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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쓰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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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마쓰 고분은 일본 나라현 아스카 마을에 있는 고분으로, 1972년 발굴 조사에서 고구려 양식의 벽화가 그려진 석실이 발견되어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분은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벽화는 16명의 인물상, 사신, 별자리 등을 묘사하고 있다. 벽화는 곰팡이와 빗물 침투로 열화되어 2007년 해체되어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복원된 형태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고분의 피장자는 특정되지 않았으며, 덴무 천황의 황자, 신하, 한반도계 왕족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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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쓰 고분
개요
고마쓰즈카 고분 벽화 서벽 여자 군상
고마쓰즈카 고분 벽화 서벽 여자 군상
명칭고마쓰즈카 고분 (高松塚古墳)
형태2단 원분 (円墳)
소재지나라현다카이치군아스카무라 히라타 (奈良県高市郡明日香村平田)
상세 정보
축조 연대후지와라쿄 시대 (藤原京期) (694년 - 710년)
규모직경 23m, 높이 5m
사적 지정1973년 (쇼와 48년) 특별 사적
출토품벽화 (국보), 동경 등
피장자불명

2. 발굴 조사

다카마쓰 고분의 발굴 조사는 1972년 3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20][7] 발굴이 시작된 계기는 1970년 10월경 마을 사람이 생강을 저장하려고 구덩이를 팠는데, 구덩이 안쪽에서 오래된 다듬어진 돌이 발견된 것이다. 지역 사람들이 아스카촌에 요청했고, 아스카촌이 자금을 마련하여 나라현립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하게 되었다. 발굴은 아스카촌이 사업 주체가 되었고,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가 실제 발굴을 담당했다. 당시 아스카촌에서는 마을 출범 15주년을 기념하여 촌사를 편찬하기 위해 미조사 유적 발굴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다카마쓰 고분 발굴도 그 일환이었다.[7] . 나라현립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소장 스에나가 마사오의 지휘 아래, 현장 발굴은 다테 무네야스와 간사이 대학교 조교수 아보시 요시노리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대학교와 류코쿠 대학교의 연구자·학생 그룹에 의해 이루어졌다. 석실이 검출되었고, 선명하게 채색된 벽화가 발견된 것은 같은 해 3월 21일의 일이다.[20][7]

고분은 가마쿠라 시대 무렵에 도굴을 당했으며, 석실 남벽에는 도굴공이 뚫려 있었지만, 벽화의 채색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도굴을 면한 부장품 일부도 이때 검출되었다. 극채색 벽화의 출현은 고고학상 유례없는 대발견으로 톱 뉴스가 되었고, 문화청은 즉시 벽화의 보존 대책 및 연구 조사를 시작했다. 벽화 발견 직후 다카마쓰 고분 응급 보존 대책 조사회가 설치되었고, 발견된 지 한 달도 안 된 1972년 4월 6일4월 17일에 첫 학술 조사가 실시되었다. 또한, 응급 보존 대책 조사회와는 별도로, 고고학, 미술사, 보존 과학 등의 전문가로 구성된 다카마쓰 고분 종합 학술 조사회가 설치되어 1972년 10월에 동 조사회에 의한 학술 조사가 실시되었다.[20][7]

고분은 1973년 4월 23일, 특별사적으로, 또 극채색 벽화는 1974년 4월 17일국보로 지정되었다. 고분의 연대는 도굴을 면하고 남아 있던 동경 등으로부터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종말기로 추정되었지만, 2005년 발굴 조사에 의해 후지와라쿄기 694년 - 710년 사이로 확정되었다.[8]

다카마쓰 고분의 매장 시설은 고고학적 분류에서는 "횡구식 석곽" (よこぐちしきせっかく)이라고 불리지만, 본 항목에서는 보다 일반적인 "석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 1. 발굴 경위

다카마쓰 고분(고분)의 발굴조사는 1972년 3월 1일부터 개시되었다.[20][7] 1970년 10월경 마을 사람이 생강을 저장하려고 굴을 파다가, 내부에서 오래된 다듬어진 돌을 발견한 것이 발굴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현지의 사람들이 아스카 마을을 움직여, 아스카 마을의 자금으로 나라현립 가시하라 고고학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아스카 마을에서는 마을이 발족한 15주년을 기념하여 마을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조사되지 않은 유적의 발굴을 진행하였고, 다카마쓰 고분의 발굴도 그 일환이었다.[20]

나라 현립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소장인 스에나가 마사오의 지휘하에, 현장에서의 발굴은 다테 무네야스와 간사이 대학교의 조교수인 아보시 요시노리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대학교, 류코쿠 대학교의 연구자와 학생 팀에 의해 시행되었다.[20][7] 석실이 발견되고, 선명하게 채색된 벽화가 발견된 것은 같은해 3월 21일경이었다.[20][7] 고분은 1973년 4월 23일, 특별사적으로, 극채색벽화는 1974년 4월 17일에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20][7]

고분은 가마쿠라 시대 즈음에 도굴되어 석실의 남쪽 벽에는 도굴 구멍이 나 있었으나, 벽화의 채색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도굴을 피한 부장품의 일부도 발견되었다. 극채색화의 출현은 일본 고고학사상 드물게 볼 수 있는 대발견으로서, 문화청은 곧바로 벽화의 보존 대책과 연구조사에 들어갔다. 다카마쓰 고분 응급보존대책조사회가 설치되어, 발견으로부터 1개월도 지나지 않은 1972년 4월 6일과 4월 17일에 처음으로 학술조사가 실시되었다. 또한, 응급보존대책조사회에는 별도로 고고학, 미술사, 보존 과학 등의 전문가로 구성된 다카마쓰 고분 총합학술조사회가 설치되어 1972년 10월에 학술조사가 실시되었다.[20][7]

다카마쓰 고분의 매장 시설의 고고학적 분류는 ‘횡구식 석곽’으로 불린다. 고분의 연대는 도굴을 면하고 남아 있던 동경 등으로부터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종말기로 추정되었지만, 2005년 발굴 조사에 의해 후지와라쿄기 694년 - 710년 사이로 확정되었다.[8]

2. 2. 발굴 과정

다카마쓰 고분(일본어: 高松塚古墳 다카마쓰즈카 고훈)의 발굴 조사는 1972년 3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20] 발굴은 1970년 10월경 마을 사람이 생강을 저장하려고 구덩이를 파다가 안쪽에서 오래된 다듬어진 돌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7] 지역 주민들의 요청으로 아스카촌이 자금을 마련하여 나라현립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아스카촌은 마을 출범 15주년을 기념하여 마을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조사되지 않은 유적의 발굴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다카마쓰 고분 발굴도 그 일환이었다.[7]

발굴은 나라현립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소장 스에나가 마사오의 지휘 아래, 다테 무네야스와 간사이 대학교 조교수 아보시 요시노리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대학교와 류코쿠 대학교의 연구자와 학생 그룹에 의해 이루어졌다.[20] 1972년 3월 21일, 석실이 발견되었고, 선명하게 채색된 벽화가 발견되었다.[20]

고분은 가마쿠라 시대 무렵에 도굴되었으나, 벽화의 채색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도굴을 피한 부장품 일부도 발견되었다. 극채색 벽화의 출현은 일본 고고학상 유례없는 대발견으로, 문화청은 즉시 벽화의 보존 대책 및 연구 조사를 시작했다. 다카마쓰 고분 응급 보존 대책 조사회가 설치되어, 1972년 4월 6일4월 17일에 첫 학술 조사가 실시되었다. 또한, 고고학, 미술사, 보존 과학 등의 전문가로 구성된 다카마쓰 고분 종합 학술 조사회가 설치되어 1972년 10월에 학술 조사가 실시되었다.[20]

고분은 1973년 4월 23일 특별사적으로, 극채색 벽화는 1974년 4월 17일 국보로 지정되었다.[20] 고분의 연대는 도굴을 피하고 남아 있던 동경 등으로부터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종말기로 추정되었지만, 2005년 발굴 조사에 의해 후지와라쿄기 694년 - 710년 사이로 확정되었다.[8]

다카마쓰 고분의 매장 시설은 고고학적 분류에서는 "횡구식 석곽"이라고 불린다.

2. 3. 지정 및 보존 노력

다카마쓰 고분의 발굴조사는 1972년 3월 1일부터 개시되었다. 1970년 10월경 마을 사람이 생강을 저장하려고 굴을 파다가, 내부에서 오래된 다듬어진 돌을 발견한 것이 발굴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20] 현지인들이 아스카 마을을 움직여, 아스카 마을의 자금으로 나라 현립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橿原考古学研究所)가 발굴조사를 담당하게 되었다.[20] 당시 아스카 마을에서는 마을이 발족한 15주년을 기념하여 마을 역사를 편찬하기 위해 조사되지 않은 유적의 발굴을 진행하였고, 다카마쓰 고분의 발굴도 그 일환이었다.[20] 나라 현립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소장인 스에나가 마사오(末永雅雄)의 지휘하에, 현장에서의 발굴은 다테 무네야스(伊達宗泰)와 간사이 대학의 조교수인 아보시 요시노리(網干善教)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대학교, 류우코쿠 대학의 연구자와 학생 팀에 의해 시행되었다.[20] 석실이 발견되고, 선명하게 채색된 벽화가 발견된 것은 같은 해 3월 21일경이었다.[20] 고분은 1973년 4월 23일, 특별사적(特別史跡)으로, 극채색 벽화는 1974년 4월 17일에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분은 가마쿠라 시대 즈음에 도굴되어 석실의 남쪽 벽에는 도굴 구멍이 나 있었으나, 벽화의 채색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도굴을 피한 부장품의 일부도 발견되었다. 극채색화의 출현은 일본 고고학 사상 드물게 볼 수 있는 대발견으로서, 문화청(文化庁)은 곧바로 벽화의 보존 대책과 연구 조사에 들어갔다. 다카마쓰 고분 응급 보존 대책 조사회가 설치되어, 발견으로부터 1개월도 지나지 않은 1972년 4월 6일과 4월 17일에 처음으로 학술 조사가 실시되었다. 또한, 응급 보존 대책 조사회에는 별도로 고고학, 미술사, 보존 과학 등의 전문가로 구성된 다카마쓰 고분 총합 학술 조사회(高松塚古墳総合学術調査会)가 설치되어 1972년 10월에 학술 조사가 실시되었다.

일본 문화청은 석실을 해체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벽화의 추가적인 열화를 방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아스카 미인'이라고 불리는 그림은 묘실 벽화 중 열화가 진행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묘실의 현재 상황으로는 추가적인 손상을 막고 곰팡이의 확산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례적인 보존 방법이 고려되고 있다.

키토라 고분과는 달리, 아스카의 다카마쓰 고분 벽 회반죽 조각을 제거하여 보존을 위해 강화하는 것은 회반죽에 수많은 작은 균열이 있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3. 고분의 구조 및 연대

고분은 점토모래를 층층이 쌓아 만들었다. 직경은 약 16m이고 높이는 5m이다. 발굴 결과 고구려 양식의 의상을 입은 궁정의 벽화가 그려진 채색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 매장실이 나왔다. 그림은 붉은색, 파란색, 금색, 은색 박을 사용하여 4명의 남성 추종자와 4명의 시녀, 그리고 청룡, 현무, 백호, 주작 별자리를 표현한 풀 컬러로 그려졌다. 이 그림들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분 서벽의 여성 벽화


이 고분이 누구를 위해 지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장식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 왕족이나 고위 귀족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보자는 오사카베 친왕(705년 사망), 유게 친왕(699년 사망), 다케치 친왕(654년경 – 696년), 태정대신을 역임한 진신노란의 장군이자 덴무 천황의 아들인 이소노카미 아손 마로 (640–717), 백제 마지막 왕의 아들인 구다라노 코니키시 젠코 (617–700) 등이다.

도굴을 피해 남아 있는 동경(청동 거울) 등으로 7세기부터 8세기 초의 종말기로 추정되었으나, 2005년 발굴조사를 통해 후지와라쿄우기(694년 ~ 710년)에 축조된 것으로 확정되었다.

3. 1. 고분 구조

고분은 점토모래를 층층이 쌓아 만들었다. 직경은 약 16m이고 높이는 5m이다.[1][2] 발굴 결과 고구려 양식의 의상을 입은 궁정의 벽화가 그려진 채색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 매장실이 나왔다. 그림은 붉은색, 파란색, 금색, 은색 박을 사용하여 4명의 남성 추종자와 4명의 시녀, 그리고 청룡, 현무, 백호, 주작 별자리를 표현한 풀 컬러로 그려졌다.[1][2] 이 그림들은 국보로 지정되었다.[1][2]

이 고분이 누구를 위해 지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장식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 왕족이나 고위 귀족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보자는 오사카베 친왕(705년 사망), 유게 친왕(699년 사망), 다케치 친왕(654년경 – 696년), 이소노카미 아손 마로 (640–717), 구다라노 코니키시 젠코 (617–700) 등이다.[1][2]

3. 2. 축조 연대

도굴을 피해 남아 있는 동경(청동 거울) 등으로 7세기부터 8세기 초의 종말기로 추정되었으나, 2005년 발굴조사를 통해 후지와라쿄우기(694년 ~ 710년)에 축조된 것으로 확정되었다.[21] 다카마쓰 고분은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960년대에 지역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21]

4. 석실 벽화

석실은 응회암을 잘라 만든 횡구식 석곽으로, 남북 길이 약 265cm, 동서 폭 약 103cm, 높이 약 113cm의 작은 공간이다.[9] 벽화는 동벽, 서벽, 북벽, 천장 4면에 회반죽을 바른 위에 그려져 있으며, 인물상, 해와 달, 사신, 별자리가 소재이다.[9] 동벽에는 남자 군상, 청룡, 해, 여자 군상이, 서벽에는 남자 군상, 백호, 달, 여자 군상이 대칭적으로 그려져 있다.[9] 남자·여자 군상은 모두 4인 1조로 총 16명이 그려져 있으며, 서벽의 여자 군상은 '아스카 미인'으로 불리기도 한다.[9] 이들은 정관의식에 보이는 정월 초하루 조하 의식에 참여하는 사인 등의 소지품과 일치하는 물건들을 지니고 있다.[9]

북벽에는 현무가, 천장에는 자미원을 중심으로 이십팔수 등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9] 남벽에는 주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도굴로 소실되었다.[9] 해와 달 앞에는 산들이 그려져 있고, 해에는 금박, 달에는 은박 흔적이 있었으나 대부분 유실되었다.[10]

벽화는 고구려 고분군(세계유산)과 비교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신도는 고구려 양식의 고분에서 유래했지만, 다카마쓰 고분에서는 중국(당대)의 신기술을 도입한 화풍이 나타난다.[11] 여자 군상의 복장은 고구려 고분의 벽화 부인상 복장과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12]

석곽 레플리카 전개도
간사이 대학 박물관 다카마쓰 고분 벽화 재현 전시실 전시。


벽화는 발견 이후 열화되어 2007년 해체하여 복원 중이다.[22]

4. 1. 벽화의 구성

석실은 응회암을 잘라 만든 횡구식 석곽으로, 남북 길이 약 265cm, 동서 폭 약 103cm, 높이 약 113cm의 작은 공간이다.[9] 벽화는 동벽, 서벽, 북벽, 천장 4면에 회반죽을 바른 위에 그려져 있으며, 인물상, 해와 달, 사신, 별자리가 소재이다.[9] 동벽에는 남자 군상, 청룡, 해, 여자 군상이, 서벽에는 남자 군상, 백호, 달, 여자 군상이 대칭적으로 그려져 있다.[9] 남자·여자 군상은 모두 4인 1조로 총 16명이 그려져 있으며, 서벽의 여자 군상은 '아스카 미인'으로 불리기도 한다.[9] 이들은 정관의식에 보이는 정월 초하루 조하 의식에 참여하는 사인 등의 소지품과 일치하는 물건들을 지니고 있다.[9]

북벽에는 현무가, 천장에는 자미원을 중심으로 이십팔수 등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9] 남벽에는 주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도굴로 소실되었다.[9] 해와 달 앞에는 산들이 그려져 있고, 해에는 금박, 달에는 은박 흔적이 있었으나 대부분 유실되었다.[10]

벽화는 고구려 고분군(세계유산)과 비교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신도는 고구려 양식의 고분에서 유래했지만, 다카마쓰 고분에서는 중국(당대)의 신기술을 도입한 화풍이 나타난다.[11] 여자 군상의 복장은 고구려 고분의 벽화 부인상 복장과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12]

벽화는 발견 이후 열화되어 2007년 해체하여 복원 중이다.[22]

4. 2. 벽화의 내용

석실은 응회암을 잘라 만든 돌을 짜 맞춘 횡구식 석곽으로, 남쪽에 묘도(墓道)가 있고 남북 방향으로 긴 평면 형태이다. 석실의 크기는 남북 길이 약 265cm, 동서 폭 약 103cm, 높이 약 113cm로, 어른 2명이 몸을 굽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공간이다.[9]

벽화는 석실의 동벽, 서벽, 북벽, 천장의 4면에 그려져 있으며, 얇게 바른 회반죽 위에 그려졌다. 벽화의 소재는 인물상, 해와 달, 사신(四神), 별자리이다. 동벽에는 남자 군상, 청룡, 해, 여자 군상이, 서벽에는 남자 군상, 백호, 달, 여자 군상이 그려져 있다. 남자와 여자 군상은 모두 4인 1조로 구성되어 총 16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특히 서벽의 여자 군상은 발견 당시 색채가 선명하여 '아스카 미인(飛鳥美人)'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9] 인물 군상이 지닌 물건들은 정관의식에 보이는 신년 하례 의식에 참석하는 시중 드는 사람의 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신년 하례 의식에는 해와 달, 사신의 깃발도 세워진다.

북벽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남벽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가마쿠라 시대의 도굴로 소실된 것으로 여겨진다. 천장의 그림은 원형 금박으로 별을 표시하고, 별과 별 사이를 붉은 선으로 연결하여 별자리를 표현했다. 중앙에는 북극오성과 사보성, 그 주위로 이십팔수가 표시되어 있다.

동쪽과 서쪽의 해와 달 앞에는 운해에 떠 있는 듯이 솟아 있는 산들이 그려져 있다. 해에는 금박이, 달에는 은박이 붙어 있던 흔적이 있었으나, 발굴 조사 당시에는 대부분 유실되었고, 가마쿠라 시대 등의 도굴꾼에 의해 인위적으로 깎여 나간 것으로 생각된다.

벽화는 발굴 초기부터 고구려 고분군과 비교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10] 다카마쓰 고분과 기토라 고분의 사신도는 고구려의 화풍뿐만 아니라 중국(당나라)의 필치나 덧칠 등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것이 특징이며, 천공도는 고구려에서 전래된 원도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11] 또한, 여자 군상의 복장은 고구려 고분의 수무총과 무용총의 벽화 부인상의 복장과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12]

벽화는 발견 이후 열화(劣化)되어 2007년에 해체하여 복원 중이다.[22]

4. 3. 벽화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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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 벽화는 응회암을 자른 돌 위에 두께 수 mm의 회반죽을 바른 후 그 위에 그려졌다. 벽화는 석실의 동벽, 서벽, 북벽, 천장 4면에 있으며, 소재는 인물상, 해와 달, 사신, 별자리이다.[9] 동벽에는 남자 군상, 청룡, 해, 여자 군상이, 서벽에는 남자 군상, 백호, 달, 여자 군상이 그려져 있다. 남녀 군상은 각각 4명씩 총 16명이 그려져 있으며, 이 중 서벽의 여자 군상은 발견 당시 색채가 선명하여 '아스카 미인(飛鳥美人)'으로 불리기도 했다.[9] 인물 군상이 지닌 물건들은 정관의식에 나오는 정월 초하루 의식에 참석하는 사인 등 관인의 소지품과 일치한다. 이 의식에는 해와 달, 사신의 깃발도 세워진다.[9]

북벽에는 현무가, 천장에는 북극오성과 사보성, 이십팔수 등 별자리가 금박으로 그려져 있다. 남벽에는 주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도굴로 소실되었다. 동서벽의 해와 달 앞에는 산들이 그려져 있고, 해에는 금박, 달에는 은박 흔적이 있었으나 대부분 도굴꾼에 의해 훼손되었다.

벽화는 발견 이후 열화(劣化)되어 2007년 해체하여 복원 중이다.[22] 벽화는 고구려 고분군(세계유산)과 비교 연구되고 있으며, 고구려 양식뿐 아니라 당나라의 기술도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10][11] 여자 군상의 복장은 고구려 고분의 수무총과 무용총 벽화 속 부인상 복장과 유사하다.[12]

4. 4. 고구려 벽화와의 비교

다카마쓰 고분의 벽화는 발굴 초기부터 고구려 고분군(세계유산)과의 비교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10] 특히 사신도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특징적인 모티프인데, 다카마쓰 고분과 기토라 고분의 사신도는 고구려의 화풍뿐만 아니라 당나라 시대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점이 주목받는다.[11] 천장 벽화의 별자리는 고구려에서 전래된 원도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1]

여자 군상의 복장은 고구려 고분의 수무총과 무용총 벽화 속 부인상의 복장과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된다.[12] 서벽의 여자 군상은 발견 당시 색채가 선명하여 '아스카 미인(飛鳥美人)'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9]

석실의 동벽에는 청룡과 해, 서벽에는 백호와 달이 그려져 있고, 북벽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자미원을 중심으로 이십팔수 등 별자리가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벽화의 구성과 내용은 고대 중국의 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다.

2012년에는 몽골에서 다카마쓰 고분 벽화와 유사한 벽화가 발견되었다. 7세기 돌궐이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 벽화에는 청룡과 백호가 묘사되어 있으며, 중국인, 소그드인 등 다양한 인물들의 행렬이 그려져 있다. 벽화는 발견 이후 열화(劣化)되어, 2007년 해체하여 복원 중에 있다.[22]

5. 피장자

피장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특정되지 않았다. 애초에 아스카 지역의 고분군에서 피장자가 특정된 경우는 드물다. 피장자론에 관해서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덴무 천황의 황자설

:오사카베 황자, 다케이치 황자, 유게 황자 등 덴무 천황의 황자를 피장자로 하는 설.

:*오사카베 황자 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나오키 고지로(오사카 시립 대학 명예 교수), 이노쿠마 가네카츠(현 교토 타치바나 대학 명예 교수), 왕중주 (중국 사회 과학원 고고 연구소 연구원) 등이다. 근거는 46, 7세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오사카베 황자가 출토 인골의 추정 연령에 가깝다는 점, 부장품, 인물상의 복장 등이다.

:*다케이치 황자 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하라다 다이로쿠(고고학자), 가와카미 구니히코(나라현립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부소장, 현 고베 여자 대학 교수), 도요타 아리쓰네(작가) 등이다.

:*유게 황자 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스가야 후미노리(현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소장, 시가현립 대학 명예 교수), 우메하라 다케시(철학자) 등이다.

:그러나 출토된 피장자의 치아와 턱뼈로 미루어 40대에서 60대의 초로의 인물로 추정되며, 20대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여겨지는 유게 황자의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된다.

;신하설

:오카모토 겐이치(교토 학원 대학 교수), 시라이시 다이치로(나라 대학 교수) 등은 이시카미 마로 설을 주장한다. 이 설이 맞다면 다카마쓰 고분나라 시대의 연대가 된다.

;한반도계 왕족설

:*센다 미노루(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는 백제 백제왕 젠코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홋타 게이이치(고야산 대학 교수)는 고구려의 왕족 클래스가 피장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5. 1. 덴무 천황의 황자설

덴무 천황의 황자를 피장자로 비정하는 설에는 오사카베 황자, 다케이치 황자, 유게 황자 등이 거론된다.

  • 오사카베 황자 설은 나오키 고지로(오사카 시립 대학 명예 교수), 이노쿠마 가네카츠(현 교토 타치바나 대학 명예 교수), 왕중주 (중국 사회 과학원 고고 연구소 연구원) 등이 주장한다. 이들은 46, 7세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오사카베 황자가 출토 인골의 추정 연령에 가깝다는 점, 부장품, 인물상의 복장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 다케이치 황자 설은 하라다 다이로쿠(고고학자), 가와카미 구니히코(나라현립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부소장, 현 고베 여자 대학 교수), 도요타 아리쓰네(작가) 등이 주장한다.
  • 유게 황자 설은 스가야 후미노리(현 가시하라 고고학 연구소 소장, 시가현립 대학 명예 교수), 우메하라 다케시(철학자) 등이 주장한다. 그러나 출토된 피장자의 치아와 턱뼈로 미루어 40대에서 60대의 초로의 인물로 추정되며, 20대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여겨지는 유게 황자의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된다.

5. 2. 신하설

오카모토 겐이치(교토 학원 대학 교수), 시라이시 다이치로(나라 대학 교수) 등은 이시카미 마로 설을 주장한다. 이 설이 맞다면 다카마쓰 고분은 나라 시대의 연대가 된다.

5. 3. 한반도계 왕족설

센다 미노루(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는 피장자가 백제왕 젠코라고 주장한다. 홋타 게이이치(고야산 대학 교수)는 피장자가 고구려의 왕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6. 벽화의 열화와 보존

일본 문화청은 석실을 해체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벽화의 추가적인 열화를 방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13] '아스카 미인'이라고 불리는 그림은 묘실 벽화 중 열화가 진행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13] 묘실의 현재 상황으로는 추가적인 손상을 막고 곰팡이의 확산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례적인 보존 방법이 고려되고 있다.[13]

발굴 조사 이후, 벽화는 현상태로 현지 보존하기로 결정되었고, 문화청이 석실 내의 온도와 습도 조절, 곰팡이 방지 처리 등의 보존 관리, 그리고 1981년 이후 연 1회 정기 점검을 실시해 왔다.[13] 그러나, 2002년부터 2003년에 걸쳐 촬영된 사진을 조사한 결과, 빗물의 침투와 곰팡이 발생 등으로 벽화의 퇴색 및 변색이 현저해진 것이 2004년에 밝혀졌다.[13]

다카마쓰 고분 벽화의 곰팡이에 의한 열화는 2004년 6월에 출판된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의해 현상이 밝혀지고,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후 일반에게 알려졌다.[13] 1972년 벽화 발견 당시, 석실 내에는 남벽의 도굴공에서 흘러 들어온 토사가 퇴적되어 있었고, 동벽의 남자 군상의 오른쪽 절반 등, 토사나 지하수의 영향으로 화면이 오염된 부분도 있었지만, 벽화의 대부분에는 선명한 색채가 남아 있었다.[13] 이러한 벽화는 쪼갠 돌에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쪼갠 돌 위에 수 밀리미터 두께로 칠해진 옻칠 층 위에 그려져 있는데, 옻칠 자체가 취약해져서 박락의 위험성이 우려되었다.[13] 또한, 1,300년 가까이 토중에 있었고, 폐쇄된 환경에서 보존되어 온 석실이 개방되어, 사람이 들어오면서 온습도 등의 환경 변화, 곰팡이, 벌레 등의 생물에 의한 벽화의 열화가 우려되었다.[13]

석실은 성인 2명이 웅크린 자세로 겨우 들어갈 정도의 넓이 밖에 되지 않아, 공간의 점만 고려해도, 현지에서의 일반 공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13] 석실 내는 상대 습도가 100%에 가까운 고습의 환경이었고, 수리나 조사를 위해 사람이 단시간 석실 내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온도의 상승과 습도의 저하를 가져왔다.[13] 벽화의 보존 방법에 대해서는 국내외 전문가로부터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고, 석실에서 벽화를 떼어내 별도로 보존하는 방법을 포함하여, 다양한 안이 검토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석실은 해체하지 않고, 벽화는 현지에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13]

그 후, 석실 남쪽의 전실 부분에 1974년부터 공조 설비를 갖춘 보존 시설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1976년 3월에 완공되었다.[13] 이 보존 시설은 전실, 준비실, 기계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석실 내부의 온습도를 모니터링하면서, 전실 내의 온습도를 이에 맞춰 조절하는 것이다.[13] 벽화의 보존 수리 공사는 1976년 9월부터 제1차, 제2차, 제3차로 나누어 실시되었고, 1985년을 기점으로 제3차 수리가 종료되었다.[13] 이 기간 동안, 1980년에 곰팡이가 대량 발생했지만, 이때는 약품 등을 사용한 제거책이 효과를 보았다.[13]

2001년 2월, 석실과 보존 시설 사이의 취합부 천장 붕괴 방지 작업을 할 때, 작업원이 방호복을 착용하지 않고 입실한 것이, 결과적으로 대량의 곰팡이 발생으로 이어졌다고 지적되고 있다.[14] 벽화의 열화는 이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어 온 것이지만, 문화청이 곰팡이 발생 및 벽화 열화의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게 되었다.[14]

2002년 1월 28일에는 서벽의 손상 사고가 일어났다.[14] 이날, 수리를 담당하던 담당자 중 한 명이 실수로 공기 청정기를 넘어뜨려, 서벽 남자 군상의 아래 여백에 상처를 냈다.[14] 같은 날, 다른 담당자가 실내등에 접촉하여, 서벽 남자상의 가슴 부분의 옻칠이 박락되었다.[14] 문화청에서는 "통상적인 수리" 범위 내라고 하여, 이러한 사고를 공표하지 않았다.[14]

2003년 3월,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긴급 보존 대책 검토회가 설치되었고, 이듬해 2004년 6월에는 "긴급"을 "항구적"으로 바꾼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항구 보존 대책 검토회가 발족했다.[13] [2004년] 6월 20일자 "아사히 신문" 오사카 본사판 아침 신문이 "백호"의 열화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벽화의 열화 문제가 일반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13]

벽화의 열화 방지책 및 보존 방법에 대해 여러 검토가 계속되었다.[13] 특별 사적(고분)과 국보(벽화) 중 어느 것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13] 최종적으로, 벽화가 그려진 석실을 일단 해체·이동하여 수리하고, 수리 완료 후에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식이 채택되었고, 2005년 6월 27일,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항구 보존 대책 검토회에서, 이 방법을 채택하기로 결정되었다.[13]

석실을 해체하고, 벽화가 그려진 쪼갠 돌을 꺼낸다는 것은, 관점에 따라서는, 특별 사적인 둔덕의 파괴이다.[13] 이를 받아들여, 같은 해 10월 25일, 일본 고고학 협회는 "특별 사적 다카마쓰 고분의 보전·보호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적은 현지에서 보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3] 같은 해 8월 4일, 아스카 보존 재단은 "현지 수복 요망서"를 문화청과 보존 대책 검토회에 제출, 아스카 마을 의회는 같은 해 8월 11일, 벽화의 현지 보존 대책 요망을 결의하고, 문화청에 제출하는 등,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현지에서의 보존 수복을 바라는 목소리도 여전히 높았다.[13]

200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일어난 곰팡이의 대량 발생과 서벽의 손상 사고에 대해서는 제3자에 의한 조사 위원회에서 재조사되었다.[14] 같은 위원회는 2006년 6월 19일에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 거기에서는, 문화청의 칸막이식 섹셔널리즘의 폐해, 정보 공개에 대한 의식 부족 등이 지적되었다.[14] 2001년 2월의 천장 붕괴 방지 공사에 따른 곰팡이의 대량 발생에 대해서는, 작업원이 멸균한 방호복을 착용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14] 게다가, 곰팡이 발생의 사실이 공표된 것은 그로부터 2년이나 지난 후였다.[14] 2002년 1월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벽의 2곳에 손상이 발생했지만, 문화청은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흠집이 눈에 띄지 않도록 보채색했다.[15] 또한, 서벽 손상 사고 2년 전인 2000년 3월 21일에 촬영된 (손상 전의) 벽화 사진을 "최신 사진"이라고 속여 신문사에 제공한 것도 밝혀졌다.[16][17]

이 사태를 받아, 문화청에 의해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항구 보존 대책"을 목적으로 한 고분의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고, 묻혀 있던 주거 등이 발견되어 고분의 본래 형태가 밝혀지고 있다.[13] 또한, 둔덕에서는 과거의 지진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균열이 다수 발견되어, 벌레나 빗물의 침투 경로가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13]

둔덕의 발굴 조사와 석실의 해체 수리는 2006년 10월 2일에 시작되었다.[13] 2007년 1월에는 고분 전체를 덮는 단열 덮개가 완성, 내부의 온습도는 10℃, 90%로 유지되었다.[13] 같은 해 3월 12일에는 국영 아스카 역사 공원 내에 수리 시설이 완성되었다.[13] 석실은 일단 해체·반출된 후, 이 수리 시설로 옮겨져, 수리가 진행되었다.[13] 4월 5일에는 4장의 천장석 중 1장이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져, 전용 차량으로 수리 시설로 옮겨졌다.[13] 이후, 4장의 천장석과 8장의 벽석은 한 장씩 이동되었고, 5월 10일·11일에는 "서벽석 3"이라고 불리는, "아스카 미인"이 그려진 돌이 이동되었다.[13] 마지막 12번째 벽석(서벽석 1)이 이동된 것은 6월 26일의 일이다.[13]

수리 중인 2008년 11월 25일에 안료 분석 중, 동벽 여자 군상의 안료 부분을 기재로 손상시키는 사고가 발생했다.[13]

그 후에는 보존 시설의 철거와 함께 발굴 조사에 근거한 형태의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2009년 10월 24일부터 일반 공개되었다.[18] 둔덕의 각도가 급하기 때문에, 식재된 울타리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출입은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18]

2020년 3월 26일, 12년이 걸린 벽화의 수리가 완료되었다.[19]

6. 1. 벽화 열화 문제

일본 문화청은 석실을 해체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벽화의 추가적인 열화를 방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13] 묘실의 현재 상황으로는 추가적인 손상을 막고 곰팡이의 확산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례적인 보존 방법이 고려되고 있다.[13]

발굴 조사 이후, 벽화는 현상태로 현지 보존하기로 결정되었고, 문화청이 석실 내의 온도와 습도 조절, 곰팡이 방지 처리 등의 보존 관리, 그리고 1981년 이후 연 1회 정기 점검을 실시해 왔다. 그러나, 2002년부터 2003년에 걸쳐 촬영된 사진을 조사한 결과, 빗물의 침투와 곰팡이 발생 등으로 벽화의 퇴색 및 변색이 현저해진 것이 2004년에 밝혀졌다.[13]

다카마쓰 고분 벽화의 곰팡이에 의한 열화가 일반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문화청이 2004년 6월에 출판한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의해 현상이 밝혀지고,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후이다.[13] 1972년 벽화 발견 당시, 석실 내에는 남벽의 도굴공에서 흘러 들어온 토사가 퇴적되어 있었고, 동벽의 남자 군상의 오른쪽 절반 등, 토사나 지하수의 영향으로 화면이 오염된 부분도 있었지만, 벽화의 대부분에는 선명한 색채가 남아 있었다. 벽화는 쪼갠 돌에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쪼갠 돌 위에 수 밀리미터 두께로 칠해진 옻칠 층 위에 그려져 있는데, 옻칠 자체가 취약해져서 박락의 위험성이 우려되었다. 또한, 1,300년 가까이 토중에 있었고, 폐쇄된 환경에서 보존되어 온 석실이 개방되어, 사람이 들어오면서 온습도 등의 환경 변화, 곰팡이, 벌레 등의 생물에 의한 벽화의 열화가 우려되었다. [13]

석실은 성인 2명이 웅크린 자세로 겨우 들어갈 정도의 넓이 밖에 되지 않아, 공간의 점만 고려해도, 현지에서의 일반 공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석실 내는 상대 습도가 100%에 가까운 고습의 환경이었고, 수리나 조사를 위해 사람이 단시간 석실 내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온도의 상승과 습도의 저하를 가져왔다. 벽화의 보존 방법에 대해서는 국내외 전문가로부터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고, 석실에서 벽화를 떼어내 별도로 보존하는 방법을 포함하여, 다양한 안이 검토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석실은 해체하지 않고, 벽화는 현지에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13]

그 후, 석실 남쪽의 전실 부분에 1974년부터 공조 설비를 갖춘 보존 시설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1976년 3월에 완공되었다. 벽화의 보존 수리 공사는 1976년 9월부터 제1차, 제2차, 제3차로 나누어 실시되었고, 1985년을 기점으로 제3차 수리가 종료되었다. 이 기간 동안, 1980년에 곰팡이가 대량 발생했지만, 이때는 약품 등을 사용한 제거책이 효과를 보았다.[13]

다음으로 곰팡이의 대량 발생을 보인 것은 2001년이다. 같은 해 2월, 석실과 보존 시설 사이의 취합부(とりあいぶ)라고 불리는 부분의 천장 붕괴 방지 작업을 할 때, 작업원이 방호복을 착용하지 않고 입실한 것이, 결과적으로 대량의 곰팡이 발생으로 이어졌다고 지적되고 있다. 벽화의 열화는 이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어 온 것이지만, 문화청이 곰팡이 발생 및 벽화 열화의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게 되었다.[13][14]

2002년 1월 28일에는 서벽의 손상 사고가 일어났다. 이날, 수리를 담당하던 담당자 중 한 명이 실수로 공기 청정기를 넘어뜨려, 서벽 남자 군상의 아래 여백에 상처를 냈다. 같은 날, 다른 담당자가 실내등에 접촉하여, 서벽 남자상의 가슴 부분의 옻칠이 박락되었다. 문화청에서는 "통상적인 수리" 범위 내라고 하여, 이러한 사고를 공표하지 않았다.[13]

2003년 3월,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긴급 보존 대책 검토회가 설치되었고, 이듬해 2004년 6월에는 "긴급"을 "항구적"으로 바꾼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항구 보존 대책 검토회가 발족했다. 같은 2004년 6월에는 『국보 다카마쓰 고분』이 간행되어, 벽화의 열화, 특히 서벽의 "백호"의 현저한 열화가 밝혀졌다[13].[2004년] 6월 20일자 "아사히 신문" 오사카 본사판 아침 신문이 "백호"의 열화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벽화의 열화 문제가 일반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13]

벽화의 열화 방지책 및 보존 방법에 대해 여러 검토가 계속되었다. 특별 사적(고분)과 국보(벽화) 중 어느 것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최종적으로, 벽화가 그려진 석실을 일단 해체·이동하여 수리하고, 수리 완료 후에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식이 채택되었고, 2005년 6월 27일,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항구 보존 대책 검토회에서, 이 방법을 채택하기로 결정되었다. [13]

200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일어난 곰팡이의 대량 발생과 서벽의 손상 사고에 대해서는 제3자에 의한 조사 위원회에서 재조사되었다. 2006년 6월 19일에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 거기에서는, 문화청의 칸막이식 섹셔널리즘의 폐해, 정보 공개에 대한 의식 부족 등이 지적되었다. 2001년 2월의 천장 붕괴 방지 공사에 따른 곰팡이의 대량 발생에 대해서는, 작업원이 멸균한 방호복을 착용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2002년 1월에는 서벽의 2곳에 손상이 발생했지만, 문화청은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흠집이 눈에 띄지 않도록 보채색했다. 서벽 손상 사고 2년 전인 2000년 3월 21일에 촬영된 (손상 전의) 벽화 사진을 "최신 사진"이라고 속여 신문사에 제공한 것도 밝혀졌다.[13][14][15][16][17]

둔덕의 발굴 조사와 석실의 해체 수리는 2006년 10월 2일에 시작되었다. 2007년 1월에는 고분 전체를 덮는 단열 덮개가 완성, 내부의 온습도는 10℃, 90%로 유지되었다. 같은 해 3월 12일에는 국영 아스카 역사 공원 내에 수리 시설이 완성되었다. 석실은 일단 해체·반출된 후, 이 수리 시설로 옮겨져, 수리가 진행되었다. 4월 5일에는 4장의 천장석 중 1장이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져, 전용 차량으로 수리 시설로 옮겨졌다. 이후, 4장의 천장석과 8장의 벽석은 한 장씩 이동되었고, 5월 10일·11일에는 "서벽석 3"이라고 불리는, "아스카 미인"이 그려진 돌이 이동되었다. 마지막 12번째 벽석(서벽석 1)이 이동된 것은 6월 26일의 일이다.[13]

수리 중인 2008년 11월 25일에 안료 분석 중, 동벽 여자 군상의 안료 부분을 기재로 손상시키는 사고가 발생했다.[13]

그 후에는 보존 시설의 철거와 함께 발굴 조사에 근거한 형태의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2009년 10월 24일부터 일반 공개되었다[18]. 2020년 3월 26일, 12년이 걸린 벽화의 수리가 완료되었다[19].

6. 2. 보존 및 복원 노력

일본 문화청은 석실을 해체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벽화의 추가적인 열화를 방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13] '아스카 미인'이라고 불리는 그림은 묘실 벽화 중 열화가 진행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13] 묘실의 현재 상황으로는 추가적인 손상을 막고 곰팡이의 확산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례적인 보존 방법이 고려되고 있다.[13]

발굴 조사 이후, 벽화는 현상태로 현지 보존하기로 결정되었고, 문화청이 석실 내의 온도와 습도 조절, 곰팡이 방지 처리 등의 보존 관리, 그리고 1981년 이후 연 1회 정기 점검을 실시해 왔다.[13] 그러나, 2002년부터 2003년에 걸쳐 촬영된 사진을 조사한 결과, 빗물의 침투와 곰팡이 발생 등으로 벽화의 퇴색 및 변색이 현저해진 것이 2004년에 밝혀졌다.[13]

다카마쓰 고분 벽화의 곰팡이에 의한 열화가 일반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문화청이 2004년 6월에 출판한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의해 현상이 밝혀지고,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후이다.[13] 1972년 벽화 발견 당시, 석실 내에는 남벽의 도굴공에서 흘러 들어온 토사가 퇴적되어 있었고, 동벽의 남자 군상의 오른쪽 절반 등, 토사나 지하수의 영향으로 화면이 오염된 부분도 있었지만, 벽화의 대부분에는 선명한 색채가 남아 있었다.[13] 이러한 벽화는 쪼갠 돌에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쪼갠 돌 위에 수 밀리미터 두께로 칠해진 옻칠 층 위에 그려져 있는데, 옻칠 자체가 취약해져서 박락의 위험성이 우려되었다.[13] 또한, 1,300년 가까이 토중에 있었고, 폐쇄된 환경에서 보존되어 온 석실이 개방되어, 사람이 들어오면서 온습도 등의 환경 변화, 곰팡이, 벌레 등의 생물에 의한 벽화의 열화가 우려되었다.[13] 열화를 어떻게 막고, 벽화를 후세에 전해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발견 초기부터 여러 가지로 검토되었다.[13]

석실은 성인 2명이 웅크린 자세로 겨우 들어갈 정도의 넓이 밖에 되지 않아, 공간의 점만 고려해도, 현지에서의 일반 공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13] 석실 내는 상대 습도가 100%에 가까운 고습의 환경이었고, 수리나 조사를 위해 사람이 단시간 석실 내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온도의 상승과 습도의 저하를 가져왔다.[13] 벽화의 보존 방법에 대해서는 국내외 전문가로부터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고, 석실에서 벽화를 떼어내 별도로 보존하는 방법을 포함하여, 다양한 안이 검토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석실은 해체하지 않고, 벽화는 현지에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13]

그 후, 석실 남쪽의 전실 부분에 1974년부터 공조 설비를 갖춘 보존 시설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1976년 3월에 완공되었다.[13] 이 보존 시설은 전실, 준비실, 기계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석실 내부의 온습도를 모니터링하면서, 전실 내의 온습도를 이에 맞춰 조절하는 것이다.[13] 유의해야 할 점은, 이 보존 시설은, 고분의 석실 내의 온습도를 직접적으로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석실 내의 자연 온습도의 변화에 맞춰 전실의 온습도를 조절하고 있다는 점이다.[13] 즉, 점검 수리 등을 위해 석실에 사람이 들어갈 때, 외부의 온습도 영향을 받지 않도록, 보존 시설 내의 온습도를 미리 석실 내와 동일한 조건으로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13] 벽화의 보존 수리 공사는 1976년 9월부터 제1차, 제2차, 제3차로 나누어 실시되었고, 1985년을 기점으로 제3차 수리가 종료되었다.[13] 이 기간 동안, 1980년에 곰팡이가 대량 발생했지만, 이때는 약품 등을 사용한 제거책이 효과를 보았다.[13]

2001년 2월, 석실과 보존 시설 사이의 취합부(とりあいぶ)라고 불리는 부분의 천장 붕괴 방지 작업을 할 때, 작업원이 방호복을 착용하지 않고 입실한 것이, 결과적으로 대량의 곰팡이 발생으로 이어졌다고 지적되고 있다.[14] "취합부"란, 보존 시설과 석실의 경계 부분으로, 흙이 노출되어 있는 부분이다.[14] 벽화의 열화는 이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어 온 것이지만, 문화청이 곰팡이 발생 및 벽화 열화의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게 되었다.[14]

2002년 1월 28일에 서벽의 손상 사고가 일어났다.[14] 이날, 수리를 담당하던 담당자 중 한 명이 실수로 공기 청정기를 넘어뜨려, 서벽 남자 군상의 아래 여백에 상처를 냈다.[14] 같은 날, 다른 담당자가 실내등에 접촉하여, 서벽 남자상의 가슴 부분의 옻칠이 박락되었다.[14] 이 두 사고 중, 전자는 그림이 없는 여백 부분에 생긴 상처였고, 후자는 벽화 발견 당시부터 유입 토사로 오손되어, 오리지널 채색이 남지 않은 부분이었기 때문에, 석실 밖의 흙을 물에 녹인 것으로 수리가 이루어졌으며, 문화청에서는 "통상적인 수리" 범위 내라고 하여, 이러한 사고를 공표하지 않았다.[14]

2003년 3월,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긴급 보존 대책 검토회가 설치되었고, 이듬해 2004년 6월에는 "긴급"을 "항구적"으로 바꾼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항구 보존 대책 검토회가 발족했다.[13] 같은 2004년 6월에는 『국보 다카마쓰 고분』이 간행되어, 벽화의 열화, 특히 서벽의 "백호"의 현저한 열화가 밝혀졌다.[13] 2004년 6월 20일자 "아사히 신문" 오사카 본사판 아침 신문이 "백호"의 열화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벽화의 열화 문제가 일반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13]

벽화의 열화 방지책 및 보존 방법에 대해 여러 검토가 계속되었다.[13] 특별 사적(고분)과 국보(벽화) 중 어느 것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13] 미래를 위한 벽화의 수복과 보존의 방식에 대해서는, 고분의 둔덕 전체를 보존 시설로 덮는 방법, 벽화를 떼어내 다른 시설에서 항구 보존하는 방법 등, 모든 가능성이 추구되었지만, 최종적으로, 벽화가 그려진 석실을 일단 해체·이동하여 수리하고, 수리 완료 후에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식이 채택되었고, 2005년 6월 27일,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항구 보존 대책 검토회에서, 이 방법을 채택하기로 결정되었다.[13]

석실을 해체하고, 벽화가 그려진 쪼갠 돌을 꺼낸다는 것은, 관점에 따라서는, 특별 사적인 둔덕의 파괴이다.[13] 이를 받아들여, 같은 해 10월 25일, 일본 고고학 협회는 "특별 사적 다카마쓰 고분의 보전·보호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적은 현지에서 보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3] 같은 해 8월 4일, 아스카 보존 재단은 "현지 수복 요망서"를 문화청과 보존 대책 검토회에 제출, 아스카 마을 의회는 같은 해 8월 11일, 벽화의 현지 보존 대책 요망을 결의하고, 문화청에 제출하는 등,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현지에서의 보존 수복을 바라는 목소리도 여전히 높았다.[13]

200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일어난 곰팡이의 대량 발생과 서벽의 손상 사고에 대해서는 제3자에 의한 조사 위원회에서 재조사되었다.[14] 같은 위원회는 2006년 6월 19일에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는데, 거기에서는, 문화청의 칸막이식 섹셔널리즘의 폐해, 정보 공개에 대한 의식 부족 등이 지적되었다.[14] 다카마쓰 고분의 경우, 특별 사적인 고분 자체는 문화청 기념물과, 국보인 벽화는 미술 공예과(2001년 1월부터 "미술 학예과"로 개칭)의 관할이며, 양자의 연계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한다.[14] 2001년 2월의 천장 붕괴 방지 공사에 따른 곰팡이의 대량 발생에 대해서는, 작업원이 멸균한 방호복을 착용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15] 이 공사는 기념물과가 발주했지만, 현장의 관리는 미술 학예과에 맡겨두었고, 기념물과 직원들은 공사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15] 도쿄 문화재 연구소에는 공사를 실시한다는 사실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다.[15] 또한, 방호복 착용 등을 규정한 "보존 수리 매뉴얼"의 존재도 현장에 주지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곰팡이의 대량 발생을 초래했다.[15] 게다가, 곰팡이 발생의 사실이 공표된 것은 그로부터 2년이나 지난 후였다.[15] 2002년 1월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벽의 2곳에 손상이 발생했지만, 문화청은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흠집이 눈에 띄지 않도록 보채색했다.[15] 보채색은 상기 서벽의 2곳 외에 동벽, 북벽, 천장에도 이루어졌지만 이에 대해서도 공표되지 않았다.[15] 또한, 서벽 손상 사고 2년 전인 2000년 3월 21일에 촬영된 (손상 전의) 벽화 사진을 "최신 사진"이라고 속여 신문사에 제공한 것도 밝혀졌다.[16][17]

이 사태를 받아, 문화청에 의해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항구 보존 대책"을 목적으로 한 고분의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고, 묻혀 있던 주거 등이 발견되어 고분의 본래 형태가 밝혀지고 있다.[13] 또한, 둔덕에서는 과거의 지진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균열이 다수 발견되어, 벌레나 빗물의 침투 경로가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13]

둔덕의 발굴 조사와 석실의 해체 수리는 2006년 10월 2일에 시작되었다.[13] 2007년 1월에는 고분 전체를 덮는 단열 덮개가 완성, 내부의 온습도는 10℃, 90%로 유지되었다.[13] 같은 해 3월 12일에는 국영 아스카 역사 공원 내에 수리 시설이 완성되었다.[13] 석실은 일단 해체·반출된 후, 이 수리 시설로 옮겨져, 수리가 진행되었다.[13] 4월 5일에는 4장의 천장석 중 1장이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져, 전용 차량으로 수리 시설로 옮겨졌다.[13] 이후, 4장의 천장석과 8장의 벽석은 한 장씩 이동되었고, 5월 10일·11일에는 "서벽석 3"이라고 불리는, "아스카 미인"이 그려진 돌이 이동되었다.[13] 마지막 12번째 벽석(서벽석 1)이 이동된 것은 6월 26일의 일이다.[13]

수리 중인 2008년 11월 25일에 안료 분석 중, 동벽 여자 군상의 안료 부분을 기재로 손상시키는 사고가 발생했다.[13]

그 후에는 보존 시설의 철거와 함께 발굴 조사에 근거한 형태의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2009년 10월 24일부터 일반 공개되었다.[18] 둔덕의 각도가 급하기 때문에, 식재된 울타리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출입은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18]

2020년 3월 26일, 12년이 걸린 벽화의 수리가 완료되었다.[19]

6. 3. 현황 및 과제

일본 문화청은 석실을 해체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벽화의 추가적인 열화를 방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13] '아스카 미인'이라고 불리는 그림은 묘실 벽화 중 열화가 진행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13] 묘실의 현재 상황으로는 추가적인 손상을 막고 곰팡이의 확산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례적인 보존 방법이 고려되고 있다.[13]

발굴 조사 이후, 벽화는 현상태로 현지 보존하기로 결정되었고, 문화청이 석실 내의 온도와 습도 조절, 곰팡이 방지 처리 등의 보존 관리, 그리고 1981년 이후 연 1회 정기 점검을 실시해 왔다.[13] 그러나, 2002년부터 2003년에 걸쳐 촬영된 사진을 조사한 결과, 빗물의 침투와 곰팡이 발생 등으로 벽화의 퇴색 및 변색이 현저해진 것이 2004년에 밝혀졌다.[13]

다카마쓰 고분 벽화의 곰팡이에 의한 열화는 2004년 6월에 출판된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의해 현상이 밝혀지고,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후 일반에게 알려졌다.[13] 1972년 벽화 발견 당시, 석실 내에는 남벽의 도굴공에서 흘러 들어온 토사가 퇴적되어 있었고, 동벽의 남자 군상의 오른쪽 절반 등, 토사나 지하수의 영향으로 화면이 오염된 부분도 있었지만, 벽화의 대부분에는 선명한 색채가 남아 있었다.[13] 이러한 벽화는 쪼갠 돌에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쪼갠 돌 위에 수 밀리미터 두께로 칠해진 옻칠 층 위에 그려져 있는데, 옻칠 자체가 취약해져서 박락의 위험성이 우려되었다.[13] 또한, 1,300년 가까이 토중에 있었고, 폐쇄된 환경에서 보존되어 온 석실이 개방되어, 사람이 들어오면서 온습도 등의 환경 변화, 곰팡이, 벌레 등의 생물에 의한 벽화의 열화가 우려되었다.[13]

석실은 성인 2명이 웅크린 자세로 겨우 들어갈 정도의 넓이 밖에 되지 않아, 공간의 점만 고려해도, 현지에서의 일반 공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13] 석실 내는 상대 습도가 100%에 가까운 고습의 환경이었고, 수리나 조사를 위해 사람이 단시간 석실 내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온도의 상승과 습도의 저하를 가져왔다.[13] 벽화의 보존 방법에 대해서는 국내외 전문가로부터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고, 석실에서 벽화를 떼어내 별도로 보존하는 방법을 포함하여, 다양한 안이 검토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석실은 해체하지 않고, 벽화는 현지에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13]

그 후, 석실 남쪽의 전실 부분에 1974년부터 공조 설비를 갖춘 보존 시설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1976년 3월에 완공되었다.[13] 이 보존 시설은 전실, 준비실, 기계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석실 내부의 온습도를 모니터링하면서, 전실 내의 온습도를 이에 맞춰 조절하는 것이다.[13] 벽화의 보존 수리 공사는 1976년 9월부터 제1차, 제2차, 제3차로 나누어 실시되었고, 1985년을 기점으로 제3차 수리가 종료되었다.[13] 이 기간 동안, 1980년에 곰팡이가 대량 발생했지만, 이때는 약품 등을 사용한 제거책이 효과를 보았다.[13]

2001년 2월, 석실과 보존 시설 사이의 취합부 천장 붕괴 방지 작업을 할 때, 작업원이 방호복을 착용하지 않고 입실한 것이, 결과적으로 대량의 곰팡이 발생으로 이어졌다고 지적되고 있다.[14] 벽화의 열화는 이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어 온 것이지만, 문화청이 곰팡이 발생 및 벽화 열화의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게 되었다.[14]

2002년 1월 28일에는 서벽의 손상 사고가 일어났다.[14] 이날, 수리를 담당하던 담당자 중 한 명이 실수로 공기 청정기를 넘어뜨려, 서벽 남자 군상의 아래 여백에 상처를 냈다.[14] 같은 날, 다른 담당자가 실내등에 접촉하여, 서벽 남자상의 가슴 부분의 옻칠이 박락되었다.[14] 문화청에서는 "통상적인 수리" 범위 내라고 하여, 이러한 사고를 공표하지 않았다.[14]

2003년 3월,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긴급 보존 대책 검토회가 설치되었고, 이듬해 2004년 6월에는 "긴급"을 "항구적"으로 바꾼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항구 보존 대책 검토회가 발족했다.[13] [2004년] 6월 20일자 "아사히 신문" 오사카 본사판 아침 신문이 "백호"의 열화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벽화의 열화 문제가 일반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13]

벽화의 열화 방지책 및 보존 방법에 대해 여러 검토가 계속되었다.[13] 특별 사적(고분)과 국보(벽화) 중 어느 것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13] 최종적으로, 벽화가 그려진 석실을 일단 해체·이동하여 수리하고, 수리 완료 후에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식이 채택되었고, 2005년 6월 27일,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항구 보존 대책 검토회에서, 이 방법을 채택하기로 결정되었다.[13]

석실을 해체하고, 벽화가 그려진 쪼갠 돌을 꺼낸다는 것은, 관점에 따라서는, 특별 사적인 둔덕의 파괴이다.[13] 이를 받아들여, 같은 해 10월 25일, 일본 고고학 협회는 "특별 사적 다카마쓰 고분의 보전·보호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적은 현지에서 보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3] 같은 해 8월 4일, 아스카 보존 재단은 "현지 수복 요망서"를 문화청과 보존 대책 검토회에 제출, 아스카 마을 의회는 같은 해 8월 11일, 벽화의 현지 보존 대책 요망을 결의하고, 문화청에 제출하는 등,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현지에서의 보존 수복을 바라는 목소리도 여전히 높았다.[13]

2001년부터 2002년에 걸쳐 일어난 곰팡이의 대량 발생과 서벽의 손상 사고에 대해서는 제3자에 의한 조사 위원회에서 재조사되었다.[14] 같은 위원회는 2006년 6월 19일에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 거기에서는, 문화청의 칸막이식 섹셔널리즘의 폐해, 정보 공개에 대한 의식 부족 등이 지적되었다.[14] 2001년 2월의 천장 붕괴 방지 공사에 따른 곰팡이의 대량 발생에 대해서는, 작업원이 멸균한 방호복을 착용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14] 게다가, 곰팡이 발생의 사실이 공표된 것은 그로부터 2년이나 지난 후였다.[14] 2002년 1월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벽의 2곳에 손상이 발생했지만, 문화청은 이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흠집이 눈에 띄지 않도록 보채색했다.[15] 또한, 서벽 손상 사고 2년 전인 2000년 3월 21일에 촬영된 (손상 전의) 벽화 사진을 "최신 사진"이라고 속여 신문사에 제공한 것도 밝혀졌다.[16][17]

이 사태를 받아, 문화청에 의해 "국보 다카마쓰 고분 벽화 항구 보존 대책"을 목적으로 한 고분의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고, 묻혀 있던 주거 등이 발견되어 고분의 본래 형태가 밝혀지고 있다.[13] 또한, 둔덕에서는 과거의 지진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균열이 다수 발견되어, 벌레나 빗물의 침투 경로가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13]

둔덕의 발굴 조사와 석실의 해체 수리는 2006년 10월 2일에 시작되었다.[13] 2007년 1월에는 고분 전체를 덮는 단열 덮개가 완성, 내부의 온습도는 10℃, 90%로 유지되었다.[13] 같은 해 3월 12일에는 국영 아스카 역사 공원 내에 수리 시설이 완성되었다.[13] 석실은 일단 해체·반출된 후, 이 수리 시설로 옮겨져, 수리가 진행되었다.[13] 4월 5일에는 4장의 천장석 중 1장이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져, 전용 차량으로 수리 시설로 옮겨졌다.[13] 이후, 4장의 천장석과 8장의 벽석은 한 장씩 이동되었고, 5월 10일·11일에는 "서벽석 3"이라고 불리는, "아스카 미인"이 그려진 돌이 이동되었다.[13] 마지막 12번째 벽석(서벽석 1)이 이동된 것은 6월 26일의 일이다.[13]

수리 중인 2008년 11월 25일에 안료 분석 중, 동벽 여자 군상의 안료 부분을 기재로 손상시키는 사고가 발생했다.[13]

그 후에는 보존 시설의 철거와 함께 발굴 조사에 근거한 형태의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2009년 10월 24일부터 일반 공개되었다.[18] 둔덕의 각도가 급하기 때문에, 식재된 울타리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출입은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18]

2020년 3월 26일, 12년이 걸린 벽화의 수리가 완료되었다.[19]

7. 기타

7. 1. 기념 발행물

기부금부착특수 우표는 우편 요금 20엔에 5엔의 부가금이 붙은 것 2종류, 우편 요금 50엔에 10엔의 부가금이 붙은 것 1종류가 1973년 3월 26일에 발행되었다. 사진 엽서도 200엔에 판매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Takamatuzuka http://www.asukanet.[...] Asuka net
[2] 웹사이트 特集 高松塚光源 http://www.nara-np.c[...] 2022-01-13
[3] 뉴스 保存公開施設、墳丘近くに建設へ 高松塚古墳の国宝壁画 https://www.nikkei.c[...] 2016-03-23
[4] 웹사이트 高松塚古墳 https://www.asuka-pa[...] 国営飛鳥歴史公園 2020-04-14
[5] 뉴스 高松塚古墳の国宝壁画、13年の修理完了 飛鳥美人など https://www.asahi.co[...] 2020-03-26
[6] 뉴스 高松塚古墳壁画、12年がかりの修復が終了 https://www.nikkei.c[...] 2020-03-26
[7] 서적 高松塚への道 草思社 2007
[8] 뉴스 築造は藤原京期-高松塚古墳 奈良新聞 2005-02-23
[9] 웹사이트 時論公論 「高松塚古墳壁画 保存の議論正念場」 http://www.nhk.or.jp[...] NHK解説委員室 2013-04-11
[10] 서적 高松塚壁画古墳: 朝日シンポジウム 朝日新聞社 1972
[11] 뉴스 高松塚光源-高松塚古墳壁画発見30年 第二部 被葬者の迷宮 〔2〕高句麗の画題に共通性 http://www.nara-np.c[...] 奈良新聞
[12] 서적 宮都と木簡 吉川弘文館 1977
[13] 문서
[14] 문서
[15] 뉴스 読売新聞 2006-05-12
[16] 뉴스 読売新聞 2006-05-25
[17] 웹사이트 誰が国宝・高松塚古墳壁画を殺したのか?高松塚古墳石室解体にみる文化庁の体質 https://www.shundaic[...]
[18] 뉴스 よみがえる高松塚 外観復元終え24日から一般公開 http://www.asahi.com[...] 2009-10-24
[19] 웹사이트 高松塚古墳の壁画 修復終了 奈良 明日香村 https://web.archive.[...] NHK 2020-04-02
[20] 서적 高松塚への道 草思社 2007
[21] 뉴스 築造は藤原京期-高松塚古墳 2005-02-23
[22] 뉴스 日 '아스카 고분 벽화' 1300년 만의 외출 http://news.hankooki[...] 2008-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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