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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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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녹림군은 신나라 말기에 기근으로 인해 발생한 반란 집단으로, 왕광과 왕봉 등이 이끌었다. 녹림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키웠으며, 지황 2년에는 형주목의 공격을 격퇴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녹림군은 하강병, 신시병, 평림병, 용릉병 등으로 분열되었고, 이들은 연합하여 경시제를 옹립하고 신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경시제 정권은 내분과 적미군의 공격으로 붕괴되었고, 녹림군 출신 지도자들은 대부분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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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림군
개요
명칭녹림군
중국어绿林军 (Lǜlín Jūn)
로마자 표기Lullin'gyun
활동 기간17년 ~ 25년
활동 지역형주 (荊州, 현재의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
주요 활동신나라에 대한 반란
역사적 배경
원인왕망의 실정, 기근, 황하의 범람
시작17년경, 왕광 등이 녹림산에서 봉기
주요 지도자왕광
왕봉
주유
장앙
주요 전투운취 전투
소장안취 전투
남양 전투
결과신나라 멸망
후한 건국에 기여
녹림군의 일부는 유수에게 투항, 일부는 자체 세력 유지
조직 및 특징
구성주로 유민, 농민, 도적 등으로 구성
이념반(反)신나라, 민생 안정
규모수십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사력초기에는 약했으나 점차 성장
특징규율이 엄격하지 못함
약탈 행위가 잦음
내부 분열이 심함
영향
정치적 영향신나라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 후한 건국에 기여
사회적 영향사회 혼란 야기, 민생 악화
문화적 영향삼국지연의 등 후대 문학 작품에 등장
기타
관련 인물유수 (광무제)
왕망

2. 결성

신나라 말기, 극심한 기근과 관리들의 부패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하군 신시현의 왕광왕봉은 생존을 위해 녹림산(綠林山)을 근거지로 농민들을 모아 녹림군(綠林軍)을 결성하고, 지주들의 저택을 공격하여 식량을 약탈하고 지방 군대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1]

2. 1. 초기 활동

왕광왕봉강하군 신시현에서 분쟁을 조정하다가, 굶주린 사람들을 이끌고 녹림군을 결성했다. 이들은 뤼린 산(綠林山)에 지역 농민들을 모아 지주들의 저택을 공격하여 식량을 약탈하고, 지방 군대에서 무기를 탈취했다.[1] 이후 마무, 왕상, 성단 등 많은 사람들이 합류하여, 수개월 만에 7,000명에서 8,000명으로 세력이 커졌다. 그들은 녹림산을 근거지로 삼고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을 공격하여 식량을 약탈하는 방식으로 활동하였다.[1]

지황 2년(21년), 형주목이 이끄는 2만 군대의 공격을 강하군 운두현에서 물리쳤다. 형주목의 군수물자를 노략하고 강하군 경릉현을 함락했으며, 운두현과 안륙현을 돌아다니며 여자들을 납치해 녹림산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무리가 5만여 명으로 늘어나자, 주와 군에서는 녹림군을 어찌할 수 없었다.[3]

3. 분파

22년, 역병으로 녹림군은 큰 타격을 입고 하강병(下江兵), 신시병(新市兵), 평림병(平林兵) 등으로 흩어졌다.[3] 이들은 각각 남군, 남양군, 평림 등지를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유인 등이 이끈 용릉병(舂陵兵)도 녹림군의 일파였다.

3. 1. 하강병 (下江兵)

왕상, 성단(成丹), 장앙[4] 등은 남군을 기반으로 활동한 하강병(下江兵)이다. 이들은 남구취(남군 편현)로 이동하여 하강군이라고도 불렸다.[2] 지황 3년(22년), 역병으로 녹림군이 절반 가량의 병력을 잃고 흩어지면서 하강병, 신시병 등으로 나뉘었다.[3] 하강병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남군(오늘날의 징저우, 후베이성)으로 향했다.

3. 2. 신시병 (新市兵)

왕광(王匡), 왕봉(王鳳), 마무, 주유 등은 남양군(신나라의 전수군)을 기반으로 활동한 세력이었다.[3] 이들은 모두 신시(新市) 출신이었기 때문에 '신시병'(新市兵)이라고 불렸다.[5]

지황 3년(22년), 역병으로 인해 녹림군이 절반 가량의 병력을 잃자, 녹림군은 흩어져 하강병과 신시병 등으로 나뉘었다.[3] 신시병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남양군(오늘날의 난양, 허난성)으로 향했다.[5]

신나라 말기, 형주 강하군 경산시 남신시현의 유력자였던 왕광왕봉은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수백 명의 민중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여기에 마무, 왕상, 성단 등의 낭인들이 합류하여 녹림산(형주 강하군 당양현)에 웅거하며 세력이 커졌다. 왕광은 형주목이 이끄는 2만 명의 군세를 격파하기도 했다.[2]

3. 3. 평림병 (平林兵)

平林兵|평림병중국어은 진목, 요담 등이 평림에서 일어나 활동한 군사 집단이다.[3] 이들은 녹림군의 일파로 합류하였다.[3]

22년, 녹림군이 갑작스러운 전염병으로 큰 피해를 입고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었을 때, 진목과 요담이 이끄는 인근 반란군은 평림병으로 불렸다. 이들은 모두 평림(오늘날의 쑤이저우, 후베이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5]

3. 4. 용릉병 (舂陵兵)

지황 3년(22년), 유인남양군 용릉현(옛 한나라의 용릉후국)에서 일어난 한나라 황족의 후손들이 이끌었다.[3]

용릉병은 녹림군 중 신시병(新市兵)과 평림병(平林兵)을 불러들여 연합하고 함께 남양군 완현을 공격하려 했으나, 도중에 소장안취에서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에게 대패했다. 신시병과 평림병은 떠나려 했으나, 하강병(下江兵)까지 합류해서 다시 진부와 양구사를 공격해 죽였다. 신나라에서는 납언장군 장우질종장군 진무를 보내서 공격했으나 유인은 이들도 무찔렀다.[5]

유수와 달리, 유연은 왕망의 한 왕좌 찬탈에 오랫동안 분개해 왔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유씨가 권력을 되찾을 것이라는 예언이 퍼져 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유연에게 모여 그를 따랐다. 유연은 자신의 군대를 녹림군의 신시군, 평림군과 합류시켰고, 그들은 많은 마을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서기 22년 겨울, 유연은 남양군 수도인 완성(Wancheng)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했고, 남양 태수인 견부(甄阜)에게 큰 손실을 입었다. 그의 누이 유원과 동생 유중 모두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에 놀란 신시군과 평림군은 연합에서 탈퇴하여 도주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하강병(下江兵)이 근처에 도착했고, 유연은 하강 지도자들에게 존경받는 왕창을 설득하여 자신이 유능한 군사 지도자임을 믿게 했다. 하강군은 연합에 합류했고, 신시군과 평림군도 연합에 남게 되었다.

유연의 지휘하에, 군대는 견부의 후방을 기습하여 정부군의 예비 식량과 무기를 모두 탈취했다. 서기 23년 중국 설날, 유연은 견부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와 그의 조수를 전투에서 죽였다.

4. 연합과 현한의 성립

유현이 황제로 추대된 배경에는 녹림군 내부의 권력 다툼이 있었다. 녹림군이 크게 성장하면서, 여러 장수들은 황제를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 용릉병의 지도자인 유인과 평림병 소속의 경시장군 유현이 후보로 거론되었다.[3][5]

왕상을 비롯한 하강병과[6] 남양의 사대부들은 유인을 지지했지만, 신시병과 평림병은 유현을 지지했다. 결국, 내분을 우려한 유인이 양보하면서 유현이 황제로 추대되었다.[3][5]

경시 원년(23년) 2월, 유현은 경시제로 즉위했다. 녹림군 창시자인 왕광은 정국상공, 왕봉은 성국상공에 봉해졌다. 춘릉군 지도자인 유연은 대사도, 신시군 출신 주위는 대사마, 평림군 두령 진목은 대사공에 임명되었다. 하강군 두령 왕상을 비롯한 연합군 유력 부장들도 요직에 배치되어, 4군의 균형을 고려한 인사였다.

하지만, 곤양과 완 전투에서 유수와 유연 형제가 큰 명성을 얻자, 구 녹림군 장수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주위와 이예의 주도로 유연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수 또한 하북 원정을 떠나면서, 경시 정권은 녹림군의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었다. 그러나 유연의 후임 대사도로 춘릉군 출신 유사가 임명되는 등, 사군의 균형 인사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5. 경시제 정권의 내분과 붕괴

23년 7월, 진목·요담이 이끄는 평림군이 녹림군에 합류했고, 11월에는 유연·유수 형제의 춘릉군도 합류했다. 연합군은 형주 완을 목표로 진군했지만, 소장안취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23년 정월, 비수 전투에서 신나라 군대를 격파하며 세력을 회복했다.

연합군에서는 유연과 유현 중 누구를 천자로 할 것인지 논의가 벌어졌다. 남양 사대부와 왕상은 유연을, 구 녹림군과 평림군 장수들은 유현을 지지했다. 결국 유연은 분열을 피하고자 유현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23년 2월, 유현은 경시제로 즉위했다. 녹림군의 왕광은 정국상공, 왕봉은 성국상공, 춘릉군의 유연은 대사도, 신시군의 주위는 대사마, 평림군의 진목은 대사공에 임명되는 등, 4군의 균형을 고려한 인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곤양 전투와 완 전투에서 유연·유수 형제가 명성을 얻자, 구 녹림군 장수들은 위기감을 느껴 주위, 이예 주도로 유연을 주살했다. 유수도 하북 원정으로 떠나면서, 경시 정권은 녹림군 색채가 강해졌다.

25년, 경시제 휘하 군대는 등우의 군대와 적미군에게 대패하고, 경시제와 왕광·장앙 등 유력 부장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신도건, 성단, 진목 등이 경시제에게 죽임을 당하고, 외효는 근거지로 도망쳤다. 결국 왕광·장앙 등은 적미군에 항복하여 장안으로 이끌었고, 25년 9월 경시제를 포로로 만들었다. 이로써 녹림군이 세운 경시 정권은 녹림군 창시자 왕광과 장앙에 의해 멸망하는 비극을 맞았다.

5. 1. 유연의 죽음

경시제는 劉縯의 능력에 두려움을 느껴 劉稷|유직중국어을 체포하여 처형하려 했다. 유연이 중재하려 하자, 경시제는 이 기회를 틈타 유연 또한 처형했다.[1] 그러나 자신이 한 일에 부끄러움을 느껴 유연의 동생 劉秀는 살려두었고, 무신후로 임명했다.[1]

5. 2. 왕망의 멸망과 경시제의 통치

경시제는 왕광을 선봉으로 낙양을, 신도건과 이송을 선봉으로 장안을 공격하게 했다. 가는 길에 있는 백성들은 모두 한나라 군대에 합류했다. 장안의 젊은이들 또한 봉기하여 미앙궁을 공격했고, 왕망은 궁궐 전투에서 사망했다.

왕망 사후, 경시제는 수도를 완성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이후 적미 장군 범숭을 포함하여 항복한 신나라 지방 관료들의 직책을 유지하도록 허락했으나, 이 정책은 일관되지 않았고 지방 총독들은 곧 권력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했다.

24년, 경시제는 수도를 다시 장안으로 옮겼다. 장안 백성들은 경시제의 관리들을 반역자로 여겼기에 불만을 품었다. 경시제는 사면령을 내려 상황을 진정시켰으나, 소심함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 공식 회의에서 경시제는 당황했고, 장군들에게 "오늘 얼마나 약탈했습니까?"와 같은 질문을 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잃었다.

결국 경시제의 무능함은 각지의 통치를 약화시켰다. 24년 말, 황하 북쪽 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파견된 유수는 사실상 독립 상태였고, 적미는 장안을 공격하려 했다.

경시 원년(23년) 9월, 경시제의 군대는 장안을 공략하여 왕망을 죽이고 신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경시 2년(24년) 2월, 경시제는 장안으로 천도하고, 이송과 조맹의 진언에 따라 종실과 연합군의 유력 부장들을 모두 왕으로 봉하려 했다. 대사마 주위가 반대했지만, 경시제는 결국 왕으로 봉했다. 이 결과 주위는 좌천되었고, 왕광과 장앙은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경시제는 승상 이송이나 조맹과 같은 측근들만 의지하고, 이숙 등 간언하는 부하들을 탄압하여 구심력을 상실하고 자멸해 갔다.[1]

5. 3. 적미군과의 전쟁 및 경시제의 죽음

유수는 그의 장군들과 경시제의 장군들이 하내와 낙양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후, 25년 여름에 마침내 경시제와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그는 황제를 칭하고 (역사서에서 후한으로 알려진 왕조를 세움) 곧 그의 장군 등우는 현대의 산시성을 점령하여 경시제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켰다.[1]

궁지에 몰린 경시제의 여러 장군들은 그를 납치하여 고향인 남양군으로 도망칠 음모를 꾸몄다. 이 공모자들에는 장앙, 요참, 호은, 신도건과 군벌 외효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발각되어 대부분 처형되었지만, 장앙은 장안의 대부분을 점령하여 경시제가 도망치도록 강요했고, 마침 적미군이 접근하고 있었다. 경시제는 그 후 증거도 없이 왕광, 진무, 성단이 장앙과 공모했다고 의심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계략을 써서 진무와 성단을 처형했고, 이에 왕광은 장앙에게 합류했다.[1]

경시제에게 여전히 충성스러운 장군들은 결국 장앙을 수도에서 몰아낼 수 있었지만, 그 당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장앙과 그의 동맹들은 적미군에게 항복했고, 그들과 협력하여 장안을 다시 공격했고, 장안은 빠르게 함락되었다. 경시제는 도망쳤고, 몇몇 충성스러운 추종자들만 따라갔다. 25년 겨울, 그는 적미군에게 항복했고, 결국 살해되었다.[1]

6. 녹림군 지도자들의 최후

광무제에게 항복하여 후한에서도 활동한 왕상, 마무, 주유를 제외한 대부분의 녹림군 출신 지도자들은 몰락하거나 잊혀졌다. 왕봉은 경시 2년에 의성왕에 봉해진 이후 행적이 묘연하고, 장앙은 적미군에 항복한 후 기록이 없다. 왕광은 적미군을 이탈하여 광무제에게 항복했다가 변심하여 도망쳤기 때문에 처형당했다.[1] 성단과 진목은 경시 3년에 경시제에게 반역 혐의로 주살되었고, 요담건무 2년 유가에게 패배하여 참살되었다.[1]

참조

[1] 서적 An Outline History of China https://archive.org/[...] Joint Publishing Co. 1979
[2] 문서
[3] 서적 후한서
[4] 문서
[5] 서적 후한서
[6] 서적 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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