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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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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야발은 발해 건국에 기여한 인물로, 대조영의 동생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생애와 행적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신당서》에는 대인수의 4세조로 기록되어 있으며, 대무예와 대립한 대문예 대신 흑수말갈 정벌군을 이끈 대일하가 그의 아들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대명충 이후 대인수가 즉위하면서 발해 왕계가 대조영 계통에서 대야발 계통으로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대인수가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대야발을 대조영의 동생으로 설정한 것이 의도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단기고사》를 집필했다는 설이 있으나,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점을 고려할 때 신빙성은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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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대야발
원어 이름大野勃
본명대야발(大野勃)
다른 이름태야발(太野勃)
별명미상
출생일생년 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일몰년 미상
사망지미상
배우자미상
자녀대원기(大元璣)
대일하(大壹夏)
부친걸걸중상(乞乞仲象)
모친시씨(時氏)
종교미상
가문영순 태씨(永順 太氏)
밀양 대씨(密陽 大氏)
왕조발해(渤海)
목록발해의 태자

2. 생애

대야발은 발해 건국에 공을 세웠다고 알려졌으나, 자세한 생애와 행적, 시호는 전해지지 않는다.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 세계상 2세이다. 그의 증손자인 대인수가 왕위를 계승했다. 작위, 시호, 역임 관직에 대한 기록은 없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종부(從父) 인수가 즉위하여 건흥(建興)으로 연호를 고쳤고, 그 4세조인 야발(野勃)은 좌영(祚榮)의 동생이다."라고 전해지며, 대조영에게 대야발이라는 동생이 있었고, 대야발은 대인수의 4세조였다고 전해지지만, 『신당서』 외에는 확실한 사료가 없다.[5]

사카요리 마사시는 대무예가 726년 흑수말갈의 입당사가 발해에 통보 없이 영내를 통과한 것을 계기로 동생 대문예와 흑수말갈 정벌을 놓고 대립했고, 대문예 대신 "종형 대일하"에게 흑수말갈 정벌군을 통솔하게 했는데, 이 대일하가 대무예의 백부나 숙부의 아들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백부·숙부가 대야발일 수 있지만, 실명은 전해지지 않아 불명확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대명충의 재위 기간은 짧았고, 대인수가 왕위를 이으며 발해 왕계가 대조영 계통에서 대야발 계통으로 교체되었다. 왕계 교체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신당서』에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 확인되지 않고, 대명충의 재위가 짧으며, 대인수가 북방 말갈 여러 부를 복속시켜 영토를 넓히고 당나라에 조공을 자주 하는 등 강력한 지배력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연호도 "건흥"으로 고친 것으로 보아, 대인수가 대명충에게서 왕위를 찬탈하고 새 왕조를 창시했을 가능성이 있어, "대인수의 즉위 상황을 고려하면, 대야발을 대조영의 동생으로 설정한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이마니시 류대종교단군 제고(制誥)로 여겨지는 "삼일단고"에 실린 대흥 3년의 발, 천통 17년 3월 3일, 반안군왕 야발(대야발)의 봉칙 서문, 임아상(대무예의 외숙부) 봉칙 주해 등을 "대흥은 발해 대흠무의 연호이지만, 천통의 연호, 야발 등은 모두 허구이며 매우 기이하다"라며 "대야발"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2. 1. 가계와 후손

대야발은 고왕 대조영의 아우이며, 친아우인지 이복동생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왕 대인수는 그의 4세손(증손자)이라고 전해진다.[5]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 세계상 2세이다. 발해 건국에 공을 세웠다고 알려졌으나, 자세한 생애와 행적, 시호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버지걸걸중상
아들대원기
손자대광덕
증손선왕 대인수 (재위: 818년~831년)[5]
아들대일하



신당서》 발해전에는 대조영에게 대야발이라는 동생이 있었고, 대야발은 대인수의 4세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당서》 외에는 확실한 사료가 없어, 대야발의 존재와 가계에 대한 논란이 있다.

사카요리 마사시는 대무예가 726년 흑수말갈 정벌을 놓고 동생 대문예와 대립할 때, 대문예 대신 "종형 대일하"에게 군대를 통솔하게 했는데, 이 대일하가 대무예의 백부나 숙부의 아들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대야발이 대일하의 아버지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백부·숙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아 불명확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대인수가 대명충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새로운 왕조를 창시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대야발을 대조영의 동생으로 설정한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마니시 류대종교 문헌에 나타나는 "대야발" 관련 기록에 대해, 연호 등이 허구이며 매우 기이하다며 불신감을 드러냈다.

한편, 《환단고기》에는 대야발이 《단기고사》를 집필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환단고기》 자체가 위서로 평가받기 때문에 신빙성이 낮다.

3. 《단기고사》 집필 관련 논란

환단고기》에 따르면, 대야발은 《환단고기》의 참조가 되는 서적 중 하나인 《단기고사》를 집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단기고사》는 실전되었다. 《환단고기》 자체가 위서인 점을 미루어 보면 대야발이 《단기고사》를 썼을 가능성은 적은 편이다.[1]

4. 평가 및 의의

대야발에 대한 평가는 주로 학계 연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은 제한적이다.

사카요리 마사시는 726년 대무예가 흑수말갈과의 문제로 동생 대문예와 갈등을 겪었을 때, 대문예 대신 "종형 대일하"에게 흑수말갈 정벌을 맡긴 점에 주목했다. 그는 대일하가 대무예의 백부나 숙부의 아들일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 백부나 숙부가 대야발일 수 있다고 보았으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4]

사카요리 마사시는 대명충의 짧은 재위 후 대인수가 왕위를 이으면서 발해 왕계가 대조영 계통에서 대야발 계통으로 바뀌었다고 보았다. 그는 『신당서』 발해전에 대인수가 "종부"로 기록된 점, 대인수가 북방 말갈 여러 부를 복속시키고 당나라에 조공을 자주 하는 등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 점, 연호를 "건흥"으로 바꾼 점 등을 근거로 대인수가 왕위를 찬탈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러한 즉위 정황을 고려하면, 대야발을 대조영의 동생으로 설정한 것은 의도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4]

이마니시 류대종교단군 관련 기록에 대흥 3년, 천통 17년 등 발해 연호와 함께 대야발의 이름이 나오는 것에 대해, 연호와 인물이 모두 허구이며 매우 이상하다고 비판했다.[5]

4. 1. 학계의 연구

사카요리 마사시는 726년 대무예가 흑수말갈의 입당사 문제로 동생 대문예와 대립했을 때, 대문예 대신 "종형 대일하"에게 흑수말갈 정벌군을 맡긴 것을 주목했다. 그는 대일하가 "종형"으로 기록된 것은 대일하가 대무예의 백부나 숙부의 아들임을 의미하며, 이 백부나 숙부가 대야발일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실명은 전해지지 않아 불명확하다고 지적했다.[4]

사카요리 마사시는 대명충의 짧은 재위 후 대인수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발해 왕계가 대조영 계통에서 대야발 계통으로 교체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신당서』 발해전에 대인수가 "종부"로 기록된 점, 대인수가 북방 말갈 여러 부를 복속시키고 당나라에 조공을 빈번하게 하는 등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 점, 연호를 "건흥"으로 고친 점 등을 들어 대인수가 대명충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러한 즉위 정황을 고려할 때, 대야발을 대조영의 동생으로 설정한 것은 의도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4]

이마니시 류대종교단군 관련 기록에 대흥 3년, 천통 17년 등 발해 연호와 함께 대야발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연호, 인물 등이 모두 허구이며 매우 기이하다며 불신감을 드러냈다.[5]

5. 가계도


  • 아버지 : 걸걸중상
  • 아들 : 대원기
  • * 손자 : 대광덕
  • ** 증손 : 대인수(재위 : 818년~831년)[5]
  • 아들 : 대일하

참조

[1] 서적 渤海と古代の日本 校倉書房 2001-03
[2] 서적 渤海と古代の日本 校倉書房 2001-03
[3] 서적 渤海史研究と近代日本 明治大学史学地理学会 1999-12
[4] 문서 구당서, 신당서 등에는 나타나지 않는족보상 기록이다.
[5] 문서 발해고(渤海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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