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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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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양 평화론은 1910년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미완성의 논설로, 한·중·일 3국의 평화를 위한 구상을 담고 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사형 집행 전까지 동양 평화론을 완성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동양 평화론은 서문과 전감 일부만 완성되었지만, 자서전, 공술 내용 등을 통해 동양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한·중·일 3국 간의 동양평화회의 조직, 공동 은행 설립, 공동 평화군 창설 등을 제안했으며, 이는 유럽 연합과 같은 형태의 평화 체제를 구상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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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평화론
동양 평화론
동양 평화론 표지
동양 평화론 표지
저자안중근
집필 시기1910년
미완성 여부미완성
언어한문
주요 내용
구성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 (미완성)
서론세계 대세와 동양의 위치
한국, 중국, 일본의 협력 필요성 강조
본론평화 회의 개최 제안
공동 은행 설립
공동 화폐 사용
평화 군대 창설
결론한국, 중국, 일본 3국의 독립 유지 및 서구 열강에 대한 공동 대처 방안 제시 (미완성)
사상적 배경
동양 평화 사상유교적 대동사회 이상
불교적 자비 사상
천주교적 평등 사상
애국 계몽 운동실력 양성 운동
민족 교육 진흥 운동
역사적 의미
관련 정보
관련 인물안중근
관련 사건하얼빈 의거

2. 관련 유묵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들은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고 동양 평화를 염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는데,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는 완성되었지만, 논문 형식의 논설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전감 1'만 지어졌고 나머지는 미완성으로 남았다.[1]

《동양평화론》의 서문에서 안 의사는 만약 일본이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인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을 경고하며 자신의 생각과 뜻을 명확히 밝혔다.[1]

2. 1. 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화국미성유강개정략불개진가련 (東洋大勢思杳玄有志男兒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政略不改眞可憐)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칠언절구 자작시를 쓴 글씨이다.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목)[2]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동양대세사묘현 유지남아기안면 화국미성유강개 정략불개진가련중국어

"암담한 동양의 대세를 생각해보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기개 있는 남아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게다가 아직 동양 평화의 시국을 이루지 못한 것이 더욱 개탄스럽기만 한데, 이미 야욕에 눈이 멀어 정략, 즉 침략정책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이 오히려 불쌍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2]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묵에는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버려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한들 무엇하랴!"(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중국어)라는 내용을 담아, 일본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 연관된 글귀이다.[2]

중국 안위성 선성현에서 만들어진 품질이 우수한 선지(宣紙)에 2행 16자를 쓰고, 왼쪽에 "경술삼월(庚戌三月) 여순옥중(旅順獄中)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서(安重根書)"라고 묵으로 쓴 글씨와 왼손 장인(掌印, 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2]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역인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함께 세계 침략 전쟁으로 변질되어 가던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발판으로 침략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던 1910년 경술년(庚戌年) 당시, 노골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침략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칠 것을 촉구하고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야욕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던 것이다.[2]

2. 2. 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 (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칠언절구 자작시 유묵이다.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버려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한들 무엇하랴!"(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 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라는 내용을 담아, 일본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 연관된 글귀이다.

중국 안위성 선성현에서 만들어진 품질이 우수한 선지(宣紙)에 2행 16자를 쓰고, 왼쪽에 “경술삼월(庚戌三月) 여순옥중(旅順獄中)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서(安重根書)”라고 묵으로 쓴 글씨와 왼손 장인(掌印, 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

일본 제국제2차 세계 대전의 주역인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과 함께 세계 침략 전쟁으로 변질되어 가며 조선을 발판으로 침략 야욕을 불태우던 1910년 경술년(庚戌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일본의 침략 정책을 지적하고 고칠 것을 촉구하며 일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웠다.[2]

안중근 의사는 이와 관련하여 옥중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는 완성되었지만, 논문 형식의 논설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전감 1'만 지어졌고, '현상 2', '복선 3', '문답'은 목차만 제시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집필을 위해 사형 집행 날짜를 한 달쯤 늦추도록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청하여 약속을 받았으나,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안 의사는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라고 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을 경고하며 안중근 의사의 생각과 뜻을 명확히 밝혔다.[1]

2. 3. 유묵의 특징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칠언절구 자작시 유묵에는 "암담한 동양의 대세를 생각해보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기개있는 남아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게다가 아직 동양 평화의 시국을 이루지 못한 것이 더욱 개탄스럽기만 한데, 이미 야욕에 눈이 멀어 정략 즉 침략정책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이 오히려 불쌍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이 담겨있다.[2]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묵에는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버려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한들 무엇하랴!" (zh)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유묵은 일본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칠 것을 촉구하고,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내용으로,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 연관된다.[2]

이 유묵은 중국 안위성 선성현에서 만들어진 품질이 우수한 선지(宣紙)에 2행 16자를 쓰고, 왼쪽에 "경술삼월(庚戌三月) 여순옥중(旅順獄中)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서(安重根書)"라고 쓴 글씨와 왼손 장인(掌印, 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2]

이는 1910년 경술년(庚戌年) 당시,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칠 것을 촉구하며,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야욕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것이다.[2]

3. 동양평화론 집필 배경 및 과정

1910년 3월 안중근은 옥중에서 쓴 칠언절구 자작시와 유묵을 통해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고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이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안중근은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논설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안응칠 역사》는 완성되었으나,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전감 1만 작성되었고, 현상 2, 복선 3, 문답은 목차만 남긴 채 미완성으로 끝났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집필을 위해 사형 집행 연기를 요청했지만, 뤼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안중근은 일본의 침략 정책이 계속되면 한국과 청국이 연대하여 저항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1910년 2월부터 3월까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으나, 형 집행 연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3. 1. 《동양평화론》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칠언절구의 자작시 "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화국미성유강개정략불개진가련(東洋大勢思杳玄有志男兒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政略不改眞可憐)"은 "암담한 동양의 대세를 생각해보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기개 있는 남아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게다가 아직 동양 평화의 시국을 이루지 못한 것이 더욱 개탄스럽기만 한데, 이미 야욕에 눈이 멀어 정략 즉 침략정책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이 오히려 불쌍하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이다.[2]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의 유묵에는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버려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한들 무엇하랴!(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 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라는 내용을 담아 일본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이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 연관된 글귀이다.[2]

이러한 내용과 관련하여 안 의사는 옥중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지었다.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는 완성되었지만, 논문 형식의 논설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전감 1'만 지어졌고 나머지 '현상 2', '복선 3', '문답'은 목차만 제시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당시 안 의사는 이를 집필하기 위해 사형 집행 날짜를 한 달쯤 늦추도록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청하여 그의 약속을 받았으나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1]

《동양평화론》의 서문에서 안 의사는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이라 하여 일제의 침략정책을 경고하며 안중근 의사의 생각과 뜻을 명확히 밝혔다. 이는 세계 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논리가 엿보이는 내용이다.[1]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1910년 2∼3월 동안 집필한 작품으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의거 후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은 안 의사는 형 집행만 남은 상태에서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때까지 처형을 연기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래 집필을 구상했던 서·전감·현상·복선·문답 가운데 서문과 전감 일부만 작성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한문으로 쓴 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A4용지 7∼8장 분량이다.[1]

비록 《동양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검찰의 신문 및 재판 과정에서 한 공술 내용, 그가 남긴 글들을 보면 동양 평화론을 통해 ‘동양의 대세 관계와 평화 정략의 의견’을 개진하려고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안 의사는 한·중·일 3국 간의 상설 기구인 동양평화회의를 뤼순에 조직해 기타 아시아 국가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키고,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 동북아 3국 공동 평화군 창설 등의 구체적인 구상도 밝혔다. 이는 유럽연합(EU) 형태의 한·중·일 평화 체제 구상론으로 100년이라는 시간을 앞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1]

4. 동양평화론의 주요 내용 및 구상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가 1910년 2월부터 3월까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미완성 작품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후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은 안 의사는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사형 집행 연기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래 구상했던 서(序),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 중 서문과 전감 일부만 작성되어 A4용지 7~8장 분량이다.[1]

안 의사는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진술 등을 통해 '동양의 대세 관계와 평화 정략'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자 했다. 그는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한 상설 기구인 '동양평화회의'를 뤼순에 설치하고, 이를 다른 아시아 국가들까지 참여하는 회의체로 발전시킬 구상을 하였다. 또한,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과 공동 평화군 창설 등의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하였다. 이는 유럽연합(EU)과 유사한 형태의 한·중·일 평화 체제 구상으로, 시대를 100년이나 앞선 선구적인 제안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

4. 1. 일본 제국주의 비판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칠언절구 자작시 "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화국미성유강개정략불개진가련(東洋大勢思杳玄有志男兒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政略不改眞可憐)"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목)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2]

"암담한 동양의 대세를 생각해보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기개있는 남아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게다가 아직 동양 평화의 시국을 이루지 못한 것이 더욱 개탄스럽기만 한데, 이미 야욕에 눈이 멀어 정략 즉 침략정책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이 오히려 불쌍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2]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묵에는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버려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한들 무엇하랴!(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 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는 일본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고 일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내용으로,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 관련이 깊다.[2]

중국 안위성 선성현에서 만들어진 품질이 우수한 선지(宣紙)에 2행 16자를 쓰고, 왼쪽에 “경술삼월(庚戌三月) 여순옥중(旅順獄中)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서(安重根書)”라고 쓴 글씨와 왼손 장인(掌印)이 찍혀 있다.[2]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역인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발판으로 침략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1910년 경술년(庚戌年) 당시, 안중근은 이러한 침략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고 일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웠다.[2]

안중근은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논문 형식의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안응칠 역사》는 완성되었지만,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전감 1'만 완성되고 나머지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안중근은 집필을 위해 사형 집행 연기를 요청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1]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안중근은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라며 일제의 침략 정책을 경고했다.[1]

4. 2. 동양평화회의

안중근이 중국 뤼순 감옥에서 1910년 2∼3월 동안 집필한 작품이다. 안중근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의거 후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았다. 안중근은 형 집행만 남은 상태에서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때까지 처형을 연기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래 집필을 구상했던 서·전감·현상·복선·문답 가운데 서문과 전감 일부만 작성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한문으로 쓴 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A4용지 7∼8장 분량이다.[1]

《동양평화론》은 비록 완성되지 못했지만, 안중근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검찰의 신문 및 재판 과정에서 한 공술 내용, 그가 남긴 글들을 보면 ‘동양의 대세 관계와 평화 정략의 의견’을 개진하려고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안중근은 한·중·일 3국 간의 상설 기구인 동양평화회의를 뤼순에 조직해 기타 아시아 국가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키고,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 동북아 3국 공동 평화군 창설 등의 구체적인 구상을 밝혔다. 이는 유럽연합(EU) 형태의 한·중·일 평화 체제 구상론으로 100년이라는 시간을 앞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1]

4. 3. 공동은행 및 공동평화군

안중근은 한·중·일 3국 간의 상설기구인 동양평화회의를 뤼순에 조직하여 기타 아시아 국가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키고, 동북아 3국 공동은행 및 공동평화군 창설 등의 구체적인 구상을 밝혔다. 이는 유럽연합(EU) 형태의 한·중·일 평화체제 구상론으로 100년이라는 시간을 앞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1]

5. 평가 및 의의

《동양평화론》은 비록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안중근 의사가 꿈꿨던 동양 평화의 이상과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자서전 《안응칠 역사》, 검찰 신문 및 재판 과정에서의 공술 내용, 안중근이 남긴 글들을 통해, 단순한 이상을 넘어 '동양의 대세 관계와 평화 정략'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다.[1]

5. 1. 유럽 연합(EU) 형태의 평화 체제 구상

안중근은 한·중·일 3국 간의 상설기구인 동양평화회의를 뤼순에 조직해 기타 아시아 국가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키고,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 동북아 3국 공동평화군 창설 등의 구체적인 구상을 밝혔다. 이는 유럽연합(EU) 형태의 한·중·일 평화체제 구상론으로 100년이라는 시간을 앞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1]

5. 2. 시대를 초월한 통찰력

안중근1910년 2~3월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작품이다. 안중근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후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안중근은 형 집행만 남은 상태에서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때까지 처형을 연기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집필을 구상했던 서·전감·현상·복선·문답 가운데 서문과 전감 일부만 작성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한문으로 쓴 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A4 용지 7~8장 분량이다.[1]

《동양평화론》은 비록 미완성이지만, 자서전 《안응칠 역사》, 검찰 신문 및 재판 과정에서의 공술 내용, 안중근이 남긴 글들을 통해 '동양의 대세 관계와 평화 정략'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은 한·중·일 3국 간 상설 기구인 동양평화회의를 뤼순에 조직하고, 기타 아시아 국가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키며,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 동북아 3국 공동평화군 창설 등 구체적인 구상을 밝혔다. 이는 유럽연합(EU) 형태의 한·중·일 평화 체제 구상으로, 100년이라는 시간을 앞선 평가를 받는다.[1]

참조

[1] 간행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한국학중앙연구원 1998
[2] 뉴스 “안중근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관점서도 선구적 사상”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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