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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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새 예루살렘은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다양한 해석을 갖는다. 유대교에서는 천상의 예루살렘을 묘사하며, 메시아가 통치할 이상적인 도시로 여겨진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형 이후 예루살렘의 종교적 중요성을 부여하며, 종말론적 관점에서 새 예루살렘을 해석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신부로 묘사되며, 전천년설과 연관되어 모든 참된 신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곳으로 묘사된다. 새 예루살렘은 기독교 교회, 천국, 그리고 기독교 순례의 완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말일성도 운동, 여호와의 증인, 스베덴보리안주의 등 다양한 종교와 사상에서도 새 예루살렘을 각자의 교리에 맞게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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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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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의미 | |
다른 이름 | 하느님의 성막 거룩한 도시 하느님의 도시 천상의 도시 천국의 예루살렘 위의 예루살렘 시온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 |
설명 | 에제키엘의 예언적 환상 속 도시 |
일반 정보 | |
면적 | 4,950,625 제곱킬로미터 |
관련 항목 | 기독교 종말론 |
2. 성서
wikitext
유대교 신비주의에는 두 개의 에덴 동산과 두 개의 약속의 땅이 있는데, 하나는 천상의 보이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의 보이지 않는 것의 복사본인 지상의 보이는 것이다.[6][7]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천국은 천상의 약속의 땅 - 예루살렘, 성전, 언약의 궤를 포함 - 과 천상의 에덴 동산 - 생명 나무, 천사들이 먹는 만나의 저장소, 정원에 물을 대는 여러 강을 포함한다.[6][7] 성경에서 새 예루살렘, 천상의 성소, 생명의 빵, 하나님의 보좌 등을 언급할 때, 그것은 유대교 신비주의적 천국에 대한 이해를 가리킨다.[6][7]
유다 왕국에 대한 바빌론의 위협은 바빌론 제국이 아시리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612년부터 609년까지 권력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597년에 바빌론에 주요 유혈 사태 없이 항복했다. 이스라엘의 봉기로 인해 기원전 586년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다. 솔로몬 성전을 포함한 도시 전체가 불에 탔다. 이스라엘 귀족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
에스겔서에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에스겔 40-48에는 성전, 그 방, 현관, 벽의 치수에 대한 길고 자세한 설명이 있다. 에스겔 48:30–35에는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딴 12개의 성전 문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
스가랴서[8]는 에스겔의 새 예루살렘을 확장한다. 제2성전이 세워졌을 때, 유배 후 예루살렘의 인구는 불과 수백 명이었다. 기원전 445년까지 방어용 도시벽은 없었다.[9] 이 구절에서 저자는 거대한 인구를 보호하기 위한 불의 도시 벽에 대해 쓰고 있다. 이 텍스트는 새 예루살렘 사상의 진전을 보여준다. 에스겔에서는 성전 건축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스가랴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건국에 대한 하나님의 중재로 초점이 이동한다.
새 예루살렘은 이사야서에서 더욱 확장되어,[10] 새 예루살렘이 귀한 사파이어, 보석, 루비로 장식되어 있다. 도시는 공포가 없고 의로움으로 가득한 곳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이사야는 유대교 종말론의 한 예를 제공하며, 완전한 예루살렘에 대한 희망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드러난다.
원래 새 예루살렘 구성으로서 에스겔은 4 에스라, 2 바룩, 쿰란 문서, 요한계시록과 같은 후기 작품의 자료 역할을 했다. 이 텍스트는 유사한 측정 언어를 사용하고 에스겔의 제한된 종말론적 관점을 확장했다.
{{인용문|
「승리하는 사람은 내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아 다시는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게 하겠다. 그리고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에게 새겨 주겠다.」
'' | 요한의 묵시록(요한계시록) 3:12| 21세기 해설판 성경 }}
{{인용문|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 요한의 묵시록(요한계시록) 21:2| 21세기 해설판 성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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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형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다른 사건들의 장소로서 예루살렘에 종교적 중요성을 부여해 왔다.[19] 특히,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지 몇 십 년 후인 서기 70년에 일어난 제2성전의 파괴는 그 당시 신생 기독교의 종말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9] 복음서의 올리벳 담론에서 예수는 헤롯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고, 이것이 인자의 재림 곧 일반적으로 재림이라고 불리는 사건에 선행할 것이라고 약속한다.[19] 메시아에 의한 예루살렘의 갱신에 대한 이 예언은 유대교 예언자들의 예언을 반영한다.[19] 밧모의 요한의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은 올리벳 담론과 위에 언급된 모든 역사적 선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19]
요한 계시록에 따르면, 전천년설은 종말론과 하늘과 땅의 두 번째 창조(새 지구 참조) 이후, 새 예루살렘이 모든 참된 신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보낼 지상 장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19]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종말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19] 많은 기독교인들은 새 예루살렘을 현재의 현실로, 즉 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완성이며, 기독교인들이 이미 천상의 예루살렘과 지상의 교회 모두의 일원으로서 일종의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19] 이러한 방식으로 새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선택받은 백성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화해를 나타내며, "기독교 순례의 끝"을 의미한다.[19] 이와 같이 새 예루살렘은 천국에 대한 개념이며, 천국 (기독교)도 참조하라.
"새 예루살렘"(카이네 이에루살렘/καινὴ Ἰερουσαλήμel)이라는 용어는 신약성경 3:12절과 21:2절의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두 장의 상당 부분은 밧모 섬의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새 예루살렘을 "'어린 양의 신부, 아내'"로 묘사하며, 그곳에는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 (요한계시록 22:1).[20]
요한은 새로운 하늘과 "더 이상 바다가 없는" 새로운 땅을 본 후, 한 천사가 그를 "성령으로" 데리고 가서 "크고 높은 산"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게 한다.[20] 거대한 도시는 하늘에서 내려와 새 땅으로 내려온다. 요한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정교한 묘사는 강, 사각형 모양, 벽, 그리고 생명 나무와 같이 에덴 동산과 낙원 정원의 많은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20]
요한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으며, 그 "광채는 마치 매우 값진 보석, 맑은 벽옥과 같"다고 한다. 그 도시의 거리는 또한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도시의 기초는 정방형으로 놓여 있으며 벽옥으로 만들어진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요한계시록 21:16에는 높이, 길이, 너비가 같은 크기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 성소와 첫 번째 성전에서와 같았고 - 그 크기는 12,000 스타디온(약 1,500마일)이다. 요한은 그 벽이 144 큐빗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길이가 앞서 언급되었으므로 두께로 추정된다. 144 큐빗은 약 65미터이다. 12는 144의 제곱근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숫자 12는 초기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했으며, 이스라엘의 12 지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12 사도를 나타냈다. 이 숫자는 요한계시록에서 완전성을 상징한다.[20] 새 예루살렘의 네 면은 네 개의 주요 방향(북, 남, 동, 서)을 나타낸다. 이런 식으로 새 예루살렘은 지구의 모든 구석에서 온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모두 받아들이는 12개의 문이 있는 포용적인 장소로 여겨진다.[20]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 건물이 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은 도시의 성전이며, 그들은 어디에서나 숭배받는다. 요한계시록 22장은 또한 도시의 큰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는 생명수의 강에 대해 설명하며, 이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생명나무는 거리 한가운데와 강 양쪽에서 자란다. 그 나무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고 매달 열매를 맺는다. 요한에 따르면 "그 나무 잎사귀들은 모든 민족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 예루살렘에 생명나무가 포함된 것은 에덴 동산을 연상시킨다. 그 나무가 맺는 열매는 생명의 열매일 수 있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죄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신화 (즉, 하나님의 권능 또는 형상, 즉 거룩함의 "그의 형상"과 같은 것)을 가질 것이며 "그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밤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고, 도시의 거주자들은 "등불이나 햇빛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을 영원한 본질을 강조하면서 끝맺는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기인 서기 1세기 말(서기 96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부에서는 네로 황제 통치 말기(서기 54~68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1:4)에 보내는 서신이다. 요한 계시록은 일반적으로 서론(1:1–3:22), 환상(4:1–22:5), 결론(22:6–20)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태생 유대인이자 기독교 신자였다. 요한 계시록의 저자와 수신자는 주님께서 그들을 옹호하시고 그들의 고난에 대해 "땅의 거주자들"을 심판하시기를 간구한다(6:10). 예루살렘의 함락은 네로 시대의 박해와 함께 요한 계시록의 숨겨진 주제를 형성한다.
요한 계시록 전체에서 성전에 대한 여러 언급이 나온다 (요한계시록 3:12, 7:15, 11:19, 14:15, 16:1). 이 성전은 천상의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요한계시록 21:1에서 종말이 도래하면, 독자는 성전이 새 예루살렘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올 것을 예상한다. 요한 계시록 21장은 심지어 회복된 성전을 수반하는 전형적인 새 예루살렘 용어를 포함한다. 새 도시에 대한 구체적인 측정이 주어지고(에스겔 40–48, 4Q554), 그 도시는 금, 사파이어, 에메랄드로 지어진다(이사야, 토비트). 또한, 21:21절은 "열두 문"을 언급한다. 요한 계시록은 새 예루살렘 전통의 또 다른 전형적인 측면, 즉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재통일을 유지한다(에스겔 48:33–34, 4Q554).
22절은 새 예루살렘 종말론적 수사에서 갑작스럽고 놀라운 전환점을 보여준다. "내가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 계시록은 3 바룩과 4 시빌린 신탁의 전통에 따라 성전이 없는 종말을 예견한다.
23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됨이라." 요한 계시록의 저자에게는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님은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빛이 되시고 예수(어린 양)는 그 등불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재해석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그 주장을 펼친다.
"여호와는 네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은 네 영광이 되리라. 네 해가 다시는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니라." (이사야 60:19)
주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비추시고 그리스도께서 그 주민들의 영광이 되시기 때문에 종말론적 시대에는 성전이 버려진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새 예루살렘에 더 이상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주님은 성전을 충분히 대체했다.

2. 1. 구약성경
유대교 신비주의에는 두 개의 에덴 동산과 두 개의 약속의 땅이 있는데, 하나는 천상의 보이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의 보이지 않는 것의 복사본인 지상의 보이는 것이다.[6][7]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천국은 천상의 약속의 땅 - 예루살렘, 성전, 언약의 궤를 포함 - 과 천상의 에덴 동산 - 생명 나무, 천사들이 먹는 만나의 저장소, 정원에 물을 대는 여러 강을 포함한다.[6][7] 성경에서 새 예루살렘, 천상의 성소, 생명의 빵, 하나님의 보좌 등을 언급할 때, 그것은 유대교 신비주의적 천국에 대한 이해를 가리킨다.[6][7]유다 왕국에 대한 바빌론의 위협은 바빌론 제국이 아시리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612년부터 609년까지 권력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597년에 바빌론에 주요 유혈 사태 없이 항복했다. 이스라엘의 봉기로 인해 기원전 586년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다. 솔로몬 성전을 포함한 도시 전체가 불에 탔다. 이스라엘 귀족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
에스겔서에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에스겔 40-48에는 성전, 그 방, 현관, 벽의 치수에 대한 길고 자세한 설명이 있다. 에스겔 48:30–35에는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딴 12개의 성전 문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
스가랴서[8]는 에스겔의 새 예루살렘을 확장한다. 제2성전이 세워졌을 때, 유배 후 예루살렘의 인구는 불과 수백 명이었다. 기원전 445년까지 방어용 도시벽은 없었다.[9] 이 구절에서 저자는 거대한 인구를 보호하기 위한 불의 도시 벽에 대해 쓰고 있다. 이 텍스트는 새 예루살렘 사상의 진전을 보여준다. 에스겔에서는 성전 건축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스가랴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건국에 대한 하나님의 중재로 초점이 이동한다.
새 예루살렘은 이사야서에서 더욱 확장되어,[10] 새 예루살렘이 귀한 사파이어, 보석, 루비로 장식되어 있다. 도시는 공포가 없고 의로움으로 가득한 곳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이사야는 유대교 종말론의 한 예를 제공하며, 완전한 예루살렘에 대한 희망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드러난다.
원래 새 예루살렘 구성으로서 에스겔은 4 에스라, 2 바룩, 쿰란 문서, 요한계시록과 같은 후기 작품의 자료 역할을 했다. 이 텍스트는 유사한 측정 언어를 사용하고 에스겔의 제한된 종말론적 관점을 확장했다.
{{인용문|
「승리하는 사람은 내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아 다시는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게 하겠다. 그리고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에게 새겨 주겠다.」
'' | 요한의 묵시록(요한계시록) 3:12| 21세기 해설판 성경 }}
{{인용문|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 요한의 묵시록(요한계시록) 21:2| 21세기 해설판 성경 }}
2. 2. 신약성경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형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다른 사건들의 장소로서 예루살렘에 종교적 중요성을 부여해 왔다.[19] 특히,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지 몇 십 년 후인 서기 70년에 일어난 제2성전의 파괴는 그 당시 신생 기독교의 종말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9] 복음서의 올리벳 담론에서 예수는 헤롯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고, 이것이 인자의 재림 곧 일반적으로 재림이라고 불리는 사건에 선행할 것이라고 약속한다.[19] 메시아에 의한 예루살렘의 갱신에 대한 이 예언은 유대교 예언자들의 예언을 반영한다.[19] 밧모의 요한의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은 올리벳 담론과 위에 언급된 모든 역사적 선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19]요한 계시록에 따르면, 전천년설은 종말론과 하늘과 땅의 두 번째 창조(새 지구 참조) 이후, 새 예루살렘이 모든 참된 신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보낼 지상 장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19]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종말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19] 많은 기독교인들은 새 예루살렘을 현재의 현실로, 즉 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완성이며, 기독교인들이 이미 천상의 예루살렘과 지상의 교회 모두의 일원으로서 일종의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19] 이러한 방식으로 새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선택받은 백성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화해를 나타내며, "기독교 순례의 끝"을 의미한다.[19] 이와 같이 새 예루살렘은 천국에 대한 개념이며, 천국 (기독교)도 참조하라.
"새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는 신약성경 3:12절과 21:2절의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두 장의 상당 부분은 밧모 섬의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새 예루살렘을 "'어린 양의 신부, 아내'"로 묘사하며, 그곳에는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 (요한계시록 22:1).[20]
요한은 새로운 하늘과 "더 이상 바다가 없는" 새로운 땅을 본 후, 한 천사가 그를 "성령으로" 데리고 가서 "크고 높은 산"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게 한다.[20] 거대한 도시는 하늘에서 내려와 새 땅으로 내려온다. 요한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정교한 묘사는 강, 사각형 모양, 벽, 그리고 생명 나무와 같이 에덴 동산과 낙원 정원의 많은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20]
요한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으며, 그 "광채는 마치 매우 값진 보석, 맑은 벽옥과 같"다고 한다. 그 도시의 거리는 또한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도시의 기초는 정방형으로 놓여 있으며 벽옥으로 만들어진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에는 높이, 길이, 너비가 같은 크기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 성소와 첫 번째 성전에서와 같았고 - 그 크기는 12,000 스타디온(약 1,500마일)이다. 요한은 그 벽이 144 큐빗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길이가 앞서 언급되었으므로 두께로 추정된다. 144 큐빗은 약 65미터이다. 12는 144의 제곱근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숫자 12는 초기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했으며, 이스라엘의 12 지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12 사도를 나타냈다. 이 숫자는 요한계시록에서 완전성을 상징한다.[20] 새 예루살렘의 네 면은 네 개의 주요 방향(북, 남, 동, 서)을 나타낸다. 이런 식으로 새 예루살렘은 지구의 모든 구석에서 온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모두 받아들이는 12개의 문이 있는 포용적인 장소로 여겨진다.[20]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 건물이 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은 도시의 성전이며, 그들은 어디에서나 숭배받는다. 요한계시록 22장은 또한 도시의 큰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는 생명수의 강에 대해 설명하며, 이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생명나무는 거리 한가운데와 강 양쪽에서 자란다. 그 나무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고 매달 열매를 맺는다. 요한에 따르면 "그 나무 잎사귀들은 모든 민족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 예루살렘에 생명나무가 포함된 것은 에덴 동산을 연상시킨다. 그 나무가 맺는 열매는 생명의 열매일 수 있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죄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신화 (즉, 하나님의 권능 또는 형상, 즉 거룩함의 "그의 형상"과 같은 것)을 가질 것이며 "그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밤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고, 도시의 거주자들은 "등불이나 햇빛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을 영원한 본질을 강조하면서 끝맺는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기인 서기 1세기 말(서기 96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부에서는 네로 황제 통치 말기(서기 54~68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1:4)에 보내는 서신이다. 요한 계시록은 일반적으로 서론(1:1–3:22), 환상(4:1–22:5), 결론(22:6–20)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태생 유대인이자 기독교 신자였다. 요한 계시록의 저자와 수신자는 주님께서 그들을 옹호하시고 그들의 고난에 대해 "땅의 거주자들"을 심판하시기를 간구한다(6:10). 예루살렘의 함락은 네로 시대의 박해와 함께 요한 계시록의 숨겨진 주제를 형성한다.
요한 계시록 전체에서 성전에 대한 여러 언급이 나온다 . 이 성전은 천상의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에서 종말이 도래하면, 독자는 성전이 새 예루살렘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올 것을 예상한다. 요한 계시록 21장은 심지어 회복된 성전을 수반하는 전형적인 새 예루살렘 용어를 포함한다. 새 도시에 대한 구체적인 측정이 주어지고(에스겔 40–48, 4Q554), 그 도시는 금, 사파이어, 에메랄드로 지어진다(이사야, 토비트). 또한, 21:21절은 "열두 문"을 언급한다. 요한 계시록은 새 예루살렘 전통의 또 다른 전형적인 측면, 즉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재통일을 유지한다(에스겔 48:33–34, 4Q554).
22절은 새 예루살렘 종말론적 수사에서 갑작스럽고 놀라운 전환점을 보여준다. "내가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 계시록은 3 바룩과 4 시빌린 신탁의 전통에 따라 성전이 없는 종말을 예견한다.
23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됨이라." 요한 계시록의 저자에게는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님은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빛이 되시고 예수(어린 양)는 그 등불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재해석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그 주장을 펼친다.
"여호와는 네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은 네 영광이 되리라. 네 해가 다시는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니라." (이사야 60:19)
주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비추시고 그리스도께서 그 주민들의 영광이 되시기 때문에 종말론적 시대에는 성전이 버려진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새 예루살렘에 더 이상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주님은 성전을 충분히 대체했다.
3. 유대교와 기독교의 해석
유대교 신비주의에는 두 개의 에덴 동산과 두 개의 약속의 땅이 있는데, 하나는 천상에 있고 다른 하나는 지상에 있다.[6][7] 천상의 예루살렘에는 성전, 언약의 궤, 생명 나무, 만나 저장소, 정원에 물을 대는 강들이 있다.[6][7] 성경에서 새 예루살렘, 천상의 성소, 생명의 빵, 하나님의 보좌 등은 이러한 유대교 신비주의적 천국을 가리킨다.[6][7]
바빌론 유수는 유다 왕국에 대한 바빌론의 위협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은 바빌론에 항복했고, 기원전 586년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해 솔로몬 성전을 포함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귀족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
에스겔서 40-48장에는 새 예루살렘 성전, 방, 현관, 벽의 치수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딴 12개의 성전 문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8] 스가랴서는 에스겔의 새 예루살렘을 확장하여, 인구를 보호하기 위한 불의 도시 벽을 언급하며, 새 예루살렘 건국에 대한 하나님의 중재를 강조한다.[9] 이사야서는 새 예루살렘이 보석으로 장식되고 공포가 없으며 의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며, 유대교 종말론의 한 예시를 제공한다.[10] 에스겔서는 4 에스라, 2 바룩, 쿰란 문서, 요한계시록과 같은 후기 작품의 자료가 되었으며, 이들 텍스트는 유사한 측정 언어를 사용하고 에스겔의 종말론적 관점을 확장했다.
유대교는 메시아를 인간이며 다윗 왕의 남자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통치할 인물로 본다. 메시아는 잃어버린 이스라엘 지파들을 모으고, 할라카 문제를 해결하며, 에스겔에게 보여진 모습대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시기에 세계 평화와 번영이 시작되고, 열방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숭배할 것이라고 믿는다. 스가랴 (히브리 예언자)는 초막절 축제를 지내지 않는 가족은 비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이사야는 재건된 성전이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새 예루살렘 도시는 세계 열방이 모이는 장소가 되고, 갱신된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역할을 할 것이며, 각 지파마다 하나의 문이 있는 12개의 문을 갖게 될 것이다. 이사야서는 "매달 초하루에서 다음 초하루까지, 매주 안식일에서 다음 안식일까지 모든 육체가 내 앞에서 경배하러 올 것이다."라는 예언으로 끝을 맺는다.
에녹 1서(85-90장)는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코스 4세 치하의 박해에 대한 묵시록적 응답으로,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사해 문서는 예루살렘 성전 지도부에 반대했던 에세네파의 새 예루살렘 전통을 담고 있으며, 쿰란 문헌의 새 예루살렘 텍스트는 열두 개의 도시 문과 도시 치수에 초점을 맞추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재통일을 의미한다.
서기 1세기 유대 속주에서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와 로마-유대 전쟁은 유대인과 초기 기독교인들을 위한 새 예루살렘 종말론을 변화시켰다. 제2성전 파괴는 제2성전 유대교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이에 대한 종말론적 응답이 이어졌다. 4 에즈라와 2 바룩은 하늘에서 성전을 찾으며 유대교의 마지막 새 성전 텍스트를 보여준다. 3 바룩과 같은 유대교 텍스트는 복원된 성전을 거부하기 시작했지만, 랍비 유대교는 제3성전에 대한 믿음을 유지했다. 4 에즈라는 예루살렘의 하늘 왕국으로의 회복을 강조하고, 2 바룩은 하늘 성전이 에덴 동산보다 먼저 존재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회복은 하늘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3 바룩은 성전의 부재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며,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관점과 일치한다.
쿠므란, 이스라엘 근처 사해 사본에서 발견된 새 예루살렘 두루마리는 종말론적 환상을 담고 있으며, 아람어로 쓰여진 이 텍스트는 12개의 문이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도시를 묘사한다. 이는 에제키엘서 40–48장과 요한 계시록 21–22장과 유사하며, 성전 두루마리와 비교했을 때 직접적인 문학적 연관성은 없지만 많은 유사점을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형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사건들의 장소로서 예루살렘에 종교적 중요성을 부여해 왔다.[19] 특히,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지 몇 십 년 후인 서기 70년에 일어난 제2성전의 파괴는 그 당시 신생 기독교의 종말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복음서의 올리벳 담론에서 예수는 헤롯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고, 이것이 인자의 재림 곧 일반적으로 재림이라고 불리는 사건에 선행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메시아에 의한 예루살렘의 갱신에 대한 이 예언은 유대교 예언자들의 예언을 반영한다. 밧모의 요한의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은 올리벳 담론과 위에 언급된 모든 역사적 선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19]
요한 계시록에 따르면, 전천년설은 종말론과 하늘과 땅의 두 번째 창조(새 지구 참조) 이후, 새 예루살렘이 모든 참된 신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보낼 지상 장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종말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새 예루살렘을 현재의 현실로, 즉 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완성이며, 기독교인들이 이미 천상의 예루살렘과 지상의 교회 모두의 일원으로서 일종의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방식으로 새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선택받은 백성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화해를 나타내며, "기독교 순례의 끝"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새 예루살렘은 천국에 대한 개념이며, 천국 (기독교)도 참조하라.
기독교는 이 도시를 예루살렘의 물리적 및/또는 영적 회복 또는 신성한 재창조로 해석한다. 또한 많은 기독교 단체는 교회를 성도들의 거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밧모섬의 요한은 기독교 성경의 요한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며,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기독교 종말론과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루살렘의 이러한 갱신은 재건이라면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바하이 신앙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갱신된 예루살렘은 "책에 따라"를 의미하는 라틴어인 ''Ad librum''이라는 모토를 사용한다.
개신교와 정통 유대교와 같이 성경과 유대교 및 기독교의 다른 저술을 기반으로 하는 많은 전통은 다양한 예언에 따라 언젠가 성전산에서 예루살렘의 문자적 갱신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세대주의자들은 하늘에서 내려올 문자적인 새 예루살렘을 믿으며, 이는 엄청난 규모의 완전히 새로운 도시가 될 것이다. 다양한 개신교 기독교 교파, 현대주의 기독교 분파,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및 개혁 유대교와 같은 다른 종파는 새 예루살렘을 비유적으로 보거나, 그러한 갱신이 이미 일어났을 수 있거나, 성전산 외의 다른 장소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요한계시록 20:9에 언급된 "성도들의 진과 사랑받는 도시"와 21장의 새 예루살렘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시록 20:9는 에스겔서 36장에서 시작하여 48장에서 끝나는 책에서 그 설명과 목적을 찾을 수 있는 지상의 도시를 언급한다.
가장 명백한 차이점 중 하나는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치수가 에스겔 48장의 도시(그리고 계시록 20:9)의 치수보다 1,000배 크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은 길이, 너비, 높이가 2,225km이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의 도시는 지구상에 위치할 수 없지만, 계시록 21장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 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와" "새로운 땅"으로 내려올 것이다.
thumb의 55r 면에는 천사가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있다.]]
"새 예루살렘"(카이네 이에루살렘/καινὴ Ἰερουσαλήμel)이라는 용어는 신약성경 3:12절과 21:2절의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두 장의 상당 부분은 밧모 섬의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새 예루살렘을 "'어린 양의 신부, 아내'"로 묘사하며, 그곳에는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 (요한계시록 22:1).
요한은 새로운 하늘과 "더 이상 바다가 없는" 새로운 땅을 본 후, 한 천사가 그를 "성령으로" 데리고 가서 "크고 높은 산"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게 한다. 거대한 도시는 하늘에서 내려와 새 땅으로 내려온다. 요한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정교한 묘사는 강, 사각형 모양, 벽, 그리고 생명 나무와 같이 에덴 동산과 낙원 정원의 많은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요한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으며, 그 "광채는 마치 매우 값진 보석, 맑은 벽옥과 같"다고 한다. 그 도시의 거리는 또한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도시의 기초는 정방형으로 놓여 있으며 벽옥으로 만들어진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에는 높이, 길이, 너비가 같은 크기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 성소와 첫 번째 성전에서와 같았고 - 그 크기는 12,000 스타디온(약 1,500마일)이다. 요한은 그 벽이 144 큐빗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길이가 앞서 언급되었으므로 두께로 추정된다. 144 큐빗은 약 65미터이다. 12는 144의 제곱근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숫자 12는 초기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했으며, 이스라엘의 12 지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12 사도를 나타냈다. 이 숫자는 요한계시록에서 완전성을 상징한다.[20] 새 예루살렘의 네 면은 네 개의 주요 방향(북, 남, 동, 서)을 나타낸다. 이런 식으로 새 예루살렘은 지구의 모든 구석에서 온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모두 받아들이는 12개의 문이 있는 포용적인 장소로 여겨진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 건물이 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은 도시의 성전이며, 그들은 어디에서나 숭배받는다. 요한계시록 22장은 또한 도시의 큰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는 생명수의 강에 대해 설명하며, 이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생명나무는 거리 한가운데와 강 양쪽에서 자란다. 그 나무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고 매달 열매를 맺는다. 요한에 따르면 "그 나무 잎사귀들은 모든 민족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 예루살렘에 생명나무가 포함된 것은 에덴 동산을 연상시킨다. 그 나무가 맺는 열매는 생명의 열매일 수 있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죄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신화 (즉, 하나님의 권능 또는 형상, 즉 거룩함의 "그의 형상"과 같은 것)을 가질 것이며 "그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밤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고, 도시의 거주자들은 "등불이나 햇빛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을 영원한 본질을 강조하면서 끝맺는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기인 서기 1세기 말(서기 96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부에서는 네로 황제 통치 말기(서기 54~68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1:4)에 보내는 서신이다. 요한 계시록은 일반적으로 서론(1:1–3:22), 환상(4:1–22:5), 결론(22:6–20)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 연구는 주로 21장을 다룬다.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태생 유대인이자 기독교 신자였다. 요한 계시록의 저자와 수신자는 주님께서 그들을 옹호하시고 그들의 고난에 대해 "땅의 거주자들"을 심판하시기를 간구한다(6:10). 예루살렘의 함락은 네로 시대의 박해와 함께 요한 계시록의 숨겨진 주제를 형성한다.
요한 계시록 전체에서 성전에 대한 여러 언급이 나온다 . 이 성전은 천상의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에서 종말이 도래하면, 독자는 성전이 새 예루살렘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올 것을 예상한다. 요한 계시록 21장은 심지어 회복된 성전을 수반하는 전형적인 새 예루살렘 용어를 포함한다. 새 도시에 대한 구체적인 측정이 주어지고(에스겔 40–48, 4Q554), 그 도시는 금, 사파이어, 에메랄드로 지어진다(이사야, 토비트). 또한, 21:21절은 "열두 문"을 언급한다. 요한 계시록은 새 예루살렘 전통의 또 다른 전형적인 측면, 즉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재통일을 유지한다(에스겔 48:33–34, 4Q554).
22절은 새 예루살렘 종말론적 수사에서 갑작스럽고 놀라운 전환점을 보여준다. "내가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 계시록은 3 바룩과 4 시빌린 신탁의 전통에 따라 성전이 없는 종말을 예견한다. 요한 계시록은 왜 갑자기 종말론적 성전을 부정했을까? 23절은 이 불일치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23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됨이라." 요한 계시록의 저자에게는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님은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빛이 되시고 예수(어린 양)는 그 등불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재해석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그 주장을 펼친다.
"여호와는 네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은 네 영광이 되리라. 네 해가 다시는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니라." (이사야 60:19)
주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비추시고 그리스도께서 그 주민들의 영광이 되시기 때문에 종말론적 시대에는 성전이 버려진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새 예루살렘에 더 이상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주님은 성전을 충분히 대체했다.
2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고대 기독교 분파인 몬타누스주의는 인근 프리게아의 페푸자와 티미온에 새 예루살렘이 강림할 것으로 예상했다. 후기 고대 시대에 두 곳 모두 로마 제국 전역에서 온 순례자들의 발길을 끌었다. 페푸자는 몬타누스주의 교회의 본부였다. 몬타누스주의 총대주교는 페푸자에 거주했다. 여성은 몬타누스주의에서 사제와 주교로 봉사하며 해방된 역할을 했다. 6세기에는 이 교회가 소멸되었다.
2001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페터 람페는 터키의 프리게아에서 매년 고고학 발굴 조사를 지휘해 왔다.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윌리엄 태버니와 함께 진행된 이 학제간 조사에서 수많은 미지의 고대 정착지가 발견되어 고고학적으로 기록되었다. 그 중 두 곳은 고대 몬타누스주의의 두 성지인 페푸자와 티미온을 식별하는 데 가장 유력한 후보지이며, 새 예루살렘이 강림할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 학자들은 19세기부터 이 잃어버린 장소를 찾아왔다.
윌리엄 태버니와 페터 람페가 페푸자로 발견하고 확인한 고대 정착지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정착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중요한 석굴 수도원이 이 마을에 속해 있었다. 이 마을은 프리게아의 카라할르 지역에 있으며, 카라야쿠플루 (우샤크 주, 에게 해 지역, 터키) 마을 근처에 있다. 페터 람페가 확인한 티미온의 고대 유적지는 터키의 쉭란제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에게 페푸자와 티미온 사이의 높은 평원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착륙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가톨릭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론적 역할에서 새 예루살렘을 위치시킨다. 가톨릭교회는 또한 새 예루살렘이 이미 천국에 있는 영적인 공동체, 즉 승리 교회로 존재하며, 지상에는 투쟁 교회라는 전초 기지가 있다고 본다. 승리 교회, 투쟁 교회, 그리고 고통받는 교회는 함께 보편 교회를 이룬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교회 박사이자 교부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인 ''신국''에서 요한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을 바탕으로 이러한 관점을 제시한다.
"천국"에 관한 ''가톨릭 백과사전''의 기사는 가톨릭 교회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 신학자들은 복된 자들이 특별한 집을 가지고 거기에 거하며, 비록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더라도 그곳에서 일반적으로 거주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여깁니다. 복된 자들이 거주하는 환경은 그들의 행복한 상태에 부합해야 하며, 애정으로 그들을 결합하는 자선 관계의 내적 연합은 거주의 공동체에서 외부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지구는 천체와 함께 복된 자들의 거처의 일부로 영광스럽게 변형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 따라서 복된 자들의 특정한 거처를 암시하는 성경의 수많은 표현에 비유적인 의미를 부여할 충분한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복된 자들의 천국이 특정한 경계를 가진 특별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이 장소는 지구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표현에 따라 그 경계 바깥에 존재한다고 여겨집니다. 그 위치에 대한 다른 모든 세부 사항은 전혀 불확실합니다. 교회는 이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랄리벨라는 1187년 살라딘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무슬림에게 점령되자 이에 대응하여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랄리벨라를 건설했다.
동방 정교회는 새 예루살렘이 요한 계시록(묵시록)에 묘사된 방식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도시라고 가르친다. 교회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상징이다.[23] 러시아의 새 예루살렘 수도원은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새 예루살렘은 17세기에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를 식민지화하는 데 중요한 주제였다. 청교도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를 신세계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지상에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자들로 여겼다. 이 생각은 미국 민족주의의 근본이었다.[24]
스베덴보리안 교회는 종종 그들의 조직을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저술한 《새 예루살렘과 그 천국의 교리》, 《요한계시록 해설》, 《요한계시록 해설》과 같은 책에서 설명한 새 예루살렘의 일부이거나 기여하는 것으로 언급한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경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은 기독교를 대체/회복할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다. 또한 이 책들에 따르면, 이 새 예루살렘은 1757년경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는 예루살렘 자체가 교회의 상징이며, 따라서 성경 속 새 예루살렘은 새 교회에 대한 예언적 묘사라는 그들의 믿음에서 비롯된다.
시온 (말일성도)
말일성도 운동에서 새 예루살렘은 북아메리카에 세워질 물리적인 왕국으로 여겨지며,[25] 그 중심지는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이다.[26] 이 운동은 새 예루살렘을 시온이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창시자인 조셉 스미스는 1830년대 초에 이 시온을 건설하려 시도했고,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성경적 묘사에 대한 그의 관점을 바탕으로 시온의 평면도를 작성했으며, 여기에는 성전에 대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미주리 정착민들과의 정치적, 군사적 경쟁으로 인해, 이 종교의 신자들은 1838년에 미주리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여러 말일성도 교단들이 그곳에 거주지를 마련했으며, 이곳이 하나님의 천년 왕국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을 다스리는 왕이자 제사장으로 봉사하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 왕-제사장의 수는 결국 총 144,000명이 될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로 묘사되고, 이 동일한 "신부"가 "어린 양의 아내"로 묘사된다는 것에 근거한다. 는 어린 양과 144,000 사이의 아내와 같은 관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144,000의 정체성을 어린 양의 아내, 그리고 다시 새 예루살렘과 연결한다.[27]
에녹 1서(85-90장)에 나오는 동물 종말론은 갈등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예시이다. 에녹 1서는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코스 4세 치하의 박해에 대한 묵시록적 응답이다.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황제는 전직 대제사장인 야손이 이끄는 예루살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돌아왔다. 흥분한 안티오코스는 유대교에 가혹한 제약을 가했다. 할례, 축제 기념, 안식일 준수가 모두 금지되었다. 안티오코스는 토라 사본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어야 했다. 최악의 압제는 성전의 모독으로 나타났다. 다신교 숭배가 형성되었고, 야훼 숭배가 폐지되었다. 셀레우코스 신에게 바치는 조각상이 유대교 제단 위에 세워졌다.
에녹 1서는 기원전 166년에서 기원전 163년 사이에 이 재앙의 여파로 기록되었다. 에녹 1서의 저자에게 역사는 에덴 동산의 유토피아에서 악으로의 가파른 하강이다. 저자의 종말론적 비전은 예루살렘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양의 주인이 이전 것보다 새롭고 더 크고 더 높은 집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에녹 1서 90:29). 이 새 예루살렘 구절에서 양은 유대인, 건축가는 하느님, 집은 성전을 의미한다. 같은 기간 동안, 사해 문서는 갈등에서 형성된 새 예루살렘 전통을 담고 있다. 쿰란 동굴에 살았던 작은 유대교 종파인 에세네파는 예루살렘의 성전 지도부와 대제사장에 반대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비판하는 데 집중하여 성전을 비난했다. 그들은 또한 유대 왕들에게 대제사장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에 좌절했다. 에세네파는 성전과 그 숭배 제도 자체에 반대하지 않았다. 쿰란의 에세네파는 통일된 열두 지파가 로마 유대와 무능한 성전 지도부에 맞서 일어나 진정한 성전 숭배를 재건할 것을 예언했다.
위에 제시된 바와 같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언어의 역사적 전개는 구체적으로 갈등과 연결되어 있다. 바빌론 유수, 안티오쿠스 박해, 그리고 예루살렘의 부패한 지도력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을 담은 종말론적 응답을 자극했다. 서기 1세기에 유대 속주에서 훨씬 더 큰 갈등이 폭발했다.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와 다른 로마-유대 전쟁이 그것이다. 그 후 종말론적 응답은 유대인과 초기 기독교인들을 위한 새 예루살렘 종말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핵심적으로 종말론은 일종의 신정론이다. 이것은 압도적인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중재와 완성된 다가올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응답한다. 서기 70년 제2성전의 파괴는 제2성전 유대교의 종말을 의미했다. 당연히 이 재앙에 대한 종말론적 응답이 이어졌다. 이 섹션에서는 먼저 4 에즈라와 2 바룩을 다룰 것이다. 4 에즈라와 2 바룩은 두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첫째, 종말이 아닌 하늘에서 성전을 찾는다. 둘째, 이 텍스트는 유대교의 마지막 새 성전 텍스트를 보여준다. 3 바룩과 같은 유대교 텍스트는 완전히 복원된 성전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랍비 유대교의 중심으로서 제3성전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랍비들에 의해 외경으로 간주되었다.
4 에즈라의 유대 종말론은 외경 2 에스드라에 포함된 텍스트이다. 4 에즈라의 장르는 역사 소설로, 바빌론의 예루살렘 파괴 후 13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4 에즈라는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 13년 후인 서기 83년경으로 추정된다. 이야기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 에즈라의 애도 기간을 따른다. 에즈라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비판에서 욥과 같다.
에즈라는 깊은 슬픔에 잠겨 예루살렘을 슬퍼하는 여인을 만난다. 에즈라는 그 여인을 위로하며 "너의 큰 슬픔을 떨쳐 버리고 너의 많은 슬픔을 벗어 버리라...
3. 1. 유대교
유대교 신비주의에는 두 개의 에덴 동산과 두 개의 약속의 땅이 있는데, 하나는 천상에 있고 다른 하나는 지상에 있다.[6][7] 천상의 예루살렘에는 성전, 언약의 궤, 생명 나무, 만나 저장소, 정원에 물을 대는 강들이 있다.[6][7] 성경에서 새 예루살렘, 천상의 성소, 생명의 빵, 하나님의 보좌 등은 이러한 유대교 신비주의적 천국을 가리킨다.[6][7]바빌론 유수는 유다 왕국에 대한 바빌론의 위협에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은 바빌론에 항복했고, 기원전 586년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해 솔로몬 성전을 포함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귀족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
에스겔서 40-48장에는 새 예루살렘 성전, 방, 현관, 벽의 치수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딴 12개의 성전 문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8] 스가랴서는 에스겔의 새 예루살렘을 확장하여, 인구를 보호하기 위한 불의 도시 벽을 언급하며, 새 예루살렘 건국에 대한 하나님의 중재를 강조한다.[9] 이사야서는 새 예루살렘이 보석으로 장식되고 공포가 없으며 의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며, 유대교 종말론의 한 예시를 제공한다.[10] 에스겔서는 4 에스라, 2 바룩, 쿰란 문서, 요한계시록과 같은 후기 작품의 자료가 되었으며, 이들 텍스트는 유사한 측정 언어를 사용하고 에스겔의 종말론적 관점을 확장했다.
유대교는 메시아를 인간이며 다윗 왕의 남자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통치할 인물로 본다. 메시아는 잃어버린 이스라엘 지파들을 모으고, 할라카 문제를 해결하며, 에스겔에게 보여진 모습대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시기에 세계 평화와 번영이 시작되고, 열방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숭배할 것이라고 믿는다. 스가랴 (히브리 예언자)는 초막절 축제를 지내지 않는 가족은 비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이사야는 재건된 성전이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새 예루살렘 도시는 세계 열방이 모이는 장소가 되고, 갱신된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역할을 할 것이며, 각 지파마다 하나의 문이 있는 12개의 문을 갖게 될 것이다. 이사야서는 "매달 초하루에서 다음 초하루까지, 매주 안식일에서 다음 안식일까지 모든 육체가 내 앞에서 경배하러 올 것이다."라는 예언으로 끝을 맺는다.
에녹 1서 (85-90장)는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코스 4세 치하의 박해에 대한 묵시록적 응답으로,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사해 문서는 예루살렘 성전 지도부에 반대했던 에세네파의 새 예루살렘 전통을 담고 있으며, 쿰란 문헌의 새 예루살렘 텍스트는 열두 개의 도시 문과 도시 치수에 초점을 맞추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재통일을 의미한다.
서기 1세기 유대 속주에서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와 로마-유대 전쟁은 유대인과 초기 기독교인들을 위한 새 예루살렘 종말론을 변화시켰다. 제2성전 파괴는 제2성전 유대교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이에 대한 종말론적 응답이 이어졌다. 4 에즈라와 2 바룩은 하늘에서 성전을 찾으며 유대교의 마지막 새 성전 텍스트를 보여준다. 3 바룩과 같은 유대교 텍스트는 복원된 성전을 거부하기 시작했지만, 랍비 유대교는 제3성전에 대한 믿음을 유지했다. 4 에즈라는 예루살렘의 하늘 왕국으로의 회복을 강조하고, 2 바룩은 하늘 성전이 에덴 동산보다 먼저 존재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회복은 하늘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3 바룩은 성전의 부재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며,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관점과 일치한다.
쿠므란, 이스라엘 근처 사해 사본에서 발견된 새 예루살렘 두루마리는 종말론적 환상을 담고 있으며, 아람어로 쓰여진 이 텍스트는 12개의 문이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도시를 묘사한다. 이는 에제키엘서 40–48장과 요한 계시록 21–22장과 유사하며, 성전 두루마리와 비교했을 때 직접적인 문학적 연관성은 없지만 많은 유사점을 보여준다.
3. 2. 기독교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형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사건들의 장소로서 예루살렘에 종교적 중요성을 부여해 왔다.[19] 특히,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지 몇 십 년 후인 서기 70년에 일어난 제2성전의 파괴는 그 당시 신생 기독교의 종말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복음서의 올리벳 담론에서 예수는 헤롯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고, 이것이 인자의 재림 곧 일반적으로 재림이라고 불리는 사건에 선행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메시아에 의한 예루살렘의 갱신에 대한 이 예언은 유대교 예언자들의 예언을 반영한다. 밧모의 요한의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은 올리벳 담론과 위에 언급된 모든 역사적 선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19]
요한 계시록에 따르면, 전천년설은 종말론과 하늘과 땅의 두 번째 창조(새 지구 참조) 이후, 새 예루살렘이 모든 참된 신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보낼 지상 장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종말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새 예루살렘을 현재의 현실로, 즉 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완성이며, 기독교인들이 이미 천상의 예루살렘과 지상의 교회 모두의 일원으로서 일종의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방식으로 새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선택받은 백성의 최종적이고 영원한 화해를 나타내며, "기독교 순례의 끝"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새 예루살렘은 천국에 대한 개념이며, 천국 (기독교)도 참조하라.
기독교는 이 도시를 예루살렘의 물리적 및/또는 영적 회복 또는 신성한 재창조로 해석한다. 또한 많은 기독교 단체는 교회를 성도들의 거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밧모섬의 요한은 기독교 성경의 요한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며,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기독교 종말론과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루살렘의 이러한 갱신은 재건이라면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바하이 신앙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갱신된 예루살렘은 "책에 따라"를 의미하는 라틴어인 ''Ad librum''이라는 모토를 사용한다.
개신교와 정통 유대교와 같이 성경과 유대교 및 기독교의 다른 저술을 기반으로 하는 많은 전통은 다양한 예언에 따라 언젠가 성전산에서 예루살렘의 문자적 갱신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세대주의자들은 하늘에서 내려올 문자적인 새 예루살렘을 믿으며, 이는 엄청난 규모의 완전히 새로운 도시가 될 것이다. 다양한 개신교 기독교 교파, 현대주의 기독교 분파,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및 개혁 유대교와 같은 다른 종파는 새 예루살렘을 비유적으로 보거나, 그러한 갱신이 이미 일어났을 수 있거나, 성전산 외의 다른 장소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요한계시록 20:9에 언급된 "성도들의 진과 사랑받는 도시"와 21장의 새 예루살렘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시록 20:9는 에스겔서 36장에서 시작하여 48장에서 끝나는 책에서 그 설명과 목적을 찾을 수 있는 지상의 도시를 언급한다.
가장 명백한 차이점 중 하나는 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치수가 에스겔 48장의 도시(그리고 계시록 20:9)의 치수보다 1,000배 크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은 길이, 너비, 높이가 2,225km이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의 도시는 지구상에 위치할 수 없지만, 계시록 21장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 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와" "새로운 땅"으로 내려올 것이다.
thumb의 55r 면에는 천사가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있다.]]
"새 예루살렘"(카이네 이에루살렘/καινὴ Ἰερουσαλήμel)이라는 용어는 신약성경 3:12절과 21:2절의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두 장의 상당 부분은 밧모 섬의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새 예루살렘을 "'어린 양의 신부, 아내'"로 묘사하며, 그곳에는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 (요한계시록 22:1).
요한은 새로운 하늘과 "더 이상 바다가 없는" 새로운 땅을 본 후, 한 천사가 그를 "성령으로" 데리고 가서 "크고 높은 산"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게 한다. 거대한 도시는 하늘에서 내려와 새 땅으로 내려온다. 요한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정교한 묘사는 강, 사각형 모양, 벽, 그리고 생명 나무와 같이 에덴 동산과 낙원 정원의 많은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요한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으며, 그 "광채는 마치 매우 값진 보석, 맑은 벽옥과 같"다고 한다. 그 도시의 거리는 또한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도시의 기초는 정방형으로 놓여 있으며 벽옥으로 만들어진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에는 높이, 길이, 너비가 같은 크기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 성소와 첫 번째 성전에서와 같았고 - 그 크기는 12,000 스타디온(약 1,500마일)이다. 요한은 그 벽이 144 큐빗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길이가 앞서 언급되었으므로 두께로 추정된다. 144 큐빗은 약 65미터이다. 12는 144의 제곱근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숫자 12는 초기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했으며, 이스라엘의 12 지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12 사도를 나타냈다. 이 숫자는 요한계시록에서 완전성을 상징한다.[20] 새 예루살렘의 네 면은 네 개의 주요 방향(북, 남, 동, 서)을 나타낸다. 이런 식으로 새 예루살렘은 지구의 모든 구석에서 온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모두 받아들이는 12개의 문이 있는 포용적인 장소로 여겨진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 건물이 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은 도시의 성전이며, 그들은 어디에서나 숭배받는다. 요한계시록 22장은 또한 도시의 큰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는 생명수의 강에 대해 설명하며, 이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생명나무는 거리 한가운데와 강 양쪽에서 자란다. 그 나무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고 매달 열매를 맺는다. 요한에 따르면 "그 나무 잎사귀들은 모든 민족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 예루살렘에 생명나무가 포함된 것은 에덴 동산을 연상시킨다. 그 나무가 맺는 열매는 생명의 열매일 수 있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죄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신화 (즉, 하나님의 권능 또는 형상, 즉 거룩함의 "그의 형상"과 같은 것)을 가질 것이며 "그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밤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고, 도시의 거주자들은 "등불이나 햇빛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을 영원한 본질을 강조하면서 끝맺는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기인 서기 1세기 말(서기 96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부에서는 네로 황제 통치 말기(서기 54~68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1:4)에 보내는 서신이다. 요한 계시록은 일반적으로 서론(1:1–3:22), 환상(4:1–22:5), 결론(22:6–20)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 연구는 주로 21장을 다룬다.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태생 유대인이자 기독교 신자였다. 요한 계시록의 저자와 수신자는 주님께서 그들을 옹호하시고 그들의 고난에 대해 "땅의 거주자들"을 심판하시기를 간구한다(6:10). 예루살렘의 함락은 네로 시대의 박해와 함께 요한 계시록의 숨겨진 주제를 형성한다.
요한 계시록 전체에서 성전에 대한 여러 언급이 나온다 . 이 성전은 천상의 기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에서 종말이 도래하면, 독자는 성전이 새 예루살렘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올 것을 예상한다. 요한 계시록 21장은 심지어 회복된 성전을 수반하는 전형적인 새 예루살렘 용어를 포함한다. 새 도시에 대한 구체적인 측정이 주어지고(에스겔 40–48, 4Q554), 그 도시는 금, 사파이어, 에메랄드로 지어진다(이사야, 토비트). 또한, 21:21절은 "열두 문"을 언급한다. 요한 계시록은 새 예루살렘 전통의 또 다른 전형적인 측면, 즉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재통일을 유지한다(에스겔 48:33–34, 4Q554).
22절은 새 예루살렘 종말론적 수사에서 갑작스럽고 놀라운 전환점을 보여준다. "내가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 계시록은 3 바룩과 4 시빌린 신탁의 전통에 따라 성전이 없는 종말을 예견한다. 요한 계시록은 왜 갑자기 종말론적 성전을 부정했을까? 23절은 이 불일치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23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됨이라." 요한 계시록의 저자에게는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님은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빛이 되시고 예수(어린 양)는 그 등불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재해석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그 주장을 펼친다.
"여호와는 네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은 네 영광이 되리라. 네 해가 다시는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니라." (이사야 60:19)
주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비추시고 그리스도께서 그 주민들의 영광이 되시기 때문에 종말론적 시대에는 성전이 버려진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새 예루살렘에 더 이상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주님은 성전을 충분히 대체했다.
|thumb|새 예루살렘, 율리우스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1860]]
2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고대 기독교 분파인 몬타누스주의는 인근 프리게아의 페푸자와 티미온에 새 예루살렘이 강림할 것으로 예상했다. 후기 고대 시대에 두 곳 모두 로마 제국 전역에서 온 순례자들의 발길을 끌었다. 페푸자는 몬타누스주의 교회의 본부였다. 몬타누스주의 총대주교는 페푸자에 거주했다. 여성은 몬타누스주의에서 사제와 주교로 봉사하며 해방된 역할을 했다. 6세기에는 이 교회가 소멸되었다.
2001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페터 람페는 터키의 프리게아에서 매년 고고학 발굴 조사를 지휘해 왔다.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윌리엄 태버니와 함께 진행된 이 학제간 조사에서 수많은 미지의 고대 정착지가 발견되어 고고학적으로 기록되었다. 그 중 두 곳은 고대 몬타누스주의의 두 성지인 페푸자와 티미온을 식별하는 데 가장 유력한 후보지이며, 새 예루살렘이 강림할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 학자들은 19세기부터 이 잃어버린 장소를 찾아왔다.
윌리엄 태버니와 페터 람페가 페푸자로 발견하고 확인한 고대 정착지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정착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중요한 석굴 수도원이 이 마을에 속해 있었다. 이 마을은 프리게아의 카라할르 지역에 있으며, 카라야쿠플루 (우샤크 주, 에게 해 지역, 터키) 마을 근처에 있다. 페터 람페가 확인한 티미온의 고대 유적지는 터키의 쉭란제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에게 페푸자와 티미온 사이의 높은 평원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착륙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가톨릭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론적 역할에서 새 예루살렘을 위치시킨다. 가톨릭교회는 또한 새 예루살렘이 이미 천국에 있는 영적인 공동체, 즉 승리 교회로 존재하며, 지상에는 투쟁 교회라는 전초 기지가 있다고 본다. 승리 교회, 투쟁 교회, 그리고 고통받는 교회는 함께 보편 교회를 이룬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교회 박사이자 교부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인 ''신국''에서 요한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을 바탕으로 이러한 관점을 제시한다.
"천국"에 관한 ''가톨릭 백과사전''의 기사는 가톨릭 교회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 신학자들은 복된 자들이 특별한 집을 가지고 거기에 거하며, 비록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더라도 그곳에서 일반적으로 거주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여깁니다. 복된 자들이 거주하는 환경은 그들의 행복한 상태에 부합해야 하며, 애정으로 그들을 결합하는 자선 관계의 내적 연합은 거주의 공동체에서 외부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 지구는 천체와 함께 복된 자들의 거처의 일부로 영광스럽게 변형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 따라서 복된 자들의 특정한 거처를 암시하는 성경의 수많은 표현에 비유적인 의미를 부여할 충분한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복된 자들의 천국이 특정한 경계를 가진 특별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이 장소는 지구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표현에 따라 그 경계 바깥에 존재한다고 여겨집니다. 그 위치에 대한 다른 모든 세부 사항은 전혀 불확실합니다. 교회는 이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랄리벨라는 1187년 살라딘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무슬림에게 점령되자 이에 대응하여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랄리벨라를 건설했다.
동방 정교회는 새 예루살렘이 요한 계시록(묵시록)에 묘사된 방식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도시라고 가르친다. 교회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상징이다.[23] 러시아의 새 예루살렘 수도원은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새 예루살렘은 17세기에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를 식민지화하는 데 중요한 주제였다. 청교도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를 신세계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지상에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자들로 여겼다. 이 생각은 미국 민족주의의 근본이었다.[24]
교회 스베덴보리안은 종종 그들의 조직을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저술한 《새 예루살렘과 그 천국의 교리》, 《요한계시록 해설》, 《요한계시록 해설》과 같은 책에서 설명한 새 예루살렘의 일부이거나 기여하는 것으로 언급한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경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은 기독교를 대체/회복할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다. 또한 이 책들에 따르면, 이 새 예루살렘은 1757년경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는 예루살렘 자체가 교회의 상징이며, 따라서 성경 속 새 예루살렘은 새 교회에 대한 예언적 묘사라는 그들의 믿음에서 비롯된다.
시온 (말일성도)
말일성도 운동에서 새 예루살렘은 북아메리카에 세워질 물리적인 왕국으로 여겨지며,[25] 그 중심지는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이다.[26] 이 운동은 새 예루살렘을 시온이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창시자인 조셉 스미스는 1830년대 초에 이 시온을 건설하려 시도했고,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성경적 묘사에 대한 그의 관점을 바탕으로 시온의 평면도를 작성했으며, 여기에는 성전에 대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미주리 정착민들과의 정치적, 군사적 경쟁으로 인해, 이 종교의 신자들은 1838년에 미주리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여러 말일성도 교단들이 그곳에 거주지를 마련했으며, 이곳이 하나님의 천년 왕국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을 다스리는 왕이자 제사장으로 봉사하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 왕-제사장의 수는 결국 총 144,000명이 될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로 묘사되고, 이 동일한 "신부"가 "어린 양의 아내"로 묘사된다는 것에 근거한다. 는 어린 양과 144,000 사이의 아내와 같은 관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144,000의 정체성을 어린 양의 아내, 그리고 다시 새 예루살렘과 연결한다.[27]
3. 3. 역사적 발전
에녹 1서(85-90장)에 나오는 동물 종말론은 갈등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예시이다. 에녹 1서는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코스 4세 치하의 박해에 대한 묵시록적 응답이다.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황제는 전직 대제사장인 야손이 이끄는 예루살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돌아왔다. 흥분한 안티오코스는 유대교에 가혹한 제약을 가했다. 할례, 축제 기념, 안식일 준수가 모두 금지되었다. 안티오코스는 토라 사본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어야 했다. 최악의 압제는 성전의 모독으로 나타났다. 다신교 숭배가 형성되었고, 야훼 숭배가 폐지되었다. 셀레우코스 신에게 바치는 조각상이 유대교 제단 위에 세워졌다.에녹 1서는 기원전 166년에서 기원전 163년 사이에 이 재앙의 여파로 기록되었다. 에녹 1서의 저자에게 역사는 에덴 동산의 유토피아에서 악으로의 가파른 하강이다. 저자의 종말론적 비전은 예루살렘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양의 주인이 이전 것보다 새롭고 더 크고 더 높은 집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에녹 1서 90:29). 이 새 예루살렘 구절에서 양은 유대인, 건축가는 하느님, 집은 성전을 의미한다. 같은 기간 동안, 사해 문서는 갈등에서 형성된 새 예루살렘 전통을 담고 있다. 쿰란 동굴에 살았던 작은 유대교 종파인 에세네파는 예루살렘의 성전 지도부와 대제사장에 반대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비판하는 데 집중하여 성전을 비난했다. 그들은 또한 유대 왕들에게 대제사장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에 좌절했다. 에세네파는 성전과 그 숭배 제도 자체에 반대하지 않았다. 쿰란의 에세네파는 통일된 열두 지파가 로마 유대와 무능한 성전 지도부에 맞서 일어나 진정한 성전 숭배를 재건할 것을 예언했다.
위에 제시된 바와 같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언어의 역사적 전개는 구체적으로 갈등과 연결되어 있다. 바빌론 유수, 안티오쿠스 박해, 그리고 예루살렘의 부패한 지도력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을 담은 종말론적 응답을 자극했다. 서기 1세기에 유대 속주에서 훨씬 더 큰 갈등이 폭발했다.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와 다른 로마-유대 전쟁이 그것이다. 그 후 종말론적 응답은 유대인과 초기 기독교인들을 위한 새 예루살렘 종말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핵심적으로 종말론은 일종의 신정론이다. 이것은 압도적인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중재와 완성된 다가올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응답한다. 서기 70년 제2성전의 파괴는 제2성전 유대교의 종말을 의미했다. 당연히 이 재앙에 대한 종말론적 응답이 이어졌다. 이 섹션에서는 먼저 4 에즈라와 2 바룩을 다룰 것이다. 4 에즈라와 2 바룩은 두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첫째, 종말이 아닌 하늘에서 성전을 찾는다. 둘째, 이 텍스트는 유대교의 마지막 새 성전 텍스트를 보여준다. 3 바룩과 같은 유대교 텍스트는 완전히 복원된 성전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랍비 유대교의 중심으로서 제3성전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랍비들에 의해 외경으로 간주되었다.
4 에즈라의 유대 종말론은 외경 2 에스드라에 포함된 텍스트이다. 4 에즈라의 장르는 역사 소설로, 바빌론의 예루살렘 파괴 후 13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4 에즈라는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 13년 후인 서기 83년경으로 추정된다. 이야기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 에즈라의 애도 기간을 따른다. 에즈라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비판에서 욥과 같다.
에즈라는 깊은 슬픔에 잠겨 예루살렘을 슬퍼하는 여인을 만난다. 에즈라는 그 여인을 위로하며 "너의 큰 슬픔을 떨쳐 버리고 너의 많은 슬픔을 벗어 버리라... 지극히 높으신 분이 너에게 안식을 주실 것이다." (4 에즈라 10:24)라고 말한다. 갑자기 그 여인은 밝은 빛으로 변형된다. 그녀는 재건되고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변한다. 슬픔에 잠긴 과부로서 그녀는 에즈라가 새 예루살렘의 이미지로 스스로 위안을 얻도록 설득했다.
4 에즈라는 두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첫째, 예루살렘에 대해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둘째, 예루살렘은 하늘의 왕국으로 회복될 것이다. 4 에즈라는 또한 종말론 전체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다시 통치하고 거주하실 것을 강조한다.
2 바룩의 종말론은 4 에즈라와 동시대의 이야기이다. 이 텍스트 역시 4 에즈라와 동일한 기본 구조를 따른다. 즉, 욥과 같은 슬픔, 주님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욥과 같은 인물의 위안으로 이어지는 예루살렘의 정당화이다. 2 바룩은 로마의 파괴 이후에 쓰여졌지만 바빌론에 대한 예루살렘의 함락 전에 설정된 역사 소설이다.
바룩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임박한 멸망을 알리시자 고통스러워한다. 바룩은 하나님께 몇 가지 신학적 질문으로 답한다. 이 연구에서 이스라엘의 미래와 주님의 영광에 대한 바룩의 질문이 가장 적절하다(2 바룩 3:4-6). 바룩은 주님께서 적이 아닌 도시를 파괴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룩은 또한 전생적인 하늘 성전에 대해 배운다. "[성전]은 내가 낙원을 창조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그에게 보여주었다." (2 바룩 4:3). 이 성전은 아담보다 먼저 창조되었고, 아담의 타락 전에 그에게 보여졌다.
2 바룩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첫째, 저자는 지상에 재건된 성전에 대한 희망을 일축한다. 초점은 전적으로 에덴 동산보다 먼저 존재했던 하늘 성전에 맞춰져 있다. 이것은 하늘 성전의 우월성을 에덴 (지상 성전의 전통적인 위치) 전에 지어진 성소로 표현하는 장치일 수 있다. 둘째, 바룩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회복은 지상이 아닌 하늘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3 바룩의 종말론은 반란 이후 새 예루살렘 텍스트들 중에서 이례적인 존재이다. 2 바룩과 4 에즈라와 달리 이 텍스트는 복원된 성전이 없는 대안적인 전통을 보여준다. 다른 종말론과 마찬가지로 3 바룩은 여전히 성전을 애도하며 유대인들을 하늘로 다시 향하게 한다. 그러나 3 바룩은 궁극적으로 성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성전에 과도한 숭배를 허용한 작품에 대한 논쟁이 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한 천사가 바룩에게 와서 예루살렘에 대해 위로한다. "그들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보라, 내가 울며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와서 나에게 말했다. 오,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여, 깨달아라. 예루살렘의 구원에 대해 너무나 고통스러워하지 말라." (3 바룩 1:3)
3 바룩은 분명히 성전에 대해 애도한다. 그러나 3 바룩은 궁극적으로 성전의 부재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이 텍스트는 예레미야와 시빌린 신탁 4와 함께 유대 문학 내의 소수 전통을 표현한다. 최초의 기독교 종말론인 요한계시록은 예루살렘에 대한 이러한 관점과 일치한다. 이제 이 연구는 성전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관점과 계시록의 종말론적 응답으로 넘어갈 것이다.
쿠므란, 이스라엘 근처 사해 사본에서 발견된 사본 조각들은 새 예루살렘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이른바 새 예루살렘 두루마리는 종말론적 환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조각난 상태라 분류하기 어렵다. 아람어로 쓰여진 이 텍스트는 길고 긴 벽으로 둘러싸이고, 12개의 문이 있으며,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도시를 묘사하고 있다. 비슷한 묘사가 에제키엘서 40–48장과 요한 계시록 21–22장에 나타나며, 성전 두루마리(또한 쿠므란 근처에서 발견됨)와의 비교를 통해 두 문서 사이에 직접적인 문학적 연관성은 없지만 많은 유사점을 보여준다.
2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고대 기독교 분파인 몬타누스주의는 인근 프리게아의 페푸자와 티미온에 새 예루살렘이 강림할 것으로 예상했다. 후기 고대 시대에 두 곳 모두 로마 제국 전역에서 온 순례자들의 발길을 끌었다. 페푸자는 몬타누스주의 교회의 본부였다. 몬타누스주의 총대주교는 페푸자에 거주했다. 여성은 몬타누스주의에서 사제와 주교로 봉사하며 해방된 역할을 했다. 6세기에는 이 교회가 소멸되었다.
2001년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페터 람페는 터키의 프리게아에서 매년 고고학 발굴 조사를 지휘해 왔다.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윌리엄 태버니와 함께 진행된 이 학제간 조사에서 수많은 미지의 고대 정착지가 발견되어 고고학적으로 기록되었다. 그 중 두 곳은 고대 몬타누스주의의 두 성지인 페푸자와 티미온을 식별하는 데 가장 유력한 후보지이며, 새 예루살렘이 강림할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 학자들은 19세기부터 이 잃어버린 장소를 찾아왔다.
윌리엄 태버니와 페터 람페가 페푸자로 발견하고 확인한 고대 정착지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정착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중요한 석굴 수도원이 이 마을에 속해 있었다. 이 마을은 프리게아의 카라할르 지역에 있으며, 카라야쿠플루 (우샤크 주, 에게 해 지역, 터키) 마을 근처에 있다. 페터 람페가 확인한 티미온의 고대 유적지는 터키의 쉭란제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에게 페푸자와 티미온 사이의 높은 평원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착륙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랄리벨라는 1187년 살라딘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무슬림에게 점령되자 이에 대응하여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랄리벨라를 건설했다.
동방 정교회는 새 예루살렘이 요한 계시록(묵시록)에 묘사된 방식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도시라고 가르친다. 교회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상징이다.[23] 러시아의 새 예루살렘 수도원은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새 예루살렘은 17세기에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를 식민지화하는 데 중요한 주제였다. 청교도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이를 신세계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지상에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자들로 여겼다. 이 생각은 미국 민족주의의 근본이었다.[24]
4. 기타 종교 및 사상
스베덴보리안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저술에 나타난 새 예루살렘을 기독교를 대체하거나 회복할 새로운 시대의 상징으로 본다.[25]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은 1757년경에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예루살렘 자체가 교회의 상징이므로 성경 속 새 예루살렘은 새 교회에 대한 예언적 묘사이다.
말일성도 운동에서 새 예루살렘은 북아메리카에 세워질 물리적인 왕국이며,[25] 그 중심지는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이다.[26] 조셉 스미스는 1830년대 초에 시온 건설을 시도했고, 시온의 평면도를 작성하여 성전 계획도 포함시켰으나, 1838년에 미주리에서 추방되었다. 여러 말일성도 교단들은 이곳이 하나님의 천년 왕국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여호와의 증인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을 다스리는 왕이자 제사장으로 봉사하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수는 총 144,000명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로 묘사되고, 이 "신부"가 "어린 양의 아내"로 묘사된다는 것에 근거한다.[27]
18세기 말, 퀘이커 복음주의로 알려진 공공의 보편적 친구를 중심으로 모인 종교 공동체는 1790년, 뉴욕주 핑거 레이크스 지역에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는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 공동체는 현재 뉴욕주 예루살렘 타운에 위치하며, 지도자의 죽음 이후 쇠퇴했다.
영국 이스라엘주의의 창시자 리처드 브라더스는 영국인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의 후손이며, 영국의 수도는 다가올 계몽주의 시대를 위한 새 예루살렘으로 재건축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발전시켰다. 이 아이디어는 제1차 세계 대전 중과 직후에 그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으며, 세인트 폴 대성당과 같은 건물들은 디자인에 이 계획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베드워디즘은 1889년부터 1921년까지 활동한 자메이카의 종교 운동으로, 킹스턴의 교외인 어거스트 타운이 서반구의 새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했다. 이 운동은 1921년 지도자 베드워드가 체포되면서 붕괴되었다.
킴방구주의는 1921년 시몬 킴방구에 의해 창시된 콩고의 분파 교회로, 킴방구의 출생지인 콩고 앙감바(Mbanza-Ngungu 근처의 마을)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부른다. 킴방구주의자들은 1935년 앙감바 마을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건물)을 보았다고 믿으며, 요한 계시록 21장을 언급하며 이 건물의 동일한 설계를 건설하여 앙감바 새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다.
1853년, 태평천국은 청나라에 대항한 태평천국 운동 기간에 난징을 점령하고, 도시 이름을 "새 예루살렘"으로 개명했다.[28]
바하이 신앙은 새 예루살렘을 약 천 년마다 일어나는 종교의 갱신으로 보며, 이는 인간 세계의 번영을 보장한다.[29][30] 바하올라는 새 예루살렘을 자신의 주장된 계시(신의 말씀)와 동일시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신의 율법과 동일시했다.[31][32] 압두'l-바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실제로 갱신되는 도시가 아니라, 신의 율법이라고 설명했다.[33] 쇼기 에펜디는 바하올라의 율법서인 키타브-이-아크다스가 새 예루살렘이라고 명시했다.[34][35] 바하올라는 카르멜 서판에서 새 예루살렘이 새로운 시온산인 카르멜 산에 나타났다고 언급했다.[31]
5. 한국 개신교와 새 예루살렘
6. 찬송가
"곧 저쪽의"는 요한의 묵시록에서 예언된 신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에서의 재회를 기대하는 찬미가이며, 장례식에서 불리기도 한다. 루터교 찬송가인 "예루살렘, 높은 도시여(Jerusalem, du hochgebaute Stadt)"는 1626년 요한 마테우스 마이파르트가 작사했으며,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곡은 막스 레거와 지그프리트 카르크-엘레르트와 같은 작곡가들에 의해 곡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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