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보리이시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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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보리이시가키는 일본 성곽에서 사용된 오르막 돌담 형태의 석축 기술을 의미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이묘들이 안골왜성에서 사용했던 공법을 활용하여 일본 국내에서 성을 쌓거나 보수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일국일성령과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많은 성들이 파괴되어, 현재 노보리이시가키가 남아있는 성은 몇 곳에 불과하다. 주요 유적으로는 마쓰야마성, 히코네성, 스모토성 등이 있으며, 중세 성곽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유구가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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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리이시가키 | |
---|---|
지도 | |
개요 | |
종류 | 돌담 |
소재 | 돌 |
축조 목적 | 방어 |
위치 | 성곽의 해자 일부를 가로질러 언덕까지 |
특징 | 독특한 구조 경사면에 축조된 돌담 |
상세 정보 | |
축조 시기 | 주로 임진왜란 이후 |
축조 배경 | 조선의 왜성 공격 방어 해안 방어 강화 |
구조 | 성벽의 일부를 해자 너머 언덕까지 연결 적의 침입을 늦추고 측면 공격 가능 |
주요 축조 지역 | |
지역 | 일본 서부 해안 지역 |
대표적인 예 | 마쓰야마성 이마바리성 우와지마성 |
역사적 의미 | |
의미 | 임진왜란 이후 일본 성곽 건축 기술의 발전 독특한 방어 전략의 구현 |
문화재 지정 현황 | 일부 성곽의 노보리이시가키가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 보존 및 연구의 대상 |
2. 한국의 노보리이시가키
문록·경장의 역에서 다이묘들의 침공 거점으로 조선반도에 왜성이 축조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일본으로부터의 보급을 위한 선착장을 확보하기 위해 해안이나 하천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혼마루와 덴슈는 전망이 좋고 방비의 요새가 되는 작은 언덕이나 산 위에 있었지만, 병사들의 거주 건물 등은 보급구에 가까운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의 침입을 막기 위해 혼마루와 항구를 둘러싸듯이 산복의 양쪽에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이것을 노보리이시가키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왜성을 축조했던 다이묘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성을 축성하거나 보수할 때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를 활용했다. 안골왜성에 주둔했던 가토 요시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1615년 일국일성령과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많은 성들이 파괴되어, 현재 노보리이시가키가 남아있는 성은 몇 곳 되지 않으며, 그 역사적 과정에 대한 연구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다.[1]
산복으로부터의 적의 진입을 막는다는 생각은 중국의 만리장성과 통하는 것이지만, 전투원 보호를 위한 국지적인 것이었다. 또한, 축성의 형태는 대부분 평산성이었으며, 구루와의 형태로는 렌카쿠식, 테이카쿠식, 린카쿠식 등이 있었다[1]。
일본군의 철퇴 후, 덴슈나 야구라는 파괴되거나 손상되어 소멸되었지만, 노보리이시가키를 포함해 덴슈다이 기타 석축은 대부분 현존하고 있다. 단, 성에 따라서는 석축의 각 부분 몇 곳이 파괴되어 있다. 가장 장대한 노보리이시가키는 구마가와성(동쪽으로 뻗은 반도의 성)에 있으며, 산정의 혼마루 북쪽 노보리이시가키의 기슭까지의 길이는 600m, 남쪽이 400m이다.
최근, 중국·조선반도·일본의 축성 교류사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구로서, 대한민국에서도 조사·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3. 일본의 노보리이시가키
3. 1. 주요 유적
3. 2. 중세 성곽의 노보리이시가키
안골왜성에 있었던 가토 요시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이묘들이 일본 국내에서 성의 축성과 보수를 할 때 노보리이시가키를 사용했다. 하지만, 1615년 일국일성령과 메이지 유신을 전후해 많은 성들이 파각되어 노보리이시가키가 남아있는 성은 몇 곳에 불과하며,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는 않고 있다.
마쓰야마성은 1602년부터 가토 요시아키가 축성한 성으로 대규모의 노보리이시가키가 남아있다. 메이지 유신을 전후해 북쪽 부분은 어떤 이유로 철거되었고, 남쪽 부분만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히코네성은 1603년부터 막부의 노역할당에 따라 서국(西國)[5] 다이묘들이 축성에 참여하였고, 이 무렵 노보리이시가키가 축성되었다.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스모토성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석벽을 보수할 때 축조된 것으로 일국일성령에 따라 파각되어 그 형태나 석벽의 보존 상태는 그리 좋지 않다.
위의 성보다 더 오래된 중세 성곽에도 오르막 돌담 형태의 유구가 존재했다.
4. 의의 및 평가
문록·경장의 역에서 다이묘들의 침공 거점으로 조선반도에 왜성이 축조되었는데, 대부분 일본으로부터의 보급을 위한 선착장을 확보하기 위해 해안이나 하천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혼마루와 덴슈는 전망이 좋고 방비의 요새가 되는 작은 언덕이나 산 위에 있었지만, 병사들의 거주 건물 등은 보급구에 가까운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의 침입을 막기 위해 혼마루와 항구를 둘러싸듯이 산복의 양쪽에 일본식 석축을 쌓았다. 이것을 노보리이시가키라고 한다.[1]
산복으로부터의 적의 진입을 막는다는 생각은 중국의 만리장성과 통하는 것이지만, 전투원 보호를 위한 국지적인 것이었다. 또한, 축성의 형태는 대부분 평산성이었으며, 구루와의 형태로는 렌카쿠식, 테이카쿠식, 린카쿠식 등이 있었다.[1]
일본군의 철퇴 후, 덴슈나 야구라는 파괴되거나 손상되어 소멸되었지만, 노보리이시가키를 포함해 덴슈다이 기타 석축은 대부분 현존하고 있다. 단, 성에 따라서는, 석축의 각 부분 몇 곳이 파괴되어 있다. 가장 장대한 노보리이시가키는 구마가와성(동쪽으로 뻗은 반도의 성)에 있으며, 산정의 혼마루 북쪽 노보리이시가키의 기슭까지의 길이는 600m, 남쪽이 400m이다.
최근, 중국·조선반도·일본의 축성 교류사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구로서, 대한민국에서도 조사·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안골포성에 있던 가토 요시아키나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한반도에서 귀국한 다이묘들이 국내에서 축성 및 개수할 때 그 수법을 사용했다고 전해지지만, 일국일성령과 메이지 유신 전후에 파각된 성곽이 많아, 노보리이시가키의 역사적 과정에 대해서는, 축조된 장소 등을 포함하여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다.
- '''마쓰야마성'''
: 1602년부터 가토 요시아키가 축성을 시작했을 때, 국내 최대 규모의 노보리이시가키를 축조했지만, 메이지 유신 전후에 북쪽 부분이 어떤 이유로 철거되었으며, 남쪽 부분만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 '''히코네성'''
: 1603년부터 막부의 부역으로 축성이 시작되었을 때, 노보리이시가키가 축조되었으며, 현재까지 양호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단, 본래의 산상과 산록의 구루와를 연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산복의 이동을 방해하는 세로 해자의 발전 형태를 의도하여 축조되었다.
- '''스모토성'''
: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석축을 대대적으로 개수했을 때, 노보리이시가키를 설치했지만, 일국일성령으로 파각된 탓에 유구로서의 석축 보존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다.
- '''다케다성'''
: 기타센조 곡륜의 북서부, 하방 능선부에 잔존한다.
- '''요나고성'''
: 요나고성 그림에 그려진 노보리이시가키가 혼마루 북서쪽, 나이젠마루의 어문에서 도미야구라 북동쪽 구석까지 확인되었다. 헤이세이 28년도에 노보리이시가키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축성 초기의 깃카와 히로이에 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된다.
참조
[1]
서적
韓國の倭城
釜山博物館
[2]
간행물
城郭談話会2016
[3]
간행물
濱野2018
[4]
간행물
濱野2019
[5]
문서
규슈, 주고쿠, 시코쿠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교토시의 서쪽에 위치한 지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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