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쿠니 신사 (교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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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요쿠니 신사(교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는 신사로, 1599년 히데요시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창건되었다. 에도 막부 시대에 폐쇄되었다가 메이지 시대에 재건되었으며, 현재는 국보로 지정된 가라 문을 포함한 여러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신사 정면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미미즈카가 위치해 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묘와 유물, 그리고 관련 인물들의 공양탑 등이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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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카 신사는 교토 동부에 위치하며, 과거 기온샤로 불리다 메이지 시대에 개칭되었고, 스사노오노미코토 등을 주요 신으로 모시며, 기온마쓰리의 중심지이자 국보 본전을 포함한 중요문화재를 보유한 관광 명소이다.
도요쿠니 신사 (교토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도요쿠니 신사 |
로마자 표기 | Toyokuni-jinja |
위치 | 교토부교토시히가시야마구야마토오지 거리쇼멘 거리 차야초 530 |
![]() | |
종교 | 신토 |
모시는 신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창건 | 게이초 4년 (1599년) |
설립자 | 알 수 없음 |
웹사이트 | 알 수 없음 |
건축 양식 | |
건축 양식 | 알 수 없음 |
축제 | |
축제 | 알 수 없음 |
조직 | |
지도자 | 알 수 없음 |
역사 | |
창건 연도 | 1599년 |
파괴 연도 | 알 수 없음 |
신사 정보 | |
옛 신사 등급 | 옛 별격관폐사 |
종류 | 별표 신사 |
예제 | 9월 18일 |
2. 역사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그의 유해는 후시미 성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1599년 4월 13일 유언에 따라 교토 호코지 동쪽의 아미다가봉 산정에 매장되었다.[12][13] 그 기슭에는 고야 산의 목식 응기에 의해 묘소가 건립되었는데, 처음에는 히데요시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아 '대불의 진수사'로 불렸다.[14] 이 진수사는 기타노 신사를 본뜬 팔동 건물이었다고 한다.[14] 히데요시는 나라 도다이지 대불전을 수호하는 데미야마 하치만구를 본떠 자신을 "신 하치만"으로 모시도록 유언했다고 전해진다.[14]
4월 16일, 조정은 히데요시의 바람과는 달리 '''도요쿠니노다이묘진'''(豊国大明神)이라는 신호를 내렸다.[16] 이는 일본의 옛 지명인 "도요아시하라나카쓰쿠니"에서 유래했지만, 도요토미 가문의 성씨를 의식한 것이었다. 신호 하사 선명에는 도요쿠니 다이묘진이 병위를 이역에 떨치는 무의 신으로 설명되어 있다. 4월 18일에 천궁 의식이 거행되었고, 4월 19일에는 정1위의 신계가 주어졌다.
도요쿠니 신사의 천궁은 요시다 신도의 요시다 가문이 주최했고, 하기와라 가네쓰구가 사궁직을 맡았다.[16] 1601년에는 1만 석이 사령으로 기증되었고, 1604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기와라 가네쓰구의 사가로서의 지위를 승인했다.[16] 매년 4월과 8월 18일 히데요시의 기일에는 '도요쿠니 제'라는 성대한 축제가 열렸으며,[16] 특히 1604년의 도요쿠니 제는 "도요쿠니 제례도 병풍"에 그려질 정도로 유명했다.
1615년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종가가 멸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미즈노오 천황의 칙허를 얻어 도요쿠니 다이묘진 신호를 박탈하고 신사를 폐지했다.[17] 히데요시는 '''고쿠타이인덴 운잔 슌류 다이코지'''라는 불교식 명칭을 받았고, 영혼은 오륜석탑으로 옮겨졌다.[18] 히데요시의 부인 기타노만도코로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사당은 수리되지 않고 방치되었다. 간에이 17년 (1640년)에는 묘호인 몬제키에 의해 구 참도 내에 신히에 신사 (이마히에진자)가 재흥되었다.[19]
간분 2년 5월 (1662년 6월) 교토 지진 때 도요쿠니 신사 주변이 무사했기 때문에, 지진 방지 유행신으로 참배자가 모였다.[20]
분로쿠・게이초의 역과 관련된 미미즈카가 도요쿠니 신사 정면에 있다.
2. 1. 건립과 폐쇄
159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시신은 유언에 따라 호코지(方広寺)에 가까운 아미다 산정에 매장되었고, 그 기슭에 도요쿠니 신사가 창건되었다.[2] 히데요시는 고요제이 천황으로부터 정1위의 신위와 호코쿠 다이묘진(豊国大明神/풍국대명신)이라는 신호를 받아 신으로 모셔졌다. 4월 18일에 천궁 의식이 거행되었고, 4월 19일에는 정1위의 신계가 주어졌다.[16]1615년 오사카 전투를 끝으로 도요토미 가문이 멸문되자, 에도 막부는 신호를 폐지하고 신사 소유의 땅을 몰수했다.[3] 신위는 신히요시 신궁으로 은밀히 이전되어 모셔졌다.
1868년 메이지 천황은 오사카 행행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했으면서도 막부를 열지 않은 점을 들어 임금을 받들 줄 아는 공신으로 추켜세워 신사 재건을 명했다.[4] 1873년 관사로 승격되어 국가에서 관리하였고, 1880년 호코지 대불전 터였던 현재의 땅에 신사 건물이 완공되어 신위가 옮겨졌다.
1897년 히데요시의 300주년 기념 행사가 이 장소에서 열렸다.[6]
2. 2. 재건과 현재
1868년 메이지 천황이 오사카에 행차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막부를 열지 않고 임금을 받들 줄 아는 공신으로 평가하여 신사 재건을 명했다.[4] 같은 해 5월에는 도바-후시미 전투의 전몰자도 합사하도록 명했다. 1873년에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별격관폐사로 지정되었다. 1880년 호코지 대불전 터였던 현재 위치에 신사 건물이 완공되어 신위가 옮겨졌다.1897년에는 히데요시의 300주년 기념 행사가 이 장소에서 열렸다.[6]
1948년에는 진자 혼초의 별표 신사로 지정되었다.
2019년 4월에는 레이와로 연호가 바뀌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공상(도제)"이 24년 만에 공개되었다.[23][24]
3. 문화재
구분 | 명칭 | 비고 |
---|---|---|
국보 | 카라몬 | 후시미성에서 이전, 난젠지 콘치인을 거쳐 이전 |
중요문화재 | 도요쿠니 축제(豊国の祭り)를 묘사한 병풍 | 가노 나오젠 작품 |
금색 국화 문양이 장식된 조끼 | ||
장식된 중국식 궤 3점 | ||
철 등롱 (철제 등) | 쓰지 요지로 작, 게이초 5년(1600년) 명 | |
나기나타 칼날 호네바미("뼈를 갉아먹는 자") | 아와타구치 요시미쓰의 작품으로 추정, 호네바미 토시로라고도 함 | |
지본 채색 풍국제도, 황지 국동문 부사야 동복, 동 당초 무늬 옻칠 궤·동 봉황 무늬 옻칠 궤·동 얇은 옻칠 궤 | 가노 나이젠 필/6곡 병풍 |
3. 1. 국보

일반적으로 '''카라몬'''은 1598년 히데요시의 후시미성을 위해 처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7] 1623년 성이 해체되었을 때, 이 문은 처음에는 니조성으로 옮겨졌고,[8] 그 다음에는 난젠지의 콘치인으로 옮겨졌다. 마침내 메이지 유신 이후 1876년 도요쿠니 신사로 이전되었다.[9]
3. 2. 중요문화재
- 가노 나오젠의 작품, '''도요쿠니 축제(豊国の祭り)'''를 묘사한 병풍
- 금색 국화 문양이 장식된 조끼
- 장식된 중국식 궤 3점
- 쓰지 요지로 작, 게이초 5년(1600년) 명 철 등롱 (철제 등)[26]
- 나기나타 칼날 ''호네바미''("뼈를 갉아먹는 자"), 무명, 아와타구치 요시미쓰의 작품으로 추정 (호네바미 토시로라고도 함)
- 지본 채색 풍국제도〈가노 나이젠 필/6곡 병풍〉
- 황지 국동문 부사야 동복
- 동 당초 무늬 옻칠 궤·동 봉황 무늬 옻칠 궤·동 얇은 옻칠 궤
4. 경내
일반적으로 '''카라몬''' 문은 1598년 히데요시의 후시미성을 위해 처음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7] 1623년 성이 해체되었을 때, 이 문은 처음에는 니조성으로 옮겨졌고,[8] 그 다음에는 난젠지의 콘치인으로 옮겨졌다. 마침내 메이지 유신 이후 1876년 도요쿠니 신사로 이전되었다.[9]
- 본전 - 1880년(메이지 13년) 건립.
- 폐전
- 정조 신사 - 제신: 기타노만도코로 (도요토미 요시코)
- 배전
- 당문 (국보) - 원래는 난젠지탑두킨치인에 있던 것으로, 도요쿠니 신사 재건에 즈음하여 킨치인에서 이축되었다. 본래는 이신스덴이 간에이 4년 (1627년)에 에도 막부로부터 니조 성의 당문을 양도받은 것이다. 그 전에는 후시미 성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후시미 성의 폐성이 결정된 것은 겐나 9년으로, 간에이 4년 이전에 후시미 성에서 니조 성으로 이축되었다면, 후시미 폐성에서 수년이 지나지 않아 킨치인으로 재이축된 것이 되어, 이 전승에는 일고의 여지가 있다. 또한 킨치인은 이 당문을 당사에 이축한 후, 그 자리에 다이토쿠지에 있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기증한 은으로 건축한 '아케치 문'을 입수하여, 이설했다.
- 마키모토 이나리 신사
- 도요토미 히데요시상 - 태평양 전쟁 중에 도제로 제작된 높이 약 1.1m의 히데요시상. 받침대도 마찬가지로 도제로 약 1.8m의 받침대였지만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부서졌다.[25][24]
- 사무소
- 서원 - 메이지 6년 조영이라고 전해진다.
- 호슈샤 - 노무라 토쿠시치 (토쿠안) 기증의 다실. 서원의 정원 안쪽에 있다.
- 보물관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아 (왼쪽 위 어금니), '토요쿠니 제례도 병풍' 등이 있다.
- 마즈카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양탑.
- 경외·호코쿠묘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묘
- 배전
- 도요토미 구니마쓰의 공양탑
- 마츠노마루도노의 공양탑
- 호코지 대불전 터 및 석루·석탑 - 석탑이란 당 신사 경내 남동쪽 모퉁이에 있는 말 무덤의 오륜탑과 신사의 서쪽에 있는 귀무덤의 오륜탑을 말한다.
5. 경외 · 호코쿠묘
게이초 3년(1598년) 8월 18일에 사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해는 후시미 성에 안치되었다가, 다음 해 유언에 따라 교토의 대불(호코지) 동쪽 아미다가봉 산정에 매장되었다.[12][13] 그 기슭에는 고야 산의 목식 응기에 의해 묘소가 건립되었는데, 처음에는 히데요시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아 '대불의 진수사'로 불렸다.[14] 히데요시는 나라 도다이지 대불전을 수호하는 데미야마 하치만구를 본떠 자신을 '신 하치만'으로 모시도록 유언했다고 전해진다.[15]
게이초 4년(1599년) 4월 16일, 조정은 히데요시의 바람과는 달리 '''도요쿠니노다이묘진'''(도요쿠니노다이묘진)이라는 신호를 내렸다.[16] 이는 일본의 옛 지명인 '도요아시하라나카쓰쿠니'에서 유래했지만, 도요토미 가문의 성씨를 의식한 것이었다. 4월 18일 천궁 의식이 거행되면서 '''도요쿠니 신사'''로 명명되었고, 4월 19일에는 정1위의 신계가 주어졌다.
도요쿠니 신사의 천궁은 요시다 신도의 요시다 가문이 주최했고, 하기와라 가네쓰구가 사궁직을 맡았다. 신류인 본슌은 진궁사의 사승이 되었다. 게이초 6년(1601년)에는 1만 석이 사령으로 기증되었다.
게이초 20년(1615년) 도요토미 종가가 멸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미즈노오 천황의 칙허를 얻어 도요쿠니 다이묘진 신호를 박탈하고 신사를 폐지했다.[17] 히데요시는 '''고쿠타이인덴 운잔 슌류 다이코지'''라는 불교식 명칭을 받았고, 그의 영혼은 오륜석탑으로 옮겨졌다.[18] 히데요시의 유해는 묘소와 함께 산정에 남겨졌다.
이후 사당은 수리가 금지된 채 낡아 없어지도록 방치되었으나, 간에이 17년(1640년)에는 묘호인 몬제키에 의해 구 참도 내에 신히에 신사(이마히에진자)가 재흥되었다.[19]
게이오 4년(1868년) 윤4월, 메이지 천황은 히데요시를 칭찬하며 도요쿠니 신사 재흥을 명했다. 1873년(메이지 6년) 별격관폐사로 지정되었고, 1880년(메이지 13년) 현재 위치에 사당이 완성되어 천좌가 거행되었다. 1897년(메이지 30년)에는 아미다가봉 산정에 거대한 석조 오륜탑이 세워졌고, 이듬해 도요타이코 300년제가 거행되었다. 이 공사 때 히데요시의 유해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재매장되었다.[22]
1948년(쇼와 23년) 진자 혼초의 별표 신사로 지정되었다.
6. 임진왜란과의 관계
159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시신을 유언에 따라 호코지(方広寺)에 가까운 아미다 산정에 매장하고 그 기슭에 도요쿠니 신사를 창건하였다. 고요제이 천황은 히데요시에게 정1위의 신위와 호코쿠 다이묘진(豊国大明神/풍국대명신)이라는 신호를 내려 신으로 모셨다.[2] 귀족, 승려, 무사, 그리고 백성들이 신사에 모여 히데요시의 신격화 기념일을 연회, 음악 공연, 그리고 떠들썩한 축제와 함께 기념했다.[3]
그러나 1615년 오사카 전투를 끝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문되었고, 에도 막부는 신호를 폐지했으며, 신사가 소유한 땅은 몰수되었다. 이에 신위는 신히요시 신궁으로 은밀히 이전되어 모셔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가 빛을 바래게 한 인물에 대한 보기 흉한 충성심을 억제하기 위해" 신사를 폐쇄했다.[3]
1868년 메이지 천황은 오사카 행행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했으면서도 막부를 열지 않은 점을 들어 임금을 받들 줄 아는 공신으로 추켜세워 신사 재건을 지시했다.[4] 1873년 관사로 승격되어 국가에서 관리하였고, 1880년 호코지 대불전터였던 현재의 땅에 신사 건물이 완공되어 신위가 옮겨졌다. 당시 신사 구역은 인접한 호코지의 일부였던 작은 토지를 포함하여 약간 확장되었다.[5] 1897년에는 히데요시의 300주년 기념 행사가 이 장소에서 열렸다.[6]
7.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한일 양국의 시각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도요쿠니 신사는 한국인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메이지 천황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막부를 열지 않고 임금을 받든 공신으로 추켜세워 신사를 재건하고 국가에서 관리하기도 하였다.
7. 1. 일본에서의 평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599년 시신을 유언에 따라 호코지(方広寺)에 가까운 아미다 산정에 매장하고, 그 기슭에 도요쿠니 신사를 창건하였다. 히데요시는 고요제이 천황으로부터 정1위의 신위와 호코쿠 다이묘진(豊国大明神/풍국대명신)이라는 신호를 받아 신으로 모셔졌다.[1] 그러나, 1615년 오사카 전투를 끝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문되었고, 에도 막부로부터 신호가 폐지되었으며, 신사가 소유한 땅은 몰수되었다.[1] 이에 신위는 신히요시 신궁으로 은밀히 이전되어 모셔졌다.[1]1868년 메이지 천황의 오사카 행행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했으면서도 막부를 열지 않은 점을 들어 임금을 받들 줄 아는 공신으로 추켜세워 신사를 재건하였다.[1] 1873년 관사로 승격되어 국가에서 관리하였고, 1880년 호코지 대불전터였던 현재의 땅에 신사 건물이 완공되어 신위가 옮겨졌다.[1]
7. 2. 한국에서의 평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로, 한국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도요쿠니 신사는 한국인들에게는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이다.참조
[1]
웹사이트
reibyou 霊廟
http://www.aisf.or.j[...]
Japanese Architecture and Art Net Users System
2007-08-09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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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eyo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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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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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shimi castle
http://www.jcastle.i[...]
Guide to Japan Castles
201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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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From Castle to Teahouse: Japanese Architecture of the Momoyama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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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発掘調査で見つかった恭明宮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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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市内遺跡発掘調査報告 平成25年度
[1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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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秀吉の大仏造立
法藏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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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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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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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かなめいし
愛媛大学古典叢書
[21]
웹사이트
豊国祭礼図屏風(ほうこくさいれいずびょうぶ)伝岩佐又兵衛
https://bunka.nii.ac[...]
蜂須賀氏
[22]
논문
豊太閤改葬始末
[23]
뉴스
24年間お蔵入りの豊臣秀吉像を公開 豊国神社「令和見守って」
https://www.kyoto-np[...]
[24]
트위터
【太閤秀吉公像復活】新しい御代の奉祝記念として、阪神大震災にて損傷し長く御蔵に収蔵しておりました「豊臣秀吉公之像」を修復し国宝唐門前に安置致しました。
https://twitter.com/[...]
[25]
뉴스
24年間お蔵入りの豊臣秀吉像を公開 豊国神社「令和見守って」
https://www.kyoto-np[...]
京都新聞
2020-12-21
[26]
웹사이트
文化遺産データベース
https://bunka.nii.ac[...]
[27]
웹사이트
方広寺大仏殿跡および石塁・石塔
https://bunka.nii.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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