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 다카요시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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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도 다카요시는 1579년 니와 나가히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센마루로 불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도 다카토라의 양자가 되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이마바리 번의 지번인 나바리 번의 조상이 되었으며, 1670년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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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다카요시 (초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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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니와 씨 → 하시바 씨(도요토미 씨) → 도도 씨(나바리 도도가) |
이름 | 도도 다카요시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생년월일 | 덴쇼 7년 6월 1일 (1579년6월 24일) |
사망일 | 간분 10년 7월 16일 (1670년8월 31일) |
어릴적 이름 | 센마루 |
계명 | 도쿠렌인덴 도쿠오 슈에이 대거사 |
묘소 | 나바리시도쿠렌인 |
관위 | 종5위하 궁내소보 |
주군 | 도도 다카쓰구 |
가문 | 니와 씨 하시바 씨(도요토미 씨) 도도 씨(나바리 도도가) |
부모 | 아버지: 니와 나가히데, 어머니: 스기와카 무신의 딸 양아버지: 도요토미 히데나가, 도도 다카토라 |
형제자매 | 니와 나가시게, 니와 나가마사, 다카요시, 니와 나가쓰구 |
배우자 | 정실: 미조구치 히데카쓰의 딸 측실: 게이호인 |
자녀 | 나가마사, 나가토메, 나가유키, 나가노리, 나가토시, 딸 (도도 간노스케 실), 딸 (도도 겐노스케 나오히로 실), 딸 (이코마 마사유키 실) |
관직 | |
역대 | 1대 |
임기 | 1636년 ~ 1670년 |
전임 | 도도 다카토라 |
후임 | 도도 나가마사 |
2. 생애
도도 다카요시는 1579년 6월, 오미 사와야마성에서 니와 나가히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기와카 엣젠노카미의 딸이며, 어린 시절 이름은 센마루(せんまる)였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하시바 히데요시는 나가히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센마루를 히데나가의 양자로 들였다. 히데나가의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지만, 1588년에 히데요시가 히데야스를 히데나가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다카요시는 입지가 좁아졌다. 결국 후계자 자리를 잃은 센마루는 히데나가의 가신이었던 도도 다카토라의 양자가 되었고, 히데나가는 이를 인정하여 1만 석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1595년, 다카토라는 이요 이타지마 7만 석의 다이묘로 발탁되었고, 다카요시도 이에 따라 이타지마에 입봉했다. 미조구치 히데카쓰의 일곱째 딸과 결혼했지만 곧 이혼했다. 그러나 그 시녀를 곁에 두고 측실로 삼아, 나가마사를 비롯한 아이들을 낳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활약하였고, 도도 다카토라가 이마바리 20만 석을 영지로 받을 때, 다카요시는 그 중 2만 석을 받았다. 1601년 다카토라에게 친아들 다카쓰구가 태어나면서, 다카요시는 다카토라의 가신이 되었다. 1608년, 도도 다카토라가 이가와 이세 중부의 22만 석으로 전봉되면서, 다카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시로 이마바리에 남아 오치 군에서 2만 석을 받고 새로 지은 이마바리 성을 받았다. 이로써 도도 번의 지번인 이마바리 번이 탄생하였다. 다카요시는 즉시 가신단에게 영지를 할당하였는데, 1609년 9월에 중신 야구라 씨에게 400석을 준 것이 확인된다. 또한 검지도 실시된 듯하며, 1620년 2월의 "오치 군 후루야 촌 검지장"이 전해지고 있다.
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여, 여름 전투에서는 초소카베 모리치카 부대를 상대로 활약했다(야오 전투).
1630년, 양부 다카토라가 사망하자, 다카요시는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이마바리에서 에도로 향했다. 그 도중 오미 미나구치에서 본번의 사자에 의해 설득당하여, 대리로서 가마다 신베를 파견하고, 다카요시는 이마바리로 귀국했다. 가독이 정식으로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카쓰구로부터 상당한 압력이 가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1636년, 다카쓰구의 명령으로 이가 나바리로 이봉되어, 나바리 도도가의 조상이 되었다. 차남 이하 3명에게 5,000석을 분지하여 1만 5천 석이 되었다. 다카쓰구는 다카요시의 존재를 위험시했다고 하며, 교호 연간까지 나바리 도도가와 본가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그런 배경도 있어서인지, 나바리 가문의 번주는 제9대 도도 나가노리까지 도도 씨의 통자(通字)인 '다카(高)'가 아닌 니와 씨의 '나가(長)'를 사용하고 있다.
나바리 도도가는 대대로 구나이(宮内)를 통칭하며, 도도 구나이가(藤堂宮内家)라고도 불린다. 11대 다카사다(高節) 때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고, 자손은 현재도 도쿄에 거주하고 있다.
1670년 7월에 사망했다. 향년 93세. 묘소는 나바리의 도쿠렌인에 있다.
2. 1. 어린 시절
덴쇼 7년(1579년) 6월, 오미 사와야마성에서 니와 나가히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기와카 엣젠노카미의 딸이다. 어린 시절 이름은 '''센마루'''(せんまる)였다. 덴쇼 10년(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하시바 히데요시는 나가히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센마루를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의 양자로 들였다. 친아들이 없는 히데나가의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지만, 덴쇼 16년(1588년)에 히데요시가 자신과 히데나가의 조카인 히데야스를 히데나가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다카요시는 입지가 좁아졌다. 후계자 자리를 잃은 센마루를 히데나가의 가신으로 후계자가 없었던 도도 다카토라가 양자로 삼았고, 히데나가는 이를 인정하여 양자 입적에 즈음하여 1만 석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분로쿠 4년(1595년), 다카토라는 이요 이타지마 7만 석의 다이묘로 발탁되었고, 다카요시도 이에 따라 이타지마에 입봉했다. 이때 미조구치 히데카쓰의 일곱째 딸과 결혼했지만 곧 이혼했다. 그러나 그 시녀를 곁에 두고 측실로 삼아, 나가마사를 비롯한 아이들을 낳았다.
2. 2. 도요토미 가문과 도도 가문
덴쇼 7년(1579년) 6월, 오미 사와야마성에서 니와 나가히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기와카 엣젠노카미의 딸이다. 어린 시절 이름은 '''센마루'''(せんまる)였다. 덴쇼 10년(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하시바 히데요시는 나가히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센마루를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의 양자로 들였다. 친아들이 없는 히데나가의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지만, 덴쇼 16년(1588년)에 히데요시가 자신과 히데나가의 조카인 히데야스를 히데나가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다카요시는 입지가 좁아졌다. 후계자 자리를 잃은 센마루를 히데나가의 가신으로 후계자가 없었던 도도 다카토라가 양자로 삼았고, 히데나가는 이를 인정하여 양자 입적에 즈음하여 1만 석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다카토라는 분로쿠 4년(1595년)에 이요 이타지마 7만 석의 다이묘로 발탁되었고, 다카요시도 이에 따라 이타지마에 입봉했다. 이때 미조구치 히데카쓰의 일곱째 딸과 결혼했지만 곧 이혼했다. 그러나 그 시녀를 곁에 두고 측실로 삼아, 나가마사를 비롯한 아이들을 낳았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와 이마바리 번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활약하였고, 도도 다카토라가 이마바리 20만 석을 영지로 받을 때, 다카요시는 그 중 2만 석을 받았다. 다카토라는 친아들이 없어 다카요시를 후계자로 생각했으나, 1601년 다카토라에게 친아들 다카쓰구가 태어나면서 후계자 이야기는 없어지고, 다시 다카토라의 가신이 되었다. 하지만 다카토라는 다카요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여, 산킨코타이에는 동반시키지 않았다고 한다.1608년, 도도 다카토라가 이가와 이세 중부의 22만 석으로 전봉되면서, 다카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시로 이마바리에 남아 오치 군에서 2만 석을 받고 새로 지은 이마바리 성을 받았다. 이로써 도도 번의 지번인 이마바리 번이 탄생하였다. 다카요시는 즉시 가신단에게 영지를 할당하였는데, 1609년 9월에 중신 야구라 씨에게 400석을 준 것이 확인된다. 또한 검지도 실시된 듯하며, 1620년 2월의 "오치 군 후루야 촌 검지장"이 전해지고 있다.
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여, 여름 전투에서는 초소카베 모리치카 부대를 상대로 활약했다(야오 전투).
1630년, 양부 다카토라가 사망하자, 다카요시는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이마바리에서 에도로 향했다. 그 도중 오미 미나구치에서 본번의 사자에 의해 설득당하여, 대리로서 가마다 신베를 파견하고, 다카요시는 이마바리로 귀국했다. 가독이 정식으로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카쓰구로부터 상당한 압력이 가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2. 4. 오사카 전투와 나바리 도도가
게이초 19년(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 여름 전투에서 초소카베 모리치카 부대를 상대로 활약했다(야오 전투).간에이 7년(1630년), 양부 다카토라 사망 후 장례식 참석을 위해 이마바리에서 에도로 향하던 중, 오미 미나구치에서 본번의 사자에게 설득당했다. 이에 대리인 가마다 신베를 파견하고 이마바리로 귀국했다. 당시 가독이 정식으로 결정되지 않아 다카쓰구의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5. 말년
1636년, 다카쓰구(高次)의 명령으로 다시 이가(伊賀) 나바리로 이봉되어, 나바리 도도가의 조상이 되었다. 차남 이하 3명에게 5,000석을 분지하여 1만 5천 석이 되었다.다카쓰구는 다카요시의 존재를 위험시했다고 하며(막부에 다카요시를 도도 본가에서 독립한 다이묘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호 연간까지 나바리 도도가와 본가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그런 배경도 있어서인지, 나바리 가문의 번주는 제9대 도도 나가노리까지 도도 씨의 통자(通字)인 '다카(高)'가 아닌 니와 씨의 '나가(長)'를 사용하고 있다.
나바리 도도가는 대대로 구나이(宮内)를 통칭하며, 도도 구나이가(藤堂宮内家)라고도 불린다. 11대 다카사다(高節) 때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고, 자손은 현재도 도쿄에 거주하고 있다.
1670년 7월에 사망했다. 향년 93세. 묘소는 나바리의 도쿠렌인에 있다.
3. 가계
구분 | 내용 |
---|---|
아버지 | 니와 나가히데 |
어머니 | 스기와카 무신의 딸 |
양아버지 | 도요토미 히데나가, 도도 다카토라 |
형제 | 니와 나가시게, 니와 나가마사, 도도 다카요시, 니와 나가쓰구 |
배우자 | 정실: 미조구치 히데카쓰의 일곱째 딸, 측실: 게이호인 (정실의 시녀) |
자녀 | 도도 나가마사(적자), 도도 나가토메(차남, 하야토, 나가나오), 도도 나가유키(삼남, 주베에, 사몬, 오리베, 니와 조스이), 도도 나가노리(사남), 도도 나가토시(오남) |
수정 사항:
- 자녀 항목의 이름 표기 통일: "주베에"를 "주계"로 수정 (다른 항목과 통일)
- 기존의 결과물에서 변경된 사항은 없습니다. 모든 지시사항을 완벽하게 준수하고 있습니다.
3. 1. 부모
3. 2. 형제
- 니와 나가시게
- 니와 나가마사
- '''도도 다카요시'''
- 니와 나가쓰구
3. 3. 배우자
정실은 미조구치 히데카쓰의 일곱째 딸이며, 측실은 정실의 시녀였던 게이호인이다.3. 4. 자녀
이름 | 비고 |
---|---|
도도 나가마사 | 적자 |
도도 나가토메 | 차남, 하야토, 나가나오라고도 불림 |
도도 나가유키 | 삼남, 주베에, 사몬, 오리베, 니와 조스이라고도 불림 |
도도 나가노리 | 사남 |
도도 나가토시 | 오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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