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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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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은 9세기 노르웨이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격변기, 바이킹 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노르웨이 왕 하랄 1세의 지지자였으며, 셰틀랜드 제도와 오크니 제도 등지에서 군사 원정에 참여했다. 사료에 따라 가계와 가족, 오크니 백작령 설립에 대한 기록이 다르며, 하랄 1세의 서방 원정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로근발드의 삶은 노르웨이, 스코틀랜드, 북부 제도의 복잡한 권력 관계와 지역 정체성 형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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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
기본 정보
이름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
작위야를 (에알) 모레
통치 기간9세기 중반
통치 유형통치
전임없음 (창시자)
후임토리어 로근발다르손
후임 유형후계자
자녀할라드, 토르프-에이나르, 흐롤라우그, 이바르, 흐롤프 (추정: 롤로), 토리어 로근발다르손
가문모레 야를
아버지에위스테인 이바르손
배우자힐드르 흐롤프스도티르
출생지노르웨이
사망일기원후 890년경
본명Rögnvaldr "The Wise" (현명한 로근발드)
활동 시기
활동 시기865년

2. 역사적 배경

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이 활동했던 시기는 바이킹 시대로,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북해를 건너 스코틀랜드 북부와 여러 섬 지역으로 활발히 진출하며 영향을 미치던 때였다. 그의 생애와 당시 오크니를 포함한 주변 지역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오르크네잉가 사가''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활용된다. 이 사가는 당시의 주요 사건과 인물 간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어, 해당 시대의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2. 1. 9세기 노르웨이와 스코틀랜드

오르크네잉가 사가는 로근발드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9세기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사가에서는 여러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형제간의 갈등, 야를노르웨이 왕실 사이의 관계, 그리고 헤브리디스 제도에서의 약탈 행위 등이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이러한 주제들은 당시 오크니를 포함한 스코틀랜드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가의 기록 목적 중 하나는 "오크니 사람들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심리적 갈등을 탐구하고, 그들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9세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과 인식을 엿볼 수 있다.

2. 2. 바이킹 시대와 북해 세계

''오르크네잉가 사가''는 로그발드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사가에서는 여러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형제간의 갈등, 야를과 노르웨이 왕실의 관계, 헤브리디스 제도에서의 약탈 등이 주요하게 다뤄진다. 이러한 주제들은 로그발드의 생애와 그가 활동했던 바이킹 시대 북해 세계의 복잡한 사회상을 반영한다. 사가의 집필 목적 중 하나는 "오크니 사람들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심리적 갈등을 탐구하고, 그들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당시 북유럽 사회의 역동성과 갈등 구조를 엿볼 수 있다.

3. 전통적인 기록

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정보는 주로 후대에 기록된 노르드 사가, 특히 13세기에 아이슬란드에서 쓰인 《오크니 사람들의 사가》와 스노리 스투를루손의 《헤임스크링글라》에 크게 의존한다. 이들 사가는 로근발드를 노르웨이의 하랄 미발왕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뫼레의 강력한 백작(야를)으로 묘사하며, 그의 가계, 오크니 제도셰틀랜드 제도와의 관계, 그리고 그의 아들들을 통해 이어지는 오크니 백작령과 아이슬란드 정착의 기원에 대해 서술한다.

사가에 따르면 로근발드는 하랄 왕의 노르웨이 통일 전쟁에 기여했으며, 서부 바이킹 소탕 원정 이후 오크니와 셰틀랜드를 하사받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흐롤프는 훗날 노르망디 공국을 세운 인물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처럼 사가는 로근발드를 오크니 백작 가문과 아이슬란드의 주요 가문의 시조이자, 나아가 노르망디 공작의 조상으로까지 연결하며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기록들은 로근발드가 활동했던 시기로부터 수백 년 후에 작성된 것으로, 그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사가의 내용은 종종 연대기적으로 불분명하거나 다른 역사적 자료와 모순되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특정 가문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각색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하랄 1세의 서쪽 원정과 같은 주요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있다. 따라서 사가에 나타난 로근발드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과 함께 문학적, 전설적 요소가 혼합된 결과물로 이해될 수 있다. 로근발드의 구체적인 가계, 활동, 죽음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어지는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가계와 가족

로근발드의 부모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기록이 다르다. 아일랜드 연대기에 따르면, 로근발드는 "로클란 왕" 할프단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할프단은 흔히 검은 할프단으로 여겨지며, 이 경우 로근발드는 금발 하랄 왕의 형제가 된다. 그러나 이는 할프단을 로근발드의 할아버지로 기록하는 후대의 노르드 사가와는 모순되는 내용이다.[9] 반면, 《오크니 사람들의 사가》에서는 로근발드가 에위스테인 이바르손의 아들이며, 이바르 우플렌딩야를의 손자라고 기록하고 있다.[10]

로근발드의 부인에 대한 기록 역시 사가마다 차이가 있다. 《오크니 사람들의 사가》는 그가 흐롤프 코(Hrolf Nefja)의 딸 라그닐드(Ragnhild)와 결혼했다고 하지만,[11]헤임스크링글라》에서는 그의 아내 이름이 힐드(Hild)라고 언급한다.[11]

두 사가 모두 로근발드에게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중 세 아들은 첩에게서 태어났으며,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형제들이 아직 어릴 때 이미 성인이었다고 한다.[14][11] 나머지 세 아들은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났다.

로근발드의 자녀
구분이름비고
첩 소생할라드 (Hallad)오크니 백작직을 잠시 맡았으나 바이킹의 습격을 막지 못하고 포기함.[18]
에이나르 (Einar)오크니 백작. 토르프-에이나르(Torf-Einarr)라고도 불림. 덴마크인을 물리치고 오크니 백작 왕조의 시조가 됨.[20][21]
흐롤라우그 (Hrollaug)아버지 로근발드의 예언에 따라 아이슬란드로 가서 자신의 운명을 찾음.[20]
정실 소생이바르 (Ivar)금발 하랄의 서부 원정 중 사망.[13]
흐롤프 (Hrólfr)"덩치가 너무 커서 어떤 말도 그를 태울 수 없었다"고 하여 "강걸 흐롤프"(Ganger-Hrólf, "걸어 다니는 흐롤프")라는 별명을 얻음.[14] 사가 작가들은 그를 911년 노르망디 공국을 세운 롤로와 동일 인물로 봄.[11]
침묵의 토르리 (Thórir the Silent)아버지 로근발드에 의해 노르웨이에 남도록 지명됨.[20]


3. 2. 하랄 1세와의 관계와 군사 활동

오크니가 사가는 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의 생애 초기, 특히 하랄 1세 국왕과의 관계 및 군사 활동을 처음 여덟 장에 걸쳐 다루고 있다. 그러나 사가의 이 초기 부분은 후대의 사건 기록에 비해 상세함이나 역사적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27] 13세기에 기록된 이 사가는 당시 노르웨이의 정치적 상황, 특히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헤브리디스 제도 및 맨 섬 영유권 경쟁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9] 따라서 사가의 기록 중 일부는 북부 섬들과 서쪽의 도서 왕국에 대한 노르웨이의 역사적 권리를 주장하려는 목적을 가졌을 수 있다.[30]

스노리 스투를라손이 《헤임스크링글라》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하프스피오르 전투(전통적으로 872년, 혹은 900년경[35]) 이후 노르웨이 통일에 기여한 로근발드는 하랄 1세의 충실한 지지자로서 뫼레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사가는 하랄 1세가 서쪽으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여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스코틀랜드 본토, 아일랜드, 맨 섬 등지에서 활동하던 바이킹들을 소탕했다고 전한다. 이 과정에서 로근발드의 아들 이바르(Ivar)가 전사하였고, 하랄 1세는 그 보상으로 로근발드에게 오크니와 셰틀랜드를 하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랄 1세의 서쪽 원정 이야기는 많은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그 역사적 사실성이 의심받고 있다.[28] 동시대의 아일랜드 기록 등에서는 하랄 1세의 서쪽 원정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고[37], 오히려 그보다 앞선 시기(840년대)에 대규모 바이킹 원정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가에 묘사된 사건들의 연대기는 다른 역사 기록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알바 왕국 연대기에 기록된 하랄의 스코틀랜드 공격 추정 시기(돔날 막 코스탄틴 통치 기간, 889–900[36])는 오크니 백작령의 기원을 더 이른 시점으로 잡는 사가의 설명과 잘 맞지 않는다.

하랄스하우겐(Haraldshaugen) 기념비. 하프스피오르 전투 이후 하랄 1세 통치하의 노르웨이 통일을 기념한다. 사가에서는 이 시기 하랄 1세와 로근발드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루지만, 그 역사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부 사가 자료는 다른 설명을 제시하기도 한다. 《에이르비갸 사가》는 비슷한 서쪽 원정 이야기를 전하지만, 이를 이끈 인물은 케틸 플라트네프라고 기록한다.[2] 역사가 스미스(Smyth)는 이 원정을 올라프 백색 왕의 활동과 연관 짓기도 한다.[38] 또한, 하랄 1세의 서쪽 원정 이야기가 실제로는 훨씬 후대인 11세기 말 마그누스 3세 노르웨이 왕의 원정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0]

중심에 오크니 제도셰틀랜드 제도가 있고 주변 영토를 보여주는 지도. 사가에 따르면 로근발드는 이 지역을 하랄 1세로부터 하사받았으나, 동생 시구르드에게 넘겨주었다.


사가에 따르면 로근발드는 하랄 1세에게 하사받은 오크니와 셰틀랜드 영지를 직접 다스리지 않고 동생 시구르드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로근발드가 해당 지역의 불안정성(바이킹 약탈 등) 때문에 부담을 느꼈을 수 있다는 시각[43], 또는 사가 작가가 오크니 백작령의 독립성(로근발드의 증여)과 노르웨이 왕권에 대한 의존성(하랄의 백작 임명)이라는 상반된 요소를 조화시키려 했다는 시각[44] 등이 있다. 이는 사가가 쓰여질 당시 오크니의 정치적 상황과 독립성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45][46]

사가에는 로근발드와 그의 아들들(토리, 흐롤로그, 에이나르) 사이의 대화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로근발드가 뫼레 백작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와 함께, 각 아들의 성격과 운명(오크니, 아이슬란드 정착 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해석된다.[47] 《토지 획득의 서》에서는 또 다른 아들 흐롤프가 등장하며, 그의 운명은 노르망디 공국 설립과 연결된다.[48]

3. 3. 오크니 백작령 설립과 죽음

로근발드는 하랄드 왕의 아들 하프단 호레그와 구드로드 글림에게 살해당했다. 그들은 로근발드가 머물고 있던 집을 기습 공격하여 포위한 후, 그 안에서 백작과 그의 부하 60명을 불태워 죽였다. 하랄드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구드로드에게 대군을 보냈고, 구드로드는 추방되었다. 하프단은 서쪽 바다로 도망쳤으나, 로근발드의 죽음은 그의 아들 토르프-에이나르에 의해 복수되었다. 토르프-에이나르는 노스 로날드세이에서 하프단을 죽인 후 하랄드와 평화를 맺었다. 로근발드의 다른 아들 토리르는 하랄드에 의해 뫼레의 백작이 되었고, 하랄드는 토리르에게 자신의 딸 아로프를 결혼시켰다.[24][25][26]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로근발드는 노르웨이로 돌아가면서 북부 제도를 자신의 형제 시구르드 에위스테인손에게 넘겨주었으며, 시구르드가 오크니의 첫 번째 백작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구르드는 모레이의 맬 브리지와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그의 아들 구토름 역시 자식 없이 죽었다. 이후 로근발드의 아들 할라드가 백작직을 물려받았으나, 그는 덴마크 바이킹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백작직을 포기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로근발드의 막내아들 토르프-에이나르가 덴마크인들을 물리치고 오크니 백작령을 장악했으며, 이후 수 세기 동안 섬들을 통치하게 될 오크니 노르드 백작 왕조의 기초를 세웠다.

사가(Saga)는 이처럼 로근발드를 13세기 초까지 섬들을 통치했던 오크니 노르드 백작들의 시조이자, 중요한 아이슬란드 가문의 선구자로 묘사한다. 더 나아가, 그의 아들 흐롤프를 통해 로근발드는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국왕이 된 노르망디 공작의 조상으로까지 연결된다.[14]

그러나 로근발드의 생애를 다루는 《오크니가 사가》의 초기 부분은 후기 사건들에 비해 상세함과 역사적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27] 13세기에 기록된 이 사가는 당시 노르웨이의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스노리 스투를라손이 《헤임스크링글라》에 기록한 하랄 1세 공정한 머리칼 왕의 서쪽 원정 이야기는 많은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더 이상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28] 이러한 기록은 13세기 중반 노르웨이스코틀랜드 사이의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에 대한 영유권 경쟁 속에서 나왔을 수 있으며,[29] 북부 섬들과 서쪽의 도서 왕국에 대한 노르웨이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을 가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0] 특히 1195년 오크니의 하랄 마다손 백작이 노르웨이 왕권에 복종해야 했던 사건은 사가가 쓰여질 당시 오크니에서 이러한 종류의 전설적인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높였을 수 있다.[31]

이야기의 일부 요소는 훨씬 후대인 마그누스 맨발 왕의 원정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지적된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크니 백작령이 "모레 가문(Møre family)의 일원"에 의해 세워졌다는 견해는 여전히 학계의 지지를 받고 있다.[32] 하랄 1세 공정한 머리칼 왕이 노르웨이 일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하프스피오르 전투는 전통적으로 872년으로 여겨지지만, 900년경으로 늦춰질 수도 있다.[35] 《알바 왕국 연대기》에 기록된 돔날 막 코스탄틴 통치 기간(889–900) 동안의 스코틀랜드 사건들은 하랄드의 스코틀랜드 공격 가능성과 시기적으로 일치하지만,[36] 이는 오크니 백작령의 기원을 한 세대 앞선 시점으로 설정하는 초기 기록들과는 맞지 않는다.

다른 사가 자료들은 또 다른 설명을 제공하기도 한다. 《에이르비갸 사가》는 케틸 '플라트네프'가 하랄드의 명령으로 서쪽 원정을 이끌었다고 기록하지만, 케틸이 이후 섬들을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케틸의 활동 시기 역시 연대기적으로 불분명하다.[2] 동시대 아일랜드 자료들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해안에 대한 바이킹 습격을 상세히 기록하면서도 하랄드 왕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며, 가장 초기의 대규모 원정은 하랄드의 시대보다 앞선 840년대로 기록되어 있다.[37] 일부 학자들은 서쪽으로의 항해를 올라프 백색 왕(아일랜드 기록의 아믈라입 "콘웅"과 동일 인물로 추정)에게 돌리기도 하며,[38] 아이슬란드 자료는 올라프가 케틸 '플라트네프'의 딸 아우드 데이프마인디와 결혼했다고 기록한다.[39] 또한, 사가 작가들이 후대의 인물인 라그날 우어 이마르(914년에서 921년 사이 활동)의 삶의 요소를 로근발드의 이야기에 통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라그날은 873년에 사망이 기록된 "브리튼과 아일랜드 전역의 노르드인의 왕" 이마르의 손자였으며,[49] 로근발드처럼 라그날의 가까운 친척인 이마르 우어 이마르가 스코틀랜드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유사점이 있다(904년 사망).[50]

4. 현대적 해석

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주요 정보는 《오르크네잉가 사가》와 스노리 스투를라손의 《헤임스크링글라》와 같은 노르드 사가에 기반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기록들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특히 사가의 초기 부분, 즉 로근발드의 시대를 다루는 내용은 후대의 사건 기록에 비해 상세함이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27]

사가가 기록된 13세기는 노르웨이스코틀랜드 왕국 사이에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 등 서쪽 섬들의 영유권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사가의 내용 중 일부, 특히 하랄 1세 공정한 머리칼 왕이 서방 원정을 통해 이 지역들을 정복하고 로근발드에게 오크니와 셰틀랜드를 하사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노르웨이의 영유권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9][30]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하랄 1세의 대규모 서방 원정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28]

또한, 사가에 나타난 연대기는 다른 역사 자료들과 충돌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하프스피오르 전투의 시기나 하랄 1세의 스코틀랜드 공격 시점에 대한 사가의 기록은 《알바 왕국 연대기》나 아일랜드의 연대기 기록과 잘 부합하지 않는다.[35][36] 동시대 아일랜드 기록에서는 당시 활발했던 바이킹 활동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하랄 1세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사가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한다.[37]

이처럼 《오르크네잉가 사가》를 비롯한 관련 사가들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기보다는, 특정 시대의 정치적 배경과 필요에 의해 구성되고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사가는 오크니 백작 가문의 기원을 설명하고, 노르웨이 왕실과의 관계를 정립하며, 오크니 사람들의 정체성을 탐구하려는 복합적인 목적을 가지고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에 대한 사가의 기록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4. 1. 하랄 1세의 서방 원정과 그 진위

오르크네잉가 사가는 로근발드의 생애와 시대를 다루는 주요 자료 중 하나로, 여러 반복되는 주제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형제간의 갈등, 야를과 노르웨이 왕실의 관계, 헤브리디스 제도에서의 약탈 등이 포함된다. 이 사가는 부분적으로 "오크니 사람들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심리적 갈등을 탐구하고, 그들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4. 2. 오크니 백작령 설립에 대한 다양한 견해

로근발드의 생애는 《오크니가 사가》(Orkneyinga saga) 초기 8개 장에 묘사되는데, 이 부분은 후대의 사건 기록에 비해 상세함이나 역사적 정확성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27] 13세기에 기록된 이 사가는 당시 노르웨이의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스노리 스투를라손이 《헤임스크링글라》(Heimskringla)에 기록한 하랄 1세 공정한 머리칼 왕의 서쪽 원정 이야기는 오늘날 많은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28] 이러한 기록은 13세기 중반 노르웨이스코틀랜드 왕국 사이에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의 영유권을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9] 사가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북부 섬들과 서쪽의 도서 왕국에 대한 노르웨이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으로 해석된다.[30] 또한, 1195년 오크니 백작 하랄 마다손이 노르웨이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했다가 왕에게 복종해야 했던 사건은, 사가가 쓰여질 당시 오크니에서 이러한 종류의 전설적인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높였을 수 있다.[31]

이야기의 일부 요소들은 훨씬 후대인 마그누스 맨발 왕의 원정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크니 백작령이 "모레(Møre) 가문의 일원"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견해는 여전히 학계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32]

사가에 나타난 연대기 역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노르웨이 일부 지역에 대한 하랄 1세의 지배권을 확립한 하프스피오르 전투의 시기는 전통적으로 872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900년경으로 늦춰질 수도 있다.[35] 《알바 왕국 연대기》(Chronicle of the Kings of Alba)에 따르면, 하랄의 스코틀랜드 공격은 돔날 막 코스탄틴의 통치 기간(889–900) 동안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36] 그러나 이는 오크니 백작령의 기원을 한 세대 더 이전으로 설정하는 사가의 연대기와 일치하지 않는다. 아일랜드의 《단편 연대기》(Fragmentary Annals of Ireland) 초기 기록 또한, 하랄 1세가 로그발드의 북부 섬 정복에 관여했다는 사가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른 사가 자료들은 또 다른 설명을 제공한다. 《에이르비갸 사가》(Eyrbyggja saga)는 노르웨이를 약탈하는 바이킹을 응징하기 위한 서쪽 원정 이야기를 유사하게 전하지만, 여기서는 케틸 플라트네프(Ketil 'Flatnose')가 원정을 이끈 것으로 묘사된다. 비록 하랄의 명령에 따른 원정이었다고는 하나, 케틸은 이후 섬들을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케틸에 대한 다른 정보들은 그의 활동 시기를 9세기 후반이 아닌 중반으로 지목하고 있어, 이 역시 연대기적 불일치를 보인다.[2]

더욱이, 동시대 아일랜드 자료들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해안에 대한 바이킹 습격과 그 지도자들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랄 왕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기록된 초기 대규모 원정들은 하랄의 즉위 시기보다 앞선 84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37]

역사학자 스미스(Smyth, 1984)는 이 서쪽 원정을 올라프 백색 왕(Olaf the White)에게 돌리는 대안적인 해석을 제시했다. 그는 올라프가 베스트폴 출신의 왕족이며 스코틀랜드에서 다양한 군사 활동을 벌였다고 주장한다. 만약 올라프가 더블린 왕국의 왕 아믈라입 콘웅(Amlaíb Conung)과 동일 인물이라면, 853년의 동시대 아일랜드 기록과 연결될 수 있다.[38] 아이슬란드 자료 역시 올라프가 케틸 플라트네프의 딸인 아우드 데이프마인디(Aud the Deep-Minded)와 결혼했다고 전하며, 《얼스터 연대기》(Annals of Ulster)는 857년에 올라프와 그의 장인 케틸 사이에 벌어진 왕조 내 분쟁을 기록하고 있다.[39]

《오크니가 사가》는 형제간의 갈등, 백작과 노르웨이 왕실 간의 관계, 헤브리디스 제도에서의 약탈 등 반복되는 주제를 다루며, 이는 로그발드의 생애와 시대를 다루는 초기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사가의 목적 중 하나는 "오크니 사람들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사회적, 심리적 갈등을 탐구하고, 그들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을 수 있다.

4. 3. 로그발드의 형제와 아들들에 대한 해석

오크니가 사가의 초기 8개 장은 로그발드 에위스테인손의 생애를 다루지만, 이 부분은 사가의 후반부 사건들에 비해 상세함이나 역사적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27] 13세기에 기록된 이 사가는 당시 노르웨이의 정치 상황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랄 1세 공정한 머리칼 왕이 서쪽으로 원정하여 바이킹을 소탕하고 북부 섬들을 정복했다는 이야기는 스노리 스투를라손이 《헤임스크링글라》에 기록했지만,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28] 이러한 기록은 13세기 중반 노르웨이와 스코틀랜드 왕국 사이에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의 영유권을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에, 노르웨이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29] [30] 특히 1195년 오크니 백작 하랄 마다손이 노르웨이 왕권에 도전했다가 복종하게 된 사건 이후, 오크니에서는 자신들의 기원과 노르웨이 왕실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것이다.[31] 또한, 사가에 묘사된 일부 사건들은 실제로는 훨씬 후대인 마그누스 맨발 왕의 서부 원정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0]

이러한 사가의 배경과 특징을 고려할 때, 로그발드가 하랄 왕에게서 받은 북부 섬 영지를 동생 시구르드에게 넘겨준 이야기는 여러 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당시 만연했던 바이킹의 약탈 활동(사가는 헤브리디스에서의 약탈을 반복적으로 다룬다[30])에 대한 인식과, 왕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단순한 영광 이상의 복잡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또한, 노르웨이 왕권에 대한 의존과 오크니 백작령의 독립적인 지위 사이의 긴장 관계를 조화시키려는 사가의 서사적 장치로 해석될 수도 있다. 야를과 노르웨이 왕실의 관계는 《오크니가 사가》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사가에 등장하는 로그발드와 그의 아들들 사이의 대화 역시 단순한 가족사를 넘어선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로그발드가 모레 가문의 백작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열망과, 오크니 백작령의 기원이 유력한 가문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와 관련될 수 있다.[32] 또한, 사가가 집필된 아이슬란드의 초기 역사와의 연관성이나, 사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형제(가족) 간의 갈등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오크니가 사가》에 나타난 로그발드의 형제 및 아들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기보다는, 사가가 추구하는 특정한 주제 의식과 서사적 목적 속에서 구성되고 해석될 필요가 있다. 사가는 오크니 사람들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그들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목적을 가졌으며, 로그발드의 이야기는 이러한 큰 틀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4. 4. 라그날 우어 이마르와의 유사성

(내용 없음)

5. 종합적 평가 및 의의

로근발드 에위스테인손의 생애와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 중 하나는 오르크네잉가 사가이다. 이 사가에는 여러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로그발드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특징과 갈등 양상을 보여준다.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내용으로는 형제 사이의 갈등, 야를과 노르웨이 왕실 간의 미묘하고 때로는 긴장된 관계, 그리고 헤브리디스 제도를 포함한 지역에서의 약탈 활동 등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당시 북유럽 사회, 특히 바이킹 시대의 권력 구조와 사회적 역학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오르크네잉가 사가는 단순히 과거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오크니 사람들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심리적 갈등을 탐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사가를 통해 오크니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원을 이해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따라서 로그발드와 관련된 이야기는 단순한 영웅담이나 사건 기록을 넘어, 특정 공동체의 자기 이해와 역사 인식을 형성하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참조

[1] 서적 Preface: Genealogical table of the Earls of Orkney 2005
[2] 서적 2008
[3] 서적 1999
[4] 서적 Annals of Ulster 865
[5] 서적 2008
[6] 서적 2001
[7] 서적 2001
[8] 서적 2007
[9] 서적 1987
[10] 서적 Orkneyinga saga 1981
[11] 서적 Saga of Harald Fairhair
[12] 서적 Saga of Harald Fairhair
[13] 서적 Saga of Harald Fairhair 1990
[14] 서적 Orkneyinga saga 1981
[15] 서적 Heimskringla
[16] 서적 2008
[17] 서적 Orkneyinga saga 1981
[18] 서적 2008
[19] 서적 A General Collection of the Best and Most Interesting Voyages and in All Parts of the World, Vol. 3 https://archive.org/[...] Longman, Hurst, Rees, and Orme ... and Cadell and Davies 1809
[20] 서적 Orkneyinga saga 1981
[21] 서적 2008
[22] 서적 1990
[23] 서적 2001
[24] 서적 Saga of Harald Fairhair
[25] 서적 Orkneyinga saga 1981
[26] 서적 Heimskringla
[27] 서적 Introduction 1981
[28] 서적 2008
[29] 서적 1987
[30] 서적 2008
[31] 서적 2008
[32] 간행물 '"Earls of Orkney": The Vikings and Scotland - Impact and Influence' http://www.royalsoce[...] Royal Society of Edinburgh 2006
[33] 서적 1998
[34] 서적 1998
[35] 서적 1987
[36] 서적 Anderson (1990)
[37] 서적 Thomson (2008)
[38] 서적 Smyth (1984)
[39] 서적 Smyth (1984)
[40] 서적 Ó Corráin (1979)
[41] 서적 Smyth (1984)
[42] 서적 Woolf (2007)
[43] 서적 Muir (2005)
[44] 서적 Thomson (2008)
[45] 서적 Beuermann (2011)
[46] 서적 Beuermann (2011)
[47] 서적 Pálsson and Edwards (1981) "Introduction"
[48] 서적 Pálsson and Edwards (1981) "Introduction"
[49] 서적 Ó Corráin (1998)
[50] 서적 Woolf (2007)
[51] 서적 Pálsson and Edwards (1981) "Introduction"
[52] 서적 Pálsson and Edwards (1981) "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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