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단 빈 알라웃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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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마단 빈 알라웃딘은 광저우 회성사 묘지에 있는 비문을 통해 생애가 알려진 인물이다. 비문은 아랍어와 한문으로 작성되었으며, 아랍어 비문은 이슬람식 장례 비문의 형식을 따르고, 한자 비문은 출신지(고려), 거주지(대도 완평현 청현관), 직업(다루가치), 사망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라마단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고려인 무슬림, 중앙아시아 출신 무슬림 등 다양한 추측이 존재하며, 1989년 학술 연구를 시작으로 2005년 한국일보 기사, 2006년 KBS 다큐멘터리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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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단 빈 알라웃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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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라마단 이븐 알라 웃딘 |
원어 이름 | مضان ابن علاء الدين |
다른 이름 | 剌馬丹 (Lámǎdān) |
국적 | 고려 |
출생일 | 1312년 또는 1313년 1월 |
출생지 | 고려? |
사망일 | 1349년 4월 11일 |
사망지 | 광서행중서성 용주 |
직업 | |
직책 | 다루가치 |
직위 | 용천현 다루가치 |
종교 | |
종교 | 이슬람교 |
기타 | |
알려진 이유 | 한국 최초의 무슬림으로 기록됨 |
2. 비문
라마단 빈 알라웃딘의 생애는 중국 광저우 회성사 묘지에 있는 그의 비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 비문은 원래 무함마드의 동료인 사드 빈 아비 와카스의 무덤 근처에 있었으나, 현재는 회성사 건물 내부로 옮겨졌다.[3] 비문은 아랍어와 한문 두 가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4]
2. 1. 내용
라마단 빈 알라웃딘(이하 라마단)의 묘비는 광저우 회성사 묘지에 있으며, 무함마드의 동료인 사드 빈 아비 와카스의 무덤 근처에 있었다. 현재는 회성사 건물 내부로 옮겨졌다.[3] 묘비는 아랍어와 한문 두 가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4]
아랍어 비문은 이슬람 장례식 비문의 형식을 따른다. 쿠란 3장 185절 "모든 영혼은 죽음을 맛보리라"라는 문구를 제목으로 사용하며, 왕좌의 구절을 인용하고 라마단에 대한 세부 사항을 덧붙인다.[3]
하나님의 사자는 오래 전에 “이방 땅에서 죽는 자는 순교자로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이 묘지는 죽은 라마단 빈 알라웃딘이 돌아온 곳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읽을 수 없음] 알레포를 방문한 자는 751년 라자브 [읽을 수 없음]의 날짜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3]
한문 비문에는 라마단의 출신지(고려), 거주지(대도 완평현 청현관), 직업(다루가치), 사망일(1349년 4월 11일), 매장일(1349년 9월 30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4]
라마단은 대도로 완평현 청현관에 거주하는 고려인이다. 그는 38세歲|세중국어였으며, 당시 광서도 용주 육천현 다루가치에 임명되었다. 그는 지정 9년 3월 23일(1349년 4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8월 18일(9월 30일) 광주성 북쪽 유화교 옆 계화강에 묻혔다. 비문이 제거되었다.[4]
아랍어 비문에 기록된 사망 시점(1350년 9월)과 한자 비문에 기록된 사망 시점(1349년)이 1년 차이 나는 이유는 라마단의 시신이 이장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3]
2. 2. 사진
3. 정체성
라마단은 원나라의 다루가치나 지방 총독을 역임했으며, 베이징 근처에 거주했다. 그는 중국의 이슬람교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근처에 묻혔고, 쿠란 구절이 포함된 비문으로 기념될 만큼 무슬림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1]
라마단이 한국 민족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1]
3. 1. 고려인 무슬림 가능성
라마단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고려인이었거나, 그의 아버지가 무슬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4] 14세기 당시 원나라의 수도 대도(현재의 베이징) 교외 완평현에는 대규모 고려인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존재했다.[4] 몽골인들은 때때로 고려인들을 색목인으로 분류하고 중앙 관리나 지방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4]3. 2. 중앙아시아 출신 무슬림 가능성
13세기에 몽골이 고려를 정복한 후, 많은 중앙아시아 무슬림(색목인)들이 몽골과 고려 조정에서 일하거나 상업에 종사하기 위해 고려에 들어갔다. 몽골인들이 현지 지방관으로 색목인을 자주 임명했지만 고려인을 임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만큼, 라마단은 중앙아시아(위구르족) 출신으로 태어나거나 고려에 정착한 무슬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 이희수는 당시 룽저우가 베트남 쩐 왕조와의 무역 중심지였기 때문에, 라마단이 고려에 근거지를 두며 원나라에 고용된 국제 세무 상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1]4. 학계 연구 및 대중화
라마단 빈 알라웃딘은 1989년 중국 역사학자 양탕과 장용행이 광저우에서 발견된 이슬람 비문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학계에 언급되었다.[1] 이후 2005년 한국일보에 손상하 당시 외교통상부 대사가 라마단의 비문 복제품을 보기 위해 광저우를 방문했다는 기사가 실리면서 대중에게 알려졌고, 2006년 KBS에서 관련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도 했다.[2]
4. 1. 학계 연구
1989년, 중국 역사학자 양탕과 장용행이 광저우에서 발견된 이슬람 비문에 관해 발표한 논문에서 라마단 빈 알라웃딘이 처음으로 학계에 언급되었다.[1] 2005년 한국일보는 손상하 당시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대사가 라마단의 비문 복제품을 보기 위해 광저우를 방문했다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라마단의 존재가 대한민국에서 대중화되었다.[1] 2006년, 대한민국의 국영 방송사인 KBS는 라마단을 중심으로 중세 고려의 이슬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2]4. 2. 대중화
2005년 일간지 ''한국일보''에 손상하 당시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대사가 라마단 빈 알라웃딘의 비문 복제품을 보기 위해 광저우를 방문했다는 기사가 게재되면서 그의 존재가 대한민국에 알려졌다.[1] 2006년에는 KBS에서 라마단을 중심으로 중세 고려의 이슬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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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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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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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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