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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셸 공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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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로셸 공성전은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가 위그노 세력의 중심지였던 라 로셸을 포위한 사건이다.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에게 특권이 부여되면서 라 로셸은 자치 도시이자 해상 세력의 거점이 되었고, 이에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은 위그노 제압을 추진했다. 잉글랜드의 지원 요청이 거절되자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1627년 앙굴렘 공작의 프랑스 왕군이 라 로셸을 포위했다. 잉글랜드는 두 차례 구원 함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했고, 라 로셸은 14개월간의 저항 끝에 항복했다. 이로 인해 위그노는 정치적, 군사적 특권을 상실하고 신앙의 자유만 인정받았으며, 프랑스 중앙 정부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이 공성전은 절대 왕정 확립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자크 칼로, 클로드 로랭 등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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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셸 공성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리슐리외 추기경이 공성전 당시 라로셸의 해벽에 있는 모습, 앙리 폴 모트의 1881년 묘사
일부위그노 반란 및 영국-프랑스 전쟁 (1627년-1629년)의 일부
날짜1627년 9월 10일 – 1628년 10월 28일
장소라로셸
결과왕당파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
교전국 2라로셸
위그노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및 지도자
사령관 1루이 13세
리슐리외 추기경 (공성전 사령관)
토이라스 (일 드 레 총독)
바송피에르
사령관 2장 기통 (시장)
수비즈 (사령관)
버킹엄 공작 (사령관)
병력 규모
병력 1공성군: 22,001명
토이라스: 1,200명 및 30-40척의 스페인 함선
병력 2라로셸: 27,000명의 민간인 및 군인
버킹엄: 80척의 함선, 7,000명의 군인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공성군: 불명
토이라스: 500명 사망
사상자 2라로셸: 22,000명 사망
버킹엄: 5,000명 사망

2. 배경

공성전 기간 라 로셸. 클로드 로랭의 세부묘사 ''Le siège de La Rochelle'', 루브르 박물관.


위그노 지역 (보라색과 파란색으로 표시)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에서는 가톨릭개신교(위그노)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앙리 4세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에게 상당한 종교적 자유와 자치를 허용하며 프랑스 종교 전쟁을 종식시켰다.

1610년 앙리 4세가 가톨릭 교도에 의해 암살당하고, 어린 루이 13세가 즉위하면서 그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시작했다.

1625년 로앙 공작 앙리와 수비즈는 다시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루이 13세에게 레 섬의 점령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루이 13세와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위그노 세력 제압을 왕국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앙리 4세낭트 칙령을 공포하여 위그노에게 많은 특권이 주어졌다. 라 로셸은 위그노들의 자치가 이루어져 그들의 본거지가 되었고, 해상세력의 중심이자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 되었다.[12]

라로셸은 수입으로 인한 관세 외에도, 주요 세수원인 소금의 가장 큰 생산지 중 하나이기도 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2. 1. 종교적 갈등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에서는 가톨릭개신교(위그노)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앙리 4세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에게 상당한 종교적 자유와 자치를 허용하며 프랑스 종교 전쟁을 종식시켰다.[12] 이로 인해 라로셸은 위그노 해상 세력의 중심지이자, 가톨릭 왕실 정부에 대한 저항의 핵심 거점이 되었다.[6] 당시 라로셸은 3만 명이 넘는 주민이 거주하는 프랑스에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중요한 항구 중 하나였다.[13]

1610년 앙리 4세가 가톨릭 교도에 의해 암살당하고,[13] 어린 루이 13세가 즉위하면서 그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시작했다. 마리는 친가톨릭 정책으로 회귀하였고, 이에 따라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앙 공작 앙리와 그의 동생 수비즈 공작은 프로테스탄트 저항 세력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1621년 위그노 반란을 일으켰다.[13] 루이 13세는 생장당젤리를 포위하여 함락시키고 라 로셸의 봉쇄를 시도했으나, 전황이 교착되어 몽페리에 협정을 맺고 종결되었다.[13]

1625년 로앙과 수비즈는 다시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루이 13세에게 레 섬의 점령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루이 13세와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위그노 세력 제압을 왕국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2. 2. 정치적 상황

앙리 4세낭트 칙령을 공포하여 위그노에게 많은 특권이 주어졌다. 라 로셸은 위그노들의 자치가 이루어져 그들의 본거지가 되었고, 해상세력의 중심이자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 되었다.[12]

1610년 앙리 4세가 가톨릭교도에 의해 암살되고, 9살의 어린 루이 13세가 즉위하면서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마리는 개신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버리고 친가톨릭 정책으로 회귀하였고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에 로앙 공작 앙리와 그의 동생 수비즈 공작은 프로테스탄트 저항세력을 조직, 1621년 위그노 반란을 일으켰다. 루이 13세는 1621년-1622년 생장당젤(Saint-Jean d'Angély)을 포위해 함락시키고, 라 로셸의 봉쇄를 시도했으나 전황이 교착되어 몽페리에 협정( Treaty of Montpellier)을 맺고 종결시켰다.[13]

1625년 로앙과 수비즈는 다시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루이 13세에게 레 섬의 점령(Capture of Ré island)에 의해 종결되었다. 이후 루이 13세는 위그노 제압을 바랐고,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도 위그노 제압이 왕국의 최우선 과제라고 선언했다.

2. 3. 라 로셸의 중요성

프랑스앙리 4세가 공포한 낭트 칙령에 의해 위그노에게 많은 특권이 부여되었다. 라 로셸은 개신교를 믿는 위그노들의 자치가 이루어져 그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 지역은 위그노의 해상세력의 중심이 되었고,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 되었다.[12] 라 로셸은 당시 도시민이 30,000명을 넘어 프랑스에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에 해당하는 거대한 도시였다. 또한 라로셸은 수입으로 인한 관세 외에도, 주요 세수원인 소금의 가장 큰 생산지 중 하나이기도 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다.[12]

1610년 앙리 4세가톨릭교도에 의해 암살되고, 9살의 어린 루이 13세가 즉위하였고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마리는 개신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버리고 친가톨릭 정책으로 회귀하였고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위축되었다.

3. 잉글랜드의 개입

1624년 잉글랜드가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626년 리슐리외 추기경은 스페인과 비밀리에 강화 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잉글랜드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의 친정인 부르봉 왕가와의 분쟁을 야기했다. 프랑스는 잉글랜드를 "국익에 해를 가하는 존재"로 여기고 해군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14]

1626년 6월, 월터 몬터규가 프랑스로 건너가 불만을 품은 귀족들과 접촉해 프랑스 국내에서 반란을 모의했다. 이 계획은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잉글랜드 함대를 파견하고, 로앙 공작 앙리와 수비즈 공작이 이에 호응해 새로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14]

버킹엄 공작은 공성전을 풀려 했다.

3. 1. 잉글랜드-프랑스 관계 악화

1624년 잉글랜드가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면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1626년 리슐리외 추기경은 스페인과 비밀리에 강화 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잉글랜드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의 친정인 부르봉 왕가와의 분쟁을 야기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는 잉글랜드를 "국익에 해를 가하는 존재"로 여기고 해군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14]

3. 2. 제1차 라 로셸 파견군 (생마르탱드레 공성전)

찰스 1세는 자신의 총신이었던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에게 80척의 함대를 이끌고 라 로셸의 위그노 반란군을 지원하도록 명했다. 1627년 6월, 버킹엄 공작은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레 섬에 상륙하여 라 로셸과의 연락로를 확보하고 도시를 지원하고자 했다. (영불 전쟁)

세블랑주에 상륙하는 버킹엄 공작(세부)


당초 라 로셸은 국왕과의 전쟁을 우려하여 버킹엄 공작과의 동맹 및 함대 입항을 거부했으나, 9월에 국왕군과의 충돌이 발생하면서 동맹을 맺게 되었다.[14]

레 섬은 프로테스탄트의 거점이었지만, 국왕에 대한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버킹엄 공작은 섬의 중심 도시인 생마르탱 드 레를 포위했지만(생마르탱드레 공성전), 도시는 3개월 동안 완강하게 저항했다. 국왕군의 소형 선박들은 영국 함대의 봉쇄를 뚫고 도시에 보급을 계속하였다. 버킹엄 공작은 자금과 지원이 부족했고, 설상가상으로 역병까지 돌아 군대가 약화되었다. 결국 버킹엄 공작은 생마르탱 드 레에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어 함대를 철수해야 했다.[14]

4. 공성전의 전개

공성전 기간 라 로셸.


라 로셸 공성전 지도, 스테파노 델라 벨라, 1641년


1627년 9월 10일, 라 로셸에서 루이 요새의 국왕군을 향해 첫 대포를 발사하면서 제3차 위그노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라 로셸은 프랑스 개신교도들의 도시 가운데 가장 큰 도시였고, 위그노 저항의 본거지였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포위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국왕군 공병대는 도시를 고립시키고 해상과의 교통을 끊기 위한 여러 가지 작전을 펼쳤다.

4. 1. 포위망 구축

라 로셸을 포위한 국왕군의 요새와 군대, 자크 칼로, 1630년.


레 미님 지역에 건설된 국왕군 요새.


폼페오 타르곤이 건설한 첫 방파제, 1627년.


클레망 메트조가 설계한 두 번째 방파제.


1627년 8월, 앙굴렘의 샤를이 이끄는 프랑스 왕군은 병사 7,000명, 기병 600명, 대포 24문을 동원하여 라 로셸 포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봉그레느(Bongraine, 현재의 레 미님)와 루이 요새를 강화했다.

1627년 9월 10일, 라 로셸에서 루이 요새의 왕군을 향해 첫 포탄을 발사하면서 세 번째 위그노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당시 라 로셸은 프랑스 내 개신교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였으며, 위그노 저항의 중심지였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포위군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프랑스 왕군 공병대는 12km 길이의 참호를 파고 요새 11개소와 보루 18개소로 구성된 포위망을 구축하여 도시를 고립시켰다. 이 포위 요새들은 1628년 4월에 완공되었고, 3,000명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또한 왕군은 4,000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길이 1,400m의 방파제(seawall)를 건설하여 라 로셸과 해상 사이의 교통을 차단했다. 이 해상 봉쇄 작전은 이탈리아 기술자 폼페오 타르곤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나, 1627년 11월 겨울의 악천후로 인해 구조물이 파괴되었다. 이후 왕실 건축가 클레망 메트조가 새로운 방파제를 건설했다.[15] 그는 돌을 가득 채운 폐선을 침몰시켜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방파제를 건설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프랑스 왕군 포병대는 라 로셸에 보급품을 전달하려는 잉글랜드 함대를 공격했다.

한편, 앙리 드 로앙은 남프랑스에서 라 로셸을 구원하기 위해 반란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2월까지는 일부 배들이 건설 중인 방파제를 통과할 수 있었지만, 3월부터는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이로써 라 로셸은 완전히 봉쇄되었고, 잉글랜드 함대의 개입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남게 되었다.

4. 2. 전투 경과

앙굴렘의 샤를이 이끄는 국왕군은 1627년 8월부터 병사 7,000명, 기병 600명, 대포 24문으로 라 로셸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국왕군은 봉그레느(현재의 레 미님)와 루이 요새를 강화했다.

1627년 9월 10일, 라 로셸에서 루이 요새의 국왕군을 향해 첫 포탄을 발사하면서 세 번째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다. 라 로셸은 프랑스 위그노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였고, 위그노 저항의 중심지였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국왕이 없을 때 포위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전투가 시작되자, 프랑스 공병대는 12km 길이의 참호를 파고 요새 11개소와 보루 18개소로 이루어진 포위망을 구축해 도시를 고립시켰다. 이 포위 요새들은 1628년 4월에 완성되어 병사 3,000명이 배치되었다.

국왕군은 또한 노동자 4,000명을 동원해 1400m 길이의 방파제를 건설하여 도시와 해상 교통을 차단했다. 해상 보급을 막기 위한 이 방파제는 이탈리아 기술자 폼페오 타르곤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나, 1627년 11월 겨울 악천후로 파괴되었다. 이후 국왕군 건축가 클레망 메트조가 새로운 방파제를 건설했다.[15] 두 번째 방파제는 돌을 가득 채운 폐선을 침몰시켜 그 위에 건설되었다. 국왕군 포병대는 도시에 보급을 시도하는 영국 함선을 공격했다.

한편, 앙리 드 로앙은 남프랑스에서 라 로셸을 구원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1628년 2월까지 일부 배들이 건설 중인 방파제를 통과했지만, 3월 이후에는 불가능해졌다. 도시는 완전히 봉쇄되었고, 유일한 희망은 영국 함대의 개입뿐이었다.

4. 3. 잉글랜드의 구원 시도 실패

잉글랜드는 라 로셸에 포위된 개신교도들을 구원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함대를 파견했다.

첫 번째는 덴비 백작 윌리엄 필딩이 이끄는 함대로, 1628년 4월에 출항했으나 교전 없이 포츠머스로 귀환했다. 덴비 백작은 "국왕의 배를 전투에서 위험에 빠뜨릴 권한을 받지 못했고, 부끄럽게도 포츠머스로 귀항했다"고 언급되었다.[17]

두 번째는 린지 백작 로버트 버티가 이끄는 함대로, 1628년 8월에 군함 29척, 상선 31척[18]으로 구성되어 급파되었다.[17] 9월에 잉글랜드 함대는 라 로셸 구원을 시도했으나, 국왕군 진지에 포격한 후 방파제 돌파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이를 지켜본 라 로셸은 절망하여 10월 28일 항복했다.

5. 외국의 지원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지만, 프로테스탄트 세력인 라로셸을 제압하기 위해 같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선박을 빌려야 했다. 당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적대 관계에 있던 네덜란드의 동맹국이었다.

한편, 스페인은 라로셸 공성전을 기회로 삼아 잉글랜드, 위그노, 네덜란드라는 공통의 적에 맞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9] 리슐리외 추기경은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들였고, 스페인은 30~40척의 함대를 카디스에서 모르비앙 만으로 보내 전략적 지원을 과시했다.[9]

5. 1. 네덜란드의 지원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프로테스탄트 세력인 라로셸을 제압하기 위해 같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암스테르담에서 선박을 임대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선박에서 프랑스 병사들이 로마 가톨릭의 설교를 받는 것을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암스테르담 시의회에서 벌어졌다. 논의 결과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네덜란드 선박은 프랑스 병사들을 라 로셸에 수송했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적대하는 네덜란드의 동맹국이었다.[9]

5. 2. 스페인의 동맹 시도

스페인은 라로셸 공성전을 기회로 삼아 잉글랜드, 위그노, 네덜란드라는 공통의 적에 맞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16] 리슐리외는 스페인의 원조를 받아들였고, 스페인은 30~40척의 군함을 카디스에서 몰비앙만으로 보내 전략적 지원을 확인시켰다.[16] 그러나 이 함대는 버킹엄 공작이 일 드 레에서 철수한 지 3주 후에 도착했다. 스페인 함대는 라 로셸 앞바다에 정박했지만, 실제로 도시를 공격하는 작전은 수행하지 않았다.

6. 공성전의 결과

라 로셸의 개신교인들은 장 기통 시장의 지휘 아래 14개월간 저항했지만, 잉글랜드의 지원은 점차 희박해졌다. 공성전과 기아, 질병으로 라 로셸의 인구는 27,000명에서 5,000명으로 감소했다.[1]

항복은 무조건적이었고, 알레의 화의에 따라 위그노는 영토, 정치적, 군사적 특권을 잃었지만, 낭트 칙령으로 허용된 신앙의 자유는 유지되었다.[1] 그러나 이들은 국왕의 자비에 맡겨졌고, 루이 14세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을 철폐하고 개신교 탄압을 시작했을 때 저항할 수 없었다.[1]

라 로셸 공성전은 종교적으로 개신교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려 퐁텐블로 칙령과 로마 가톨릭으로의 강제 개종을 야기했다.[1] 또한, 국왕이 프랑스 전역을 장악하여 지방 저항을 허용하지 않는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1] 이는 절대왕정 확립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 프랑스 제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1]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1627년 공성전 현장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 공성전은 자크 칼로 등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1] 또한, 라 로셸 포위전은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의 『삼총사』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6. 1. 라 로셸 함락

장 기통과 병사들이 죽을 때까지 라 로셸을 방어할 것이라고 맹세하는 모습.


17세기에 그려진 ''라 로셸의 항복''.


피에르 Courtilleau가 그린 루이 13세의 라 로셸 입성.


라 로셸의 개신교인들은 장 기통 시장의 지휘 아래 14개월간 저항을 계속했다. 공성전과 기아, 질병으로 인해 라 로셸의 인구는 27,000명에서 5,000명으로 감소했다.[1]

항복은 무조건 항복이었고, 알레의 화의에 따라 위그노는 영토, 정치적, 군사적 특권을 잃었지만, 낭트 칙령으로 허락된 신앙의 자유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국왕의 자비에 맡겨졌고, 루이 14세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을 철폐하고 개신교 탄압을 시작했을 때 저항할 수 없었다.[1]

라 로셸 공성전은 종교적으로 개신교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려 퐁텐블로 칙령과 로마 가톨릭으로의 강제 개종을 야기했다. 또한, 국왕이 프랑스 전역을 장악하여 지방 저항을 허용하지 않는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절대왕정 확립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 프랑스 제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1]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1627년 공성전 현장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 공성전은 자크 칼로 등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1]

6. 2. 알레의 화의

항복은 무조건적이었다. 알레의 화의 조건에 의해 위그노는 영토, 정치적, 군사적 특권을 잃었지만, 낭트 칙령에 의해 허용되었던 신앙의 자유는 유지되었다.[1] 그러나 그들은 국왕의 자비에 맡겨졌고, 루이 14세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을 철폐하고 개신교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시작했을 때 저항할 수단이 없었다.[1]

6. 3. 정치적 영향

라 로셸 공성전에서 위그노들은 알레 평화 조약에 따라 영토적, 정치적, 군사적 권리를 잃었지만, 낭트 칙령으로 허용되었던 신앙의 자유는 유지했다.[1] 그러나 이들은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철폐하고 탄압을 시작했을 때 저항할 수 없었다.[1]

종교적인 측면에서, 라 로셸 공성전은 개신교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려 이후 퐁텐블로 칙령과 로마 가톨릭으로의 강제 개종의 시작을 알렸다.[1] 또한, 국왕이 프랑스 전 지역을 장악하여 지방의 저항을 허용하지 않고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1] 이는 절대 왕정 확립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제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1]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권력 강화가 지방 자치와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6. 4. 종교적 영향

라 로셸의 개신교(위그노)들은 장 기통 시장의 지휘 아래 14개월간 저항했지만, 잉글랜드의 지원이 점차 희박해지면서 결국 항복했다. 공성전으로 인한 전투, 기아, 질병으로 라 로셸의 인구는 27,000명에서 5,000명으로 크게 줄었다.[1]

항복은 무조건적이었다. 알레의 화의(알레 평화 조약)에 따라 위그노들은 영토, 정치, 군사적 특권을 잃었지만, 낭트 칙령으로 허용되었던 신앙의 자유는 유지되었다.[1] 그러나 루이 14세퐁텐블로 칙령을 통해 낭트 칙령을 철폐하고 개신교를 탄압하면서 위그노들은 저항할 힘을 잃게 되었다.[1]

라 로셸 공성전은 종교적으로 위그노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려, 이후 퐁텐블로 칙령과 로마 가톨릭교회로의 강제 개종을 야기했다.[1] 또한, 국왕이 프랑스 전 지역을 장악하여 지방의 저항을 억누르고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1] 이는 절대왕정 확립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제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1]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1627년 공성전 현장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 공성전은 자크 칼로 등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1]

7. 공성전 관련 인물



라 로셸 시민들은 장 기통 시장의 지휘 아래 14개월 동안 저항했다. 항복은 무조건적이었고, 알레 조약으로 위그노는 지역적, 정치적, 군사적 특권을 잃었다. 루이 14세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탄압을 시작했을 때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1627년에 포위 중인 전장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포위전은 자크 칼로 등 수많은 화가에 의해 그려졌다. 또한,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의 『삼총사』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8. 공성전 관련 문화예술 작품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1627년에 이 공성전 현장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크 칼로 등 여러 화가들이 이 공성전을 그림으로 그렸으며,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의 소설 『삼총사[1][2], 로베르 메를의 소설 《영광과 위험》[3], 로렌스 노퍽의 소설 《렘프리에르의 사전》[4], 테일러 콜드웰의 소설 《팔과 어둠》[5] 등 여러 소설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이 공성전 시기 로마 가톨릭교회와 왕국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공성전의 모습을 묘사한 일련의 선전용 주화가 주조되었다.[19][5]

8. 1. 회화

자크 칼로, 클로드 로랭 등 여러 화가들이 라로셸 공성전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라 로셸 도시와 공성전 기간 방어 시설들, 작자불명, 17세기, 베르사유


자크 칼로의 라 로셸 공성전, 다가오는 린지 백작과 영국 함대


라 로셸 포위전에서의 루이 13세


라 로셸과 레 섬. G. 오를란디 그림. 1627년


8. 2. 문학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는 라 로셸 공성전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소설의 2부와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사총사에서는 라 로셸 주변의 장면들이 등장한다.[1] 삼총사를 각색한 여러 무대, 영화, 만화, 비디오 게임에서도 라 로셸 공성전이 배경으로 나타난다.[2]

로베르 메를의 포르튀 드 프랑스 시리즈 11권 《영광과 위험》은 이 공성전을 다루고 있다.[3]

로렌스 노퍽의 1991년 소설 《렘프리에르의 사전》에서 공성전은 160년 후 런던에서 존 렘프리에르의 《고대 작가들이 언급한 모든 고유 명칭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담긴 고전 사전》 집필 과정에서 벌어지는 (완전히 허구적인) 사건들의 핵심 원인으로 묘사된다. 소설에서 8명(원래 9명)의 상인 집단은 라 로셸 시민들을 조종하여 대량 자살을 유도하고 지하 터널을 통해 도시에서 탈출하여 거의 모든 시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사건은 렘프리에르의 조상 중 한 명(9명의 상인 중 한 명으로 묘사됨)이 상인들에게 등을 돌리고 "라 로셸의 정령"을 형성하게 한다.[4]

테일러 콜드웰은 1943년 소설 《팔과 어둠》에서 공성전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으며,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허구의 위그노 귀족 아르센 드 리슈팽을 지휘관으로 등장시킨다.[5]

8. 3. 기타

공성전 시기 로마 가톨릭교회와 왕국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공성전의 모습을 묘사한 일련의 선전용 주화가 주조되었다.[19][5] 이 주화들은 왕국의 권력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도시와 영국의 노력을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상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Stuart England, 1603–1689 https://books.google[...]
[2] 서적 The Thirty Years' War https://books.google[...]
[3] 서적 An apprenticeship in arms https://books.google[...]
[4] 서적 Ships, money, and politics https://books.google[...]
[5] 문서 Musée d'Orbigny-Bernon exhibit
[6] 서적 Warfare at sea, 1500-1650: maritime conflicts and the transformation of Europe https://books.google[...] 2002
[7]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Stuart England, 1603-1689 https://books.google[...]
[8] 서적 https://books.google[...]
[9] 서적 The Thirty Years' War https://books.google[...]
[10] 서적 An apprenticeship in arms https://books.google[...]
[11] 서적 Ships, money, and politics https://books.google[...]
[12] 서적 Warfare at sea, 1500-1650: maritime conflicts and the transformation of Europe http://books.google.[...] 2002
[13]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14]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Stuart England, 1603-1689 http://books.google.[...]
[15] 서적 http://books.google.[...]
[16] 서적 The Thirty Years' War http://books.google.[...]
[17] 서적 An apprenticeship in arms http://books.google.[...]
[18] 서적 Ships, money, and politics http://books.google.[...]
[19] 문서 Musée d'Orbigny-Bernon exhi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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