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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걸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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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강제 이주 정책에 저항하며 발해 건국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696년 거란족 반란을 틈타 걸사비우와 연합하여 당나라에 대항했으나, 천문령 전투에서 걸사비우가 사망하고 자신도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했다. 걸걸중상의 이름과 성씨에 대한 기록은 사료에 따라 차이를 보이며, 민족 정체성을 둘러싸고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학계에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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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걸중상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대중상
다른 이름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
원어명乞乞仲象
작위진국공(震國公)
출생일629년?
사망일697년?
사망지만주 천문령
배우자시씨(時氏)
부친걸곤우
자녀고왕
대야발(大野勃)
경력
주군고구려 보장왕
지휘고구려 부흥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천문령 전투
기타
묘호미상
시호미상
가문미상
사당미상
성별남성

2. 생애

이노우에 히데오는 대사리 걸걸중상이 보유했던 사리[22][23]라는 관직은 거란의 군 지휘관이기 때문에[24], 걸걸중상은 거란계 호족이라고 주장했다.[25][26]

한편, 모리야스 타카오는 "사리를 거란의 관직명으로 보고 대사리 걸걸중상을 거란인으로 간주하며, 대조영과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보는 설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27] 그는 중국 사료에 말갈에도 사리라는 말을 포함하는 관명이 존재하고[28], 발해 건국에 이민족인 거란인이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들면서 "대사리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아마 부자 관계이며, (...) 아버지 쪽이 사리라는 말갈에는 있고 고구려에서는 아직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칭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시 고구려에 귀화 또는 동화했던 말갈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말했다.[27]

대한민국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은 걸걸중상을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속말말갈인의 추장으로 추측된다"고 말하고[2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걸걸중상은 고구려에 병합된 속말말갈족 출신으로 당의 영주 지방으로 이주해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30]

2. 1. 가계 배경 및 초기 활동

대광현의 후손인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 등은 고려로 귀순하여 그를 시조로 삼고 가계 대수를 계산하고 있으나, 출신 배경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1][2][3] 조선 후기 실학자 류득공은 저서 《발해고》에서 걸걸중상의 선조가 대정씨(大庭氏)에서 나왔다는 설을 언급하기도 했다.[4][5][6]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이후, 당나라는 거의 매년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권력 투쟁과 내분으로 668년에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에 따라 유력층으로 분류된 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을 영주(榮州)로 강제 이주시켰다.[7][8][9][10][11][12]

이노우에 히데오는 대사리 걸걸중상이 보유했던 사리[22][23]라는 관직은 거란의 군 지휘관이기 때문에,[24] 걸걸중상은 거란계 호족이라고 주장했다.[25][26]

반면, 모리야스 타카오는 사리를 거란의 관직명으로 보고 대사리 걸걸중상을 거란인으로 간주하며, 대조영과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보는 설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27] 그는 중국 사료에 말갈에도 사리라는 말을 포함하는 관명이 존재한다는 점,[28] 발해 건국에 이민족인 거란인이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을 근거로 들며, 대사리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부자 관계이며, 아버지 쪽이 사리라는 말갈에는 있고 고구려에서는 아직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칭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에 귀화 또는 동화했던 말갈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했다.[27]

한국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은 걸걸중상을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속말말갈인의 추장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하고,[2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걸걸중상은 고구려에 병합된 속말말갈족 출신으로 당의 영주 지방으로 이주해 살았다"고 설명한다.[30]

신당서』 발해전에는 걸걸중상과 대조영이 부자 관계라고 되어 있지만, 『구당서』에는 걸걸중상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걸걸중상은 말갈 이름인 반면 대조영은 한자 이름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이케우치 히로시는 걸걸중상은 영주(營州)에 있을 때의 본명, 대조영은 발해 건국 후 사용한 한자 이름으로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토리야마 키이치는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부자 관계가 아닌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니이즈마 토시히사는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부자 관계라고 주장하고 있다.[25]

이진충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발해 건국의 모체가 된 고구려 유민 집단과 말갈 집단이 영주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는데, 이 중 말갈 집단을 이끈 것은 걸사비우이며, 고구려 유민 집단의 지도자는 『구당서』에서는 대조영, 『신당서』에서는 걸걸중상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고바타 토오루는 『신당서』가 참조한 『발해국기』의 사료적 성격을 검토하여, 걸걸중상-대조영이라는 부자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대조영에게 에 반역한 자라는 오명을 씌우지 않기 위한 발해 측의 고려였으며, 사실로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걸걸중상이 대조영의 아버지라는 것뿐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24]

2. 2.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695년 거란이진충이 영주 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대중상은 이 틈을 타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족과 연합하여 영주를 탈출하였다. 이후 대중상은 고구려 유민들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13]

측천무후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대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하고,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측천무후의 회유에 응하지 않고 당나라에 계속 저항하였다. 이에 측천무후는 거란족 출신의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추격하게 하였다.[14] 이해고의 공격으로 걸사비우와 대중상은 모두 전사하였다는 설과, 걸사비우는 전사하고 대중상은 고구려 유민과 남은 말갈족을 이끌고 저항하다가 큰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2. 3. 발해 건국에 미친 영향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에 저항했다. 696년, 거란족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대중상은 말갈족 지도자 걸사비우와 연합하여 당나라에 맞섰다.[13] 신당서에 따르면, 측천무후는 대중상을 진(鎭)공, 걸사비우를 허(許)공으로 임명하고 사면하려 했으나, 걸사비우는 이를 거부했다.[14]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에 맞서 걸사비우와 대중상은 저항했지만, 천문령 전투에서 걸사비우는 전사하고, 대중상은 전투 후 병으로 사망했다.[14] 이후 대조영이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13] 동모산을 도읍으로 삼아 발해를 건국하였다.[33]

대중상의 항쟁은 고구려 유민들의 결속을 강화하고 발해 건국의 정신적, 인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 이름과 성씨에 대한 논란

구오대사발해고에는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으로, 신당서와 발해국지에는 사리걸걸중상(舍利乞乞仲象)으로, 신오대사오대회요에는 대사리걸걸중상(大舍利乞乞仲象)으로 기록되는 등, 대중상의 이름은 사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1][2][3]

이에 따라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사료주장
오대회요대(大)는 성, 사리(舍利)는 벼슬, 중상이 이름이라는 설
발해국지걸걸중상까지의 성씨는 사리(舍利)였으나 그 아들인 대조영부터 성을 대(大)로 바꾸어 썼다는 설
통지당 고종 시기의 장수인 사리아박(舍利阿搏)의 예를 들며 사리부(舍利部)의 추장족(酋長族) 사리씨(舍利氏)가 대(大)씨의 본래 성씨라는 설



이 외에도 여러 설과 논란이 있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이나바 이와키치는 사리 걸걸중상의 "사리"는 여진어의 "샘의 의미"임을 지적하고 있다.[18]

이노우에 히데오는 대사리 걸걸중상이 보유했던 사리[22][23]라는 관직은 거란의 군 지휘관이기 때문에[24], "사리는 五代會要|오대회요중국어 권 삼십 발해 상에 '유고려별종대사리걸걸중상대성, 사리관, 걸걸중상명야(有高麗別種大舎利乞乞仲象大姓,舎利官,乞乞仲象名也)'라고 있는 것으로 관명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요사 권 일일육 국어해는 '거란호민요과두건자, 납우타십두, 마백필, 내급관명왈사리(契丹豪民耍裹頭巾者,納牛駝十頭,馬百疋,乃給官名曰舎利)'라고 기록하고 있어, 사리란 권력을 과시할 수 있는 두건을 원하는 호민이 우타와 말을 대가로 지불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걸걸중상은 거란계 호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5][26]

한편, 모리야스 타카오는 "사리를 거란의 관직명으로 보고 대사리 걸걸중상을 거란인으로 간주하며, 이것과 대조영을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보는 설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말하며[27], 그 이유로 "중국 사료에는 말갈에도 사리라는 말을 포함하는 관명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있고[28], 또한 발해 건국에 이민족인 거란인이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는 이 경우 생각하기 어렵다"면서 "대사리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아마 부자 관계이며, (중략) 아버지 쪽이 사리라는 말갈에는 있고 고구려에서는 아직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칭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시 고구려에 귀화 또는 동화했던 말갈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말했다.[27]

걸걸중상이라는 이름은 고구려인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말갈인의 이름이다.[15][16][17] 사서에 보이는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대" 씨를 쓰지 않았으며, 그 이름은 분명히 본족어이며, 성씨 "대"의 채용은 대조영이 개국하여 왕이 된 이후의 일이다.[19]

현대의 영순 태씨 일족은 태중상(걸걸중상)을 시조로 숭배하고 있다.[20][21]

4. 민족 정체성 논쟁

역사 자료들은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의 민족과 배경에 대해 서로 다른 설명을 제공한다.[1][2][3] 구당서는 대조영과 그의 국가를 고구려와 연관된 수말말갈(여진과 후일의 만주족과 관련)로 묘사하고 있다.[4] 신당서는 대씨의 민족적 배경을 말갈이라고 언급하면서, "고려별종(高麗別種)"이라고 덧붙였다.[5] 이 용어는 한국과 북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고구려인의 한 갈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일본과 중국 연구자들은 "고구려와 구별된다"고 해석한다.[6]

삼국유사는 대씨를 수말말갈의 지도자로 묘사하지만, 현재는 소실된 신라의 기록을 인용하여 대씨가 전 고구려 장군이었다는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7][8][9][10][11][12] 알렉산더 김은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했고, 대조영은 719년에 사망했으며, 젊은 나이에 장군 직함을 받을 수 없었다는 점을 들어 이 주장의 신빙성을 낮게 평가한다.

4. 1. 개요

역사 자료들은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의 민족과 배경에 대해 서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1][2][3] 구당서는 대조영과 그의 국가를 고구려와 연관된 수말말갈(여진과 후일의 만주족과 관련)로 묘사하고 있다.[4] 신당서는 대씨의 민족적 배경을 말갈이라고 언급하면서, 그가 "高麗別種"(고려별종)이라고 덧붙이고 있다.[5] 한국과 북한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를 "고구려인의 한 갈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일본과 중국 연구자들은 "고구려와 구별된다"고 해석한다.[6] 삼국유사는 대씨를 수말말갈의 지도자로 묘사하지만, 현재는 소실된 신라의 기록을 인용하여 대씨가 전 고구려 장군이었다는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7][8][9][10][11][12]

이노우에 히데오는 걸걸중상이 보유했던 사리[22][23]라는 관직이 거란의 군 지휘관이기 때문에[24], 걸걸중상은 거란계 호족이라고 주장했다.[25][26]

반면, 모리야스 타카오는 대사리걸걸중상을 거란인으로 간주하고 대조영과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보는 설에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27] 그는 말갈에도 사리라는 말을 포함하는 관명이 존재하고[28], 발해 건국에 이민족인 거란인이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대사리걸걸중상과 대조영은 부자 관계이며, 걸걸중상이 말갈에는 있고 고구려에는 아직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칭호(사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에 귀화 또는 동화했던 말갈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주장했다.[27]

한국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은 걸걸중상을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속말말갈인의 추장으로 추측된다"고 말하고[2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걸걸중상은 고구려에 병합된 속말말갈족 출신으로 당의 영주 지방으로 이주해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30]

4. 2. 한국 학계의 입장

구당서신당서는 대조영을 고구려와 관련된 수말말갈(여진, 만주족과 관련)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4][5] 반면 삼국유사는 걸걸중상을 수말말갈의 지도자로 묘사하면서도, 소실된 신라의 기록을 인용하여 그가 고구려 장군이었다는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7][8][9][10][11][12]

이노우에 히데오는 걸걸중상이 가졌던 사리[22][23]라는 관직이 거란 군 지휘관의 관직[24]이므로 걸걸중상은 거란계 호족이라고 주장했다.[25][26]

모리야스 타카오는 사리를 거란의 관직명으로 보고 걸걸중상을 거란인으로 간주하는 것에 찬성할 수 없다고 하였다.[27] 그는 중국 사료에 말갈에도 사리라는 말을 포함하는 관명이 존재하고[28], 발해 건국에 거란인이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27]

한국의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은 걸걸중상을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속말말갈인의 추장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하고[2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걸걸중상은 고구려에 병합된 속말말갈족 출신으로 당나라 영주 지방으로 이주해 살았다"고 설명한다.[30]

한국 학계에서는 대중상을 고구려 유민으로,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진보 진영에서는 발해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는 관점을 더욱 강조하며, 대중상의 항쟁을 민족 독립 운동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보수 진영에서는 발해 주민 구성이 고구려 유민 외에도 말갈족 등 다양함을 강조하며, 발해를 다민족 국가로 보기도 한다.

4. 3. 중국 학계의 입장

중국 학계는 발해당나라의 지방 정권으로 간주하며, 걸걸중상을 말갈족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1][2][3] 이러한 관점은 동북공정과 연결되어 한국 학계와 갈등을 빚고 있다. 이노우에 히데오는 걸걸중상이 거란의 군 지휘관 직책인 사리[22][23] 관직을 보유했기 때문에[24] 걸걸중상이 거란계 호족이라고 주장했다.[25][26]

4. 4. 일본 학계의 입장

신당서에서는 대씨의 민족적 배경을 말갈이라고 언급하면서, 그가 "고려별종(高麗別種)"이라고 덧붙였다.[5] 일본 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고구려와 구별된다"고 해석한다.[6]

이노우에 히데오는 대사리 걸걸중상이 보유했던 사리[22][23]라는 관직이 거란의 군 지휘관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24] 걸걸중상이 거란계 호족이라고 주장했다.[25][26]

반면, 모리야스 타카오는 이노우에 히데오의 주장에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27] 그는 중국 사료에 말갈에도 사리라는 말을 포함하는 관명이 존재하고,[28] 발해 건국에 이민족인 거란인이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는 "대사리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아마 부자 관계이며, (중략) 아버지 쪽이 사리라는 말갈에는 있고 고구려에서는 아직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칭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시 고구려에 귀화 또는 동화했던 말갈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말했다.[27]

4. 5. 러시아 학계의 입장

러시아 학계에서는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으며, 다양한 관점이 공존하고 있다. 최근에는 발해를 다민족 국가로 보면서도, 고구려 유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연구가 늘어나고 있다.[1][2][3] 구당서는 걸걸중상을 고구려와 연관된 수말말갈(여진과 후일의 만주족과 관련)로 묘사하고 있다.[4] 신당서는 걸걸중상의 민족적 배경을 말갈이라고 언급하면서, "高麗別種"(고려별종)이라고 덧붙이고 있다.[5] 이 용어는 한국과 북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고구려인의 한 갈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일본과 중국 연구자들은 "고구려와 구별된다"고 해석한다.[6] 삼국유사는 걸걸중상을 수말말갈의 지도자로 묘사하지만, 현재는 소실된 신라의 기록을 인용하여 그가 전 고구려 장군이었다는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7][8][9][10][11][12]

5. 가계

부인의 이름과 성씨는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발해고》에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 대씨와 태씨 측 기록에 의하면 걸걸중상의 부인은 시씨(時氏)라 한다.

부인시씨(時氏) (대씨와 태씨 측 기록)
장남대조영 (발해 고왕)
차남대야발



걸걸중상의 자녀 중 가장 유명하고 주목할 만한 사람은 장남인 대조영이었다. 걸걸중상은 또 다른 아들인 대야발을 두었으며, 발해 왕실 계통이 대조영 계열과 대야발 계열의 두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대조영 외에도 다른 자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대중상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서적 Tumen jalafun jecen akū: Festschrift for Giovanni Stary's 60th birthday https://www.academia[...] Harrassowitz
[2] 서적 The Peoples of Northeast Asia through Time Precolonial Ethnic and Cultural Processes along the Coast between Hokkaido and the Bering Strait https://books.google[...] 2015
[3] 웹사이트 История тунгусских племен мохэ и государства Бохай http://www.ahmerov.c[...] 2019-02-05
[4] 문서 New Book of Tang
[5] 문서 Old Book of Tang
[6] 웹사이트 渤海は高句麗を引き継いだ http://www.searchnav[...] 高句麗研究会
[7] 문서 Samguk yusa
[8] 문서 Old records of Silla
[9] 문서 Rhymed Chronicles of Sovereigns
[10] 문서 Solitary Cloud
[11] 문서 Solitary Cloud
[12] 문서 Comprehensive Institutions
[13] 웹사이트 ДВОРЦОВО-ПАРКОВАЯ АРХИТЕКТУРА В СТОЛИЦАХ КОГУРЁ И БОХАЯ https://cyberleninka[...] 2019-02-05
[14] 서적 New Book of Tang
[15] 서적 渤海史 東方書店 1996
[16] 서적 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 1968
[17] 서적 満鮮史研究 中世第一冊 吉川弘文館 1933
[18] 서적 "<學界展望> 渤海史研究の回顧" https://doi.org/10.1[...] 東洋史研究会 1936-06-30
[19] 뉴스 Original meaning of Dan gur in Khitai scripts: with a discussion of state name of the Dong Dan Guo http://www.ritsumei.[...] 立命館大学人文学会 2008-12
[20] 웹사이트 발해 대조영의 후손 太氏 연원과 현황 https://www.yeongnam[...] 2022-09-07
[21] 웹사이트 발해 대조영 후손들이 경북 경산에 모여사는 이유는… https://www.joongang[...] 2022-09-07
[22] 문서 五代会要
[23] 문서 新唐書
[24] 서적 日本と渤海の古代史 山川出版社 2003-05-01
[25] 서적 東アジア民族史 2-正史東夷伝 平凡社 1976-01
[26] 문서 資治通鑑
[27] 서적 渤海から契丹へ 学生社 1982
[28] 문서 冊府元亀
[29] 뉴스 걸걸중상 乞乞仲象,?~? https://www.doopedia[...]
[30] 뉴스 걸걸중상(乞乞仲象) http://encykorea.aks[...]
[31] 문서 구당서
[32] 논문 발해의 종족적 연원 2011
[33] 서적 발해제국사 (서해역사책방 11) 서해문집 200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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