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나 전투 (15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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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벤나 전투는 1512년 4월 11일, 프랑스와 교황군 사이에서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의 중요한 전투이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지배를 원했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청의 갈등을 틈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스페인군을 포함한 군대를 라벤나로 보내 프랑스군에 맞섰다.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사령관 가스통 드 푸아의 전사로 인해 프랑스군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프랑스군은 라벤나를 점령하고 약탈했지만, 가스통 드 푸아의 죽음 이후 프랑스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라벤나 전투는 대포의 대량 사용과 중장기병의 쇠퇴를 보여주며,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전투 전 나타난 '라벤나의 괴물'은 당시 사람들에게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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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나 총독부는 6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이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에 대응하여 이탈리아에 설치한 행정 구역으로, 총독은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라벤나를 중심으로 내정, 군사, 교회 관리를 담당했으나 랑고바르드족과 프랑크족의 위협, 동서 기독교 분열로 입지가 약화되어 751년 멸망했다.
라벤나 전투 (1512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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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 라벤나 전투 |
일부 | 캉브레 동맹 전쟁 |
![]() | |
날짜 | 1512년 4월 11일 |
장소 | 현재의 이탈리아 라벤나 근처 |
결과 | 프랑스-페라라 연합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왕국 페라라 공국 |
교전국 2 | 스페인 교황령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가스통 드 푸아 자크 드 라 팔리스 알폰소 1세 데스테 |
교전국 2 지휘관 | 파브리치오 콜론나 라몬 데 카르도나 페드로 나바로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라벤나 방어를 위해 남겨진 2,000명 구원군에 맞서 투입된 21,000명 54문의 포 |
교전국 2 병력 | 라벤나 수비대: 5,000명 구원군: 16,000명 30문의 포 |
사상자 규모 | |
교전국 1 사상자 | 3,000–4,500명 전사 4,500명 부상 |
교전국 2 사상자 | 9,000명 전사 부상자 수 불명 17,000명의 민간인 학살 |
2. 배경
13세기부터 프랑스 역대 왕들은 부유하지만 아직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이탈리아를 지배하기 원하였다. 이탈리아는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중간 지역으로 전략적 가치가 있으며, 유럽의 패권을 두고 다투고 있는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과의 싸움에서 교두보로 삼기 위해 필요했다. 이탈리아를 차지하는 자는 지중해의 제해권을 차지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13세기부터 프랑스 역대 왕들은 부유하지만 통일되지 못한 이탈리아를 지배하기 원했다. 이탈리아는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중간 지역으로 전략적 가치가 있었으며, 유럽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과의 싸움에서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를 차지하는 자는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이탈리아 침공은 이탈리아 여러 도시 중 1, 2위를 다투는 강국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청과의 다툼을 틈타 일어났다. 율리오 2세는 교황령을 세속 양쪽에서 최고 권위의 지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강대국의 군주에게 뒤지지 않는 야심이 있었으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력 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율리오 2세는 북 이탈리아에서 베네치아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주위의 여러 나라에 베네치아를 타도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호응한 루이 12세는 군대를 거느리고 북 이탈리아에 침입해 베네치아를 격파했다. 베네치아는 많은 양보를 하고 화해를 요청했다. 교황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나 문제는 이제 프랑스의 루이 12세였다.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루이 12세로 인해 대결 구도는 베네치아 대 교황에서 프랑스 대 교황청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탈리아반도에서의 주도권 다툼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책략을 되풀이하던 끝에 양측은 군사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1512년 2월, 가스통 드 푸아, 느무르 공작이 새로 지휘하는 이탈리아 주둔 프랑스군은 로마냐와 베네토의 도시들을 점령하여 신성 동맹군에게 해당 지역의 지배권을 빼앗으려 했다. 그는 여러 차례의 공성전에서 성공했지만,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프랑스 침공이 임박하여 그의 군대 상당수가 철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전에 신성 동맹의 주력 부대를 전투로 끌어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3월 말, 느무르는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 휘하의 이탈리아 군대와 함께 볼로냐에서 동쪽으로 진격했다. 프랑스군은 4월 8일 라벤나에 도착했고, 다음 날부터 도시를 포격했다. 성벽이 파괴된 후 총공세가 시작되었지만, 도시를 방어하는 교황령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 후 며칠 동안 프랑스군은 세 차례의 "헛된 공격"을 시도했다.[3]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로마냐의 마지막 거점을 잃을까 우려하여,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라몬 데 카르도나는 이에 응해야 했고, 스페인군은 교황군을 이끌고 라벤나로 향했다. 4월 9일까지 그들은 포를리를 지나 론코 강을 따라 북쪽으로 진격하여 도시에 접근했고, 다음 날에는 프랑스군 진지에서 불과 1마일 남쪽에 위치한 몰리나치오에 도착했지만, 론코 강으로 여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보급품이 부족하고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기 전에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조바심에 휩싸인 가스통 드 푸아는 전면적인 공격을 명령했다. 부활절 아침인 4월 11일, 프랑스군은 야영지를 떠나 론코 강을 건너 스페인-교황군 진지로 접근했다.[4]
사건의 발단은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가 라벤나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신성 동맹을 결성했다.
3. 전개 과정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이탈리아 침공은 이탈리아의 강국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청 간의 다툼을 틈타 일어났다. 교황 율리오 2세는 교황령을 세속 양쪽에서 최고 권위에 올려놓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무력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율리오 2세는 북이탈리아에서 베네치아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주변 국가들에게 베네치아를 견제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한 루이 12세는 군대를 이끌고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베네치아를 격파했다. 베네치아는 많은 양보를 하고 화해를 요청했지만, 교황의 다음 목표는 프랑스의 루이 12세였다.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루이 12세로 인해 대결 구도는 베네치아 대 교황에서 프랑스 대 교황청으로 바뀌었고, 양측은 군사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1511년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교황 율리오 2세는 신성동맹을 발족했다.[3] 신성동맹에는 프랑스와 패권을 다투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을 자리에 앉힌 스페인과 베네치아, 영국, 스위스가 참가했다. 루이 12세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약관 21세의 용장 가스통 드 푸아를 임명했다.
1511년 5월 13일, 프랑스군은 볼로냐를 함락시킨 뒤 페라라로 향했다. 교황군은 라몬 데 카르도나가 지휘하는 스페인군과 합류하여 볼로냐로 진격했고, 베네치아는 반교황 측 거점인 브레시아를 공략했다.
이에 프랑스군 사령관 가스통 드 푸아는 재빨리 볼로냐로 돌아왔다. 율리오 2세는 가스통과 맞서 프랑스군을 단번에 격멸하려 했으나, 가스통은 브레시아로 우회하여 진격했다. 프랑스군 23,000명은 빠른 기동력으로 120마일 거리를 3일 만에 주파했다.
가스통은 브레시아에서 베네치아군을 격파하고 북이탈리아 대부분을 세력하에 두는 데 성공한 후, 교황의 야망을 꺾기 위해 전략 거점인 라벤나로 진군했다. 1512년 4월 9일, 가스통은 라벤나를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4]
3. 1. 전투
1511년 11월,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 동맹을 결성했다. 신성 동맹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을 옹립한 스페인, 베네치아, 영국, 스위스가 참여했다. 루이 12세는 가스통 드 푸아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즉각적인 군사 행동에 나섰다.
1512년 4월 9일, 가스통은 라벤나를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는 공성전과 야전에서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대포를 매우 중시했으며, 가스통은 56문의 대포를 준비했다. 이 대포들은 알폰소 데스테가 지휘했다. 프랑스군 병력은 독일 용병 란츠크네히트 5,000명(혹은 8,500명), 중장기병 약 2,000기, 경기병 3,000기, 그리고 기타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교황군은 라벤나를 구원하기 위해 곤살로 데 코르도바의 후계자로 알려진 라몬 데 카르도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카르도나는 보병 밀집 대형 테르시오를 이용한 전술을 특기로 했으며, 소총을 조직적으로 사용한 스페인군이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가스통은 카르도나에게 도전장을 보냈고, 결전은 4월 11일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교황군은 참호와 장애물을 설치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가스통은 2,000명의 병사를 남겨 라벤나를 견제하고, 론 강을 건너 공격적인 진형을 취했다. 중앙에 18,000명의 보병을 배치하고, 우익에 중장기병, 좌익에 경장기병을 배치했으며, 보병 대형은 중앙 돌파를 노리는 볼록렌즈 형태였다.
전투는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포병대는 스페인군에게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스페인군도 포격으로 맞섰다. 라벤나 전투는 공격 준비 단계에서 대규모 포격전이 일어난 최초의 전투였다.
포격전 속에서 스페인 보병은 참호에 몸을 숨겼으나, 교황군 중장기병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가스통은 2문의 대포를 이동시켜 교황군 중장기병대를 측면에서 포격했다. 이에 교황군 기병대 지휘관 코르도나 경이 독단으로 돌격 명령을 내렸고, 중장기병 1,700기가 프랑스군 전열에 돌입했다.
프랑스군 중장기병은 교황군 중장기병과 격전을 벌였다. 데스테 장군은 포격으로 교황군 경기병을 강타했고, 교황군 경기병은 프랑스군 포병대를 공격했으나, 프랑스군 경기병에게 격파되었다.
가스통은 보병에게 전진 명령을 내렸고, 교황군은 사격으로 저항했으나, 프랑스군은 참호 안으로 진입하여 백병전을 벌였다. 병력에서 우위를 점한 프랑스군이 압박을 가했고, 프랑스군 대포 2문이 교황군 후방 방위선을 타격하면서 교황군 보병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스통은 예비 중장기병대를 투입하여 교황군 중장기병대를 격파했고, 교황군은 전 전선에 걸쳐 붕괴되었다.
프랑스군은 추격을 명령했으나, 완강하게 저항하는 스페인군 부대도 있었다. 가스통은 직접 말을 몰고 돌진하다가 스페인군 보병의 창에 찔려 전사했다.
프랑스군은 승리했지만, 총사령관 가스통 드 푸아의 전사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4. 결과
프랑스군은 라벤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총사령관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62]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볼로냐로 철수했고, 라벤나는 교황령으로 돌아갔다. 가스통 드 푸아의 죽음은 프랑스군에게 큰 타격이었는데, 젊고 재능 있는 장군으로서 높은 지휘 능력과 부하들로부터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탈리아에서 연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62] 만약 그가 살아남았다면 이탈리아 전쟁의 향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스통 드 푸아 사망 이후, 프랑스군 지휘는 라 팔리스에게 넘어갔다. 그는 퇴각하는 스페인군을 추격하는 대신 라벤나를 포위하여 함락시키고 3일 동안 약탈했다.[63] 그러나 전투 이후 프랑스군 상당수가 프랑스로 철수했고, 라 팔리스는 8월에 이탈리아에서 철수해야 했다.
한편, 패배에 낙담했던 교황 율리오 2세는 프랑스군이 더 이상 진격하지 않자 반격에 나섰다. 율리오 2세는 공의회를 개최하여 자신이 정당한 교회의 지배자임을 확인시켰고, 프랑스는 주변 국가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어 병력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주둔 스페인군은 라벤나에서 거의 전멸했지만, 카르도나는 1513년 롬바르디아에 또 다른 군대를 소집하여 나타났다. 한편, 포로로 잡혔던 나바로와 콜론나는 이후 전투에 참여했는데, 콜론나는 이탈리아군을 지휘했고 나바로는 프랑수아 1세 휘하에 있었다.
1513년, 율리우스 2세는 독일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영토 할양을 요구했고, 이에 베네치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라벤나 전투는 중세의 전투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조직적이고 기동력 있는 전투가 주축이 되는 시대로의 전환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량으로 배치된 대포가 승리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중장기병의 돌격은 전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5. 라벤나의 괴물
1512년 라벤나 전투 한 달 전, 여러 자료에서 기형아에 대한 보고가 있었는데, 이것이 라벤나의 괴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피렌체 연대기 작가 루카 란두치에 따르면, 이 아이는 이마에 뿔, 날개, 무릎에 눈, 갈고리 발 등 끔찍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1] 그 모습은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작가들의 일기를 통해 그 소식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란두치의 기록을 포함한 대부분의 기록은 이 "괴물"의 출현을 전투와 연관 지었다. 그 모습은 앞으로의 고난에 대한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으며, 프랑스 의사 앙브루아즈 파레는 괴물의 탄생이 루이 12세 군대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의 분노의 직접적인 징표라고 생각했다.[2] 라벤나의 괴물은 하나의 전투를 넘어 종교 개혁 시기까지 지속된 신학적 함의를 얻게 되었다.
6. 평가
이 전투로 프랑스군은 교황군을 격퇴하고 라벤나를 함락시켰다. 루이 12세의 전략적 목표는 달성되었으나, 용맹한 장군 가스통의 죽음은 프랑스군 전체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뛰어난 지휘관은 더 이상 프랑스군에는 없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임에도 루이 12세는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17]
패배로 낙담했던 교황 율리오 2세는 프랑스군이 더 이상 진격하지 않자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율리오 2세는 공의회를 개최하여 자신이 정당한 교회의 지배자임을 모두에게 확인시켰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주위 국가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상황이 되어 병사를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율리우스 2세는 로마의 권위를 지켰다.[17]
라벤나 전투는 중세와 이별하고 보다 조직적이고 기동력 있는 전투가 주축이 되는 시대를 열었다. 대량으로 배치한 대포가 승패를 갈랐기에, 중세 전장을 장식했던 중장기병의 돌격은 이후 전장에서 사라졌다. 또한 전쟁사는 종교 개혁을 거쳐 고도의 전술이 요구되는 시대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라벤나 전투는 구시대와 신시대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 전투였다.[17] 프랑스군은 승리했지만, 총대장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했기 때문에 볼로냐로 철수했고, 라벤나는 교황령으로 돌아갔다.[18]
1513년, 율리오 2세는 독일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영토 할양을 요구했다. 그 때문에 베네치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19]
7.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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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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