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두재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두재표는 조선 말 옥구현(현 군산시) 출신의 학자이자 시인으로, 두릉 두씨 가문의 인물이다. 그는 1860년에 태어나 1904년에 사망했으며, 호는 시해(詩海) 또는 우초(又草)이며 만년에는 묵와거사(墨窩居士)로 불렸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장에 능했으며, 최익현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다. 전라도 관찰사 주관 한시 경선에서 수석, 전국 대회 4위를 차지했고, 항일 의병장 최익현의 제자로서 우국충정을 담은 시를 썼다. 그의 시문집인 《시해집》이 발간되었고, 후손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는 시인이자 풍류남아, 우국지사로 평가받으며, 2022년 군산 진포시비공원에 시비가 건립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두릉 두씨 - 두영철
    두영철은 고려 시대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를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고, 원나라 간섭 시기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 노력했으며, 유배지에서 시를 짓고 후학을 양성한 인물로 긍정적 평가와 비판적 시각이 공존한다.
  • 두릉 두씨 - 두응룡
    두응룡은 위키백과에 등재된 인물이지만, 현재 정보 부족으로 인해 그의 생애, 가계, 역사적 기록, 최충헌과의 관계, 평가 등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어 요약 및 원본 소스가 필요합니다.
  • 조선의 학자 - 김건순
    김건순은 조선 후기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유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 순교자이며 정약종과 함께 《성교전서》를 저술하던 중 황사영에 의해 순교자로 기록되었다.
  • 조선의 학자 - 전봉준
    전봉준은 조선 말기 동학 농민 혁명의 지도자로, 부패한 관리 처벌과 일본 세력 축출 등을 주장하며 농민 운동을 이끌었으나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 후 처형되었고, 그의 혁명 정신은 민주주의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 1904년 사망 - 안젤코 알렉시치
    안젤코 알렉시치는 오스만 제국 출신의 세르비아 체트니크 지휘관으로, IMRO에 가입하여 일린덴 봉기에 참여한 후 체트니크 조직에 합류하여 오스만 제국 영토 내 작전 중 슈플리 카멘 전투에서 전사했다.
  • 1904년 사망 - 순명효황후
    순명효황후는 여흥 민씨 출신으로 순종의 황후이며, 세자빈으로 책봉된 후 대한제국 선포 후 황태자비, 순종 즉위 후 황후로 추봉되었으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 목격 후 우울증을 겪다 33세에 자녀 없이 사망하였다.
두재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두재표
한자 이름杜宰杓
출생일1860년
출생지조선 전라도 군산
사망일904년
국가조선
본관두릉(杜陵)
가족 정보
배우자전의이씨(全義李氏), 진주강씨(晉州姜氏)

2. 가계

두재표는 조선말기 통정대부(通政大夫) 두홍하공의 아들이다. 두재표 가문의 연원은 두릉두씨(杜陵杜氏)이다. 중앙일보사(中央日報社)에서 발행한 『성씨의 고향(姓氏의 故鄕)』과 『한국인의 족보(韓國人의 族譜)』등의 문헌에 따르면, 시조(始祖) 두경녕은 중국 송(宋)나라의 두릉인(杜陵人)으로, 태종(太宗) 때에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자리에 있었다. 당시 그는 진종(眞倧)의 옹립은 반대하다가 실패하여 소주자사(蘇州刺史)로 좌천되었고, 아들인 중서사인(中書舍人) 두지건(杜之建)과 우습유(右拾遺) 두지봉(杜之逢) 형제를 데리고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1004년(목종 7) 우리나라의 궁지현(宮池縣,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현(萬頃縣)에 있는 궁지도(宮池島), 지금의 고군산도(古群山島))에 표착하게 고려에 귀화하였다. 당시 고려의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목종(穆宗)이 두경녕에게 좌사관(左史官)이란 벼슬을 내리고 궁지현(宮池縣)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두릉군(杜陵君)에 봉했다.

2. 1. 선조

두재표는 조선 말기 통정대부(通政大夫) 두홍하의 아들이다. 가문의 연원은 두릉두씨(杜陵杜氏)이다. 시조(始祖) 두경녕은 중국 송(宋)나라의 두릉인(杜陵人)으로, 송 태종(太宗)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였다. 그는 진종(眞倧)의 옹립을 반대하다 실패하여 소주자사(蘇州刺史)로 좌천되었고, 아들인 중서사인(中書舍人) 두지건(杜之建)과 우습유(右拾遺) 두지봉(杜之逢) 형제를 데리고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1004년(목종 7) 고려 궁지현(宮池縣,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읍 만경현(萬頃縣)에 있는 궁지도(宮池島), 지금의 고군산도)에 표착하여 고려에 귀화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목종(穆宗)이 두경녕에게 좌사관(左史官) 벼슬을 내리고 궁지현(宮池縣)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두릉군(杜陵君)에 봉했다.

2. 2. 가족 관계

두재표는 조선말기 통정대부(通政大夫) 두홍하공의 아들이다. 두재표 가문의 연원은 두릉두씨(杜陵杜氏)이다. 중앙일보사(中央日報社)에서 발행한 『성씨의 고향(姓氏의 故鄕)』과 『한국인의 족보(韓國人의 族譜)』등의 문헌에 따르면, 시조(始祖) 두경녕은 중국 송(宋)나라의 두릉인(杜陵人)으로, 태종(太宗) 때에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자리에 있었다. 당시 그는 진종(眞倧)의 옹립은 반대하다가 실패하여 소주자사(蘇州刺史)로 좌천되었고, 아들인 중서사인(中書舍人) 두지건(杜之建)과 우습유(右拾遺) 두지봉(杜之逢) 형제를 데리고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1004년(목종 7) 우리나라의 궁지현(宮池縣,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현(萬頃縣)에 있는 궁지도(宮池島), 지금의 고군산도(古群山島))에 표착하게 고려에 귀화하였다. 당시 고려의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목종(穆宗)이 두경녕에게 좌사관(左史官)이란 벼슬을 내리고 궁지현(宮池縣)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두릉군(杜陵君)에 봉했다.

3. 생애

두재표는 조선 말 옥구현(현 군산시 회현면) 출신의 학자이자 시인이다. 본관은 두릉이며, 초명은 진계(晉桂), 자는 명수(明秀), 초호는 시해(詩海) 또는 우초(又草), 만년에는 묵와거사(墨窩居士)였다.[1][2] 고려조 문하시중 두경승 장군의 20대손으로, 1860년(철종 11년)에 태어나 1904년에 작고했다. 부친은 홍하(洪夏)이며, 모친은 제주 고씨이다.[1]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시(經試)에 합격하였다.[1] 최익현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고, 특히 대학과 중용에 힘써 호남의 이름난 선비가 되었다.[1] 많은 문하생들이 그에게 학문을 배워 과거에 합격하였다.[1]

전라도 관찰사가 주관하는 한시 경선 대회에서 수석으로 입상하였고, 전국 대회에서는 4위로 입선하여 옥구 지역 주민과 고종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1] 최익현의 제자로서 외세에 항거하고 민족의 자존을 지켜야 한다는 우국충정을 담은 시를 썼다.[1]

그의 시풍(詩風)은 감성적인 당시(唐詩)보다는 논리성을 추구하는 송시(宋詩)의 특성을 따랐으며, 특히 소동파를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고사(故事)를 제목이나 주제로 삼은 시들이 많다.[1] 1966년 두용균(杜用均) 등이 그의 시문집인 《시해집》을 발간하였다.[1] 2021년에는 군산문인협회 주관으로 두재표 시인 발굴 문학세미나가 개최되었다.[1][2]

1904년(고종 갑진년) 3월 9일에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장지는 정읍군 소성면 고교리 연동 후록 간좌원이다.[1]

4. 사상 및 활동

두재표는 조선 말 옥구현(沃溝縣, 현 군산시) 회현면 출신의 학자이자 시인으로, 고려조 문하시중 두경승 장군의 20대손이다. 1860년(철종 11년)에 태어나 1904년에 작고했다. 초명은 진계(晉桂), 자는 명수(明秀), 초호는 시해(詩海) 또는 우초(又草), 만년에는 묵와거사(墨窩居士)라 불렸으며, 본관은 두릉이다.[1][2]

두재표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전라도 관찰사가 주관하는 한시 경선 대회에서 수석으로 입상하고 전국 대회에서 4위로 입선하여 옥구 지역 주민과 고종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1][2] 항일 의병장 최익현의 제자로서, 외세에 항거하고 민족의 자존을 지켜야 한다는 우국충정을 담은 시를 썼다.[1][2] 그는 시인이자 풍류남아, 우국지사로 평가받는다.[1][2]

두재표는 최익현의 문하에서 성리학, 특히 대학과 중용을 공부했으며, 호남의 이름난 선비가 되었다.[1][2]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이들이 과거에 합격하였다.[1][2]

1966년 두용균 등이 두재표의 시문집 《시해집》을 발간했다. 시풍(詩風)은 감성적인 당시(唐詩)보다는 논리성을 추구하는 송시(宋詩)의 특성을 따랐으며, 특히 소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와 관련된 고사를 제목이나 주제로 삼은 시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1][2] 전북과학대학교 유종국 교수와 군산대학교 정훈 교수는 《시해집》 2권 중 한시 230여 수가 실려 있는 상권을 번역했다.[1][2] 군산시 문화원장 이진원은 두재표의 시상(詩想)이 고상하고 유연하며, '제백로(題白鷺)' 10수는 뛰어난 칠언절구로 인정받고 있다고 평가했다.[1][2]

두재표는 1904년(고종 갑진년) 3월 9일에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장지는 정읍군 소성면 고교리연동후록간좌원이다.[1][2]

5. 저술 활동 및 평가

『시해집(詩海集)』은 2권 2책 석인본으로 1964년 군산 옥구에서 후손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권1은 시로 주로 자연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나 평소의 소회(所懷)를 읊은 것이 많으며, 230여 수가 전한다. 권2는 서로는 여인면학서가 있고 서문은 족보서ㆍ국포서ㆍ교궁양노소계서ㆍ계서가 있다. 기문은 망경대기ㆍ경성당기가 있으며 잡저로는 낙거론ㆍ처인택거론ㆍ학치론ㆍ사친훈ㆍ석고송ㆍ찬금마모인ㆍ상량문이 있다. 표는 9편이 전하며 책문은 장문으로 전한다. 부록으로는 가장ㆍ묘갈명ㆍ추모사서ㆍ찬사ㆍ봉하문집간행이 실려 있다. 또한 아들 두병민(杜炳敏)의 『소계유고(小溪遺稿)』가 추가로 실려 있다.

두재표는 항일의사인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의 제자로, 외세에 항거하고 민족의 자존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는 나라를 구할 인재가 나타나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작품 곳곳에서 피력하는 등 우국충정을 담은 시 작품을 썼다. 따라서 두재표는 시인이자 풍류남아(風流男兒)이며, 우국지사(憂國之士)로 평가받고 있다.

5. 1. 저서: 『시해집(詩海集)』

『시해집(詩海集)』은 2권 2책 석인본으로 1964년 군산 옥구에서 후손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권1은 시로 주로 자연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나 평소의 소회(所懷)를 읊은 것이 많으며, 230여 수가 전한다. 권2는 서로는 여인면학서가 있고 서문은 족보서ㆍ국포서ㆍ교궁양노소계서ㆍ계서가 있다. 기문은 망경대기ㆍ경성당기가 있으며 잡저로는 낙거론ㆍ처인택거론ㆍ학치론ㆍ사친훈ㆍ석고송ㆍ찬금마모인ㆍ상량문이 있다. 표는 9편이 전하며 책문은 장문으로 전한다. 부록으로는 가장ㆍ묘갈명ㆍ추모사서ㆍ찬사ㆍ봉하문집간행이 실려 있다. 또한 아들 두병민(杜炳敏)의 『소계유고(小溪遺稿)』가 추가로 실려 있다.

5. 2. 평가

두재표는 항일의사인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의 제자로, 외세에 항거하고 민족의 자존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는 나라를 구할 인재가 나타나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견해를 작품 곳곳에서 피력하는 등 우국충정을 담은 시 작품을 썼다. 따라서 두재표는 시인이자 풍류남아(風流男兒)이며, 우국지사(憂國之士)로 평가받고 있다.

6. 후대 활동

두재표 선생은 조선 고종 재위 당시 전라도 관찰사가 주관하는 한시경선 대회에서 수석으로 입상했다. 전국대회에서는 4위로 입선하여 옥구 지역 주민과 고종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 2018년 11월 27일에는 두재표 선생의 시해집(詩海集) 국역본이 발간되었다. 2021년 11월 29일에는 군산문인협회에서 조선후기 두재표 시인 발굴 문학세미나를 개최했다. 2022년 5월 23일, 군산예총 주관으로 금강변에 위치한 진포시비공원에 두재표 시인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참조

[1] URL https://www.domin.co[...]
[2] 웹인용 http://se-cu.com/nds[...] 2024-07-1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