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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15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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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명길(1586년 ~ 1647년)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주화론을 주장했다. 그는 1605년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인조반정 이후 요직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며 척화론자들과 대립했고,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의 송환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성리학과 양명학에 모두 관심을 가졌으며, 친자식이 있음에도 조카를 양자로 삼아 의리를 지켰다. 사후에는 주화론과 양명학에 대한 연구로 비판을 받았지만,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하며,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작품에서 그의 삶이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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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158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국어 표기최명길
한자 표기崔鳴吉
로마자 표기Choe Myeonggil
자겸 (Jagyeom)
지천 (Jicheon), 창랑 (Changrang)
시호문충 (Munchung)
봉군호완성군 (Wanseong-gun), 이후 완성부원군 (Wanseong Buwongun)
직책
관직최고 국무 대신
임기 시작1642년 8월 27일
임기 종료1642년 12월 8일
이전이성구
이후신경진
관직 (2)좌측 국무 대신
임기 시작 (2)1637년 8월 26일
임기 종료 (2)1638년 10월 19일
이전 (2)이성구
이후 (2)신경진
관직 (3)우측 국무 대신
임기 시작 (3)1637년 5월 3일
임기 종료 (3)1637년
이전 (3)이성구
이후 (3)장유
군주 (3)조선 인조
개인 정보
출생일1586년 10월 7일
출생지조선
사망일1647년 6월 19일
사망지조선
국적조선
가족 관계
아버지최기남
어머니전주 유씨 부인
배우자인동 장씨 부인, 양천 허씨 부인
자녀최후상 (아들), 최씨 부인 (딸), 최후량 (양자)
정치 성향
정당서인 (서인)

2. 약력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이후 이조참판, 비변사 당상,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등 요직을 역임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후금과의 화의를 주장하였고, 항복 문서 초안을 작성하는 등 협상을 주도하여 인조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1628년에는 유효립의 난 진압에 기여한 공으로 영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 군대의 선봉장을 만나 시간을 끌어 인조의 남한산성 피신 시간을 확보했다. 남한산성에서는 김상헌, 홍익한 등 척화론자들에 맞서 현실적인 주화론을 펼치며 강화를 주도했다. 이때 직접 작성한 항복 문서를 김상헌이 찢자 이를 다시 수습했다는 일화가 있다.[5]

전쟁 후 1637년 의정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고, 사은사청나라 심양에 파견되어 조선인 포로 석방 및 송환, 척화신 송환 문제를 성공적으로 교섭하고 1638년 초 귀국하여 의정부 영의정이 되었다. 1640년 김류, 김자점 등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잠시 사퇴했으나 1642년 영의정에 복직했다.

그러나 1643년 명나라와의 비공식 외교 관계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심양으로 압송되었고, 2년간 억류되었다가 1645년 소현세자 등과 함께 풀려나 귀국하여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647년 사망하였다.

사후 주화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성리학적 명분론자들에게 비판받았으나, 숙종 대에 잠시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고 대한제국 멸망 이후 그의 현실주의적 외교 노선이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유학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글씨를 잘 썼고, 저서로는 『지천집』, 『지천주차』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평안북도 박천군의 지천사(知川祠)에 배향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최명길의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이며,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의 딸인 전주 유씨이다.

'''최명길의 가계'''
관계이름생몰년비고
아버지최기남 (崔起南)1559–1619영흥부사
어머니전주 유씨 (貞敬夫人 全州 柳氏)1556–1615유영립 (柳永立)의 딸
조부최수준 (崔秀俊)
외조부유영립 (柳永立)1537–1599참판
최내길 (崔來吉)1583–1649완천군 (完川君)
동생최혜길 (崔惠吉)1591–1662
동생최가길 (崔嘉吉)
정부인인동 장씨 (貞敬夫人 仁同 張氏)장만 (張晩)의 장녀, 자녀 없어 최혜길의 차남 최후량을 양자로 들임
계부인양천 허씨 (貞敬夫人 陽川 許氏)허인 (許嶙)의 딸
후실불명
양자최후량 (崔後亮)1616–1693완릉군 (完陵君), 생부 최혜길
아들최후상 (崔後尙)1631–1680생모 양천 허씨, 자녀 없어 최후량의 차남 최석정을 양자로 들임
최씨 (崔氏)생모 후실, 능성 구씨 구황(具鐄)에게 출가[4]



'''자녀 및 후손'''


  • '''양자: 최후량 (崔後亮)''' (완릉군)
  • * 며느리: 광주 안씨 안중임 (安仲任; 1621–1673) - 안헌징 (安獻徵)의 장녀
  • ** 손자: 최석진 (崔錫晉; 1640년생)
  • ** 손자: 최석정 (崔錫鼎; 1646–1715) - 숙부 최후상의 양자로 감

손자며느리: 이경억 (李慶億)의 딸
* 증손자: 최창대 (崔昌大)

  • ** 손자: 최석항 (崔錫恒; 1654–1724)
  • ** 손녀: 최두식 (崔斗息; 1651년생) - 윤제명 (尹濟明)에게 출가
  • ** 손녀: 최단식 (崔端息; 1656년생) - 신곡 (申轂)에게 출가
  • '''아들: 최후상 (崔後尙)'''
  • * 양자: 최석정 (崔錫鼎; 1646–1715) - 생부 최후량
  • '''딸: 최씨 (崔氏)''' (후실 소생)
  • * 사위: 구황 (具鐄; 1638년생) - 능성 구씨, 구인후 (具仁垕) 능천부원군 (綾川府院君)의 아들[4]

2. 2. 수학

빙고 별제(氷庫別提)를 지내고 이조판서로 추증된 최업(崔嶪)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증 의정부 좌찬성 수준(秀俊)이다. 아버지는 영흥부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 유씨이다.

처음에는 아버지 최기남에게서 가학(家學)을 배웠고, 이후 윤두수의 문하에 출입하며 수학하였다. 1601년 윤두수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인 윤근수의 문하와 오성 이항복(李恒福)의 문하에서도 글을 배웠으며, 신흠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아버지 최기남을 비롯해 윤두수, 윤근수, 이항복, 신흠 등 다양한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운 최명길은 한가지 생각만이 정답은 아니며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일찍이 이항복신흠의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 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이항복신흠의 문인으로 수학할 때 만난 김육(金堉), 조익(趙翼), 장유(張維), 이시백(李時白) 등 소수의 친구들과는 오랫동안 교류하였다.

여러 스승들에게서 성리학 학문을 수학하며 다양한 학식과 관점을 접하였다. 또한 양명학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명나라, 청나라 밖에도 선진 문명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점술과 도학 등에도 능통하였으며 풍수지리나 병법에도 뛰어났다.

2. 3. 성균관 유생 시절과 양명학 독학

1602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학(儒學)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주된 학문인 성리학을 공부하면서도, 그것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양명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독학으로 연구했다. 최명길은 양명학을 공부하며 당시 조선 사회의 주류였던 주자학적 명분론이나 현실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태도로는 사회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양명학에서 새로운 사상적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7]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훗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많은 이들이 주자학적 명분에 얽매여 무조건적인 항전만을 외칠 때, 그가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화평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7] 1605년(선조 38년)에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2. 4.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605년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같은 해 진사시에도 8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곧이어 치러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권지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보임되어 주요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후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오히려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광해군 재위 기간 동안 북인의 권력 독점이 심화되자 이를 비판하였고, 이로 인해 북인 세력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614년(광해군 6년) 병조좌랑으로 재직하던 중, 명나라 사신과의 접촉 금지 원칙을 어겼다는 점과 인목대비 폐모론 논의를 외부에 발설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가평으로 내려가 조익, 김육, 장유, 이시백 등과 교류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이 시기에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연구의 폭을 넓혔다.

같은 해인 1614년 곧 복권되었으나, 이후 부모상을 당하여 수년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7년에는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며 다시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는 북인의 독주와 인목대비 유폐로 이어진 광해군의 정책을 난정(亂政)으로 규정하고, 이귀가 중심이 된 인조반정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후 김류 계열 인사들과 연대하여 반정 세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3. 정치, 외교 활동

최명길은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광해군의 인목대비 유폐 등 어지러운 정국을 보고 형 최내길, 김류, 이귀 등과 함께 1623년 인조반정을 계획하고 실행하여 인조를 왕위에 올렸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8], 이조좌랑에서 시작하여 같은 해 정랑, 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으로 빠르게 승진하며 비변사 당상과 제조를 겸임했다. 이후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1624년 인조반정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인조공주로 피난하자 한성부에 남아 민심을 수습했으며, 난이 진압된 후에도 민심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이괄의 난 당시 문신임에도 총독부사(摠督副使)를 자원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임진강을 건너가 원수 장만[9]과 협력하여 안현(鞍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김상헌, 홍익한 등이 주장한 척화론에 맞서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주화론을 강력히 내세웠다.[5] 이로 인해 척화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청나라와의 강화를 주도하여 삼전도의 굴욕 이후 외교 관계를 이끌었다.[5] 이후 청의 무리한 명나라 정벌 파병 요구에 반대하고, 병자호란으로 끌려간 포로들의 송환과 과도한 조공 부담 완화를 위해 노력하는 등 청과의 외교에서 실리를 추구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환향녀 문제에 대해 이혼을 반대하고 이들을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1642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임경업 등을 통해 명나라와 비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던 사실이 청나라에 발각되자 책임을 지고 1643년 심양으로 갔다.[5] 심양에서 김상헌 등과 함께 2년간 억류되었는데, 감옥에서 척화론을 주장했던 김상헌과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화해하였다.[15] 1645년 석방되어 귀국한 후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어영청 도제조를 지내며 인조를 보필하다 1647년 사망했다.[5]

3. 1. 인조반정

서인에 속했던 최명길은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당시 왕이었던 광해군을 축출하고 김자점 등과 함께 인조를 왕위에 올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공로로 정사공신 1등으로 책록되어 완창부원군(完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이조참판에 임명되어 비변사 당상을 겸임했으며, 홍문관 부제학과 사헌부 대사헌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3. 2.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정묘호란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들, 이른바 환향녀 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당시 사대부들은 이 여성들이 정조를 잃었다며 가정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렸고, 이혼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명길은 환향녀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는 남편들에게 끌려갔던 부인과 이혼하지 말고 혼인 관계를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최명길은 이 여성들이 자의로 정조를 잃은 것이 아니며, 전쟁을 막지 못한 조정과 대신들의 책임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으므로 잘못은 국가에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들을 '환향녀'나 '화냥년'이라 부르며 비난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최명길의 주장은 당시 지배적인 사대부들의 정서와 크게 어긋났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이를 국속(國俗)과 미풍양속을 해치는 주장이라며 최명길을 거세게 비난했다. 김육이원익 등 소수만이 그의 의견에 동조했을 뿐, 대다수 사대부들은 청나라에 끌려가 절개를 지키지 못한 여성들을 감싸는 행위라며 비판했다.

3. 2. 1.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

1636년 12월, 청나라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이 발발했다.[5] 이때 조정에서는 청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척화론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인정하고 화의를 맺어야 한다는 주화론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김상헌, 홍익한 등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척화론의 입장이었으나, 최명길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주화론을 강력히 주장했다.[5] 이로 인해 최명길은 척화파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청나라에 항복 조건을 제시하며 강화를 주도했다.[5] 결국 조선은 청에 항복했고, 최명길은 왕자 등과 함께 청나라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끌려갔다.[5] 심양에서의 생활 중에도 최명길은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으며,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5] 척화론을 주장하며 최명길과 대립했던 김상헌은 그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최명길이 평화를 주장한 것이 오로지 나라를 지키려는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감동했다고 전해진다.[5]

3. 3. 청나라와의 외교

1636년 12월, 청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병자호란), 최명길은 끝까지 싸우자는 김상헌·홍익한 등의 척화론에 맞서 현실적인 주화론을 주장하며 청나라와의 강화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그는 삼전도의 굴욕 이후에도 청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637년, 청나라가 명나라 정벌을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을 때, 최명길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청나라가 계속 압력을 가하고 사신을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그는 '군대 지원은 항복과는 다르며, 나라가 망하더라도 의리상 따를 수 없다'고 주장하며 죽음으로 맞서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며 심양으로 향했고, 인조는 이에 감동하여 그를 직접 전송했다. 심양에서 최명길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파병 불가 입장을 고수했으며, 홍타이지는 처음에는 분노했으나 그의 충심을 인정하여 풀어주었다. 심양에 억류되었을 때에도 그는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으며, 척화론자였던 김상헌조차 그의 행동이 나라를 위한 충정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고 감동했다고 전해진다.[5]

1638년, 최명길은 다시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사정을 설명하고, 매년 바치는 조공물의 양을 줄이고 명나라 정벌을 위한 징병 요구를 철회해 줄 것을 간청하여 이를 성사시키고 돌아왔다.

1639년, 병석에 누운 인조는 자주 최명길을 불러 자문을 구했다. 이때 정명공주의 시집이 연루된 무고 사건이 발생하자, 인조는 최명길에게 직접 옥사를 조사하라는 밀지를 내렸으나 그는 불가함을 아뢰었다. 정명공주 사가에 대한 내사가 결정되자 극력 반대하며 공주의 거처를 별궁으로 옮기도록 청하여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김류, 김자점 등과의 정치적 경쟁과 산림 세력으로부터 삼전도의 굴욕을 초래한 인물이라는 비판이 계속되자, 1640년 인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1642년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1647년에 사망했다.

3. 3. 1. 청나라 포로 송환 문제

최명길은 청나라에 끌려간 포로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데려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청나라에 억류된 포로들의 석방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1637년 (인조 15년) 2월, 조정은 호조을 사용하여 포로들을 속환(贖還, 몸값을 치르고 데려옴)시키도록 했고, 포로 가족들도 개인적으로 속전을 지불하여 귀환시켰다. 그러나 가족을 빨리 데려오려는 마음에 가격을 따지지 않아 속전 가격이 계속 오르는 폐단이 발생했다.

최명길의 거듭된 건의를 받아들여 인조는 청나라에 끌려간 백성들의 송환 문제를 논의했다. 결국 조선청나라에 조선인 포로의 석방과 속환을 건의하여 관련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조선에서 끌려간 수만 명의 포로들을 속환시에 모아놓고, 가족이 값을 치르면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노예 상인들은 포로들의 몸값을 계속 올렸고, 특히 사대부 가족에 대해서는 수백 냥에서 수천 냥까지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637년 4월, 최명길은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한 사람에 대한 속전은 나이나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아무리 비싸도 1인당 100냥을 넘지 않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엄히 다스리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그해 5월까지도 속전 가격 상승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최명길은 속환사를 직접 파견하여 포로들을 데려올 것을 건의했다. 1637년 6월, 신계영(辛啓榮)이 속환사(贖還使)로 임명되어 가족의 속환을 원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청나라로 갔다. 그는 선양의 속환시와 노예시장에서 국가 및 개인 경비로 속전을 치르고 약 600여 명의 포로를 데려왔다. 같은 해 11월, 사은사청나라에 파견된 최명길은 다시 속환시와 노예시가 열리자 사은부사, 서장관, 역관 등을 동원하여 국비와 개인 경비를 들여 800여 명을 추가로 속환시켜 데려왔다. 귀국 후에도 그는 국내에 아직 많은 조선인 포로가 남아있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속환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일부는 청나라에 그대로 남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특히 속전을 지불해 줄 친척이 없는 백성들이나, 병자호란정묘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다가 포로가 된 군졸의 처자 중 속환되지 못한 700여 명의 송환 문제는 끝내 해결되지 못하고 문제로 남았다.

3. 4. 환향녀 문제

정묘호란병자호란으로 많은 여성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이들의 정조 문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이들을 '환향녀'라 불렀는데, 이는 후에 비하적인 의미로 변질되기도 했다.

1638년(인조 16년) 최명길은 처음으로 환향녀와의 이혼을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18] 그는 환향녀나 '화냥년'과 같은 비하적인 표현 사용 역시 금지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이 문제는 최명길의 친구이자 효종의 장인이기도 했던 장유가 자신의 며느리 문제를 예조에 제기하면서 본격적인 논쟁으로 번졌다. 장유의 며느리 한씨는 병자호란 때 청군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는데, 장유는 며느리가 정조를 잃었으므로 이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대부 집안에서 조상의 제사를 모시게 할 수 없으며, 누구의 자손인지 알 수 없는 아이를 기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예조에서는 이 문제를 결정하기 어렵다며 의정(議政)들에게 미루었다.

이에 최명길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들의 사례를 들어, 속환된 부녀와 이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여성들이 끌려간 것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신료들의 책임이지, 여성들 스스로 간통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또한, 속환된 사대부 부녀가 한둘이 아니고 모두 정조를 잃은 것도 아니며, 만약 이혼을 허락하면 남편들이 아내를 속환해 오려 하지 않아 많은 여성이 타국에서 비참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18]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간에서는 법에 얽매이지 말고 남편이 아내와 계속 살거나 재혼하는 등 원하는 대로 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최명길은 이는 한 나라의 법이 두 갈래로 나뉘는 부당한 처사라고 반박했다. 결국 인조는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혼을 불허했다.[18] 다만, 사대부 자제들은 새로 장가를 들 수 있게 하되, 돌아온 부인도 함께 데리고 살도록 했다. 이 결정으로 장유 아들의 이혼은 허락되지 않았고, 다른 사대부 가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사대부가들이 환향녀를 내쫓거나 친정으로 돌려보냈고,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장유가 죽은 후 그의 부인 김씨가 다시 며느리 한씨의 이혼 문제를 예조에 탄원했다. 김씨는 며느리가 청군에게 정조를 더럽혔으며, 아들이 반정 공신 가문의 독자이므로 그 자녀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유가 세자의 장인이었던 점 등이 고려되어 결국 한씨의 이혼은 특별히 허락되었다.

환향녀의 이혼을 금지시킨 최명길에 대해 사대부와 지식인들의 반발과 비판은 거셌다. 1638년 기록에는 최명길이 이혼 반대 주장을 하자 '나라의 풍속(國俗)을 해치는 자'라는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고 나온다.[18] 이 문제는 이후 현종 때까지 이어져, 속환된 부녀가 낳은 자손을 문무반 요직에 임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으로 계속되었다.

3. 5. 2차 영의정 재임과 명나라 외교 문서 사건

1640년 사임했다가 1642년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14] 영의정 재임 중 임경업을 통해 승려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보내 비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이 사실이 첩자들에 의해 청나라에 발각되었다.

병자호란 강화 직후, 최명길은 청나라에 항복한 것을 명나라가 불쾌하게 여길 것을 우려하여 명나라 도독(都督) 진홍범(陳弘範)에게 해명하는 공문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공문 전달의 불확실성 때문에 직접 명나라에 다녀올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때 명나라 장수 홍승주(洪承疇)의 군영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파견된 조선인 승려 독보가 있었는데, 최명길은 이 독보에게 공문을 주어 홍승주에게 전달하게 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임경업에게 지시하여 배를 마련해 독보가 명나라로 갈 수 있도록 도왔다. 1641년 가을, 독보가 명나라 조정의 회답 공문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이때 최명길은 이미 영의정에서 물러난 상태였기에 답서를 써서 독보 편에 보냈다.

이 무렵 청나라는 조선의 배가 바다를 오가는 것을 보고 명나라와 내통한다고 의심하여 조선을 추궁했고, 조선은 많은 돈을 들여 무마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명나라 장수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독보가 오고 간 사실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이 와중에 선천부사(宣川府使) 이규(李烓)가 몰래 명나라 상인과 교역한 사실이 발각되자, 청나라는 조선이 명나라와 비밀리에 통교한다며 소현세자를 심양에서 봉성(鳳城)으로 데려가고 이규를 잡아다 심문했다. 심문을 받던 이규는 살아남기 위해 최명길이 독보를 명나라에 보낸 사실을 발설했고, 청나라 장수는 이를 청태종에게 보고한 뒤 즉시 최명길을 잡아와 대질 심문을 벌였다.

주변에서는 증거가 불충분하니 부인하라고 권했지만, 최명길은 "청나라가 이미 바다의 배를 보고 의심하고 있는데, 다른 증거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처음부터 속였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화가 인조에게 미칠 것이니,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낫다. 나와 임경업 두 사람만 희생하면 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책임을 지려 했다.

3. 6. 은퇴와 최후

임경업명나라와 내통한 사실과 조정의 반청(反淸) 움직임이 청나라에 발각되자, 최명길은 책임을 지고 청나라에 인질로 갈 것을 자원하여 소현세자, 김상헌, 이경여 등과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갔다.[5] 그는 임경업 등과 명나라 내통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청나라 형부에서 형문을 받은 뒤 북관(北館)에 2년간 감금되었다.

최명길은 북관에서도 사형수들을 수감하는 독방에 갇혔는데, 그의 옆방에는 청음 김상헌이 있었다. 조선에 있을 때 두 사람은 정치적 입장 차이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상헌은 최명길을 매국노 또는 도의를 저버린 비겁한 겁쟁이라며 비판했고, 최명길은 김상헌을 명분만 앞세우며 명예만 바라보는 인물로 여겼다. 그러나 심양의 독방 생활 중 두 사람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묵은 감정을 풀게 되었다. 이때 김상헌과 주고받은 시가 전해진다.[15]

:'''김상헌:'''

:이제야 서로의 우정을 되찾으니
문득 백년 의심이 풀리는구나

:

:'''최명길:'''

:그대의 마음은 돌 같아
끝내 돌이키기 어렵지만
내 마음은 둥근 고리 같아
때로는 돌아간다오

심양 감옥에서 마음을 터놓게 된 최명길과 김상헌은 귀국 후에도 서로 협력했다. 최명길은 1645년 초 특별히 석방되어 소현세자 일행, 김상헌, 이경여 등과 함께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부원군에 봉해져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이 되었고, 어영청 도제조(御營廳都提調)를 지내며 인조를 2년간 더 보필하였다. 1647년에 사망하였다.[5]

4. 사상과 신념

최명길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학문을 익혔으나, 조익이나 장유 등과 교류하며 양명학까지 연구하는 등 개방적인 학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당시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사상적 활로를 모색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서인에 속했지만 당파적 입장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린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기도 했으나, 이후 인조의 정책이나 당론에 무조건 동조하지는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소신론 문단 참고)

그의 사상과 신념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병자호란 때였다.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이 대세를 이루는 상황 속에서, 최명길은 현실적인 국력과 백성의 안위를 깊이 고려하여 주화론(主和論)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하고 전쟁으로 인한 참화를 막으려는 그의 현실주의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격렬한 비판에 직면했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청과의 강화를 주도했다. (자세한 내용은 주화론 문단 참고)

학문적으로도 그는 성리학의 틀에만 갇히지 않았다. 주자학적 명분론이나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태도로는 조선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양명학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 이는 그의 현실주의적인 정치 노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성리학과 양명학 긍정론 문단 참고) 또한, 양자를 들인 후 친아들이 태어났음에도 의리를 지켜 양자를 파양하지 않은 일화는 그의 인간적인 신념과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친양자에 대한 의리 문단 참고)

생전에 최명길의 주화론과 양명학 연구는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사후에도 오랫동안 '국치의 주범'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현실주의적인 노선과 개방적인 사상은 손자인 최석정을 비롯한 소론양명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영향을 미쳤다.

4. 1. 소신론

최명길은 서인이었지만 당론에 무조건 따르지는 않았다. 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정책을 추진할 때, 김장생, 김집, 안방준 등 대부분의 사림들은 학문적 원칙과 공과 사의 구별 등을 이유로 들어 반대하였다. 최명길 역시 처음에는 이러한 반대 의견에 동조했으나, 나중에는 박지계 등 소수 인사들과 함께 임금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로 인해 그는 탄핵을 받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최명길이 항상 임금의 뜻만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1646년 인조가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을 처형하려 했을 때, 그는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일반 사류들과 함께 어린 왕손들을 위해서라도 강빈을 용서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최명길의 이러한 주장에는 김집, 송준길, 홍우원 등 소수의 인사들만이 동조하였다. 이는 그가 당파나 권력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4. 2. 주화론

1627년 정묘호란1636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후금청나라가 과거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라는 인식과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과 주전론(主戰論)이 우세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최명길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직시하고 홀로 화의(和議)를 주장했다.

그는 오랜 기간 전쟁 준비가 미흡했고 제대로 된 대응책도 없는 상황에서 적의 침입을 받으면 강화도만으로는 항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소수 사대부의 명분을 위해 다수 백성을 희생시킬 수 없으며, 전쟁 전에 적극적인 대비를 하지 못했다면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화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이를 굽히지 않았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김상헌, 홍익한 등 척화파의 항전 주장에 맞서, 최명길은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말하지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성이 무너져 위아래가 모두 죽게 되면 종묘사직을 어찌 보존하겠는가?"[5]라고 반문하며 청과의 강화를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김상헌이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를 찢는 등 격렬한 대립이 있었으나, 최명길은 김상헌의 행동 역시 나라를 위한 충정으로 이해하고 그의 주장에 담긴 의미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훗날 심양으로 함께 끌려간 김상헌은 최명길의 당당한 태도를 보고 그의 주화론이 오로지 나라를 지키려는 충성심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고 감동했다고 전해진다[5].

최명길의 주화론은 당시뿐 아니라 사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그의 화의 및 타협 정책이 결과적으로 조선의 병란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김상헌의 주전론과 최명길의 화의론 모두 각자의 명분과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시각도 등장했다.

4. 3. 성리학과 양명학 긍정론

그는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나 성리학만이 진리라 생각하지 않고 양명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양명학을 독학으로 수학하면서 주자학적 명분론이나 묵수주의가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양명학에서 새로운 사상적 활로를 찾으려 하였다.[7] 그의 이러한 학문 태도는 훗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자학적 명분론에 사로잡혀 항전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주관에 입각해서 과감히 화평론을 주장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7]

사상은 당시의 대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그는 이미 주자학적 명분론과 묵수주의가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양명학에서 새로운 사상적 활로를 찾았다. 그는 성리학 원론이나 번다한 예설 자체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성리학을 전면 부정하지도 않았다. 또한 명분론 일변도로 흐르지도 않았다. 성리학자이면서도 그는 양명학에도 호감을 보이고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는 장유 등과 함께 양명학적 지식과 그 소양을 익히고 새로운 사상도 있음을 조선에 소개하였다.

4. 4. 친양자에 대한 의리

최명길은 본부인 인동 장씨에게 아들이 없어 조카인 최후량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을 사람으로 삼았다. 그러나 장씨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재혼한 부인 허씨가 아들 최후상을 낳았다. 당시 조선에서는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였다가 친아들이 태어나면 양자를 파양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조정에서도 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최명길은 이러한 관례를 따르지 않고, 최후량을 파양하지 않았다. 그는 최후량을 여전히 자신의 아들이자 장남으로 대우했으며, 친아들인 최후상은 차남으로 삼았다.

주위에서 친아들이 태어났음에도 양자를 파양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최명길은 '이미 아버지와 아들로 정해진 관계에는 하늘이 정한 순서(天倫)가 있으므로 바꿀 수 없다'는 소신을 밝혔다.[17] 그는 자신의 뜻을 조정에 알려 최후량을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게 하고 가산을 상속시켰다. 이러한 최명길의 행동에 사람들은 그의 의리에 감탄했으며, 예법을 아는 식자들 역시 이를 올바르다고 여겨 특별히 법전에 기록하여 나라의 명령(朝令)으로 삼도록 했다.

5. 평가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동기창체의 글씨를 잘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614년 문과 급제 후 조익, 장유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연마했고 양명학에 대한 연구도 병행했다. 서인으로서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인조를 왕위에 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에는 김상헌, 홍익한 등이 주장한 척화론에 맞서 현실적인 주화론을 내세워 과의 강화를 주도했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당시 격렬한 비판에 직면했지만,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충정에서 비롯된 현실적인 외교 노선이었다는 재평가도 존재한다.[5] 심양으로 끌려갔을 때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그의 태도는, 척화론자였던 김상헌마저 그의 충심을 인정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5]

저서로는 『지천집』 전 19권과 『지천주차』 전 2권이 있으며, 사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5. 1. 긍정적 평가

그는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고, 글씨는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유명했다.

이시백은 최명길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를 꼽았다.[20]

순서공적 내용
1인조반정에 참여한 것
2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을 국왕으로 추숭한 것
3인조를 위해 홀로 청나라 진지에 간 것
4주변 신하들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화의(和議)를 주도한 것
5청나라의 조선군 징발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
6명나라에 비밀리에 글을 보낸 것에 책임지려 목숨을 건 것
7남의 혈육을 잘 돌봐준 것
8당파에 물들지 않은 것



박세당[21]은 "조선[22] 사람들이 잠자리를 편안히 하고 그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그(최명길) 덕분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23] 남구만 역시 "종묘와 사직이 망하지 않고 백성들이 죽지 않게 한 사람은 실로 최명길이었다."[24]라고 평가하며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김만중[25]은 최명길을 "스스로 직분을 다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자"라고 평가했으며,[26] 이민서는 "강직하게 나라를 깊이 생각하여 일신의 삶과 죽음, 화와 복으로 그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여 마땅히 해야 할 바에 힘썼으니, 대신(大臣)의 절도가 있다고 할 만하다."라고 평가했다.[6]

이 외에도 허적, 정태화, 숙종, 정조, 정민시 등 많은 인물들이 최명길의 공적과 인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27]

최명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던 조선왕조실록조차도 그를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16]라고 기록하며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또한 그는 양명학(陽明學)과 새로운 사상들에 편견 없이 호감을 보였으며,[28] 이를 소개하고 익혀 장유 등과 함께 후대에 양명학을 잇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5. 2. 부정적 평가

병자호란정묘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는 주화론(主和論)과 협상론을 내세웠기 때문에, 그는 종종 매국노나 협력자로 비판받았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조선 사회와 후대 사람들에게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29] 그러나 그의 주화론과 협상론은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에서 현실적인 외교 노선이었다는 재평가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성리학자이면서도 양명학에 관심을 보이고 깊이 연구한 점 때문에, 당시 주류 학문이 아니었던 양명학에 빠졌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이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러한 비판은 조선이 멸망한 뒤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6. 저서


  • 《지천집》(遲川集) (전 19권)
  • 《지천선생유집》(遲川先生遺集)
  • 《지천선생속집》(遲川先生續集)
  • 〈병자봉사〉(丙子封事): 《지천집》 권11에 수록.
  • 《지천주차》(遲川奏箚) (전 2권)

7.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최수준(崔秀俊)
  • '''아버지''' : 최기남(崔起南, 1559 ~ 1619)
  • '''어머니''' : 전주 류씨(全州 柳氏, 1556 ~ 1615) - 유영립(柳永立)의 딸
  • * 누나 : 최몽희(崔夢姬, 1580 ~ ?)
  • * 형 : 최내길 (완천군, 1583 ~ 1649)
  • * 남동생 : 최혜길(崔惠吉, 1591 ~ 1662)
  • * 남동생 : 최만길(崔晚吉, 1596 ~ ?)
  • * 남동생 : 최가길(崔嘉吉)
  • '''서모''' : 업이(業伊) - 양민 출신
  • * 이복 남동생 : 최정길(崔正吉, 1619 ~ ?)

  • '''배우자 및 자녀'''
  • * '''정부인''' : 인동 장씨 - 장만(張晩)의 장녀 (자녀 없음)
  • ** '''양자''' : 최후량 (완릉군, 1616 ~ 1693) - 남동생 최혜길의 차남

며느리 : 안중임(安仲任, 1621 ~ 1673) - 안헌징(安獻徵)의 장녀[19]
* 손자 : 최석진(崔錫晉, 1640 ~ ?)
* 손자 : 최석정(崔錫鼎, 1646 ~ 1715) - 숙부 최후상의 양자가 됨
** 손자며느리 : 이경억의 딸
*** 증손자 : 최창대(崔昌大)
* 손자 : 최석항(崔錫恒, 1654 ~ 1724)
* 손녀 : 최두식(崔斗息, 1651 ~ ?)
** 손녀사위 : 윤제명(尹濟明)
* 손녀 : 최단식(崔端息, 1656 ~ ?)
** 손녀사위 : 신곡(申轂)

  • * '''계부인''' : 양천 허씨 - 허인(許嶙)의 딸
  • ** '''장남''' : 최후상(崔後尙, 1631 ~ 1680) - 자녀가 없어 조카 최석정을 양자로 들임

'''양손자''' : 최석정(崔錫鼎, 1646 ~ 1715)

  • * '''측실''' : 이름 미상
  • ** 서녀 : 최씨(崔氏)

사위 : 능성 구씨 구횡(具鐄, 1638 ~ ?) - 능천부원군 구인후(具仁垕)의 아들[4]

8. 관련 작품

최명길은 다양한 매체에서 역사적 인물로 재조명되었다. 특히 병자호란을 다룬 작품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 (2017년)에서는 배우 이병헌이 최명길 역을 맡아 그의 고뇌를 연기했으며, 여러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그의 삶과 정치적 선택이 그려졌다.

8. 1. 드라마

wikitext


8. 2. 영화

참조

[1] 문서 Meaning "Prince Wanseong".
[2] 문서 Meaning "Internal Prince Wanseong".
[3] 문서 In Lunar Calendar, Choi was born on 25 August 1586 and died on 17 May 1647
[4] 문서 He is the nephew of [[Queen Inheon]], the mother of [[Injo of Joseon|King Injo]]
[5] 문서 金尚憲は子孫に崔氏の家と代々付き合っていくように遺言をしている。
[6] 문서 이민서, 《서하집》 권16, 영의정 완성부원군 최 공 시장
[7] 서적 철학사전 중원문화 2009
[8] 웹인용 의병을 일으켜 즉위하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623-03-13
[9] 문서 본처 장씨의 친정아버지이기도 하다.
[10] 문서 남구만, 《약천집》 권17, 영의정 문충 최 공 신도비명 병자년(1636) 11월조
[11] 문서 당시 조정은 서인 일색이었는데 [[영의정]]에 [[김류]], [[좌의정]]에 [[홍서봉]], [[우의정]]에 [[이홍주]]가 앉아있었고 [[이조판서]]에 [[최명길]], [[호조판서]]에 [[김신국]], [[예조판서]]에 [[김상헌]], [[병조판서]]에 [[이성구]], [[형조판서]]에 [[심집]], [[공조판서]]에 [[장유 (조선)|장유]]가 앉아있었다.
[12] 문서 인조실록, 인조 15년(1637) 1월 18일(무오) 1번째 기사
[13] 문서 남구만, 《약천집》 권17, 영의정 문충 최공 신도비명 병자년(1636)조; 박세당, 《서계집》 권11, 영의정 완성부원군 최 공 신도비명 정축년(1637)조; 최창대, 《곤륜집》권20, 지천 공 유사
[14] 웹사이트 한국역사정보 통합시스템 http://yoksa.aks.ac.[...]
[15] 문서 『연려실기술』 권26, 인조조 고사본말, 심옥제수
[16] 문서 《인조실록》 권48, 인조 25년(1647) 5월 17일(정사) 2번째 기사
[17] 문서 최명길, 《지천유집》 권2, 후사 정하기를 청하는 소[請定後事疏]
[18] 웹사이트 부녀 속환 문제 http://100.daum.net/[...]
[19] 문서 [[중종 (조선)|중종]]의 8남 [[덕흥대원군]]의 외고손녀 ----[[덕흥대원군]] → 이명순 → 안응형 → 안헌징 → 안중임
[20] 문서 박세당, 《서계집》 권11, 영의정 완성부원군 최 공 신도비명
[21] 문서 밑에 나오는 남구만과 처남·매부 사이다.
[22] 문서 원문은 '동토(東土)'이다.
[23] 문서 박세당, 《서계집》 권7, 지천집 서문
[24] 문서 남구만, 《약천집》 권17, 영의정 문충 최 공 신도비명
[25] 문서 생원 김익겸(강화도에서 순절함)의 유복자이다.
[26] 서적 서포만필 하 문학동네 2010-08-28
[27] 문서 《현종개수실록》 권11, 현종 5년(1664년) 윤6월 3일(계해) 3번째 기사; 《숙종실록》 권5, 숙종 2년(1676년) 7월 2일(임오) 2번째 및 8월 2일(임자) 3번째 기사; 《숙종실록보궐정오》 권5, 숙종 2년(1676년) 7월 8일(무자); 《정조실록》 권6, 정조 2년(1778년) 11월 5일(신묘)
[28] 문서 최명길, 《지천집》 권17, 기후량서 참조.
[29] 문서 예를 들면 최명길을 '진회의 죄인'이라고 말한 [[윤집]](인조실록, 인조 14년(1636) 11월 8일(무신) 기사), 그를 “그 해가 두 개인 것을 인정하려 한다.”라고 말한 [[정온 (1569년)|정온]](정온, 《동계집》 권3, 산성에서 올린 차자[두 번째]), "지천 같은 자는 결국 나라 팔아먹은 사람이지."라고 말한 [[안정복]](안정복, 《순암집》 권1, 남문을 나가는데 최 지천의 그 때 일이 생각나 말 위에서 개연한 마음으로 절구 일곱 수를 읊었다 중 일곱 번째 수)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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