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데이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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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 데이칸(도야마 사다모토)은 에도 시대의 학자로, 교토의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득도했으나 불교에 의문을 품고 환속하여 후지와라 성을 사용했다. 그는 다양한 학문을 익히고 미토 번 쇼코칸에 초빙되어 『대일본사』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고증학 연구를 통해 『충구발』을 간행하며 기존 역사관에 도전했고, 이로 인해 국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는 『고고일록』, 『집고도』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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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데이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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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후지 사다모토 |
다른 이름 | 후지 데이칸 (藤 貞幹) |
출생 | 교호 17년 (1732년) |
사망 | 분세이 6년 11월 15일 (1823년 12월 17일) |
신분 | 고증학자 |
주요 활동 지역 | 오와리 번 |
아버지 | 아사오카 마사즈미 (朝岡 正澄) |
양아버지 | 후지 마사타다 (藤 正忠) |
자녀 | 후지 노리카타 (藤 規方) 아사오카 구메 |
학문 | |
스승 | 가타기리 하쿠안 |
주요 저서 | 《준쇼코》 (峻峭考) 《다이가쿠 와쿠몬》 (大学或問) 《고시키 벤모》 (五色弁妄) 《미즈카가미》 (水鏡) 《국위고》 (国偽考) 《가지 료와쿠》 (家字料倭訓) |
참고 정보 | |
관련 박물관 | 교토 문화 박물관 |
2. 생애
도 데이칸은 교토에서 승려로 출발했으나, 불교에 의문을 품고 환속하여 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와카, 유학, 고증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으며, 미토번 쇼코칸에서 『대일본사』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엄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일본 고대사에 대한 기존의 통설에 도전하는 주장을 펼쳤는데, 대표적으로 진무 천황의 재위 시기를 늦추고 신대 문자의 존재를 부정한 『충구발』을 간행하여 큰 학술 논쟁을 일으켰다. 특히 스사노오를 신라의 왕으로 보는 등[2]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으며, 『고고일록』[1][3], 『집고도』[1]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
2. 1. 출생과 환속
교토의 부쿄지 구온인 주지였던 겐키(히노씨 출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승려가 되기 위해 자랐으며, 11세에 득도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18세에 집을 나와 환속하였다. 환속 후에는 히노씨의 본성인 후지와라 성씨를 사용하였다.2. 2. 학문 연구
히노 스케에다에게 와카를, 다카하시 무네나오에게 유속고실을, 지묘인 무네토키에게 서도를, 고토 시잔과 시바노 릿잔에게 유학을, 다카 후요에게 전각을 배우는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 또한 가악, 전서, 초서, 금석문 등에도 깊은 조예를 보였으며, 한텐주나 우에다 아키나리와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과도 교류했다.이후 미토번의 쇼코칸에 초빙되어 역사서 『대일본사』 편찬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호레키 사건으로 은거 중이던 히노 스케에다의 동생 우라마츠 코젠으로부터 대내리(헤이안궁) 연구에 대한 도움 요청을 받고 의기투합하여, 코젠의 저술 『대내리도고증』 등에 크게 기여했다.[2]
도 데이칸은 발굴된 유물 등을 직접 검토하며 엄밀한 고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기기(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라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진무 천황의 재위 시기를 실제보다 600년 늦추고 신대 문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내용을 담은 『충구발』을 간행했다. 이 책은 당시 국학자들의 큰 반발을 샀다. 특히 진무 천황 문제와 스사노오노미코토(도 데이칸은 그를 신라의 왕으로 보았다)에 대한 해석을 두고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겸광인』을 저술하여 도 데이칸의 고증이 성급하다고 비판했다. 반면 우에다 아키나리는 도 데이칸을 옹호하며 노리나가의 태도를 비판하는 등, 이른바 '히노카미 논쟁'과 같은 격렬한 학술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 외에도 다수의 저서를 남겼는데,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2. 3. 미토 번 쇼코칸 참여
도 데이칸은 이후 미토번의 쇼코칸에 초빙되어 『대일본사』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3. 고증학 연구 및 논쟁
도 데이칸은 다양한 스승에게 학문을 배웠다. 히노 스케에다에게 와카를, 다카하시 무네나오에게 유속고실을, 지묘인 무네토키에게 서도를, 고토 시잔과 시바노 릿잔에게 유학을, 다카 후요에게 전각을 배웠다. 그는 가악, 전서, 초서, 금석문 등 여러 분야에 정통했으며, 한텐주나 우에다 아키나리와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과도 교류했다. 후에 미토번 쇼코칸에 초빙되어 『대일본사』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는 호레키 사건에 연루되었던 우라마츠 코젠과 협력하여 대내리(헤이안궁) 연구에 기여했으며[2], 발굴된 유물 등을 바탕으로 엄밀한 고증을 추구하는 학문적 태도를 견지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일본서기』나 『고사기』와 같은 기기(記紀)의 기록이라도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진무 천황의 재위 시기를 기존보다 600년 늦추고 신대 문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내용을 담은 『충구발』(衝口発)을 간행했다. 이 책의 내용은 국학자들의 큰 반발을 샀고, 특히 모토오리 노리나가와의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반면 우에다 아키나리는 도 데이칸의 입장을 옹호하기도 했다.
도 데이칸은 다수의 저술을 남겼는데,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저서 제목 |
---|
『고고일록』(考古日録)[1][3] |
『집고도』(集古図)[1] |
『백관』(百官) |
『국조서목』(国朝書目) |
『일호연호』(一号年号)[1] |
『이세 양대 신궁 의식장 고주』(伊勢両大神宮儀式帳考註) |
『고와보』(古瓦譜) |
3. 1. 대내리 연구
호레키 사건에 연루되어 은거 중이던 우라마츠 코젠은 히노 스케에다의 친동생이었다. 그는 도 데이칸에게 대내리(헤이안궁) 연구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고, 도 데이칸은 이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협력을 통해 도 데이칸은 코젠의 저술인 『대내리도고증』을 비롯한 여러 저술 활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2]3. 2. 『충구발』 간행과 논쟁
발굴된 출토품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엄밀한 고증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 기기(記紀)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무 천황의 재위 연도를 600년 늦추고 신대 문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내용을 담은 『충구발』(衝口発)을 간행했다.[2]이는 국학자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진무 천황의 재위 기간 문제나 스사노오노미코토(사다모토는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신라의 왕이라고 주장했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겸광인』(鉗狂人)을 저술하여 사다모토의 고증이 졸속하다고 비판했고, 반대로 우에다 아키나리가 사다모토를 옹호하여 노리나가의 태도를 비난하는 등 격렬한 논쟁('히노카미 논쟁' 등)이 일어났다.
4. 주요 저서
- 『고고일록』[1][3]
- 『집고도』[1]
- 『백관』
- 『국조서목』
- 『일호연호』[1]
- 『이세 양대 신궁 의식장 고주』
- 『고와보』
- 『충구발』: 진무 천황의 재위를 600년 늦추고 신대 문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내용을 담아 간행 후 국학자들과의 논쟁을 일으켰다.[2]
참조
[1]
웹사이트
日本考古学の鼻祖 藤 貞幹展
https://www.bunpaku.[...]
2023-07-10
[2]
간행물
裏松固禅の著作活動について : 『大内裏図考証』の編修過程を中心として
https://shoryobu.kun[...]
宮内庁書陵部
2004-03
[3]
웹사이트
大学蔵品展開催のお知らせ
http://www.nara-u.ac[...]
奈良大学博物館
2024-08-25
[4]
웹사이트
코토뱅크 - 도 데이칸
http://kotobank.j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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