된 자료에 인용된 왕자와 지휘관 목록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보았다.[7] 그는 드미트리의 군대에 북동 러시아 대부분, 스몰렌스크 지역 일부, 상류 오카 공국 일부의 분견대가 포함되었지만, 니즈니 노브고로드와 트베르 공국(카신 제외)의 군대는 없었다고 재구성했다.[7] 벨리키 노브고로드 분견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고, 랴잔 대공국은 프론스크 공국의 군대로 대표되었을 수 있다.[7] 무롬, 엘레츠, 메슈체라의 소규모 분견대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7] 드미트리의 군대는 폴로츠크의 안드레이와 브랸스크의 드미트리에 의해 강화되었을 것이다.[7]
"확장된 연대기 이야기"는 드미트리가 모은 총 병력을 15만~20만 명으로 추정하지만, 이 수치는 신뢰할 수 없다.[8] 10만 명조차 과장된 것으로 보이며, 후대 문헌에서는 30만 명 또는 40만 명으로까지 부풀려졌다.[8] 따라서 정확한 병력 규모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기준으로 매우 큰 규모였을 것이다.[8]
역사가들은 연대기에 묘사된 수십만 명이라는 수치에서 점차 벗어나, 군사 역사가 마슬로프스키는 10만~15만 명,[9] 군사 예술 역사가 라진은 5만~6만 명,[9] 역사가 키르프치니코프는 최대 3만 6천 명,[9] 고고학자 드부레첸스키는 6천~7천 명으로 추정했다.[9] 현대 러시아 역사가 펜스코이와 뷸리체프도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9]
병력 규모 추정치를 줄이게 된 주된 계기는 인구 통계 및 동원 잠재력 분석이었다.[9] 16세기 러시아도 3만~4만 명 이상의 병사를 동원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2주라는 짧은 동원 기간은 민병대를 대규모로 동원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9]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일부 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14]
러시아 자료에서 타타르의 병력 규모에 대한 추정치도 신뢰할 수 없으며, 압도적인 수적 우세만을 보여준다.[10] "이야기"의 한 변형에서는 러시아 군이 132만 명이었지만 타타르 군대는 "무수히 많다"고 언급되었다.[10] 타타르 측의 중세 자료는 없었다.[11] 마마이의 동맹인 랴잔의 올레그 2세와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는 전투에 늦었기 때문에 그들의 군대 수는 무시해도 된다.
3. 3. 전투 과정
1380년 9월 8일, 쿨리코보 평원에서 러시아군과 킵차크 칸국 군대가 격돌했다. 러시아군은 돈 강을 건너 배수의 진을 쳤다. 전투 전, 러시아 용사 페레스베트와 킵차크 칸국의 용사 첼루베이가 일기토를 벌였고, 둘 다 전사했다.[15]양측의 주력 부대가 격돌하면서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는데, 초기에는 킵차크 칸국 군대가 우세했다. 킵차크 칸국 군대는 러시아군 대연대의 깃발을 넘어뜨리고 보야르 브레녹을 죽였으며, "왼쪽" 연대를 무너뜨렸다.[34] 러시아군의 패배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때,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매형인 블라디미르 대담한과 드미트리 보브록이 지휘하는 러시아군 매복 부대가 킵차크 칸국 군대의 측면을 기습 공격했다.[34] 이 기습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킵차크 칸국 군대는 패주하기 시작했고, 러시아군은 크라시바야 메차 강까지 50km 이상 추격하여 승리했다.[34]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13세기 몽골의 러시아 침략 이후, 수많은 러시아 공국들은 몽골 제국의 속국인 골든 호드의 지배를 받았다.[3] 이 시기 모스크바 대공국은 점차 세력을 키워 리아잔 대공국 등 이웃 공국들과 영토 분쟁을 벌였다. 1359년 골든 호드에서 베르디벡 칸이 살해된 후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동안, 마마이는 골든 호드 서부를 장악하고 1361년 압둘라 칸을 옹립했고, 1370년 그의 의문의 죽음 이후 무함마드 볼락을 옹립했다. 하지만 그는 칭기즈 칸의 후손이 아니었기에 그의 권력은 불안정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 모스크바 공국, 리아잔 공국과 같은 새로운 정치 세력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모스크바 공작 이반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자를리크(법령)에 의해 호드의 새로운 칸은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옥좌를 니즈니노브고로드 공에게 넘겼으나, 당시 9세에 불과했던 드미트리를 옹립한 모스크바 엘리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374년 드미트리와 마마이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이후 타타르인들은 드미트리의 동맹국들을 습격했으며, 모스크바 군대는 1376년 오카 강을 따라 타타르인들에 대한 원정을 감행했고 1377년 볼가르를 점령했다. 마마이는 1378년 보자 강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1380년 모스크바에 맞서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쿨리코보 전투는 러시아 여러 나라들에 있어서, 타타르에 대한 본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이 전투는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첫 계기가 되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위상을 높이고 세력 확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돈스코이(돈 강의)”라는 칭호를 얻으며 영웅시되었다.[38]
킵차크 칸국의 정통 칸 토크타미시는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를 패배시켰고, 마마이는 크림반도로 도망쳤지만 카파에서 살해되었다.[38]
패배한 킵차크 칸국은 토크타미시 칸 휘하에서 재기에 성공, 1382년 모스크바 군을 격파하고 모스크바를 유린하여 모스크바 대공국을 황폐화시켰다.[33][39] 드미트리는 코스트로마에서 병력을 재결집하여 모스크바를 탈환했지만, 토크타미시는 몽골에 의한 러시아 재지배를 실현했고, 몽골에 대한 공납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킵차크 칸국의 세력은 점차 감소하고 분열을 거듭했다. 쿨리코보 전투는 “무적의 타타르”라는 관념을 깨고 러시아인들에게 타타르 지배를 뒤엎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으며, 모스크바가 러시아 공국들 사이에서 지도적 지위를 획득하는 계기가 되었다.[33][38][40]
4. 1. 킵차크 칸국의 패배
마마이의 명목상 칸이었던 무함마드 불렉은 전투에서 사망했다. 마마이는 크림반도의 카파에 있는 제노바의 요새로 도망쳤다. 그는 새로운 군대를 모았지만, 이제는 "합법적인 칸"이 없었고 그의 귀족들은 그의 라이벌인 토크타미쉬 칸에게 망명했다. 마마이는 다시 카파로 도망쳐 그곳에서 살해되었다.[38] 모스크바와의 전쟁은 마마이의 군대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토크타미쉬는 한 번의 타격으로 완전한 권력을 얻어 20년 동안 분열되었던 골든 호드를 종식시켰다. 역사가 고르스키에 따르면, 마마이의 패배로 가장 구체적인 정치적 이익을 얻은 사람은 토크타미쉬였다.[38]같은 해, 킵차크 칸국의 정통 칸 토크타미쉬는 마마이를 쿨리코보 전투에서 패배시켰고, 패한 마마이는 크림반도로 도망쳤지만, 흑해 연안의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지 카파(현 우크라이나 크림 공화국의 도시 페오도시아)에서 이탈리아인들과의 사이에 마찰을 일으켜 살해되었다고 한다(혹은 토크타미시에게 사살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38]
4. 2. 모스크바 대공국의 위상 강화
드미트리 1세는 쿨리코보 전투의 승리로 '돈스코이'(돈 강의)라는 칭호를 얻으며 영웅시되었다.[38] 이 승리는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첫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되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위신과 세력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38]모스크바 승리의 요인은 다음과 같다.
- 전술적 유리함: 전투 장소에 하천이 복잡하게 흘러 초원 전투에 능한 유목민 타타르군에게 불리했다.[32]
- 지형적 이점: 동쪽의 울창한 숲이 외부 공격을 방어했다.[32]
- 러시아 정교회의 지원: 러시아 정교회는 광대한 토지를 기증받고, 총대주교좌를 모스크바로 옮기며 모스크바를 지원했다.[32][36]
하지만 쿨리코보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은 골든 호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는 못했다. 1382년 토크타미시 칸은 모스크바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태웠다.[39] 드미트리는 토크타미시에게 굴복하고 공납을 계속 바쳐야 했다.
그럼에도 쿨리코보 전투는 몽골 세력 쇠퇴의 초기 신호였다. 이후 모스크바의 힘은 계속 성장했고, 우그라 강 전투에서 승리하며 러시아는 골든 호드에 대한 봉신 관계를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쿨리코보 전투는 러시아인들에게 타타르 지배를 뒤엎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으며, 모스크바가 러시아 통일과 독립 투쟁의 중심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33][38][40]
4. 3. 역사적 의의
쿨리코보 전투는 러시아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몽골-타타르 지배에 대한 저항의 상징: 13세기 몽골의 러시아 침략 이후, 러시아는 골든 호드의 지배를 받았다. 쿨리코보 전투는 이러한 몽골-타타르의 지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38] 비록 전투 이후에도 모스크바 대공국은 골든 호드에 조공을 바쳐야 했지만, 이 전투는 "무적의 타타르"라는 기존의 관념을 흔들었고, 타타르의 지배는 뒤엎을 수 있다는 희망을 러시아인들에게 주었다.[33][38][40]
- 러시아 민족 의식 형성 기여: 쿨리코보 전투는 러시아 여러 공국들이 드미트리 돈스코이 휘하에 모여 몽골-타타르에 맞서 싸운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를 통해 러시아인들은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민족적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었다.[38]
- 모스크바 대공국의 중앙집권화 및 향후 러시아 통일의 발판: 쿨리코보 전투의 승리로 모스크바 대공국의 위신은 크게 높아졌고, 동국의 세력 확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는 모스크바가 러시아 여러 공국들 가운데 구심력을 발휘하고, 국가 통일과 독립 투쟁에서 지도적 지위를 획득하는 계기가 되었다.[33][38][40]
이러한 역사적 의의를 바탕으로 쿨리코보 전투는 1480년 우그라 강의 대치에서 러시아인들이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으며, 러시아 역사에서 반쯤 전설적인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5. 논란과 재해석
쿨리코보 전투는 그 역사적 중요성만큼이나 다양한 논란과 재해석을 불러일으켰다. 전투 장소, 병력 규모, 역사적 해석 등 여러 측면에서 이견이 존재한다.
- 전투 장소 논란: 중세 사료는 돈강 너머 네프랴드바 강 근처를 언급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했다. 19세기에 스테판 네차예프가 제시한 위치가 통설로 받아들여졌으나, 2005년 고고학 조사 결과 네프랴드바 강과 스몰카 강 사이 지역이 실제 전투 장소로 확인되었다.[18] 그러나 아즈벨레프(2016)는 네프랴드바 강의 발원지가 실제 전투 장소라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19]
- 병력 규모 논쟁: 초기 기록은 양측 군대를 수십만 명으로 묘사했지만, 이는 비현실적인 수치로 여겨진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고고학적 증거와 사료 비판을 통해 수천 명에서 수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 다양한 역사적 해석:
- 슬라보필적 관점: 19세기 슬라보필주의자들은 쿨리코보 전투를 러시아 민족의 몽골 지배 탈피 시발점으로 보았다.
- 종교적 관점: 동방 정교회 역사가들은 기독교와 비기독교 세력 간의 대결로 해석한다.
- 수정주의적 관점: 쿨리코보 전투가 킵차크 칸국 내부 권력 투쟁의 일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 레프 구밀료프의 관점: 마마이는 서유럽 중심 외부 세력의 이익을 대변했고, 모스크바 대공국 군대는 토흐타미쉬 칸을 지지했다고 주장하며, "러시아인들은 여러 공국 시민으로 쿨리코보 전투터에 갔지만, 하나의 통일된 러시아 민족으로 돌아왔다"고 평가했다.[25]
모스크바 승리 요인으로는 지형적 이점, 트베리 공국 약화, 러시아 정교회 지원, 골든 호드 내분 등이 제시된다.[32][38][39][36][37]
5. 1. 전투 장소 논란
중세 자료들은 이 전투의 정확한 위치를 설명하지 않지만, 돈강 너머의 넓고 탁 트인 들판과 네프랴드바 강 어귀 근처를 언급하고 있다. 19세기에 스테판 네차예프는 전투의 정확한 위치라고 믿는 곳을 제시했고 그의 가설은 받아들여졌다. 20세기의 고토양 연구는 네프랴드바 강의 돈강 합류 지점 근처 왼쪽 강둑은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었고, 오른쪽에는 넓은 공터가 있는 숲이 우거진 스텝 지대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중 네프랴드바 강과 스몰카 강 사이의 한 곳에서 드부레첸스키가 이끄는 고고학자 팀에 의해 2005년에 전투 장소가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18]역사가 아즈벨레프(2016)는 이러한 위치 확인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양측에 40만 명이 참여한 전투였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면서, 실제 전투터는 강 어귀가 아니라 네프랴드바 강의 발원지였다고 주장했다. 고대 러시아어 단어 ''우스트예''(ust'e)가 호수에서 강이 흘러나오는 곳도 가리켰기 때문이다.[19] 20세기 초부터 네프랴드바 강은 Волово (озеро, Тульская область)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졌다.[20]
5. 2. 병력 규모 논쟁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러시아와 몽골-타타르 군대의 병력 규모에 대한 논쟁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쟁점이다. 중세 시대의 기록들은 과장된 수치를 제시하는 경향이 있어, 현대 역사학자들은 보다 현실적인 추정치를 제시하고자 노력해왔다.초기 기록들은 양측 군대의 규모를 수십만 명으로 묘사했지만, 이는 당시 러시아의 인구와 동원 능력을 고려할 때 비현실적인 수치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아즈벨레프(2016)는 양측에 40만 명이 참여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전투 지역의 지형과 보급 문제를 고려할 때 불가능에 가깝다.[19]
현대 역사학자들은 고고학적 증거와 사료 비판을 통해 쿨리코보 전투의 병력 규모를 재평가하고 있다. 2005년 드부레첸스키가 이끄는 고고학 팀은 네프랴드바 강과 스몰카 강 사이의 지역에서 전투 장소를 확인했으며,[18] 이를 바탕으로 양측 군대의 규모를 보다 현실적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키르피치니코프와 같은 중세 전쟁 전문가는 쿨리코보 전투에서 양측 군대가 각각 수천 명에서 수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당시의 전투 방식, 무기, 보급 능력 등을 고려한 결과이다.
5. 3. 다양한 역사적 해석
쿨리코보 전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며,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슬라보필적 관점: 19세기 러시아의 슬라보필주의자들은 이 전투를 러시아 민족이 몽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으로 보았다. 하지만 당시 키예프 루스의 절반 정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 종교적 관점: 일부 동방 정교회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기독교 세력과 비기독교 세력 간의 대결로 해석한다.
- 수정주의적 관점: 이 전투의 의미가 과장되었다고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이들은 쿨리코보 전투가 킵차크 칸국 내부의 권력 투쟁의 일환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 레프 구밀료프의 관점: 러시아 역사가 레프 구밀료프는 마마이가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외부 세력의 이익을 대변했으며, 쿨리코보 전투에서 모스크바 대공국 군대는 몽골 제국의 정통 지배자인 토흐타미쉬 칸을 지지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러시아인들은 여러 공국 시민으로 쿨리코보 전투터에 갔지만, 하나의 통일된 러시아 민족으로 돌아왔다"고 평가했다.[25]
모스크바가 승리한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제시된다.
- 지형적 이점: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하천이 복잡하게 흐르고, 동쪽에는 울창한 숲이 있어 전술적으로 유리했다.[32]
- 트베리 공국의 약화: 모스크바의 경쟁자였던 트베리 공국은 이미 힘을 잃고 모스크바에 종속된 상태였다.[38][39]
- 러시아 정교회의 지원: 러시아 정교회는 모스크바를 지지하며 통일된 조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32][36][37]
- 골든 호드의 내분: 당시 골든 호드는 장기간의 내분으로 인해 러시아 내정에 개입할 힘을 잃은 상태였다.[38][39]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쿨리코보 전투에서 모스크바가 승리할 수 있었으며, 이는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6. 쿨리코보 전투와 관련된 문화유산
쿨리코보 전투는 러시아 문학과 미술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이다. 오레스 키프렌스키, 바실리 사조노프, 미하일 네스테로프, 알렉산드르 부브노프, 미하일 아빌로프 등 많은 러시아와 소련 화가들이 이 전투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프랑스 화가 아돌프 이봉은 1850년 니콜라스 1세의 의뢰로 "쿨리코보 전투"라는 대규모 그림을 제작했다.[16] 1980년 소련의 천문학자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체르니흐는 소행성 2869 네프리야드바를 발견했는데, 이는 쿨리코보 전투에서 러시아가 타타르-몽골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이름 붙여졌다.[17]
18세기와 19세기에는 아마추어들에 의해 쿨리코보 전투의 흔적을 찾기 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농민들은 밭을 갈던 중 무기, 십자가, 성상, 메달 등의 조각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21] 경제학자 바실리 료프신은 이 유물들을 수집했다. 19세기에는 이반 사하로프가 쿨리코보 유물 목록을 출판했고, 역사가 스테판 네차예프는 농민들이 발견한 유물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1825년, 한 모험가는 "귀중한 것들"이 많았지만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개인 소장품이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소장품의 운명은 불분명하며, 모두 보존되지는 않았다. 알렉산더 발라쇼프와 Дмитрий Тихомиров|드미트리 티호미로프ru는 철제 물품이 농민들에 의해 녹여져 사용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2009년에는 페르시아 검이 발견되어 쿨리코보 전투터 박물관으로 이전되기도 했다. 19세기 툴라 역사가 Афремов, Иван Федорович|이반 아프레모프ru는 박물관 건립을 제안했고, 일부 유물은 정부 관리와 황실에 선물로 보내졌다.
1895년 파벨 말리츠키는 툴라 주민들로부터 창촉, 폴렉스, 십자가 발견 보고를 받았다. 많은 유물은 쿨리코보를 소유한 귀족 가문에 의해 수집되었으나, 내전 동안 대부분 손실되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도 유물이 발견되어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22]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블라디미르 나르시소프와 Ашурков, Вадим Николаевич|바딤 아슈르코프ru가 쿨리코보 유물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바실리 푸츠코, Двуреченский, Олег Викторович|올레크 드부레첸스키ru 등도 관련 출판물을 냈다.[23][24][22]
드부레첸스키 등이 2008년에 펴낸 책에는 쿨리코보 전투터에서 발견된 유물 목록이 제시되어 있다. 창촉 4개(조각 2개 포함), 투창촉 1개, 도끼날 조각 2개, 갑옷 판 조각 1개, 사슬갑옷 조각 1개, 화살촉 여러 개 등이 있다. 그러나 베르디시 등 16~18세기 무기도 발견되어 쿨리코보 전투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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