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머리 맥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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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1813년에 태어나 1843년에 사망한 스코틀랜드의 설교자이자 목회자, 시인이다. 그는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신학을 공부한 후, 라버트와 던디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맥체인은 1839년 팔레스타인으로 선교를 다녀왔으며, 1843년 발진티푸스로 사망하기 전까지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성경 통독 계획을 고안하고, 그의 저서와 찬송가는 기독교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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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머리 맥체인 | |
|---|---|
| 기본 정보 | |
![]() | |
| 존칭 접두사 | 성직자 |
| 이름 | 로버트 머리 맥체인 |
| 출생일 | 1813년 5월 21일 |
| 출생지 |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
| 사망일 | 1843년 3월 25일 |
| 사망지 | 던디, 스코틀랜드 |
![]() | |
| 직책 | |
| 교육 | 에든버러 고등학교 |
| 모교 | 에든버러 대학교 |
| 경력 | |
| 임명 | 1836년 8월 선출 |
| 안수 | 1836년 11월 24일 |
| 기타 직책 | 라버트와 더니페이스의 보조, 애넌 장로교회에서 1835년 7월 1일 면허 취득 |
2. 초기 생애와 목회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후 토마스 챌머스와 데이비드 웰시 밑에서 신학을 배우고 1835년 설교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던디의 세인트 피터 교회에서 열정적으로 목회 활동을 펼쳤으나,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838년 말 사역을 잠시 중단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1813년 5월 21일 에든버러 더블린 스트리트 14번지에서 서기인 아담 맥체인(1854년 사망)과 덤프리셔 로커우즈의 데이비드 딕슨의 딸인 록하트 머레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 때 그는 그리스 문자를 알았고, 유창하게 노래하고 암송할 수 있었다. 그는 여덟 살에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827년 11월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다재다능한 능력을 보였다. 특히 시적인 재능이 뛰어나 '언약도'에 관한 시로 윌슨 교수에게 특별상을 받았다. 1831년 겨울, 그는 토마스 챌머스와 데이비드 웰시 밑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1835년 7월 1일 애넌 장로회에서 설교자로 허가를 받았다.그는 1835년부터 1836년까지 폴커크 근처의 라버트와 더니페이스 교구에서 존 보나의 조수로 처음 사역했다. 1836년 11월 24일, 그는 같은 해 5월에 quoad sacra|쿼드 사크라lat 교구로 설립된 던디의 세인트 피터 교회 목사로 임명되었다. 약 1,100명의 교인이 있는 이 교회에서 맥체인은 매우 열정적으로 목회 활동에 임했으나,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838년 12월에는 모든 공적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는 휴식과 회복을 위해 에든버러로 돌아갔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는 나중에 중국 선교사로 유명해진 윌리엄 찰머스 번스가 그의 설교단을 맡았다.
2. 2. 초기 목회 활동
1835년 7월 1일 애넌 장로회에서 설교자로 허가를 받았다. 그는 1835년부터 1836년까지 폴커크 근처의 라버트와 더니페이스 교구에서 존 보나의 조수로 처음 봉사했다. 1836년 11월 24일, 그는 같은 해 5월에 quoad sacra 교구로 설립된 던디의 세인트 피터 교회 목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회중은 1,100명에 달했으며, 맥체인은 매우 열정적으로 목회 사역에 임했다. 그러나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838년 12월에는 모든 공적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그는 휴식과 회복을 위해 에든버러로 돌아갔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의 강단은 훗날 중국 선교사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윌리엄 찰머스 번스가 맡았다.3. 선교 사역
(내용 없음)
3. 1. 팔레스타인 선교

1839년, 맥체인은 보나 및 두 명의 연장자 목사인 알렉산더 블랙과 알렉산더 키스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유대인의 상황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귀국 후, 이들은 조사 결과를 담은 공식 보고서를 스코틀랜드 교회 선교 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성지 방문 및 유대인에 대한 조사 선교 보고서''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이후 스코틀랜드 교회와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가 유대인 대상 선교 활동을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맥체인의 후임으로 성 베드로 교회 목사가 된 이는 윌리엄 찰머스 번스의 형이자 전기 작가인 아일레이 번스였다.
3. 2. 선교의 영향
1839년, 맥체인은 앤드루 보나와 함께 알렉산더 블랙과 알렉산더 키스라는 두 명의 연장자 목사들과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유대인의 상태를 조사하는 선교 활동이었다. 귀국 후, 이들은 스코틀랜드 교회 선교 위원회에 ''성지 방문 및 유대인에 대한 조사 선교 보고서''라는 공식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이후 스코틀랜드 교회와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가 유대인 선교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맥체인의 후임으로 성 베드로 교회 목사가 된 아일레이 번스는 윌리엄 찰머스 번스의 형이자 전기 작가였다.
4. 던디로의 귀환과 죽음
1839년 11월 6일, 자리를 비웠던 맥체인은 던디로 돌아와 새로운 열정으로 사역을 재개했다. 이후 복음 전파를 위해 잉글랜드 북부, 런던, 애버딘셔 등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1843년 3월, 방문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었고, 같은 달 25일 짧은 투병 끝에 사망하였다.
4. 1. 던디에서의 사역 재개
맥체인은 1839년 4월 12일부터 11월 6일까지 자리를 비웠다. 그가 던디로 돌아오자 새로운 열정으로 자신의 사역을 재개했다. 1842년 가을,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잉글랜드 북부를 방문했고, 런던과 애버딘셔로 비슷한 여행을 했다. 그는 1843년 3월 12일에 자신의 교인들에게 설교했고, 이틀 후 방문 과정에서 감염된 발진티푸스에 걸려 1843년 3월 25일에 사망했다.4. 2. 잉글랜드 북부 방문
1842년 가을, 맥체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잉글랜드 북부 지역을 방문했다. 이와 비슷한 목적으로 런던과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셔 지역으로도 여행을 다녀왔다.4. 3. 죽음
맥체인은 1839년 4월 12일부터 11월 6일까지 자리를 비웠다가 던디로 돌아와 새로운 열정으로 사역을 재개했다. 1842년 가을에는 복음 전파를 위해 잉글랜드 북부를 방문했고, 런던과 애버딘셔로도 비슷한 여행을 했다. 그는 1843년 3월 12일에 자신의 교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했고, 이틀 후 방문 과정에서 감염된 발진티푸스에 걸려 1843년 3월 25일 던디에서 사망했다.그의 부모는 맥체인을 에든버러에 있는 가족 묘지 대신, 교인들의 소원에 따라 던디의 세인트 피터 교회 옆 묘지에 안장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장례식은 1843년 3월 30일 목요일에 거행되었으며, 약 7,000명의 추모객이 참석했다. 그의 무덤에는 웅장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5. 유산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설교가, 목회자, 시인으로서 깊은 경건의 삶을 살았다. 그는 1843년 분열 직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이후 스코틀랜드의 여러 장로교 교파에서 존경받았다.
그의 친구 앤드류 보나가 편집한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 목사님의 회고록과 유고''는 출판 이후 전 세계 복음주의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맥체인이 고안한 성경 통독 계획은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며, 여러 성경 출판사에서 권장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던디에는 그의 이름을 딴 맥체인 기념 교회가 세워져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5. 1. 신앙적 유산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설교가이자 목회자였으며, 시인이었고 많은 편지를 썼다. 그는 또한 깊은 경건의 사람이자 기도의 사람이었다.맥체인은 1843년 분열이 일어나기 정확히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이후 스코틀랜드의 여러 장로교 교파에서 존경받게 되었다. 그는 분열의 원인이 된 에라스티안주의(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옹호하는 사상)에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친구 앤드류 보나는 맥체인이 1843년 3월 7일 영국 하원에서 교회 문제가 논의될 때 "영국 의회에서 중대한 밤이 될 것이다! 다시 한번, 왕이신 예수께서 지상의 법정에 서셨으나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라고 기록했다고 전했다.
맥체인은 사망 당시 제시 테인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 역사상 성품의 거룩함, 짧은 사역 기간에도 불구하고 보여준 깊은 헌신, 그리고 복음 전파자로서 거둔 성공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목회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성경 연구에 열심이었고 뛰어난 고전 학자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어를 익혔으며 히브리어로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다. 또한 시, 예술, 음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회중에게 시편 찬송을 가르쳤고, 그가 남긴 찬송가는 여러 교회에서 불리고 있다.
맥체인이 사망한 후, 그의 친구 앤드류 보나는 맥체인의 전기와 유고를 모아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 목사님의 회고록과 유고''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여러 차례 재판되었으며, 전 세계 복음주의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맥체인은 1년 안에 성경 전체를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성경 읽기 계획표를 만들었다. 이 계획은 신약과 시편은 1년에 두 번, 구약은 한 번 읽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 계획표는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D. A. 카슨의 저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에도 수정된 형태로 소개되었고, ESV 성경이나 NET 성경 등 여러 성경 출판사에서도 권장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던디에 있는 맥체인 기념 교회는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5. 2. 성경 통독 계획
맥체인은 1년 안에 성경을 통독하기 위한 널리 사용되는 계획을 고안했다. 이 계획은 신약과 시편을 1년에 두 번 읽고, 구약을 한 번 읽는 것을 포함한다. 이 프로그램은 D. A. 카슨의 저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에 약간 수정된 형태로 포함되었으며, English Standard Version|잉글리시 스탠더드 버전eng 및 New English Translation|뉴 잉글리시 트랜슬레이션eng과 같은 여러 성경 출판사에서 권장하고 있다.5. 3. 회고록과 저작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은 설교가이자 목회자였으며, 시인이었고 많은 편지를 썼다. 그는 또한 깊은 경건과 기도의 사람이었다.그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친구인 앤드류 보나는 맥체인의 전기와 일부 원고를 모아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 목사님의 회고록과 유고''라는 제목으로 편집하여 출판했다. 이 책은 여러 판을 거듭하며 출판되었고, 전 세계 복음주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회고록에는 맥체인이 1843년 분열을 초래한 에라스티안주의에 대해 가졌던 강력한 반대 의견도 기록되어 있다. 보나는 1843년 3월 7일 영국 하원에서 교회의 문제가 논의될 때 맥체인이 "영국 의회에서 일어날 중요한 밤! 또 한 번, 왕 예수께서 지상의 법정에 서셨으나 그들은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적었다고 전한다.
회고록은 또한 스코틀랜드 교회 역사상 그의 성품의 성결함, 짧은 목회 기간 동안 보여준 간절한 헌신, 그리고 복음 전파자로서 그의 성공적인 사역을 잘 보여준다. 그는 부지런한 성경 연구자이자 뛰어난 고전 학자였으며(어릴 때 그리스어를 배웠고 히브리어로 대화가 가능했다), 시적, 예술적, 음악적 재능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회중에게 시편 찬송을 가르쳤고, 그가 쓴 찬송가는 여러 교회에서 불리고 있다.
맥체인은 1년 안에 성경 전체를 통독할 수 있도록 돕는 체계적인 계획을 고안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계획은 신약과 시편을 1년에 두 번, 구약을 한 번 읽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 성경 읽기 계획은 D. A. 카슨의 저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에 수정된 형태로 소개되었으며, ESV나 NET과 같은 여러 성경 번역본 출판사에서도 권장하고 있다.
5. 4. 한국 교회에 주는 교훈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은 설교가이자 목회자였으며, 시인이었고 많은 편지를 썼다. 그는 또한 깊은 경건과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맥체인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1843년 분열이 일어나기 약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이후 스코틀랜드의 여러 장로교 교파에서 존경받게 되었다. 그는 교회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에라스티안주의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친구 앤드류 보나는 맥체인이 1843년 3월 7일, 교회 문제가 영국 하원에서 논의될 때 "영국 의회에서 중대한 밤이 될 것이다! 왕이신 예수께서 다시 한번 지상의 법정에 서시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기록했다고 전했다.
맥체인은 사망 당시 제시 테인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 역사상 그의 성결한 성품, 짧은 목회 기간 동안 보여준 간절한 헌신, 그리고 복음 전파자로서 거둔 성공으로 맥체인만큼 깊이 기억되는 목회자는 드물다. 그는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했으며, 뛰어난 고전 학자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어를 읽었고, 히브리어로 대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뛰어난 시적, 예술적, 음악적 재능을 지녔으며, 회중에게 시편 찬송을 가르쳤다. 그가 남긴 찬송가들은 여러 교회에서 불리고 있다.
그의 사후, 친구인 앤드류 보나는 맥체인의 전기와 유고를 모아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 목사님의 회고록과 유고''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여러 차례 재판되었으며, 전 세계 복음주의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맥체인은 1년 안에 성경 전체를 읽을 수 있는 성경 통독 계획을 만들었는데, 이는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신약과 시편은 1년에 두 번, 구약은 한 번 읽게 된다. 이 방식은 D. A. 카슨의 저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에도 일부 수정된 형태로 소개되었으며, 영어 표준역(ESV)이나 새 영어 번역(NET) 같은 여러 성경 출판사에서도 권장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던디에 있는 맥체인 기념 교회는 그의 이름을 따서 세워졌다. 맥체인의 경건한 삶과 성경 중심적 사역, 복음에 대한 열정은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6. 작품

맥체인이 남긴 주요 저작과 찬송가는 다음과 같다.
'''저작'''
-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이유? (에든버러, 1838)
- 어린이가 지체 없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 (에든버러, 1839)
- 양 무리의 어린 양들에게 (에든버러, 1840)
- 안식일에 철도 운행에 대한 증언 (던디, 1841)
- 주님의 만찬을 사랑하라 (던디, 1841)
- 일용할 양식 (에든버러, 1842)
- 또 다른 백합이 거두어지다 (에든버러, 1842)
- 1839년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유대인에게 보낸 탐사 선교 보고서 [앤드루 A. 보나와 공동 저술] (에든버러, 1842)
- 영원한 유산, 신자의 몫, 그리고 멸망에 이르도록 예비된 진노의 그릇, 두 설교 (던디, 1843)
-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 해설 (던디, 1843)
-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를 격려하고 인도하는 시온의 노래 (던디, 1843)
- 앤드루 A. 보나의 회고록 및 유고 (초상화) (에든버러, 1844; 다수 판본, 앨런 싱클레어의 게일어 번역, 1895)
- 다양한 설교 및 강연으로 구성된 추가 유고 (에든버러, 1846)
- 파편의 바구니, 설교의 핵심 (애버딘, 1848)
- 부흥의 진리, 지금까지 출판되지 않은 설교 (런던, 1860)
- 발견의 선교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ISBN 978-1-85792-258-5)
'''찬송가'''
- "이 세상이 다 지나가면,"
- "나는 한때 은혜와 하나님께 낯선 사람이었네,"
- "모리아 산록 아래에서" [1839년 6월 카르멜 산 기슭에서 쓰임]
- "산 위에 안개처럼,"
- "흰 옷을 입은 열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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