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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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용어
- 3. 역사
- 4. 연방 가입 (Joining Confederation)
- 5. 유산 (Legacy)
- 참조
1. 개요
캐나다 연방은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에 따라 온타리오, 퀘벡,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이 연합하여 자치령으로 출범한 국가이다. 캐나다는 연방제 국가이며, '연방'이라는 용어는 1867년 식민지 통합 과정과 그 이후의 주 및 영토 편입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1860년대 캐나다 연방 결성은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압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으며, 연방의 이념적 기원은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된다. 연방 결성은 샬럿타운 회의, 퀘벡 회의, 런던 회의를 거쳐 이루어졌으며, 이후 여러 주와 준주가 연방에 가입했다. 캐나다 연방은 원주민 공동체를 무시하고 식민주의적 상황을 만들어냈지만, 20세기 이후 원주민들의 권리 보장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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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연방 - 1864년 퀘벡 회의
1864년 퀘벡 회의는 캐나다 연방 창설을 위해 캐나다 동부와 서부,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대표들이 모여 연방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72개 결의안을 채택한 핵심 회의였다. - 캐나다의 정치사 - 1837년~1838년 반란
1837년~1838년 반란은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에서 발생한 봉기로, 정치적, 경제적 불만과 영국 정부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으며, 캐나다 정치 개혁과 자치 정부 수립, 특히 더럼 보고서를 통한 책임 정부 수립 권고에 영향을 미쳤다. - 1867년 캐나다 -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
1867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은 1867년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어 캐나다 연방을 성립시키고,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권한 분배, 입법 및 사법 기구 구성, 소수 종교의 권리 보호 등을 규정하며, 매년 7월 1일 캐나다 데이를 기념한다.
캐나다 연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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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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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캐나다 연방 (Confédération canadienne) |
유형 | 연합 |
목표 | 자치령 형성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통합 |
관련 사건 | |
주요 회의 | 샬럿타운, 1864 퀘벡, 1864 런던, 1866 |
관련 사건 | 체사피크 사건 트렌트 사건 |
주요 협약 | 영국령 북아메리카법 퀘벡 결의안 |
관련 정당 | 반연맹당 |
관련 인물 | 캐나다 연방의 아버지 로렌시아 엘리트 |
관련 정치 | 대연정 |
관련 역사 | 헌법사 영토 변천 |
관련 선거 | 1867년 캐나다 연방 선거 |
시기 | |
공식 출범 | 1867년 7월 1일 |
구성 | 캐나다 주 노바스코샤 주 뉴브런즈윅 주 |
국가 | 캐나다 |
2. 용어
캐나다는 여러 주권 국가의 연합체인 연방(컨페더레이션/confederation영어)이 아니라, 연방제(페더레이션/federation영어)[3] 국가이다. 현대 정치 이론에서 '연방(confederation)'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주권 국가들의 연합체이다. 하지만 캐나다는 세계에서 가장 분권화된 연방 국가 중 하나로 여겨진다.[4] '연방(confederation)'이라는 용어는 1850년대부터 캐나다 주(Province of Canada)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캐나다 서부(현 온타리오주)와 캐나다 동부(현 퀘벡주)만이 아닌 모든 영국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연방으로 통합하려는 제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연방(Confederation) 당시 사람들에게 'con-' 접두사는 미국 연방에 비해 중앙 집중적 원칙을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캐나다의 맥락에서 '연방(confederation)'은 1867년 식민지를 통합한 정치적 과정, 그 과정과 관련된 사건, 그리고 이후 다른 식민지와 영토의 편입을 설명한다.[5] 이 단어는 이제 "건국의 아버지들(Fathers of Confederation)"과 같이 추상적인 방식으로 캐나다를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1867년 이후 캐나다에 편입된 주들도 연방에 가입하거나 편입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연방(the Confederation)에 가입했다고는 하지 않는다.[6] 또한 이 용어는 캐나다 역사를 연방 이전 시대와 연방 이후 시대로 구분하는 데에도 사용된다.[7]
2. 1. 연방 (Confederation)
캐나다는 여러 주권 국가의 연합체인 연방(confederation)이 아니라, 연방제(federation) 국가이다.[3] 현대 정치 이론에서 '연방(confederation)'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주권 국가들의 연합체이다. 하지만 캐나다는 세계에서 가장 분권화된 연방 국가 중 하나로 여겨진다.[4] '연방(confederation)'이라는 용어는 1850년대부터 캐나다 주(Province of Canada)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캐나다 서부(현 온타리오주)와 캐나다 동부(현 퀘벡주)만이 아닌 모든 영국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연방으로 통합하려는 제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연방(Confederation) 당시 사람들에게 'con-' 접두사는 미국 연방에 비해 중앙 집중적 원칙을 강화한다는 것을 의미했다.캐나다의 맥락에서 '연방(confederation)'은 1867년 식민지를 통합한 정치적 과정, 그 과정과 관련된 사건, 그리고 이후 다른 식민지와 영토의 편입을 설명한다.[5] 이 단어는 이제 "건국의 아버지들(Fathers of Confederation)"과 같이 추상적인 방식으로 캐나다를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1867년 이후 캐나다에 편입된 주들도 연방에 가입하거나 편입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연방(the Confederation)에 가입했다고는 하지 않는다.[6] 또한 이 용어는 캐나다 역사를 연방 이전 시대와 연방 이후 시대로 구분하는 데에도 사용된다.[7]
2. 2. 연방의 아버지들 (Fathers of Confederation)
캐나다 연합 창시자(Fathers of Confederation)는 1864년 샬럿타운 회의와 퀘벡 회의, 1866년 런던 회의에 참석하여 캐나다 연합을 이끈 대표들을 말한다.[8] 원래의 연합 창시자는 36명이었으며, 샬럿타운 회의의 속기사였던 히위트 버나드도 그중 한 명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9]
1867년 이후 다른 주들을 연합에 포함시킨 사람들도 '캐나다 연합 창시자'로 불린다. 예를 들어, 브리티시컬럼비아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고 주를 연합에 편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아모어 드 코스모스는 연합 창시자로 여겨진다.[10] 조이 스몰우드는 1949년 뉴펀들랜드를 연합에 합류시키는 데 기여했기 때문에 자신을 "마지막 연합 창시자"라고 불렀다.[11]
3. 역사
1867년 7월 1일에 캐나다 연방에 참여한 모든 옛 식민지 및 영토는 초기에는 누벨프랑스의 일부였으며, 한때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다.[142] 노바스코샤는 1621년 제임스 1세의 헌장에 따라 윌리엄 알렉산더 경에게 부여되었다.[142] 이 주장은 프랑스의 아카디아에 대한 주장과 겹쳤고, 스코틀랜드 식민지 노바스코샤는 단명했지만,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와 18세기 그레이트브리튼의 상충하는 제국적 이해관계는 통제권을 놓고 길고 격렬한 투쟁을 야기했다. 영국은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에 따라 오늘날 노바스코샤 본토를 획득했고, 아카디아 인구는 1755년 영국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들은 아카디아의 이름을 "노바스코샤"로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오늘날의 뉴브런즈윅이 포함되었다.[142] 나머지 누벨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누벨프랑스를 패배시킨 결과 영국이 획득했으며, 1763년 파리 조약으로 끝났다. 1763년부터 1791년까지 대부분의 누벨프랑스는 퀘벡 주가 되었다.[142] 그러나 1769년 아카디아의 일부였던 오늘날의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는 "세인트 존스 섬"으로 이름이 바뀌고 별도의 식민지로 조직되었다. 1798년 에드워드 왕자를 기리기 위해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약 5만 명의 연합 왕국 충성파가 영국 북아메리카로 도망쳤다.[13] 영국은 노바스코샤 서부에 정착한 충성파들을 위해 1784년 뉴브런즈윅이라는 별도의 주를 설립했다.[143] 노바스코샤(뉴브런즈윅 포함)가 이 유입의 절반 이상을 받았지만, 많은 충성파들이 퀘벡 주에도 정착했는데, 1791년 헌법법에 따라 주로 영어권인 어퍼 캐나다와 주로 프랑스어권인 로어 캐나다로 분리되었다.[13]
북아메리카의 여러 식민지를 통합하려는 구상은 이미 1814년에 제기되었다. 그해 로어캐나다의 최고법원장인 조너던 스웰은 자신의 보고서인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연방 연합 계획''의 사본을 퀘벡시에서 함께 거주했던 에드워드 왕자에게 보냈다. 이에 대해 에드워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배열되었다”고 답하며,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로 이루어진 하나의 주와 해양 식민지로 이루어진 또 다른 주로 구성된 통합된 캐나다를 제안하였다. 또한 에드워드 왕자는 각 주에는 부총독과 행정 위원회를 두고, 통합된 식민지의 수도 중 하나는 몬트리올에, 다른 하나는 애나폴리스 로열 또는 윈저에 위치하도록 제안하였다.[147] 더럼 경은 1839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문제에 대한 보고서"에서 통합에 대한 구상을 제시했으며,[148] 이는 1840년 연합법으로 이어졌다. 1857년부터 조제프샤를 타셰는 ''쿠리에 뒤 캐나다''에 연재된 33개의 기사에서 연방 설립을 제안했다. 2년 뒤인 1859년 알렉산더 틸로치 갈트, 조르주에티엔 카르티에, 존 로스는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의회에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연방화를 제시했지만, 영국 의회는 이를 정중히 거부했다.
그러나 1860년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앨버트 에드워드 왕자(훗날 에드워드 7세)의 북아메리카 순방은 주민들 사이의 공통 유대를 확인하며 식민지 통합에 기여했다.[149] 실제로 영국의 군주는 "새로운 캐나다 연합을 결속하는 데 중요한 법적 및 상징적 역할"을 수행했다.[150] 더욱이, 1864년부터는 1840년 연합법에 따라 캐나다주를 계속 통치하는 것이 실현 불가능해진 것이 명확해졌고 이에 따라 정치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지도자들 사이에 대연정, 즉 '위대한 연합'이 형성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우리가 캐나다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우리는 이를 위해 싸워야 한다. 그리고 최선의 해결책은 영국 귀족의 통치 아래 캐나다를 독립 왕국으로 놓아주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151]
조너던 스웰이 1814년에 제안한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연방 연합 계획''은 에드워드 왕자의 지지를 받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를 통합하고 해양 식민지를 별도로 묶는 방안을 제시했다.[147] 이후, 더럼 경은 1839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문제에 대한 보고서"에서 통합안을 제시했고,[148] 이는 1840년 연합법으로 이어졌다. 조제프샤를 타셰는 1857년부터 ''쿠리에 뒤 캐나다''에 연방 설립을 제안하는 33개의 기사를 연재했다. 1859년에는 알렉산더 틸로치 갈트, 조르주에티엔 카르티에, 존 로스가 영국 의회에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연방화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1860년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앨버트 에드워드 왕자(훗날 에드워드 7세)의 북아메리카 순방은 식민지 통합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149] 영국의 군주는 "새로운 캐나다 연합을 결속하는 데 중요한 법적 및 상징적 역할"을 수행했다.[150] 1864년부터는 1840년 연합법에 따른 캐나다 주 통치가 어려워지면서, 정치 체제 개혁을 위한 대연정이 형성되었다.[44] 빅토리아 여왕은 "우리가 캐나다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 최선의 해결책은 영국 귀족의 통치 아래 캐나다를 독립 왕국으로 놓아주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151]
1860년대 캐나다 연방 결성은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압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22][23]
내부적으로는 당시 캐나다 주의 정부 구조로 인한 정치적 교착 상태와 영국계 프로테스탄트와 프랑스계 가톨릭 사이의 불신이 존재했다.[24] 증가하는 인구로 인한 인구 압력과 경제 발전을 원하는 경제적 민족주의는 식민지 간 철도 부족과 충돌했는데, 이는 무역, 군사 이동 및 일반적인 교통을 방해했다.[25]
외부적으로는 1854년부터 시작된 캐나다-미국 상호호혜 조약 (제품이 세금이나 관세 없이 미국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유 무역 정책으로 당시 캐나다에 유익한 것으로 여겨짐)이 1865년 미국에 의해 취소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미국 남부를 비공식적으로 지원한 영국에 대한 보복이었다. 미국의 "명백한 운명" 이론은 또 다른 미국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캐나다인들은 미국 독립 전쟁, 1812년 전쟁, 페니언 급습, 세인트 올번스 급습[26] 동안 미국의 침입을 막아냈다). 1867년 3월 30일의 알래스카 매입은 미국 상원(찰스 서머 등)에서 영국으로부터 북미의 나머지 지역을 차지한다는 명분으로 지지되어 더욱 불을 지폈다. 미국 남북 전쟁은 또한 캐나다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공화주의 사상에서 멀어지게 했다.[27] 영국에서는 실패한 그랜드 트렁크 철도에 투자하여 손실을 본 재력가들로부터 정치적 압력이 가해졌고, 소영국주의 사상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군대를 철수하려는 욕구를 키웠다.
3. 1. 식민지 시대
1867년 7월 1일에 캐나다 연방에 참여한 모든 옛 식민지 및 영토는 초기에는 누벨프랑스의 일부였으며, 한때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다.[142] 노바스코샤는 1621년 제임스 1세의 헌장에 따라 윌리엄 알렉산더 경에게 부여되었다.[142] 이 주장은 프랑스의 아카디아에 대한 주장과 겹쳤고, 스코틀랜드 식민지 노바스코샤는 단명했지만,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와 18세기 그레이트브리튼의 상충하는 제국적 이해관계는 통제권을 놓고 길고 격렬한 투쟁을 야기했다. 영국은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에 따라 오늘날 노바스코샤 본토를 획득했고, 아카디아 인구는 1755년 영국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들은 아카디아의 이름을 "노바스코샤"로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오늘날의 뉴브런즈윅이 포함되었다.[142] 나머지 누벨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누벨프랑스를 패배시킨 결과 영국이 획득했으며, 1763년 파리 조약으로 끝났다. 1763년부터 1791년까지 대부분의 누벨프랑스는 퀘벡 주가 되었다.[142] 그러나 1769년 아카디아의 일부였던 오늘날의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는 "세인트 존스 섬"으로 이름이 바뀌고 별도의 식민지로 조직되었다. 1798년 에드워드 왕자를 기리기 위해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약 5만 명의 연합 왕국 충성파가 영국 북아메리카로 도망쳤다.[13] 영국은 노바스코샤 서부에 정착한 충성파들을 위해 1784년 뉴브런즈윅이라는 별도의 주를 설립했다.[143] 노바스코샤(뉴브런즈윅 포함)가 이 유입의 절반 이상을 받았지만, 많은 충성파들이 퀘벡 주에도 정착했는데, 1791년 헌법법에 따라 주로 영어권인 어퍼 캐나다와 주로 프랑스어권인 로어 캐나다로 분리되었다.[13]
3. 1. 1. 누벨프랑스
1867년 7월 1일에 캐나다 연방에 참여한 모든 전 식민지와 영토는 처음에는 누벨프랑스의 일부였으며, 한때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142] 노바스코샤는 1621년에 제임스 1세의 헌장에 따라 윌리엄 알렉산더 경에게 부여되었다.[142] 이 주장은 아카디아에 대한 프랑스의 주장과 겹쳤고, 스코틀랜드 식민지인 노바스코샤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으나,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와 18세기 영국은 캐나다 동북부에 대한 이해 관계와 통제권을 둘러싼 길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영국은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오늘날의 노바스코샤 본토를 획득했으며, 영국 정부는 아카디아 주민들을 1755년 아카디아에서 추방했다. 그들은 아카디아를 "노바스코샤"로 개명하였으며, 여기에는 오늘날의 뉴브런즈윅도 포함되었다.[142] 누벨프랑스의 남은 지역들은 7년 전쟁에서 누벨프랑스가 패배한 이후 영국이 차지했으며, 1763년 파리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1763년부터 1791년까지 누벨프랑스 대부분은 퀘벡주가 되었다.[142] 그러나 1769년 오늘날의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는 아카디아의 일부였으며, "세인트 존스 섬"으로 개명되어 별도의 식민지로 조직되었다. 1798년에는 켄트 및 스트래서른 공작 에드워드 왕자를 기리기 위해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로 이름이 변경되었다.3. 1. 2. 영국령 북아메리카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약 50,000명의 연합 제국 충성파들이 영국령 북아메리카로 피신했다.[143] 영국은 노바스코샤 서부 지역에 정착한 충성파들을 위해 1784년에 뉴브런즈윅이라는 별도의 주를 만들었다.[143]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포함)는 영국 충성파들의 인구 유입 중 절반 이상을 수용했으나, 많은 충성파들이 퀘벡주에도 정착했으며, 이 현상으로 인해 1791년 헌법에 따라 퀘벡주는 주로 영어권의 어퍼캐나다와 주로 프랑스어권의 로어캐나다로 분리되었다.[143]3. 2. 연방 결성의 초기 시도
북아메리카의 여러 식민지를 통합하려는 구상은 이미 1814년에 제기되었다. 그해 로어캐나다의 최고법원장인 조너던 스웰은 자신의 보고서인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연방 연합 계획''의 사본을 퀘벡시에서 함께 거주했던 에드워드 왕자에게 보냈다. 이에 대해 에드워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배열되었다”고 답하며,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로 이루어진 하나의 주와 해양 식민지로 이루어진 또 다른 주로 구성된 통합된 캐나다를 제안하였다. 또한 에드워드 왕자는 각 주에는 부총독과 행정 위원회를 두고, 통합된 식민지의 수도 중 하나는 몬트리올에, 다른 하나는 애나폴리스 로열 또는 윈저에 위치하도록 제안하였다.[147] 더럼 경은 1839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문제에 대한 보고서"에서 통합에 대한 구상을 제시했으며,[148] 이는 1840년 연합법으로 이어졌다. 1857년부터 조제프샤를 타셰는 ''쿠리에 뒤 캐나다''에 연재된 33개의 기사에서 연방 설립을 제안했다. 2년 뒤인 1859년 알렉산더 틸로치 갈트, 조르주에티엔 카르티에, 존 로스는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의회에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연방화를 제시했지만, 영국 의회는 이를 정중히 거부했다.그러나 1860년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앨버트 에드워드 왕자(훗날 에드워드 7세)의 북아메리카 순방은 주민들 사이의 공통 유대를 확인하며 식민지 통합에 기여했다.[149] 실제로 영국의 군주는 "새로운 캐나다 연합을 결속하는 데 중요한 법적 및 상징적 역할"을 수행했다.[150] 더욱이, 1864년부터는 1840년 연합법에 따라 캐나다주를 계속 통치하는 것이 실현 불가능해진 것이 명확해졌고 이에 따라 정치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지도자들 사이에 대연정, 즉 '위대한 연합'이 형성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우리가 캐나다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우리는 이를 위해 싸워야 한다. 그리고 최선의 해결책은 영국 귀족의 통치 아래 캐나다를 독립 왕국으로 놓아주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151]
3. 2. 1. 더럼 보고서 (Durham Report)
북아메리카의 여러 식민지를 합치려는 구상은 1814년에 이미 제기되었다. 그해 로어캐나다의 최고법원장인 조너던 스웰은 자신의 보고서인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연방 연합 계획''의 사본을 퀘벡시에서 함께 거주했던 에드워드 왕자에게 보냈다. 이에 대해 에드워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배열되었다”고 답하며,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로 이루어진 하나의 주와 해양 식민지로 이루어진 또 다른 주로 구성된 통합된 캐나다를 제안하였다. 또한 에드워드 왕자는 각 주에는 부총독과 행정 위원회를 두고, 통합된 식민지의 수도 중 하나는 몬트리올에, 다른 하나는 애나폴리스 로열 또는 윈저에 위치하도록 제안하였다.[147] 더럼 경은 1839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문제에 대한 보고서"에서 통합에 대한 구상을 제시했으며,[148] 이는 1840년 연합법으로 이어졌다. 1857년부터 조제프샤를 타셰는 ''쿠리에 뒤 캐나다''에 연재된 33개의 기사에서 연방 설립을 제안했다. 2년 뒤인 1859년 알렉산더 틸로치 갈트, 조르주에티엔 카르티에, 존 로스는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의회에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연방화를 제시했지만, 영국 의회는 이를 정중히 거부했다.그러나 1860년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앨버트 에드워드 왕자(훗날 에드워드 7세)의 북아메리카 순방은 주민들 사이의 공통 유대를 확인하며 식민지 통합에 기여했다.[149] 실제로 영국의 군주는 "새로운 캐나다 연합을 결속하는 데 중요한 법적 및 상징적 역할"을 수행했다.[150] 더욱이, 1864년부터는 1840년 연합법에 따라 캐나다주를 계속 통치하는 것이 실현 불가능해진 것이 명확해졌고 이에 따라 정치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지도자들 사이에 대연정, 즉 '위대한 연합'이 형성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우리가 캐나다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우리는 이를 위해 싸워야 한다. 그리고 최선의 해결책은 영국 귀족의 통치 아래 캐나다를 독립 왕국으로 놓아주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151]
3. 2. 2. 1840년 연합법 (Act of Union 1840)
조너던 스웰이 1814년에 제안한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연방 연합 계획''은 에드워드 왕자의 지지를 받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어퍼캐나다와 로어캐나다를 통합하고 해양 식민지를 별도로 묶는 방안을 제시했다.[147] 이후, 더럼 경은 1839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문제에 대한 보고서"에서 통합안을 제시했고,[148] 이는 1840년 연합법으로 이어졌다. 조제프샤를 타셰는 1857년부터 ''쿠리에 뒤 캐나다''에 연방 설립을 제안하는 33개의 기사를 연재했다. 1859년에는 알렉산더 틸로치 갈트, 조르주에티엔 카르티에, 존 로스가 영국 의회에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연방화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1860년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앨버트 에드워드 왕자(훗날 에드워드 7세)의 북아메리카 순방은 식민지 통합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149] 영국의 군주는 "새로운 캐나다 연합을 결속하는 데 중요한 법적 및 상징적 역할"을 수행했다.[150] 1864년부터는 1840년 연합법에 따른 캐나다 주 통치가 어려워지면서, 정치 체제 개혁을 위한 대연정이 형성되었다.[44] 빅토리아 여왕은 "우리가 캐나다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 최선의 해결책은 영국 귀족의 통치 아래 캐나다를 독립 왕국으로 놓아주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151]
3. 3. 연방 결성의 요인
1860년대 캐나다 연방 결성은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압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22][23]내부적으로는 당시 캐나다 주의 정부 구조로 인한 정치적 교착 상태와 영국계 프로테스탄트와 프랑스계 가톨릭 사이의 불신이 존재했다.[24] 증가하는 인구로 인한 인구 압력과 경제 발전을 원하는 경제적 민족주의는 식민지 간 철도 부족과 충돌했는데, 이는 무역, 군사 이동 및 일반적인 교통을 방해했다.[25]
외부적으로는 1854년부터 시작된 캐나다-미국 상호호혜 조약 (제품이 세금이나 관세 없이 미국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유 무역 정책으로 당시 캐나다에 유익한 것으로 여겨짐)이 1865년 미국에 의해 취소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미국 남부를 비공식적으로 지원한 영국에 대한 보복이었다. 미국의 "명백한 운명" 이론은 또 다른 미국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캐나다인들은 미국 독립 전쟁, 1812년 전쟁, 페니언 급습, 세인트 올번스 급습[26] 동안 미국의 침입을 막아냈다). 1867년 3월 30일의 알래스카 매입은 미국 상원(찰스 서머 등)에서 영국으로부터 북미의 나머지 지역을 차지한다는 명분으로 지지되어 더욱 불을 지폈다. 미국 남북 전쟁은 또한 캐나다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공화주의 사상에서 멀어지게 했다.[27] 영국에서는 실패한 그랜드 트렁크 철도에 투자하여 손실을 본 재력가들로부터 정치적 압력이 가해졌고, 소영국주의 사상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군대를 철수하려는 욕구를 키웠다.
3. 3. 1. 내부적 요인
(내용 없음)3. 3. 2. 외부적 요인
(요약 및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3. 4. 연방으로의 이념적 기원과 철학적 차원

캐나다 연방에 대한 정치적 사상의 역할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광범위한 논쟁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캐나다 연방을 본질적으로 비이데올로기적인 정치적 실용주의의 결과로 여겼다. 1960년대 역사가 피터 와이트는 연방에 관한 입법 논쟁에서 정치 철학자들을 언급하는 것을 "허황된 소리"라고 비웃었다. 와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연방은 실용적인 중개 정치와 경쟁하는 이해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다.[28]
1987년 정치학자 피터 J. 스미스는 캐나다 연방이 비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견해에 도전했다. 스미스는 연방이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만큼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으며, 캐나다 연방은 궁정당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주장했다. 스미스는 이 이데올로기의 기원을 18세기와 19세기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정치 생활은 고전 공화주의 가치를 지지하는 컨트리 당과 새로운 친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궁정당 사이에서 양극화되었다. 궁정당은 정치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믿었다. 1860년대 후반 영국 북아메리카에서 궁정당 전통은 연방 지지자들을 대표했고, 반자본주의적이고 농업적인 컨트리 당 전통은 반연방론자들을 구체화했다.[29]
2000년 저널 논문에서 역사가 이안 맥케이는 캐나다 연방이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개인 권리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다고 주장했다. 맥케이는 연방을 북쪽 북아메리카에 "자유주의 질서"를 창조하려는 고전적 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일부로 묘사했다.[30] 많은 캐나다 역사가들은 캐나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패러다임으로 맥케이의 자유주의 질서 틀을 채택했다.[31]
2008년 역사가 앤드류 스미스는 연방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에 대한 매우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원래 캐나다 4개 주에서 조세 정치가 연방에 대한 논쟁에서 중심 문제였다고 주장했다. 조세는 또한 연방을 거부한 조세 회피 식민지인 뉴펀들랜드에서의 논쟁에서도 중심이었다. 스미스는 연방이 상대적으로 개입적이거나 국가주의적인 자본주의 개발 접근 방식에 공감하는 많은 식민지 주민들에 의해 지지되었다고 주장했다. 자유 무역과 저세금을 믿는 대부분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거대 정부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연방에 반대했다. 연방에 대한 투쟁에는 굳건한 개인주의적 경제 철학과 국가의 경제에서의 적절한 역할에 대한 비교적 집단주의적 견해 사이의 싸움이 포함되었다. 스미스에 따르면, 연방의 국가주의 지지자들이 그들의 반국가주의 반대자들에 대한 승리는 존 A. 맥도널드 정부가 보호주의적 국가 정책을 제정하고 국제 간선 및 태평양 철도와 같은 주요 인프라 프로젝트에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32]
2007년 정치학자 재닛 아이젠스타트는 캐나다 연방을 존 로크의 개인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연결했다. 그녀는 영국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연합이 개인의 권리, 특히 생명권, 자유권 및 재산권을 보호하려는 열망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연방의 아버지들이 17세기와 18세기 계몽주의의 가치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다른 영국 북아메리카 식민지와의 연합이 바람직한지 여부에 대한 1865년 캐나다 주 의회 논쟁을 살펴볼 때 로크에 대한 그들의 지적 빚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주장한다.[33]
; 자유주의적 관점
이안 맥케이(Ian McKay)는 캐나다 연방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는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에 기반하여 "자유주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한다.
; 보수주의적 관점
피터 J. 스미스(Peter J. Smith)는 캐나다 연방이 권위와 질서를 중시하는 궁정당(Court Party)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주장한다.
; 국가주의적 관점
앤드류 스미스(Andrew Smith)는 캐나다 연방 지지자들이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국가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3. 4. 1. 자유주의적 관점
이안 맥케이(Ian McKay)는 캐나다 연방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는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에 기반하여 "자유주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한다.3. 4. 2. 보수주의적 관점
피터 J. 스미스(Peter J. Smith)는 캐나다 연방이 권위와 질서를 중시하는 궁정당(Court Party)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주장한다.3. 4. 3. 국가주의적 관점
앤드류 스미스(Andrew Smith)는 캐나다 연방 지지자들이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국가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3. 5. 샬럿타운 회의 (Charlottetown Conference, 1864년 9월)
1864년 9월, 샬럿타운 회의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의 샬럿타운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원래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의 해양 식민지 연합(Maritime Union)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뉴브런즈윅 주총리 새뮤얼 레너드 틸리, 노바스코샤 주총리 찰스 터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총리 존 해밀턴 그레이가 해양 연합을 구상하였다.그러나 캐나다 식민지 대표단이 회의에 참여하여 영국령 북아메리카 전체의 연합을 제안하면서 회의의 성격이 바뀌었다. 캐나다 식민지 정부는 해양 식민지 정부에 협상 포함 가능성을 질문했고, 이는 총독 몽크를 통해 런던으로 전달되어 식민지청에 의해 수락되었다. 캐나다 식민지는 이중 입법부 다수결(캐나다 동부와 서부 대표 모두의 다수결) 유지의 필요성으로 수년간 입법부 마비가 발생하였고, 맥도널드는 자유보수당을 카르티에의 파르티 블뢰프랑스어와 조지 브라운의 클리어 그릿과의 대연정으로 이끌었다. 맥도널드, 카르티에, 브라운은 다른 영국 식민지와의 연합이 캐나다 식민지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샬럿타운 회의는 1864년 9월 1일에 시작되었고, 해양 연합 문제는 연기되었으며, 캐나다 대표단은 공식적으로 참여하였다. 회의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카르티에와 맥도널드가 세 식민지의 연합을 찬성하는 주장을, 알렉산더 틸로크 갈트가 재정적 합의에 대한 제안을, 조지 브라운이 통합된 정부 형태에 대한 제안을 제시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캐나다 대표단이 제안한 정부 시스템에는 다음이 포함되었다.
- 대영제국과의 유대 관계 유지
- 중앙 당국에 남는 잔여 관할권
- 인구 비례 대표(rep by pop)를 가진 하원과 지역적 평등이 아닌 지방 평등에 기반한 대표를 가진 상원을 포함하는 양원제
- 연방 및 지방 정부의 책임 있는 정부
- 영국 왕실에 의해 임명되는 캐나다 총독
해양 식민지 정치인들에게 매력적인 다른 제안은 다음과 같았다.
- 중앙 정부에 의한 지방 정부 부채 인수
- 인구를 기준으로 지방에 할당되는 중앙 정부 수입
- 몬트리올과 핼리팩스를 연결하는 식민지 간 철도 건설 (캐나다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에, 해양 식민지는 캐나다와 루퍼트 랜드에 쉽게 접근 가능)
9월 7일,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대표들은 캐나다 대표단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고, 모든 주의 연방이 만약 연합 조건이 만족스럽게 될 수 있다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표명했으며, 해양 연합 문제는 보류되었다. 9월 9일 회의가 끝난 후, 핼리팩스, 세인트존, 프레더릭턴에서 대표들 간 추가 회의가 열렸고, 두 번째 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당시에는 퀘벡 시티에서 할리팩스까지 철도 연결이 없었고, 각 지역 사람들은 서로 거의 교류가 없었다. 토마스 다시 맥기는 그 해 여름 초 캐나다 사업가, 언론인, 정치인들의 무역 사절단과 함께 해양 주를 방문했던 몇 안 되는 캐나다 대표 중 한 명이었다. 조지 브라운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민들이 "놀랍도록 문명화되었다"고 적었다.
해양 주에서는 캐나다 대표들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34] 퀘벡 회의 대표들은 국민투표를 고려했으나, 종교 집단 간 분열과 지역 간 불신으로 인해 부결될 것이라고 믿고 자체적으로 결의안을 진행했다.[35]
3. 6. 퀘벡 회의 (Quebec Conference, 1864년 10월)
샬럿타운 회의에 이어, 1864년 10월 퀘벡 시에서 퀘벡 회의가 개최되었다.[36] 회의는 현재의 몽모렌시 공원 자리에서 10월 10일에 시작되었으며,[37] 에티엔 파스칼 타셰가 의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맥도널드가 주도했다. 이 회의에는 이전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뉴펀들랜드를 포함한 영국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총 33명의 대표가 참석했다.[36]
일부 대표들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퀘벡 회의는 결정적인 목표 의식과 민족주의로 가득 차 있었다. 조지 브라운이 이끄는 캐나다 서부 개혁가들에게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지역 문제 간섭이 끝나가는 것이 보였고, 노바스코샤의 터퍼나 뉴브런즈윅의 틸리와 같은 해양 주 대표들에게는 무역과 성장에 대한 훨씬 더 큰 가능성이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상원 구성 문제를 두고 해양 주들은 가능한 한 많은 평등을 요구했다. 뉴펀들랜드가 회의에 참여함에 따라, 세 개의 해양 식민지는 상원에서의 주들의 힘이 단순히 뉴펀들랜드를 대서양 지역에 추가함으로써 희석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맥도널드는 뉴펀들랜드가 가입할 때 자체적으로 네 명의 상원 의원을 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해양 주 대표들은 또한 어느 수준의 정부(연방 또는 주)가 별도로 명시되지 않은 권한을 부여받는가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맥도널드는 가능한 한 강력한 중앙 정부를 목표로, 별도로 명시되지 않은 권한은 중앙 정부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터퍼 등이 이에 지지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연방 헌법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72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회의는 10월 27일에 휴회했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는 퀘벡 회의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었는데, 제안된 하원에서 6명의 의원을 보장받지 못했고, 샬럿타운에서 결석 지주들의 토지를 매입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제공되었다고 생각했던 20만 달러의 지원금도 거부당했다.
S. E. 도슨(S. E. Dawson)은 회의 기간 중 퀘벡 시티 신문에 재인쇄된 팸플릿에서 "지금처럼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위한 기회는 전례 없었다"고 선포했다.
3. 7. 런던 회의 (London Conference, 1866년 12월)
1866년 12월, 캐나다 주,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의 16명의 대표가 런던에 모였다.[39] 이들은 카나번 백작의 주선으로 빅토리아 여왕을 접견했다.[39] 여왕은 연방에 대한 큰 관심을 표명했다.[41]웨스트민스터 팰리스 호텔에서 열린 회의에서 대표들은 퀘벡 회의에서 작성된 72개 결의안을 검토하고 승인했다.[40] 찰스 터퍼는 노바스코샤의 반연합 세력에게 수정안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수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이 회의의 결정은 ''런던 결의안''으로 알려졌으며, 식민지청으로 전달되었다.
크리스마스 휴가 후, 대표들은 1867년 1월에 다시 모여 《영국 북아메리카법》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카나번 백작은 캐나다 초대 총리가 되는 존 A. 맥도널드 등과 함께 하이클레어 성에서 법률 초안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2] 새 국가의 명칭은 '캐나다 연방(Dominion of Canada)'으로 결정되었으며, '연방(Dominion)'이라는 용어는 사무엘 레너드 틸리 경이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4]
대표들은 1867년 2월까지 《영국 북아메리카법》 초안을 완성하여 빅토리아 여왕에게 제출했다.[45] 이 법안은 상원과 영국 하원에서 신속하게 승인되었고, 1867년 3월 29일 왕실 재가를 받았다.[45] 연합일은 1867년 7월 1일로 정해졌다.[45]
3. 8. 영국 북아메리카 법 (British North America Act, 1867)
1867년 3월 29일,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 북아메리카 법령》(BNA 법령)에 대한 왕실 재가를 내렸고,[46] 1867년 7월 1일부터 캐나다,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주가 캐나다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연방을 형성하고 존재할 것을 명령, 선포, 공표한다는 왕실 선포가 있었다.[46] 이 법은 상부 캐나다와 하부 캐나다를 통합 캐나다 주로 통합했던 1840년 연합 법령을 대체했다. 온타리오주와 퀘벡주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각각 별도의 주가 설립되었다. 7월 1일은 현재 캐나다의 공식적인 캐나다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영국 북아메리카 법은 1982년 헌법법령에 의해 1867년 헌법 조항으로 개칭되었다.[55][56] 이 법령은 주 및 연방 관할권에서 권한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가장 중요한 두 조항은 91조와 92조이다. 91조는 의회에 은행, 금리, 형법, 우편 시스템, 그리고 무장 세력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한다. 92조는 주에 재산, 계약 및 불법 행위, 지역 사업, 그리고 일반 사업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한다. 그러나 연방법과 주법이 때때로 서로 간섭할 수 있으며, 그러한 경우에는 연방법이 우선한다.[57]
3. 8. 1. 1867년 헌법 조항 (Constitution Act, 1867)
영국 북아메리카 법은 1982년 헌법법령에 의해 1867년 헌법 조항으로 개칭되었다.[55][56] 이 법령은 주 및 연방 관할권에서 권한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가장 중요한 두 조항은 91조와 92조이다. 91조는 의회에 은행, 금리, 형법, 우편 시스템, 그리고 무장 세력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한다. 92조는 주에 재산, 계약 및 불법 행위, 지역 사업, 그리고 일반 사업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한다. 그러나 연방법과 주법이 때때로 서로 간섭할 수 있으며, 그러한 경우에는 연방법이 우선한다.[57]
4. 연방 가입 (Joining Confederation)
캐나다는 1867년 영국 북아메리카 법(BNA Act)에 따라 온타리오주, 퀘벡주, 노바스코샤주, 뉴브런즈윅주가 연합하여 자치령으로 탄생했다.[63] 이후 여러 주와 준주가 연방에 가입했다.
- 1870년 7월 15일, 매니토바주가 캐나다 의회 법률에 의해 설립되었고, 루퍼트 랜드와 북서 지역의 일부가 노스웨스트 준주로 편입되었다.[71][63]
- 1871년 7월 20일, 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영국 국왕령에 의해 캐나다에 합류했다.[64][65][66] 이 국왕령에는 브리티시컬럼비아를 캐나다 철도 시스템에 연결하는 철도 건설 약속이 포함되었다.[67]
- 1873년 7월 1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는 영국 국왕령에 의해 합류했다.[68] 재정 문제 해결이 주된 합류 이유 중 하나였다.[69] 연방 정부의 페리 연결 운영 보장은 1997년 연방 다리 완공으로 삭제되었다.[64]
- 1880년 영국은 엘즈미어 섬을 포함한 모든 북아메리카 북극 제도를 캐나다에 할당했다.[72]
- 1898년 6월 13일, 유콘 준주는 클론다이크 골드 러시 시기에 북서 준주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캐나다 정부는 골드 러시로 인한 인구 유입을 규제하고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69]
- 1905년 9월 1일, 앨버타주와 서스캐처원주는 캐나다 의회 법률에 의해 설립되었다.[70]
- 1949년 3월 31일,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는 영국 의회 법률에 의해 합류했으며, 페리 연결이 보장되었다.[64]
- 1999년 4월 1일, 누나부트 준주가 북서 준주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73]
공식 행사에서 주와 준주의 대표는 연방 가입 순서에 따라 서열을 따르지만, 주는 항상 준주보다 앞선다. 같은 날 가입한 주의 경우, 서열은 연방 가입 당시 주의 인구를 기준으로 한다.
4. 1. 연방 가입 순서
캐나다는 1867년 영국 북아메리카 법(BNA Act)에 따라 온타리오주, 퀘벡주, 노바스코샤주, 뉴브런즈윅주가 연합하여 자치령으로 탄생했다.[63] 이후 여러 주와 준주가 연방에 가입했다.- 1870년 7월 15일, 매니토바주가 캐나다 의회 법률에 의해 설립되었고, 루퍼트 랜드와 북서 지역의 일부가 노스웨스트 준주로 편입되었다.[71][63]
- 1871년 7월 20일, 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영국 국왕령에 의해 캐나다에 합류했다.[64][65][66] 이 국왕령에는 브리티시컬럼비아를 캐나다 철도 시스템에 연결하는 철도 건설 약속이 포함되었다.[67]
- 1873년 7월 1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는 영국 국왕령에 의해 합류했다.[68] 재정 문제 해결이 주된 합류 이유 중 하나였다.[69] 연방 정부의 페리 연결 운영 보장은 1997년 연방 다리 완공으로 삭제되었다.[64]
- 1880년 영국은 엘즈미어 섬을 포함한 모든 북아메리카 북극 제도를 캐나다에 할당했다.[72]
- 1898년 6월 13일, 유콘 준주는 클론다이크 골드 러시 시기에 북서 준주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캐나다 정부는 골드 러시로 인한 인구 유입을 규제하고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69]
- 1905년 9월 1일, 앨버타주와 서스캐처원주는 캐나다 의회 법률에 의해 설립되었다.[70]
- 1949년 3월 31일,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는 영국 의회 법률에 의해 합류했으며, 페리 연결이 보장되었다.[64]
- 1999년 4월 1일, 누나부트 준주가 북서 준주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73]
공식 행사에서 주와 준주의 대표는 연방 가입 순서에 따라 서열을 따르지만, 주는 항상 준주보다 앞선다. 같은 날 가입한 주의 경우, 서열은 연방 가입 당시 주의 인구를 기준으로 한다.
5. 유산 (Legacy)
"연방"이라는 용어는 캐나다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자 이 나라를 탄생시킨 역사적 사건을 지칭하는 말로 캐나다 관용어에 자리 잡았다. 연방산(Mount Confederation), 연방 광장(Confederation Square), 연방 건물(Confederation Building (disambiguation)), 연방 공원(Confederation Park (disambiguation)), 연방역(Confederation Station (OC Transpo)), 연방 하이츠(Confederation Heights), 연방 다리 등 캐나다 랜드마크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된다.
캐나다 연방 건설 과정에서 원주민 공동체는 무시되었다.[75] 연방 성립으로 캐나다 의회와 정부는 제1국민들과의 조약 체결에서 영국 정부의 책임을 이어받았다. 연방 의회는 1876년에 인디언법(Indian Act)을 통과시켰다.[76][77][78][79] 연방은 자치권을 가진 원주민 국가들에 대한 캐나다 국가의 패권으로 인해 자원 탈취, 조약 위반, 강제 동화, 가부장제, 그리고 대를 이어 내려오는 정신적 외상 등 식민주의적 상황을 만들어냈다.
20세기에 들어 캐나다 원주민들의 처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1960년에는 완전한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1982년 캐나다 헌법에 조약 권리가 명시되었고,[80][81] 스패로우 대 캐나다 여왕 사건(R. v. Sparrow)에서[82] 대법원은 캐나다 왕실과 원주민들 사이에 수탁자(fiduciary)적 캐나다 군주제와 캐나다 원주민(Monarchy of Canada and the Indigenous peoples of Canada) 관계가 존재하며, 왕실은 헌법적으로 제1국민들에게 특정 보장을 제공할 의무를 맡고 있다고 판결했다.[83][84][85] 원주민 소유권(aboriginal title) 원칙을 인정하면서 토지 청구권 해결 과정이 진행 중이다. 기숙학교 제도의 영향을 해결하기 위해 캐나다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Canada)가 설립되어 상황 개선을 위한 추가 조치들을 확인하고 있다.[86]
5. 1. 원주민 문제
5. 1. 1. 진실화해위원회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Canada)
캐나다 연방 정부는 과거 원주민 기숙학교(Residential School) 운영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며, 미래를 향한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 진실화해위원회를 설립하였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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