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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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일본사는 에도 시대에 미토 학파에 의해 편찬된 일본의 역사서이다. 짐무 천황부터 고코마쓰 천황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기전체 형식으로 구성되어 본기, 열전, 지, 표로 나뉜다. 주자학적 역사관과 미토학의 영향을 받아 존왕론과 대의명분론을 강조하며, 막말 사상과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미쳤다. 신공황후를 황후전에 등재하고, 고분 천황을 제위에 포함하며, 남조 정통론을 주장하는 특징을 지닌다. 역사학자 구메 쿠니타케는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는 사상서로서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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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편찬 과정
미쓰쿠니는 1645년 『사기』 「백이전」을 읽고 감명받아 학문에 정진하며 역사서 편찬을 구상했다. 1656년 메이레키 대화재로 거처를 옮기면서 사국(史局)을 설치했고, 1662년 하야시 가호와 『본조통감』 편찬에 대해 논의했다. 1672년 사관을 쇼코칸(彰考館)으로 개칭하며 편찬을 본격화했고, 주순수를 초빙하여 역사 정통성 개념을 확립, 남조 관련 사료를 수집했다.[8]
덴나 연간에 『신찬기전』(104권)을 완성했으나, 고카메야마 천황 시대까지 다루고자 쇼코칸을 개혁하고 사업을 확대했다.[8] 1690년 은거 후에도 역사서 완성을 추진하여 겐로쿠 10년에 「백왕본기」를 완성했다.[8]
1715년 서명을 둘러싼 논쟁 끝에 『대일본사』로 결정되었고, 1720년 교호(享保)본이 막부에 헌상되었다.[8] 1737년 아사카 단파쿠 사망으로 사업이 중단되었다가, 1799년 다치하라 스이켄이 교정 작업을 진행했으나 사관 동요가 발생했다.[8] 1906년 도쿠가와 구니유키에 의해 완성되기까지 250여 년이 걸렸다.[8]
2. 1. 편찬 배경
미쓰쿠니는 쇼호 2년(1645년) 『사기』의 「백이전」을 읽고 백이・숙제의 고사에 감명을 받아 학문에 정진하여 역사서 편찬에 뜻을 두었다.[8] 메이와 3년(1656년) 메이레키 대화재로 고이시카와(小石川) 번저(藩邸)가 소실되자 고마고메(駒込)의 별저(別邸)로 옮겨 사국(史局)을 설치하고 편찬 사업을 시작하였다.[8]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서기』를 위시한 육국사 등의 사서가 편년체로 편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사기』와 같은 기전체 사서가 편찬된 선례가 없어 사관원(史館員)들의 반대 의견도 있었다.[8] 편찬 사업의 동기로는 막부의 사서 편찬이 진행 중이었으나 메이레키 대화재로 자료가 소실된 점, 하야시 라잔의 죽음 등이 꼽힌다.[8]
간분 2년(1662년), 막부에서는 하야시 가호(林鵞峰)에게 명하여 편년체 사서 『본조통감』(本朝通鑑) 편찬을 시작했고, 미쓰쿠니는 하야시 가호를 번저에 초대하여 편찬 방침 및 정통성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8] 간분 12년에는 편찬 사업을 본격화하여 고마고메 별저의 사관(史館)을 고이시카와 본저로 이전하고 「쇼코칸」(彰考館)이라 개칭했다.[8] 사관원 수를 늘리고, 멀리 떨어진 지방까지 파견하여 사료를 수집했으며, 특히 난보쿠초 시대 남조 관련 사료를 폭넓게 수집하였다.[8]
미쓰쿠니는 일본에 망명한 명 왕조의 유신(遺臣) 주순수를 초빙하여 역사의 정통성 개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8] 특히 난보쿠초 시대 남조 측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충성심을 다루는 데 있어 주순수에게 영향을 받았다.[8]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의 영향으로 하야시 라잔 부자가 집필한 『본조통감』 초고에 야마토 민족(일본인)이 "오의 태백의 후예"라는 기술을 발견하고 분개했다고도 전해진다.[8]
이 책은 에도 시대 주요 학술 연구 중 하나로, 미토학(Mitogaku)과 국학(Kokugaku)의 기초를 마련했다.[3] 미토학의 일본 국수주의 사상가 아이자와 세이시사이(Aizawa Seishisai)도 이 작업에 참여했다.[3] 이 책은 유교, 특히 주희(Zhu Xi)의 후기 성리학(Neo-Confucianism)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명나라 충신 주지유(Zhu Zhiyu)의 제자들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3] 그러나 다른 유교 학파와 달리 중국 고전 대신 일본 고전과 천황이 다스리는 땅으로서의 일본에 중점을 두었다.[3] 이러한 사상은 존왕양이 운동으로 이어졌고, 결국 막말 시대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미토 봉기(Mito Rebellion)로 이어졌다.[3]
2. 2. 참여 인물
이름 | 역할 및 기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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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미쓰쿠니 | 편찬 사업 주도[8] |
주순수 | 명나라 유신, 역사 정통성 개념에 영향[8] |
하야시 가호 | 『본조통감』 편찬, 미쓰쿠니와 교류[8] |
아사카 단파쿠 | 미쓰쿠니 사후 사업 주도[8] |
다치하라 스이켄 | 교정 작업 주도, 사관 동요 발생[8] |
후지타 유코쿠 | 사관 동요에서 다치하라 스이켄과 대립[8] |
도쿠가와 구니유키 | 『대일본사』 완성[8] |
진구황후를 제위에서 제외하고 오토모 황자를 제위에 포함했으며, 남조 정통론을 주장했다.
3. 구성 및 내용
구분 내용 형식 기전체(紀伝体) 구성 본기(本紀), 열전(列伝), 지(志), 표(表) 본기 (73권) 짐무 천황부터 고코마쓰 천황까지 열전 (96권) 황후, 황자, 신하 등 지 (126권) 신기(神祇), 씨족, 직관, 국군, 식화, 예악, 병, 형법, 음양, 불사 표 (28권) 신하, 공경, 국군사, 장인, 검비위사, 장군료속
《대일본사》는 일본의 전설적인 초대 천황인 짐무 천황부터 1392년 남북조 합일 이후 고코마쓰 천황까지 100명의 천황을 다룬다.[1]
본문은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는 본기 73권, 부록으로 인물 약전인 열전 170권, 기타 설명인 지 126권, 표 28권으로 구성되어 총 397권이다. 색인 5권을 더하여 총 402권이 인쇄되었다.[1]
4. 특징
전반적으로 주자학에 기반한 미토학의 역사관을 따르며, 존왕론(尊王論)이라는 일본식 대의명분론을 내세웠다. 이는 존왕양이 운동으로 이어졌고, 결국 막말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미토 봉기로 이어졌다.
역대 천황의 계보가 현재와 같이 정리된 것도 『대일본사』의 영향이다.
역사학자 구메 구니타케는 『일본외사』와 함께 '극본(劇本)의 일종'이라 혹평했다. 그러나 이 책은 에도 시대의 주요 학술 연구 중 하나이며, 미토학과 국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유교, 특히 주희의 후기 성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다른 유교 학파들과 달리 일본 고전과 천황 중심의 일본에 초점을 맞추었다.[3]
4. 1. 3대 특징
신공황후를 황후전에 등재하고, 대우황자를 제기에 등재하였으며, 남조 정통론을 주장한 것이 《대일본사》의 3대 특징이다.
《대일본사》는 전반적으로 미토학의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황론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막말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사용되는 역대 천황 목록도 《대일본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5]
근대 역사학계에서는 구메 쿠니타케가 라이 산요의 『일본외사』와 함께 《대일본사》를 "극본의 종류"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5] 반면,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는 《대일본사》를 사상서로서 높이 평가했다.[6]
4. 1. 1. 진구 황후 관련
대일본사는 신공황후를 황후전에 등재하였으나, 근대 역사학계에서는 구메 쿠니타케가 일본외사와 함께 "극본의 종류"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5] 반면,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는 대일본사를 사상서로서 높이 평가했다.[6]
4. 1. 2. 오토모 황자(고분 천황) 관련
대우황자를 제기에 등재하였다.[5] 역대 천황이 현재의 것으로 개편된 것도 『대일본사』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4. 1. 3. 남조 정통론
주자학에 근거를 둔 미토학의 역사관이 배어 있고, 존왕론이라는 일본적 형태의 대의명분론이 관철되고 있으며, 남조 정통론을 주장하였다.
5. 사상적 기반
주자학에 근거를 둔 미토학의 역사관이 배어 있으며, 존왕론이라는 일본적 형태의 대의명분론이 관철되고 있다.[3] 이는 존왕양이 운동으로 이어졌고, 결국 막말(Bakumatsu)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Tokugawa shogunate)에 대한 미토 봉기(Mito Rebellion)로 이어졌다.[3]
이 책은 유교, 특히 주희의 후기 성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3] 명나라 충신 주지유(Zhu Zhiyu)의 제자들이 이 프로젝트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3] 그러나 다른 유교 학파들과 달리 중국 고전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일본 고전과 천황이 다스리는 땅으로서의 일본에 중점을 두었다.[3] 키타바타케 친후사(北畠親房)의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의 영향을 받았다.
명(明)나라 유신인 주준수(朱舜水)를 초빙하여, 그들로부터 역사의 정통성의 의미를 듣게 되었다.[3] 특히, 남북조 시대의 남조 측 무장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의 충성심을 주준수에게서 시사받았다.[3]
6. 영향
미토학의 대의명분론에 기초한 존황론은 막말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역대 천황 계보가 현재와 같이 개편된 것도 『대일본사』의 영향으로 여겨진다.[5] 이는 존왕양이 운동으로 이어졌고,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미토 봉기로 이어졌다.
주자학에 근거를 둔 미토학의 역사관은 존왕론이라는 일본적 형태의 대의명분론으로, 메이지 유신 시기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 확립에 기여했다.
구메 구니타케는 『대일본사』를 '극본(劇本)의 일종'이라고 혹평했다.[5] 반면,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는 "메이지·다이쇼 시대 사이에 역사라는 이름에 걸맞는 저술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라는 것에서 보면, 진정으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미토의 『대일본사』뿐이다"라며 사상서로서 높이 평가했다.[6]
7. 평가
大日本史일본어는 일본 역사 연구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사서로 평가받는다. 특히, 사료 수집과 정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후대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토학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존왕론을 강조하여 막말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고, 역대 천황의 계보를 현재의 형태로 개편하는 데에도 기여했다.[3]
하지만, 객관적인 역사 서술보다는 주관적인 역사 해석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특히 주자학에 근거한 미토학의 역사관이 강하게 드러나며, 천황 중심주의적인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5]
역사학자 구메 구니타케는 大日本史일본어를 라이 산요의 日本外史일본어와 함께 '극본(劇本)의 일종'이라 혹평하기도 했다.[5] 반면,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는 "메이지·다이쇼 시대 사이에 역사라는 이름에 걸맞는 저술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라는 것에서 보면, 진정으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미토의 大日本史일본어뿐이다"라며 사상서로서 높이 평가했다.[6]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1615-1867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58
[2]
학술지
What Is the Dai Nihon Shi?
https://www.cambridg[...]
2021-12-07
[3]
웹사이트
Dai Nihon Shi
https://www.britanni[...]
2021-12-07
[4]
서적
『大思想エンサイクロペヂア』
春秋社
1930
[5]
서적
大日本時代史 第六巻 南北朝時代史
早稲田大学出版部
1927-01-09
[6]
서적
橋川文三著作集
筑摩書房
2001-07-25
[7]
서적
近世日本の歴史叙述と対外意識
勉誠出版
2016-07-00
[8]
문서
완성의 공으로 미토 후작가는 공작으로 승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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