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럼 보고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더럼 보고서는 1838년 더럼 경이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의 반란을 조사한 후 작성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의 통합과 책임 정부 도입을 주요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더럼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동화를 주장하며, 영국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영국 정부는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의 통합을 시행했지만, 책임 정부 도입은 1848년에 이루어졌다. 이 보고서는 캐나다 연방 성립에 영향을 미쳤으며, 호주와 뉴질랜드 등 다른 백인 정착지의 자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더럼 보고서 | |
---|---|
보고서 개요 | |
이름 | 영국령 북아메리카 문제에 대한 보고서 |
다른 이름 | 더럼 보고서 |
원제 | Rapport sur les affaires de l’Amérique du Nord britannique (프랑스어) |
유형 | 정부 보고서 |
날짜 | 1839년 2월 11일 |
저자 | 존 램턴, 제1대 더럼 백작 |
상세 정보 | |
작성 기간 | 1838년 5월 29일 - 1839년 |
효력 발생일 | 1840년 |
지역 | 더 캐나다스 |
목적 | 1837년~1838년 반란에 대한 진상 보고 |
2. 배경
1837년 반란은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에서 발생했으며, 더럼 보고서가 작성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이 반란은 식민지의 책임 정부 부재에 대한 정치적 불만, 악화된 경제 상황, 그리고 영국계와 프랑스계 주민 간의 민족적 긴장과 같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였다. 특히 로어 캐나다에서는 프랑스계 주민들의 불만이 컸다.
반란 자체는 진압되었지만, 캐나다 식민지가 안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고, 정치적·사회적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당시 캐나다는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농작물 실패로 인한 식량 부족과 농민들의 빈곤 심화는 사회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 정부는 사태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진보적 성향의 귀족이었던 더럼 경을 영국령 북아메리카 총독으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그의 임무는 반란의 원인을 조사하고, 식민지의 지속적인 안정을 위한 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6][7]
2. 1. 반란의 원인
더럼 경은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에서 발생한 1837년 반란의 원인을 조사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1838년 영국 정부에 의해 캐나다로 파견되었다.더럼 경이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 반란은 이미 진압된 상태였지만, 식민지 내에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농작물 수확 실패로 인해 식량 부족과 농민들의 빈곤이 만연했으며, 이는 사회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정당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특히 로어 캐나다에서는 영국계 주민과 프랑스계 주민 사이의 민족적 긴장과 적대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더럼 경은 이러한 상황을 면밀히 조사한 후, 특히 로어 캐나다 문제의 핵심은 정치 체제의 결함보다는 민족 갈등에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로어 캐나다를 "하나의 국가 안에서 전쟁을 벌이는 두 민족"이 존재하는 곳으로 묘사하며, 영국계와 프랑스계 캐나다인 간의 깊은 불신과 반목이 식민지의 불안정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이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더럼 경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영국 문화에 동화시키는 것이 장기적인 해결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를 통합하여 영국계가 인구 다수를 점하도록 만들고, 지속적인 영국계 이민을 장려함으로써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점차 약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결국 영국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에 순응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1]
2. 2. 더럼 경의 임명
더럼 경은 1837년 로어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진보적인 책임 정부 구상은 영국 의회와의 갈등을 야기하여 곧 사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에서 발생한 반란의 여파는 계속되었고, 이에 영국 정부는 1838년 더럼 경을 다시 영국령 북아메리카 총독으로 임명하여 캐나다로 파견했다. 그의 임무는 반란의 근본 원인을 조사하고, 식민지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며 향후 유사한 봉기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6][7]3. 조사 과정
더럼 경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 현지에서 광범위한 조사를 수행했다. 그는 식민지 내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 의견을 청취했으며, 특히 패트리오트 운동에 반대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식민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했다.[1] 또한, 보고서의 제안 내용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자 어퍼캐나다에서는 영국의 정치 활동 방식을 참고하여 청원 운동과 대중 집회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더럼은 반란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여 사회 및 경제 상황을 살펴보기도 했다. 이러한 조사 활동을 통해 그는 캐나다 식민지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했으며, 그 결과는 더럼 보고서에 반영되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로어캐나다의 상황을 "한 국가 안에서 싸우는 두 민족"으로 규정하고,[4] 특히 프랑스계 캐나다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5][1]
3. 1. 위원회 구성 및 활동

더럼 경은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에서 패트리오트 운동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를 통해 식민지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직접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더럼은 어퍼캐나다에서 자신의 보고서에 대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팀은 영국의 정치 활동 방식을 참고하여 청원 운동을 조직하고, 광범위한 사전 홍보와 대중 집회를 통해 참여를 유도했다. 이러한 활동은 보고서의 제안 내용이 캐나다 현지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런던 정부에 심어주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이 집회들은 초당적이고 질서 있으며, 영국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의회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더럼은 미국을 방문하여 반란의 원인을 분석하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자유주의 사상과 경제적 요인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려는 프랑스계 주민들과 근대화된 영국계 주민들 사이의 문화적, 사회적 갈등이 핵심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영국식 정치 제도를 받아들이고, 소위 '영국 경쟁자들의 우수한 이점'을 통해 영국 문화에 동화되는 것만이 두 집단 간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다.[1]
더럼은 보고서에서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문화가 지난 200년간 거의 발전 없이 정체되어 있으며, 영국 문화가 이룬 진보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로어캐나다를 "한 국가 안에서 싸우는 두 민족"이 공존하는 곳으로 묘사했으며,[4] 특히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문학도 역사도 없는 민족"이라고 규정하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주장을 펼쳤다.[5]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후손들이 그들의 특유한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을 활성화하고 고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이 부족한 국적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들은 역사도 문학도 없는 민족이다. ...
[그들은] 그들에게는 완전히 생소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의견, 생활 습관에 대해 논하는 본질적으로 외국적인 [프랑스] 문학에 의존해야 한다. ...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더 사려 깊은 부분이 현재 그들의 국적을 계속 보존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다면 정말 놀라울 것이다.[1]
3. 2. 미국 방문
더럼 경은 미국을 방문하여 캐나다에서 발생한 반란의 원인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는 미국 사회의 자유주의적 분위기와 경제 상황을 관찰하며, 반란이 이러한 요소들에 기반하고 있다고 초기에 생각했다.[1] 이러한 미국 방문 경험은 이후 더럼 보고서를 통해 캐나다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되었다.4. 주요 내용
1837년 반란 이후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더럼 경은 1838년 영국 정부에 의해 다시 캐나다로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반란의 원인을 조사하고, 문제 해결과 향후 반란 방지를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당시 캐나다는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평화와 통합과는 거리가 멀었고,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민족적 긴장이 고조된 상태였다.[6] 더럼 경은 찰스 불러, 에드워드 기번 웨이크필드 등 유능한 참모들과 함께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공식 명칭이 Report on the Affairs of British North America|영국령 북아메리카의 문제에 대한 보고서eng인 이 보고서는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논란을 일으켰다. 보고서의 가장 핵심적인 제안은 다음 두 가지였다.
1.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를 하나의 주(Province)로 통합할 것: 이는 두 지역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행정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었다.[21][1]
2. 책임 정부를 도입할 것: 더럼은 식민지 의회가 행정부에 책임을 묻는 책임 정부의 도입이 식민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8]
더럼은 또한 영국령 북아메리카 전체를 아우르는 지방 정부와 대법원 설립을 권고했으며,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등 해양주까지 통합하는 방안에도 관심을 보였다. 비록 해양주의 무관심으로 당장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구상은 수십 년 후 캐나다 연방 결성의 밑거름이 되었다.[9]
이 보고서는 영국에서는 대체로 무시당했지만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일부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으며,[6] 무엇보다 캐나다의 개혁가들인 조셉 하우, 로버트 볼드윈, 루이-이폴리트 라퐁텐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쳐 캐나다 정치 개혁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7] 영국 의회는 보고서의 권고 중 두 캐나다의 통합은 1840년 연합법을 통해 비교적 신속하게 받아들였으나, 책임 정부 도입은 1848년 이후에야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14]
4. 1. 두 캐나다의 통합
더럼은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를 하나의 지방으로 통합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영국계 인구가 다수인 어퍼캐나다의 인구가 더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통합된 지방의 의회에서는 두 지역이 동등한 수의 대표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럼은 또한 영국에서의 캐나다 이주를 장려하여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수를 넘어서게 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영국 문화에 동화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21] 그는 1763년 왕립 선언과 1774년 퀘벡 법에 따라 프랑스계 캐나다인에게 부여된 자유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통해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반란의 가능성을 제거하고자 했다. 더럼은 로어캐나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 간의 갈등이라고 판단했으며,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동화가 이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두 캐나다의 통합은 이러한 동화를 이루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겨졌다. 통합을 통해 영어 사용 인구가 의회 다수를 점하게 하고, 지속적인 영국계 이민을 통해 그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1]실제로 1841년 새롭게 창설된 캐나다 주의 입법 의회는 캐나다 동부(구 로어캐나다)와 캐나다 서부(구 어퍼캐나다)에서 동등한 대표성을 가져야 했다.[15] 이는 캐나다 동부의 인구(1840년 추산 67만 명)가 캐나다 서부(1840년 추산 48만 명)보다 상당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시행된 조치였다.[16] 더럼 보고서 원안은 두 지역의 인구에 기반한 대표성을 제안했으나,[17] 영국 정부는 그 권고를 거부하고 대신 동등한 대표성을 시행했는데, 이는 새 자치령의 영어 사용 인구에게 지방 정부에서 우세한 발언권을 주어 프랑스어 사용 인구를 동화시키려는 목표를 더욱 추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러한 통합은 어퍼캐나다에게 재정적인 이점을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되었다. 운하 건설 등으로 인해 상당한 부채를 안고 있던 어퍼캐나다는 통합을 통해 구 로어캐나다의 재정적 흑자에 대한 접근이 그 부채를 탕감할 수 있게 할 것이었다.
4. 2. 책임 정부 도입
더럼 경은 1837년 반란 이후 혼란에 빠진 로어 캐나다와 어퍼 캐나다의 문제 해결을 위해 1838년 영국 정부에 의해 다시 파견되었다. 그는 캐나다의 평화와 통합을 위해서는 식민지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특히 그는 영국 의회가 책임 정부를 통해 식민지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영국 본국의 직접적인 간섭을 줄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6] 이는 더럼 경의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이전 로어 캐나다 총독 시절 영국 의회와의 갈등으로 사임했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았다.더럼 보고서, 공식 명칭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문제에 대한 보고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제안 중 하나는 바로 이 책임 정부의 도입이었다. 더럼은 당시 캐나다와 국경을 맞댄 미국의 발전과 공화주의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캐나다 식민지 주민들에게 더 많은 정치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에게 현재의 헌법적 권한을 박탈하는 실험은 생각할 수 없다"고[8] 밝히며, 책임 정부 도입 없이는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평화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는 식민지 의회가 행정부에 책임을 묻고, 실질적인 통치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는 중요한 개혁안이었다. 더럼은 찰스 불러와 에드워드 기번 웨이크필드 등 유능한 참모들과 함께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이는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영국의 일부 지식인들과 캐나다의 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6][7]
더럼의 이러한 제안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보고서는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를 하나의 캐나다 주로 통합하는 것과 함께 책임 정부 도입을 강력히 권고했다. 그러나 영국 의회는 두 캐나다의 통합은 1840년 연합법을 통해 비교적 신속하게 받아들였지만, 식민지에 완전한 책임 정부를 부여하는 것에는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책임 정부는 조셉 하우, 로버트 볼드윈, 루이-이폴리트 라퐁텐과 같은 캐나다 개혁가들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1848년 이후에야 점진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7][14]
4. 3. 프랑스계 캐나다인 동화 정책
더럼은 로어캐나다의 근본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단일 국가의 품안에서 싸우는 두 민족"[4], 즉 전통주의적인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근대화된 영국계 주민 간의 민족적 갈등이라고 진단했다.[1]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문화가 20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영국 문화가 이룩한 진보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보았다.[1] 특히 보고서에서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문학도 역사도 없는 민족"이라고 평가한 부분은 그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5]: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후손들이 그들의 특유한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을 활성화하고 고양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이 부족한 국적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들은 역사도 문학도 없는 민족이다. ...
: [그들은] 그들에게는 완전히 생소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의견, 생활 습관에 대해 논하는 본질적으로 외국적인 [프랑스] 문학에 의존해야 한다. ...
: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더 사려 깊은 부분이 현재 그들의 국적을 계속 보존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다면 정말 놀라울 것이다.[1]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여 더럼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동화가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를 하나의 지방으로 통합하여 영국계 다수를 형성하고, 지속적인 영국 이민을 장려하여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영향력을 점차 약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21][1] 통합된 입법부에서 영국계가 우위를 점하게 되면,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결국 "성공의 절망" 속에서 기존의 적대감을 버리고 새로운 정치 현실에 순응하며 영국 문화에 동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1] 또한 1763년 왕립 선언과 1774년 퀘벡 법에 따라 프랑스계 캐나다인에게 부여된 일부 권리를 축소하여 미래의 반란 가능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종교와 언어의 완전한 포기까지 요구하지는 않았다.[21] 더럼의 목표는 분명했다. "영국 정부는 앞으로 이 주의 영어 인구를 영어 법률과 언어로 확립하고, 전적으로 영국적인 입법부에만 정부를 위임하는 것을 첫 번째이자 꾸준한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13]
더럼은 보고서에서 프랑스계와 영국계를 서로 다른 '인종(race)'으로 여러 차례 언급하며 영국계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 아메리카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는 것을 관찰한 모든 사람은 조만간 잉글랜드계 인종이 수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우수한 지식, 에너지, 기업가 정신, 부를 통해 하부 캐나다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갈등의 원인이 되는 오류는 앵글로-아메리카 식민지와 주들 속에서 프랑스계 캐나다 민족성을 유지하려는 헛된 시도에 있다. [1]
: 그리고 이 프랑스계 캐나다 민족성이,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민족의 선을 위해서 우리가 영속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대상인가? 나는 그보다 더 희망 없는 열등성을 나타내고 지속시키는 민족적 구별을 알지 못한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언어, 법률, 특징은 영어이며,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인종을 제외하고 (나는 이것을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열등한 상태로 나타난다. 캐나다인들에게 우리의 영국적 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을 그러한 열등함에서 끌어올리기 위해서이다. [1]
보고서 작성 당시 영국인들이 '인종'이라는 단어를 오늘날의 '민족(ethnicity)'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지만,[10] 더럼의 주장은 명백히 영국 문화의 우월성을 전제로 프랑스계 캐나다 문화를 열등하게 취급하는 당시 제국주의적, 민족 차별적인 시각을 드러낸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에게 영국적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 그들을 '열등함'에서 끌어올리는 길이라고 여겼다.[1]
5. 반응 및 영향
더럼 보고서는 발표 직후 영국 의회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보고서의 핵심 권고 사항 중 하나인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의 통합은 비교적 신속하게 받아들여져 캐나다 주 설립의 근거가 되었으나,[14] 식민지에 실질적인 자치권을 부여하는 책임 정부의 도입은 상당 기간 유보되었다.[14] 영국 정부는 식민 통치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했으며, 책임 정부는 1848년 이후에야 캐나다 식민지에 도입되었다.[14]
보고서 내용 중 프랑스계 캐나다인에 대한 노골적인 동화 정책과 문화적 편견은 즉각적인 반발을 샀다. 보고서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고유한 정체성 유지를 "헛된 시도"로 규정하고 영어 문화권으로의 흡수를 주장했는데,[1] 이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사회와 망명 중이던 파트리오트 지도자 루이조제프 파피노 등의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더럼 보고서는 장기적으로 캐나다 정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보고서가 제시한 책임 정부 원칙은 조셉 하우, 로버트 볼드윈, 루이-이폴리트 라퐁텐 등 캐나다 개혁파 정치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7] 결국 캐나다 자치 정부 수립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또한, 두 캐나다의 통합과 해양주를 포함한 더 넓은 연방 구상 제안은[9] 당장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훗날 캐나다 연방 결성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보고서의 원칙은 이후 호주나 뉴질랜드와 같은 다른 영국 정착 식민지의 정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5. 1. 영국 정부의 반응
더럼 보고서는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를 하나의 캐나다 주로 통합하고,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모든 식민지에 책임 정부를 도입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권고했다.영국 의회는 이 두 가지 핵심 권고안 중 첫 번째, 즉 두 캐나다의 통합은 즉시 받아들여 시행했다.[14] 그러나 식민지에 실질적인 자치권을 부여하는 책임 정부의 도입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책임 정부는 1848년 이후에야 비로소 캐나다 식민지에 부여되었다.[14] 이는 더럼 보고서가 제시한 개혁안 중 일부는 신속하게 반영되었지만, 식민 통치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책임 정부 도입에 대해서는 영국 정부가 신중한 태도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5. 2.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반발
더럼 보고서는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잉글랜드계(앵글로-캐나다인)를 서로 다른 '인종'으로 여러 차례 언급한다. 이는 보고서 작성 당시 '인종'이라는 단어가 오늘날의 '민족성'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으로, 유럽 국가의 인구를 "영국 인종", "독일 인종" 등으로 지칭하는 용법과 같다.[10] 보고서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헛된 시도"로 규정하며, 영어 사용 인종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동화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아메리카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는 것을 관찰한 모든 사람은 조만간 잉글랜드계 인종이 수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우수한 지식, 에너지, 기업가 정신, 부를 통해 하부 캐나다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갈등의 원인이 되는 오류는 앵글로-아메리카 식민지와 주들 속에서 프랑스계 캐나다 민족성을 유지하려는 헛된 시도에 있다.[1]
> 그리고 이 프랑스계 캐나다 민족성이,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민족의 선을 위해서 우리가 영속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대상인가? 나는 그보다 더 희망 없는 열등성을 나타내고 지속시키는 민족적 구별을 알지 못한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언어, 법률, 특징은 영어이며,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인종을 제외하고 (나는 이것을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열등한 상태로 나타난다. 캐나다인들에게 우리의 영국적 특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을 그러한 열등함에서 끌어올리기 위해서이다.[1]
이러한 동화 정책과 프랑스계 캐나다인에 대한 폄하에 대해, 프랑스로 망명 중이던 파트리오트 지도자 루이조제프 파피노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는 1839년 5월 프랑스 잡지 ''La Revue du Progrès''에 ''Histoire de la résistance du Canada au gouvernement anglais''(영국 정부에 대한 캐나다 저항의 역사)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고, 이는 6월 뤼제르 뒤베르네의 ''La Revue canadienne''에 ''Histoire de l'insurrection du Canada en réfutation du Rapport de Lord Durham''(더럼 보고서에 대한 반박으로서의 캐나다 반란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다시 실렸다.
파피노는 더럼 보고서가 프랑스계 캐나다인에게는 역사도 문화도 없다고 주장하며 갈등의 원인을 단순히 두 민족 집단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에 분노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여러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파트리오트 지도자 중에는 생드니 전투의 영웅 울프레드 넬슨, 로어캐나다 독립 선언의 저자이자 반란 성공 시 대통령이 되었을 로버트 넬슨, 언론인 에드먼드 베일리 오캘러헌, 생샤를 전투 당시 장군이었던 토마스 스토로 브라운 등 영국계 또는 영국계 캐나다 출신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반란이 단순히 프랑스계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보고서의 주장과 달리 '단일 민족'만 존재한다고 여겨졌던 어퍼캐나다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파피노와 다른 파트리오트들은 보고서가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경제 상황에 대해 편향된 분석을 내놓았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1791년부터 반란 발발 시점까지 로어캐나다의 선출된 대표들은 꾸준히 식민지의 예산 통제권을 요구해왔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5. 3. 캐나다 연방 성립에 미친 영향
더럼 보고서는 캐나다의 미래에 대한 중요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보고서의 핵심 권고 사항은 어퍼 캐나다와 로어 캐나다를 하나의 캐나다 주로 통합하고,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책임 정부를 도입하는 것이었다.[14]더럼 경은 이웃 미국의 영향과 식민지 주민들의 열망을 고려할 때 책임 정부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표 정부를 수립하는 것. 그것은 돌이킬 수 없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에게 현재의 헌법적 권한을 박탈하는 실험은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8] 식민지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주장은 조셉 하우, 로버트 볼드윈, 루이-이폴리트 라퐁텐과 같은 캐나다의 개혁적인 정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7] 결국 1848년 이후 책임 정부가 도입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4]
두 캐나다의 통합 제안은 영국 의회에 의해 즉시 받아들여져 캐나다 주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더럼 경은 통합의 주요 목적 중 하나로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동화를 염두에 두었다. 그는 영어를 사용하는 다수가 프랑스계 소수를 지배하고, 지속적인 영국계 이민을 통해 프랑스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1] 이러한 동화 정책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통합 자체는 이후 캐나다 연방 형성의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더럼 보고서는 또한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포함한 더 넓은 연방 구상과 지방 정부 및 대법원 설립을 제안했다.[9] 비록 해양주들의 무관심으로 당장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구상들은 수십 년 후인 1867년 캐나다 연방이 성립되는 기초를 마련했다. 더럼 보고서의 자치 정부 원칙은 이후 호주와 뉴질랜드 등 다른 영국 정착 식민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6.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더럼 보고서는 식민지 지배 방식과 민족 문제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보고서에서 더럼 경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영국계 캐나다인과 구분하며 '인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당시 '민족성'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다.[10] 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계 캐나다인에 비해 "더 희망 없는 열등성을 나타내고 지속시키는 민족적 구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1] 따라서 프랑스계 캐나다 민족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는 "헛된 시도"이며,[1] 이들을 영국 문화에 동화시키는 것이 "그러한 열등함에서 끌어올리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
이러한 강제적인 동화 논리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시행했던 민족 말살 정책과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식민 지배 하에서 소수 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억압하려는 시도의 한 사례로,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식민주의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주력한다.
한편, 더럼 경이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영국 문화에 동화시켜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려 했다는 점을 들어, 현대 한국 사회 내 소수 집단 및 다문화 가정에 대한 적극적인 사회 통합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시각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자칫 소수 집단의 문화적 고유성을 존중하지 않는 강압적 동화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7. 결론
더럼은 형사 문제에 대한 그의 결정으로 런던에서 논란이 일어난 가운데 1838년 10월 9일에 사임했으며[18], 곧 찰스 파울렛 톰슨, 초대 시드넘 남작으로 교체되었다. 그는 캐나다 연합을 시행하는 책임을 맡았다. 더럼의 보고서는 1839년 2월 11일 런던 의회에 제출되었다.[18]
참조
[1]
문서
Durham, 1839: "Report on the Affairs of British North America"
http://eco.canadiana[...]
[2]
웹사이트
Canadian Encyclopedia article on Durham
https://web.archive.[...]
[3]
간행물
Durham Report
https://www.thecanad[...]
2019
[4]
논문
"'A Firebrand amongst the People': The Durham Meetings and Popular Politics in Upper Canada."
1994
[5]
웹사이트
Durham Report {{!}} The Canadian Encyclopedia
https://www.thecanad[...]
2021-06-26
[6]
논문
"Democratic struggle or national uprising? The Canadian rebellions in British political thought, 1835–1840."
https://oro.open.ac.[...]
2020
[7]
논문
"Lord Durham Then and Now"
1990
[8]
서적
Lord Durham's Report
The Canadian Publishers
[9]
웹사이트
Durham Report {{!}} The Canadian Encyclopedia
https://www.thecanad[...]
2019-12-11
[10]
웹사이트
Websters Dictionary 1828 - Webster's Dictionary 1828 - Race
https://webstersdict[...]
[11]
서적
Lord Durham's Report
The Canadian Publishers
[12]
서적
Lord Durham's Report
The Canadian Publishers
[13]
서적
Lord Durham's Report
The Canadian Publishers
[14]
웹사이트
Durham Report
http://www.canadiane[...]
Historica Foundation of Canada
2006-05-18
[15]
문서
Union Act, 1840
[16]
웹사이트
Province of Canada (1841–67)
https://www.thecanad[...]
[17]
문서
Lord Durham's Report
https://archive.org/[...]
[18]
웹사이트
Lambton, John George, 1st Earl of Durham, in the Dictionary of Canadian Biography Online
http://www.biographi[...]
2000
[19]
문서
Durham, 1839: "Report on the Affairs of British North America"
http://eco.canadiana[...]
[20]
웹인용
Canadian Encyclopedia article on Durham
http://www.thecanadi[...]
2018-09-18
[21]
웹인용
Durham Report
http://www.canadiane[...]
Historica Foundation of Canada
2006-05-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