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진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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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순진리회는 강증산(강일순)의 사상을 기반으로 1969년 박한경에 의해 창설된 대한민국의 신종교이다. 1909년 강증산 사망 이후 그의 제자 조철제가 무극도를 세운 것이 기원이며, 이후 태극도를 거쳐 대순진리회로 발전했다. 주요 교리는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도통진경이며, 포덕, 교화, 수도를 기본 사업으로, 구호 자선, 사회 복지, 교육 사업을 중요 사업으로 삼아 학교 및 병원 설립 등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96년 박한경 사망 이후 교단 내 분열이 있었으나, 현재는 여주본부도장 등을 중심으로 종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대순진리회는 600만 명의 신도를 주장하나, 실제 신도 수는 이보다 적을 수 있으며, 포교 방식 및 운영 관련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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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순진리회 | |
|---|---|
| 기본 정보 | |
![]() | |
| 창시자 | 박우당 |
| 주요 지역 | 한국 |
| 언어 | 한국어 (주요 종교 언어이자 공용어) |
| 명칭 | |
| 한국어 | 대순진리회 |
| 한자 | 大巡眞理會 |
| 로마자 표기 | Daesun Jillihoe |
| 기타 | |
| 관련 인물 | 박한경 |
| 참고 문헌 | https://brill.com/view/title/36205 |
2. 역사
대순진리회는 증산교로 알려진 한국의 여러 신종교 중 가장 큰 종교 단체이며, 신봉자들이 신으로 믿는 강증산(1871–1909)의 활동에서 유래되었다.[2] 1909년 강증산 사후, 그의 제자들과 친척들 중 일부가 각기 다른 종교를 설립했고, 이들은 다시 분열되어 경쟁 단체로 갈라졌다.[4]
1996년 박한경(박우당)이 사망한 이후, 대순진리회는 후계자 문제와 교리 해석 차이로 인해 여러 분파로 나뉘어 갈등을 겪었다. 주요 분파는 여주 본부도장, 서울 중곡도장, 포천도장 등이며, 이들은 중앙종의회를 통해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97년에는 금강산 지역에 금강산 토성 수련 도장을 완공하고 거대한 미륵불상을 봉안했다. 교육 및 의료 시스템도 확장되었다.[11]
2. 1. 기원과 초기 발전
대순진리회는 증산교 계열의 신종교로, 태극도의 총도전이었던 박한경이 태극도로부터 독립하여 서울특별시에 본부를 두고 포교를 시작하면서 기원하였다. 1925년 조철제는 전라북도 정읍에 무극도(无極道)를 창시하였으나, 1941년 일제의 종교 단체 해산령으로 인해 강제 해산되었다.[2]8.15 광복 이후 1948년 조철제는 부산에서 종단을 다시 일으키고 태극도(太極道)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8년 조철제가 사망하면서 박한경이 총도전이 되었다.[2] 박한경은 1968년 4월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에 터전을 잡고 1969년 대순진리회를 창립하였다.[27][28]
1909년 강증산이 사망한 후, 1925년 조철제가 무극도를 세웠고, 해방 후에는 부산 감천에 태극도를 창도했다. 1958년 조철제가 사망하자, 박한경이 종통을 이어받아 총도전으로 임명되어 1969년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였다.[27][28]
조정산(조철제의 도호)은 많은 추종자를 모았고, 안면도와 원산도에서 간척 사업을 시작했다. 1925년, 그는 종교 단체인 무극도를 정읍에 설립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의 신종교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1941년 무극도를 해산해야 했다.[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이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1948년 조철제는 단체를 재건하고 1950년에 태극도로 이름을 변경했다.[2] 새로운 본부는 부산에 설립되었으며, 처음에는 시내 중심에 있었다. 나중에 부산의 새로운 도시 계획 규정으로 인해 본부는 태극도 마을(감천문화마을)로 이전되었다.[7]
조정산은 1958년 3월 6일에 사망했다. 처음에는 그의 추종자 대부분이 박한경(박우당)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받아들였다. 태극도는 1958년부터 1968년까지 10년 동안 박한경 아래에서 통합된 운동으로 지속되었다.[5] 1968년, 조정산의 아들 조용래가 박한경을 비판하는 운동을 이끌었고, 두 파벌은 갈라섰다. 조용래의 추종자들은 태극도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태극도 마을에 본부를 두었으며, 박한경은 1969년에 서울 중곡동의 중곡도장을 본부로 하는 대순진리회라는 새로운 종교 단체를 설립했다.[2]
박한경의 지도 아래 대순진리회는 성공적인 운동이 되었다. 일부 설명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큰 신종교가 되었다고 한다.[8]
2. 2. 대순진리회 창립과 성장
1909년 강증산이 화천하자, 1925년 정산(鼎山) 조철제가 전라북도 정읍에 무극도(无極道)를 창시하였으나, 1941년 일제의 '종교 단체 해산령'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27][28] 1948년 8ㆍ15광복 후 부산에서 종단을 다시 일으키고 태극도(太極道)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8년 조철제가 별세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박한경이 총도전이 되었다. 박한경은 1968년 4월 현재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에 터전을 잡고 1969년 대순진리회를 창립하였다.[27][28]조정산은 상당한 수의 추종자를 모았고 제자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안면도와 원산도에서 간척 사업을 시작했다. 1925년, 그는 자신의 종교 단체인 무극도를 정읍에 법적으로 설립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일본의 신종교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조철제는 1941년에 무극도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이 한국에서 철수했고, 1948년 조철제는 단체를 재건하여 1950년에 그 이름을 태극도로 변경할 수 있었다.[2] 새로운 본부는 부산에 설립되었으며, 처음에는 시내 중심에 위치했다. 나중에 부산에서 도입된 새로운 도시 계획 규정으로 인해 본부는 태극도 마을이라고 불리게 된 교외 지역으로 이전되었으며, 이는 감천문화마을로도 알려져 있다.[7]
조정산은 1958년 3월 6일에 사망했다. 처음에는 그의 추종자 대부분이 그가 박우당(朴牛堂, 1917–1996, 또는 운동에서 사용된 음력에 따르면 1917-95)으로 알려진 박한경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받아들였으며, 박한경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군에 강제 입대 후 이 운동에 참여한 교사였다. 태극도는 1958년부터 1968년까지 10년 동안 박한경 아래에서 통합된 운동으로 지속되었다.[5] 1968년, 조정산의 아들 중 한 명인 조용래(趙容來, 1934–2004)가 박한경을 비판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결국 두 파벌은 갈라섰다. 조용래의 추종자들은 태극도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태극도 마을에 본부를 두었으며, 박한경은 1969년에 서울 중곡동의 중곡도장을 본부로 하는 대순진리회라는 새로운 종교 단체를 설립했다.[2]
창설 초기인 1972년 포덕, 교화, 수도를 기본 사업으로 정하고 구호 자선, 사회 복지, 교육 사업을 3대 중요 사업으로 정하였다. 3대 중요 사업의 일환으로 청년회와 부녀회를 통해 구호 자선을 실천하였으며, 1984년 학교법인 대진학원을 설립하여 대진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1992년에는 대진대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른다. 또 1998년에는 의료법인 대진의료재단을 설립하여 분당제생병원을 개원하였고, 2009년 사회복지법인 대순진리회복지재단을 설립하여 대진요양병원, 대진요양시설, 대진복지센터, 대진청소년수련원을 개원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2020년에는 동두천제생병원 개원을 위한 공사를 재개하였다.
박한경의 지도 아래 대순진리회는 성공적인 운동이 되었다. 일부 설명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큰 신종교가 되었다고 한다.[8] 1986년, 여주에 대규모 새 도장이 개관되었고, 1991년에는 대진대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다른 도장들이 세워졌다. 1993년에는 운동의 본부가 여주 도장으로 이전되었다.[9]
2. 3. 사회 공헌 사업 확장
1969년 대순진리회 창설 초기인 1972년 포덕, 교화, 수도를 기본 사업으로 구호 자선, 사회 복지, 교육 사업을 3대 중요 사업으로 정하고 연차적으로 시행해 오고 있다.[27][28] 3대 중요 사업의 일환으로 청년회와 부녀회를 통해 구호 자선을 실천하였으며, 1984년 학교법인 대진학원을 설립하여 서울 하계동에 대진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1992년에는 대진대학교를 개교하였다. 1998년에는 의료법인 대진의료재단을 설립하여 분당제생병원을 개원하였고, 2009년 사회복지법인 대순진리회복지재단을 설립하여 대진요양병원, 대진요양시설, 대진복지센터, 대진청소년수련원을 개원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2020년에는 동두천제생병원 개원을 위한 공사를 재개하였다.2. 4. 분파와 갈등
1996년 1월 박한경이 뚜렷한 후계자를 내세우지 않고 별세하자, 교단은 서로 정통성을 내세우며 분파하게 된다.[29] 2000년 8월 17일 경석규, 이유종 등이 서로 대순진리회를 대표한다며 법원에서 소송을 벌였으나, 2006년 12월 21일 대법원은 판결에서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29] 이어서, 2010년 8월 서울고등법원은 정재헌, 이순악, 주훈재를 공동으로 법률상 대표자인 임시 종무원장으로 선임했다.[30] 서로 갈등 하던 경석규와 이유종은 2010년 사망했으며, 2013년 11월 여주본부도장, 중곡도장, 포천도장을 중심으로 중앙종의회를 개최하여 중앙종의회 의장, 부의장 및 공동대표를 선출하였다.[31] 현재 여주본부도장, 중곡도장, 포천도장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1909년 강증산의 죽음 이후, 그의 주요 제자들과 친척들 중 일부가 각기 다른 새로운 종교를 설립했고, 이 종교들은 다시 분열되어 경쟁 단체로 갈라졌다.[2] 가장 큰 분파는 강증산의 직계 제자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 조철제(제자들에게는 조정산으로 알려짐)는 강증산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1917년에 그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강증산의 누이, 어머니 및 딸에 의해 강증산이 예언에서 발표한 후계자로 인정받았지만, 딸은 결국 별도의 분파를 설립했다.[5]
조정산은 상당한 수의 추종자를 모았고 1925년 자신의 종교 단체인 무극도를 정읍에 법적으로 설립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일본의 신종교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조철제는 1941년에 무극도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이 한국에서 철수했고, 1948년 조철제는 단체를 재건하여 1950년에 그 이름을 태극도로 변경할 수 있었다.[2]
조정산은 1958년 3월 6일에 사망했다. 처음에는 그의 추종자 대부분이 그가 박우당으로 알려진 박한경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받아들였으며, 박한경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군에 강제 입대 후 이 운동에 참여한 교사였다. 태극도는 1958년부터 1968년까지 10년 동안 박한경 아래에서 통합된 운동으로 지속되었다.[5] 1968년, 조정산의 아들 중 한 명인 조용래가 박한경을 비판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결국 두 파벌은 갈라섰다. 조용래의 추종자들은 태극도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태극도 마을에 본부를 두었으며, 박한경은 1969년에 서울 중곡동의 중곡도장을 본부로 하는 대순진리회라는 새로운 종교 단체를 설립했다.[2]
박한경의 지도 아래 대순진리회는 성공적인 운동이 되었다. 1993년에는 운동의 본부가 여주 도장으로 이전되었다.[9] 박우당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1996년(음력으로는 1995년)에 사망했다. 그의 많은 추종자들은 박우당이 살아있는 동안 도통, 즉 도와의 완전한 합일에 이를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박우당의 후계자를 임명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고, 논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분열의 주된 이유는, 박우당의 사망 이전에도 갈등의 동기가 있었고, 그의 말년에 이미 일부 분열이 나타났지만, 박우당의 신격화(즉, 그를 이제 신으로 숭배해야 하는지 아니면 미륵불로 동일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과, 강증산과 조정산의 신격화에 대한 논쟁이었다.[2]
1999년 7월 16일, 이유종에 반대하는 파벌의 지도자들이 여주 본부에 모여 이유종의 사임을 요구했다. 대립이 벌어졌고 경찰이 출동하여 마침내 이유종을 사찰에서 내쫓았다. 경찰은 2000년 1월에도 개입해야 했는데, 이유종의 파벌이 여주 본부를 탈환하려다 실패했기 때문이다.[4] 그러나 이유종의 추종자들은 서울의 대순진리회 중곡도장을 장악했고, 이유종은 스스로 박우당의 후계자라고 선언한 반면, 다수의 그룹은 박우당이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았으며 운동의 공동 지도 체제를 조직했다고 주장했다.[2]
결국, 이유종의 그룹은 다시 분열을 겪었고, 대순진리회는 적어도 5개의 파벌로 갈라졌다. 박우당 추종자의 대다수를 포함하는 한 파벌은 그의 신격화에 반대하며 여주에 본부를 유지했고, 박우당을 신 또는 미륵불로 간주하는 것을 찬성하는 4개의 주요 그룹은 각각 서울의 중곡도장, 포천, 포항, 괴산에 본부를 두었다. 후자의 분파는 현재 대진성주회로 알려져 있다. 2013년, 여주에서 종단의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한 협의회가 열렸으며, 여주 본부, 서울의 중곡도장, 포천 분파가 참석했다. 그들은 교리적 문제에 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지만, 대진대학교와 대순진리회의 의료 시스템의 주요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제생병원에 대한 공동 관리에 합의했다.[10]
3. 교리
대순진리회는 음양합덕(陰陽合德)ㆍ신인조화(神人調化)ㆍ해원상생(解寃相生)ㆍ도통진경(道通眞境)을 종지(宗旨)로 하고, 성(誠)ㆍ경(敬)ㆍ신(信)의 삼법언(三法言)을 수도의 삼요체(三要諦)로, 안심(安心)ㆍ안신(安身)ㆍ경천(敬天)ㆍ수도(修道)를 사강령(綱領)으로 삼고 있다.[12]
대순진리회 신자들은 강증산(강일순)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상제, 즉 옥황상제라고 믿는다. 상제는 인간을 갱신하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통해 지상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19세기 말에 인간의 모습을 취해 이 세상에 내려왔다.[14]
신자들은 "대변혁"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그 후 인간은 가난, 질병,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신과 인간이 통일된 상태로 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17] 그들은 "태을주"라는 주문을 외우는데, 이는 도(道)와의 통일을 앞당긴다고 믿는다.[17] 개벽(개벽, 문자 그대로 "새 시대의 새벽") 또는 지상 낙원으로의 입장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 예측은 이 종교 운동에 의해 금지되었다.[10]
3. 1. 해원상생과 상생
대순진리회는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冤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을 종지(宗旨)로 삼는다.[2] 이 네 가지 훈은 상제의 모든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2]일부 학자들은 세 번째 훈인 "해원상생(解冤相生)"이 대순진리회의 가장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15] 해원상생은 원한을 풀어 상생한다는 의미이다. 강증산은 원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열었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수도(修道)"하고 진리를 전파하며 새로운 원한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쳤다.[15]
대순진리회의 가르침은 진실성, 경건함, 신뢰를 강조하는 점에서 유교와 유사하지만, 가부장제와 사회적 계층에서 벗어난다.[17]
3. 2. 경전과 신앙 체계
대순진리회는 음양합덕(陰陽合德)ㆍ신인조화(神人調化)ㆍ해원상생(解寃相生)ㆍ도통진경(道通眞境)을 종지(宗旨)로 하며, 성(誠)ㆍ경(敬)ㆍ신(信)의 삼법언(三法言)을 수도의 삼요체(三要諦)로, 안심(安心)ㆍ안신(安身)ㆍ경천(敬天)ㆍ수도(修道)를 사강령(綱領)으로 삼고 있다. 경전(經典)은 전경이라 하며, 총 7편 17장 839절로 구성되어 있고 교조(敎祖) 강일순(강증산)과 도주(道主) 조철제(조정산)의 언행ㆍ행적들을 담아 신도들의 수도 지침으로 삼고 있다.[12]대순진리회의 교리는 성스러운 역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를 전파하고 중국에 지상 낙원을 건설하려 했으나 유교의 부패 때문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의 임무는 동방의 신령들이 서방으로 갈 수 있는 문을 열었고, 이는 서방의 과학적, 문화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결국 동서양 모두 물질주의, 탐욕, 전쟁에 굴복했다.[12]
이에 모든 신령들이 상제에게 직접적인 개입을 탄원했고, 상제는 천상, 지상, 인간계의 삼계를 재정립하는 "대순(大巡)"을 수행했다. 그는 서방으로 내려와 동방으로 이동하여 한국에 도착하여 금산사 미륵전의 거대한 미륵불상 안에 30년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신성한 가르침과 천상의 질서에 대한 계획을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에게 드러냈다. 리치가 수세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최제우의 임무는 유교 체제의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상제는 그 후 최제우로부터 천명을 거두고 (1864년에 처형됨) 1871년에 강증산으로 화신했다.[13]
대순진리회 신자들은 강일순(강증산)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상제, 즉 옥황상제라고 믿는다. 상제는 19세기 말에 인간을 갱신하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통해 지상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14]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교 단체 또한 필요했고, 대순진리회는 종교적 정통성의 계승을 통해 조정산, 그리고 박한경(박우당)에 의해 창설되었다고 믿는다.[2]
대순진리회는 그 교리를 "음양의 도덕적 조화", "신과 인간의 조화로운 결합", "원한을 풀어 상생하는 것", "도(道)와의 완전한 통일"이라는 네 가지 훈으로 설명한다. 이 네 가지 훈은 상제의 모든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2] "원한을 풀어 상생하는 것"("해원상생", 解冤相生)은 대순진리회의 가장 독특한 가르침으로 여겨지는데, 강증산이 원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열었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수도(修道)"하고 진리를 전파하며 새로운 원한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15] "수도"의 여정은 대순진리회의 사찰에서 "심우도" 즉, 흰 소를 찾는 것을 은유로 하여 영적인 여정을 묘사한 그림을 통해 묘사된다.[16]
대순진리회의 가르침은 진실성, 경건함, 신뢰를 강조하는 점 등에서 유교와 유사하지만, 대순진리회는 유교를 특징짓는 가부장제와 사회적 계층에서 벗어난다.[17] 대순진리회는 한국의 모든 종교 전통에서 발견되는 용어와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다. 미국 학자 돈 베이커는 대순진리회를 "전형적인 한국 종교"라고 부르며, 대순진리회가 "그 부분의 합보다 더 큰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불교도 아니고, 유교도 아니고, 도교도 아니고, 천도교에서 영감을 받은 것도 아니고, 샤머니즘도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을 합쳐 놓은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18] 박한경(박우당)을 신격화하는 종교 분파는 삼위일체(다른 한국 종교인 태종교의 신념과 유사)를 믿으며,[17] 이 경우 강증산, 조정산, 박우당으로 구성된다.[4]
신자들은 "대변혁"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그 후 인간은 가난, 질병,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신과 인간이 통일된 상태로 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17] 그들은 "태을주"라는 주문을 외우는데, 이는 도(道)와의 통일을 앞당긴다고 믿는다.[17] "개벽"(개벽, 문자 그대로 "새 시대의 새벽") 또는 지상 낙원으로의 입장에 대한 구체적인 날짜 예측은 이 종교 운동에 의해 금지되었다.[10] 그러나 일부 신자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이러한 예측에 관여했는데, 1984년과 조겐슨에 따르면 1988년 하계 올림픽과 관련하여 서울에서 예측을 했다.[4]
4. 조직 및 운영
대순진리회의 조직 운영은 도헌(道憲)에 의해 이루어진다. 도전 (박한경)을 정점으로 의결기관인 중앙종의회와 집행기관인 종무원이 중심이 된다. 종의회는 선감, 교감, 보정 등 각 부의 고위 교직자로 구성된다.[1]
4. 1. 중앙종의회와 종무원
대순진리회의 운영은 도헌(道憲)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도전 (박한경)을 정점으로 의결기관인 중앙종의회와 집행기관인 종무원이 중심이 되어 운영된다. 종무원 아래에는 포정원, 감사원, 육영사업부 등 몇 개의 집행 부서가 있다. 중앙종의회의 구성원은 선감, 교감, 보정 등 각 부의 고위 교직자로 구성되어 있다.[1]대순진리회는 포덕, 교화, 수도를 3대 기본사업으로, 구호·자선, 사회복지, 교육사업을 3대 중요사업으로 책정하고 1970년대 후반부터 활동하고 있다.[1]
4. 2. 3대 기본 사업과 3대 중요 사업
대순진리회는 포덕, 교화, 수도를 3대 기본사업으로, 구호·자선, 사회복지, 교육사업을 3대 중요사업으로 정하고 1970년대 후반부터 활동하고 있다.[2] 대순진리회는 '해원상생(解冤相生)'의 원리를 자선 구호, 사회 복지, 교육이라는 세 가지 주요 사회 활동을 통해 실현해야 한다고 믿는다.[2]대순진리회는 제생병원을 비롯한 노인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 및 복지 시설, 1991년에 설립된 대진대학교와 6개의 고등학교를 운영하는 것으로 한국에서 알려져 있다.[2]
대순진리회 신도들은 매달 금전적인 기부를 하며, 이 기부금은 모두 본부로 보내진다.[20] 대순진리회는 모금된 돈의 70% 이상이 구호 및 자선, 사회 복지, 교육이라는 세 가지 주요 활동에 사용되며, 1975년부터 2013년까지 39년 동안 총 6600억원(약 5.6억달러) 이상이 이 분야에 할당되었다고 보고한다.[20]
5. 재단법인 및 규모
대순진리회는 전국에 5개의 도장, 120여 개의 회관, 200여 개의 회실 및 2,000여 개의 포덕소를 운영하고 있다. 신도 수는 200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처음 지어진 도장은 중곡도장이며, 가장 규모가 큰 도장은 여주본부도장이다. 1993년 대순진리회 본부는 중곡도장에서 여주본부도장으로 이전되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1,500개 이상의 센터를 가지고 있었으며, 여주 본부는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4] 2017년에는 센터가 2,0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2]
대순진리회는 교육, 의료, 사회복지 사업을 삼대중요사업으로 운영하고 있다. 학교법인 대진대학교를 통해 대진대학교, 대진고등학교, 대진여자고등학교, 분당대진고등학교, 일산대진고등학교, 대진디자인고등학교, 대진전자통신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분당제생병원, 대진요양시설, 대진요양병원 등의 의료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동두천시와 고성군에도 제생병원이 들어설 예정이다.[32] 중원대학교는 성주방면의 대진교육재단에서 운영한다.
대순진리회는 600만 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22] 1995년 조선일보 조사에 따르면 신도 수는 67,632명으로 원불교에 이어 6위를 기록했다.[23] 2005년 인구 조사에서는 강증산에서 파생된 종교를 믿는 한국인이 35,000명 미만으로 나타났다.[17] 이러한 조사 결과의 차이는 신자들이 종교적 소속을 밝히지 않거나, 대순진리회와 같은 신종교에 대한 조사 범주가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다.[4][24] 대순진리회의 성장은 조상 숭배, 자기 수련, 메시아주의와 깨달음, 현재에 대한 집중, 그리고 안정적인 조직 시스템에 기인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4]
5. 1. 재단법인 대순진리회
재단법인 '대순진리회'는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도통진경의 대순진리를 종지로 하고, 인간 개조, 정신개벽으로 포덕천하, 구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 건설을 위하여 1987년 12월 8일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재단법인이다.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143-1이다.주요 사업은 대순진리회의 포덕, 교화, 수도 사업 및 이에 부대한 중앙 본부를 비롯한 각 지방 회관의 유지 관리, 국민을 위한 구호 자선 사업 전개, 국가를 위한 사회 복지 사업 전개, 교역자 양성 기관 및 육영사업 유지 경영 등이다.
5. 2. 도장 및 시설 현황
여주본부도장, 중곡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토성수련도장, 제주수련도장 등 5개의 도장이 있고 전국에 120여 개의 회관과 200여 개의 회실 및 2,000여 개의 포덕소를 두고 있으며, 신도수는 200여 만에 이른다. 중곡도장이 처음으로 지어진 도장이고, 이어 지어진 여주본부도장은 가장 규모가 크며, 대순진리회 본부는 1993년 중곡도장에서 여주본부도장으로 이전되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대순진리회는 이미 1,500개 이상의 센터를 가지고 있었으며, 여주에 있는 본부는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4] 2017년에는 센터가 2,0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2]5. 3. 사회 공헌 사업 현황
대순진리회는 '해원상생(解冤相生)'의 원리를 자선 구호, 사회 복지, 교육이라는 세 가지 주요 사회 활동을 통해 실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종교는 제생병원을 비롯한 노인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 및 복지 시설, 1991년에 설립된 대진대학교를 포함한 교육 시설, 그리고 6개의 고등학교로 한국에서 알려져 있다.[2] 영적인 활동 외에도, 환경, 성 평등, 한반도 통일, 세계 평화 달성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캠페인을 벌인다.[19]매달 대순진리회 신도들은 금전적인 기부를 하며, 이 기부금은 모두 본부로 보내진다.[20] 이 종교는 모금된 돈의 70% 이상이 구호 및 자선, 사회 복지, 교육이라는 세 가지 주요 활동에 사용되며, 1975년부터 2013년까지 39년 동안 총 6600억원 (약 5.6억달러) 이상이 이 분야에 할당되었다고 보고한다.[20] 또한, 대순진리회는 "그 규모 면에서 볼 때, 교리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실천적인 종교이며, 그 활동은 한국의 다른 어떤 종교보다 더 영향력 있고 기여도가 높다"고 주장한다.[20]
6. 비판 및 논란
대순진리회에 대한 비판은 주로 강증산 계열의 경쟁 종교와 한국 언론의 전반적인 신흥 종교에 대한 적대감에서 비롯된다.[2] 1990년대 중반, 대순진리회의 주요 여주 본부에서는 공공장소에서의 선교 활동을 전면 금지했으나, 일부 분파에서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10] 요르겐슨은 1990년대에 반대자에 대한 갈취 및 폭력에 대한 소문이 만연했다고 보고했으며,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 사업에 무보수로 일하며 일부 "수련" 기간 동안 하루 4~5시간의 수면만 허용되었다고 한다.[4]
6. 1. 포교 방식 논란
대순진리회에 대한 비판은 주로 강증산 계열의 경쟁 종교와 한국 언론의 전반적인 신흥 종교에 대한 적대감에서 비롯된다.[2] 대순진리회 신도들은 대형 서점이나 서울 지하철에서 포교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행인들에게 동양 사상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본 후 대순진리회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더 자세한 내용을 배울 것을 권유했다.[4] 1990년대 중반, 대순진리회의 주요 여주 본부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공공장소에서의 선교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여전히 일부 다른 분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10] 요르겐슨은 또한 1990년대에 반대자에 대한 갈취 및 폭력에 대한 소문이 만연했다고 보고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 사업에 무보수로 일했으며, 일부 운동의 "수련" 기간 동안 하루 4~5시간의 수면만 허용되었다고 한다.[4]6. 2. 운영 관련 논란
대순진리회에 대한 비판은 주로 강증산 계열의 경쟁 종교와 한국 언론의 전반적인 신흥 종교에 대한 적대감에서 비롯된다.[2] 대순진리회 신도들은 대형 서점이나 서울 지하철에서 포교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이들은 행인들에게 동양 사상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본 후 대순진리회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더 자세한 내용을 배울 것을 권유했다.[4] 1990년대 중반, 대순진리회의 주요 여주 본부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공공장소에서의 선교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여전히 일부 다른 분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10] 요르겐슨은 또한 1990년대에 반대자에 대한 갈취 및 폭력에 대한 소문이 만연했다고 보고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 사업에 무보수로 일했으며, 일부 운동의 "수련" 기간 동안 하루 4~5시간의 수면만 허용되었다고 한다.[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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