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명효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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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명효황후는 대한제국의 황태자비이자 순종의 황후로, 1872년에 태어나 1904년에 사망했다. 1882년 11세의 나이로 순종과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으며, 1897년 대한제국 성립 후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보호하려다 충격을 받아 우울증에 시달렸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처음에는 유강원에 안장되었고, 순종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어 유릉에 합장되었다. 서울 어린이대공원은 순명효황후의 묘역이었던 유강원에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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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효황후 | |
---|---|
기본 정보 | |
칭호 | 대한제국 황후 (추존) |
휘호 | 경현성휘(敬顯成徽) |
시호 | 순명(純明) |
전호 | 의효전(懿孝殿) |
본관 | 여흥 민씨 |
출생일 | 1872년 11월 8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양덕방 계동 사저 |
사망일 | 1904년 10월 23일 |
사망지 | 대한제국 한성부 경운궁 강태실 |
능묘 | 유릉(裕陵) |
능묘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
재위 | |
세자빈 | 1882년 4월 6일 ~ 1897년 10월 14일 |
황태자비 | 1897년 10월 14일 ~ 1904년 11월 5일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순종 |
아버지 | 여은부원군 민태호 |
어머니 | 진양부부인 진천 송씨 |
자녀 | 없음 |
계승 | |
세자빈 이전 | 세자빈 조씨 |
황태자비 이후 | 황태자비 윤씨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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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872년 양덕방 계동에서 태어나, 1882년 열 살에 순종과 혼례를 올려 세자빈이 되었다. 이 혼례에는 순종의 생모인 명성황후의 의중이 작용했다고 한다. 명성황후 역시 여흥 민씨 출신이었고, 이복 오빠인 민영익이 후사가 없는 왕비의 친정에 양자로 들어간 인연도 있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하고 남편이 황태자가 되면서 황태자비가 되었다.
1904년 경운궁 강태실에서 32세로 사망하였다. 자녀는 없었다.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생전에 황후가 되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의 용마산 내동에 유강원(裕康園)에 안장되었으나,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 유릉(裕陵)으로 바뀌었다. 1926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되어 현재는 순종과 함께 묻혀 있다. 시호는 황태자비로 사망했기 때문에 '''순명빈(純明嬪)'''이었으나, 순종 즉위에 따라 황후로 추존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872년 11월 20일 여흥 민씨 가문의 민태호와 진천 송씨 가문의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은 가난했으나, 배다른 형 민영익이 민승호의 양자가 된 후 형편이 나아졌다. 민승호는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였기에, 그녀의 양숙부는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어 가족의 번영에 기여했다.[2]그녀는 민영환, 흥친왕, 고종과 양사촌 관계였으며, 4대조 민진원을 통해 인현왕후의 4대 종손녀였다. 또한 민적을 공통 조상으로 하여 원경왕후와도 먼 친척이었으며, 명성황후와도 먼 친척 관계에 있었다.
2. 2. 세자빈 책봉과 혼란
1882년 4월 6일, 민씨는 열한 살의 나이에 순종 이척과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다.[2] 세자빈 민씨로 알려졌으며, 같은 해에 친어머니와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 사망하였다. 혼인으로 인해 부모는 왕족의 작위를 받았다. 아버지는 여은부원군에, 어머니는 진양부부인 진천 송씨에 봉해졌다. 민씨가 의붓딸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다른 두 부인도 왕족의 작위를 받았다.1895년 10월 8일, 22세였던 세자빈은 시어머니인 명성황후의 시해 현장을 목격했으며, 황후를 보호하려고 앞에 섰다.[3] 이 사건은 이후 심한 우울증으로 이어져 조기 사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3]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황태자비 민씨로 작위가 바뀌었다.
세자빈과 세자는 자녀를 두지 못했다. 이는 남편이 독살 사건으로 인해 불임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4][5]
2. 3. 대한제국 황태자비
1882년 11살의 나이로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황태자비가 되었다. 세자빈은 순종과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 못했는데, 이는 순종이 커피 독살 사건으로 인해 불임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4][5]1895년에는 을미사변으로 시어머니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현장을 목격하였으며, 이후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고 한다.[3]
2. 4. 사망과 추존
1872년 양덕방 계동에서 태어나, 1882년에 11살의 나이로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97년에는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으나, 남편인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1904년 11월 5일(음력 9월 28일)에 경운궁의 강태실에서 33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6]처음에는 경기도 양주 용마산 내동의 유강원(裕康園)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처음엔 순열비(純烈妃)라 했다가[12] 나중에 순명비(純明妃)로 고쳤다.[13] 1907년 순종의 즉위에 따라 황후로 추봉되어 순명효황후로 올려졌고, 능호도 유릉(裕陵)으로 바꾸었다. 이후 순종이 붕어한 1926년에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되어 합장으로 모셔졌다.[9]
순명효황후는 배가 붓는 병에 걸려 당시 최고의 명의에게 진찰을 받았으나, 배에 악령이 들렸다는 진단을 받고 성문의 문짝을 벗겨 달여 마시게 하였다. 결국, 이러한 비과학적인 치료로 인해 사망하였다.[11]
3. 가족 관계
전주 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