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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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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약도는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이후 칼뱅주의를 따르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맺어진 일련의 언약에 서명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종교 정책에 반발하여 국가 언약을 맺고 주교 전쟁, 삼국 전쟁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정복고 이후 박해를 받았으나 명예혁명으로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 군주로 즉위하면서 1690년 정치적 합의를 통해 교회의 지위를 회복했다. 언약도들의 희생과 신념은 기념물과 문학 작품을 통해 기억되었으며,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종교적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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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도
개요
스코틀랜드 국민 언약
1638년 스코틀랜드 국민 언약
언약도Cùmhnantaich
지지스코틀랜드 교회 (Church of Scotland)
언약
종교적 입장칼뱅주의
장로교
역사적 시기17세기
역사
발단1638년 스코틀랜드 국민 언약 (National Covenant)
찰스 1세의 종교 정책에 대한 반발
주요 사건주교 전쟁 (Bishops' Wars)
잉글랜드 내전 (English Civil War)
세 왕국 전쟁 (Wars of the Three Kingdoms)
킬리크랭키 전투 (Battle of Killiecrankie)
덩디의 존 그레이엄 (John Graham of Claverhouse)
결과장로교의 부흥과 쇠퇴
명예 혁명 이후 장로교의 지위 회복
신념 및 특징
주요 신념성경의 권위
언약 신학
예배의 순수성
교회의 독립성
특징언약 준수 강조
저항권 행사
순교 정신
영향
스코틀랜드 교회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전통 형성에 기여
정치 사상제한된 정부, 저항권 사상 발전에 영향
현대현대 장로교 윤리에 영향
언약 신학 연구에 기여
관련 인물
주요 인물알렉산더 헨더슨 (Alexander Henderson)
아치볼드 존스턴 (Archibald Johnston)
제임스 거스리 (James Guthrie)
리빙스턴 (John Livingston)
추가 정보
참고 자료스코틀랜드 언약도에 대한 추가 정보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확인할 수 있음.
장로교 역사 강의 노트 (작은샘 블로그)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있음.

2. 배경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은 칼뱅주의 교리를 따르는 장로회 구조의 스코틀랜드 교회(Kirk)를 탄생시켰다. 1557년 스코틀랜드의 국교가 되었고,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가톨릭의 가르침과 관습을 거부하는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을 채택했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이 신앙 고백을 채택하고 1590년과 1596년에 재확인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국왕으로서 자신이 임명한 주교를 통해 교회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앤드루 멜빌은 "스코틀랜드에는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왕국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왕과 그의 왕국인 교회, 그 신하인 제임스 6세"라며 Kirk는 오직 하나님께만 종속되며,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장로회가 통치한다고 반박했다.[1]

제임스 1세는 1603년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통합된 잉글랜드 교회와 스코틀랜드 교회를 중앙 집권적 국가의 첫 단계로 보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주교들조차 많은 잉글랜드 교회 관습을 가톨릭과 비슷하게 여겨 거부했다.

1630년까지 가톨릭은 귀족과 고지대 및 섬의 외딴 지역에 국한되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여전히 종교적 반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30년 전쟁에 참전했고, 프로테스탄트 네덜란드 공화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프로테스탄트 유럽이 공격받고 있다는 인식과 결합되어 종교 관습에 대한 민감성을 높였다. 1636년, 찰스 1세는 ''훈육서''를 새로운 ''규범서''로 대체하고, 국왕의 지배권을 부인하는 사람을 파문했다. 1637년 개정된 ''공동 기도문''이 도입되자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분노와 폭동이 일어났다.

2. 1.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으로 칼뱅주의를 따르는 장로회 스코틀랜드 교회(Kirk)가 성립되었다.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을 채택하여 가톨릭의 가르침과 관습을 거부하였다.[1] 이 신앙 고백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에 의해 1590년과 1596년에 재확인되었다.

개혁된 스코틀랜드 교회를 설립한 존 녹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국왕으로서 자신이 임명한 주교를 통해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앤드루 멜빌은 "스코틀랜드에는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왕국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왕과 그의 왕국인 교회, 그 신하인 제임스 6세"라며 Kirk는 오직 하나님께만 종속되며,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장로회가 통치한다고 반박했다.[1] 제임스 1세는 1603년 잉글랜드 왕이 된 후, 통합된 잉글랜드 교회와 스코틀랜드 교회를 중앙 집권적 국가의 첫 단계로 보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주교들조차 많은 잉글랜드 교회 관습을 가톨릭과 비슷하게 여겨 거부했다.

1630년까지 가톨릭은 귀족과 고지대 및 섬의 외딴 지역에 국한되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여전히 종교적 반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30년 전쟁에 참전했고, 프로테스탄트 네덜란드 공화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Kirk 목사들은 프랑스 칼뱅주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1637년 공동 기도문에 대한 폭동;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미리 계획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1636년, 찰스 1세는 ''훈육서''를 새로운 ''규범서''로 대체하고, 국왕의 지배권을 부인하는 사람을 파문했다. 1637년 개정된 ''공동 기도문''이 도입되자,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에서 제니 게데스가 목사에게 의자를 던진 사건을 포함하여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분노와 폭동이 일어났다.

1661년 제임스 거스리 목사 처형


1651년 패배 이후 언약도들은 제임스 거스리를 포함하여, 왕당파와 잉게이저들을 재수용한 "결의파"와 교회당(Kirk Party) 근본주의자들인 "항의파"로 나뉘었다. 1652년, 새로운 스코틀랜드 평의회가 교회 업무를 규제하고, 모든 개신교 종파에 예배 자유를 허용하면서 장로교는 더 이상 국교가 아니었다.

언약도들은 회중교도와 퀘이커교도 같은 분리주의 종파에 적대적이었고, 대다수는 이러한 변화를 거부했다. 1653년, 각 파벌은 에든버러에서 자체 총회를 개최했지만, 로버트 릴번이 두 회의를 모두 해산했다. 총회는 1690년까지 재개되지 않았고, 결의파는 비공식 "협의회"에서, 항의파는 야외 컨벤티클을 열었다.

1654년 호국경정치 수립 후, 오러리 백작은 "결의파는 찰스 스튜어트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반면, 항의파는 그와 우리 둘 다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요약했다. 글래스고를 제외하고 양측 모두 호국경정치에 협력하려 하지 않았으며, 패트릭 길레스피가 이끄는 항의파가 당국을 이용했다.

2. 2.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종교 정책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는 통합된 잉글랜드 교회와 스코틀랜드 교회를 통해 중앙 집권적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1] 제임스 1세와 그의 아들 찰스 1세주교제를 통해 스코틀랜드 교회에 대한 왕권 강화를 시도했는데, 이는 장로회 전통과 충돌했다. 제임스는 국왕으로서 자신이 스스로 임명한 주교들을 통해 통치하는 교회의 수장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1]

1636년, 찰스 1세는 기존의 스코틀랜드 ''훈육서''를 ''규범서''로 대체하고, 교회 문제에서 국왕의 지배권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을 파문했다. 1637년에 개정된 ''공동 기도문''이 도입되자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분노와 광범위한 폭동이 일어났다.

3. 전개

언약도 정치 지도자인 아가일 후작


알렉산더 레슬리, 3국 전쟁 중 언약도 군대의 최고 사령관


알렉산더 카스(Alexander Carse)의 ''글렌의 언약도''; 불법 야외 집회 또는 비밀 예배


언약도 운동은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종교적, 정치적 격변을 일으킨 중요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칼뱅주의자들은 "잘 정돈된" 군주제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고 믿었기에, 언약도들은 왕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찰스 1세의 종교 정책에 반발하여 "우리의 재산, 몸, 생명으로 왕의 인격과 권위를 방어"할 것을 맹세하며 저항했다. 이러한 견해는 잉글랜드 의회파와도 공유되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종교적 교리에 대한 합의가 있었기에 성직 임명 권한을 누가 갖느냐가 주된 갈등 요소였다.

1642년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스코틀랜드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지만, 1641년 아일랜드 반란 진압을 위해 얼스터에 군대를 파견했다. 1643년 엄숙 동맹과 언약을 통해 잉글랜드와의 종교적 연합을 추구했지만, 올리버 크롬웰 등 독립파는 이에 반대했다.

1646년 찰스 1세가 항복한 후, 언약도들은 잉글랜드 장로교 동맹과 함께 찰스 1세를 복위시키려 했다. 1647년 찰스 1세는 잉글랜드에 장로교를 강요하고 독립파를 진압하는 데 동의했지만, 언약 수용은 거부하여 언약도들은 인게이저와 휘가모어로 분열되었다.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자,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를 왕으로 선포하고 브레다 조약을 통해 언약을 수용하게 했다. 그러나 던바 전투와 우스터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1652년 잉글랜드 연방,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 편입되었다.

1660년 왕정복고 이후 언약도들은 더욱 가혹한 핍박을 받았다. 1679년 샤프 대주교 암살 사건은 보스웰 다리 전투로 이어지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언약도 운동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되었다. 1680년 생쿼 선언을 발표한 도널드 카길과 리처드 캐머런은 찰스 2세와 제임스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다.

1681년 스코틀랜드 계승법과 시험법은 군주에 대한 복종을 의무화했지만, 언약도들은 배제되었다. 제임스 달림플 등 정부 고위 인사들도 이에 반대했다. 1684년 제임스 렌윅은 ''사죄 선언''을 통해 정부 관리들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살육 시대"가 시작되었다. 1685년 제임스 7세 즉위 후 아가일 봉기가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3. 1. 국가 언약 (1638)

아치볼드 존스턴과 알렉산더 헨더슨의 지휘 아래,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사회 각계각층의 대표자들이 국가 언약에 서명하여 전례상의 "혁신"에 저항할 것을 맹세하였다.[1] 언약도들은 찰스가 변경하려 했던 신성하게 제정된 종교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1690년에 최종적으로 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1] 1638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는 주교들을 교회에서 추방하였다.[2]

3. 2. 주교 전쟁 (1639-1640)

아치볼드 존스턴과 알렉산더 헨더슨의 지휘 아래,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사회 모든 계층의 대표자들이 국가 언약에 동의하여 전례상의 "혁신"에 대한 저항을 맹세했다. 언약도들은 찰스 1세가 변경하려 했던 신성하게 제정된 종교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1690년에 최종적으로 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1] 국가 언약은 주교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1638년 12월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가 글래스고에서 열렸을 때 주교들은 교회에서 추방되었다.[2]

언약에 대한 지지는 이후 60년간 성공회 저항의 중심지였던 애버딘셔와 밴프를 제외하고는 널리 퍼져 있었다.[3] 아가일 후작과 스코틀랜드 추밀원의 다른 6명의 구성원이 언약을 지지했으며,[4] 찰스 1세는 1639년과 1640년 주교 전쟁에서 자신의 권위를 강요하려 했으나, 패배하면서 언약도들이 스코틀랜드를 장악하게 되었다.[5]

3. 3. 삼국 전쟁 (1642-1651)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스코틀랜드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지만, 1641년 아일랜드 반란에서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얼스터에 군대를 파견했다. 1643년 10월, 엄숙 동맹과 언약이 체결되어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의회파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잉글랜드는 장로교 연합에 동의했다.[1]

언약도와 잉글랜드 장로교 동맹은 신 모범군의 독립파를 왕당파보다 더 큰 위협으로 간주했다. 1647년, 찰스 1세는 잉글랜드에 3년간 장로교를 강요하고 독립파를 진압하는 데 동의했지만, 언약 수용은 거부하여 언약도는 인게이저와 휘가모어로 분열되었다.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패배하고,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자, 교회당(Kirk Party)이 총회를 장악했다.[2]

1649년,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를 "대영제국의 왕"으로 선포하고, 브레다 조약을 통해 찰스 2세는 언약을 수용했다.[3] 그러나 던바 전투와 우스터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스코틀랜드는 1652년 잉글랜드 연방,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 편입되었다.[4]

3. 4. 공화정 시대 (1652-1660)

1652년 잉글랜드 연방에 편입된 후, 언약도는 결의파와 항의파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교회 운영, 종교적 관용, 법의 역할 등에서 의견이 서로 달랐다. 회중교도와 퀘이커교도 등 분리주의 종파에 대한 적대감도 있었다. 1653년 각 파벌은 에든버러에서 자체 총회를 개최했지만, 로버트 릴번은 두 회의 모두 해산시켰다. 호국경정치 시기, 양측은 글래스고를 제외하고 호국경정치에 협력하지 않았다.

3. 5. 왕정복고와 박해 (1660-1688)

1660년 왕정복고 이후 스코틀랜드 교회는 1661년 복귀법에 따라 1633년의 법적 지위를 회복했고, 언약도 개혁은 철회되었다. 1661년 스코틀랜드 추밀원은 주교제를 복귀시켰고, 제임스 샤프는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가 되었다. 1662년 교회는 국교로 복원되었고, 독립 종파는 금지되었으며, 모든 공직자는 1638년 언약을 포기해야 했다. 약 270명의 성직자가 이를 거부하여 직위를 잃었고, 컨벤티클(Covenanters) 개최는 계속되어 수천 명의 신자가 참여했다.[1]

1679년 언약도 급진파는 샤프 대주교를 암살했고, 이는 보스웰 다리 전투로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언약도 운동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되었다. 도널드 카길과 리처드 캐머런은 생쿼 선언을 발표하여 찰스 2세와 제임스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다.[1]

1681년 스코틀랜드 계승법과 시험법은 군주에 대한 복종을 법적 의무로 규정했지만, 언약도들은 배제되었다. 제임스 달림플과 아치볼드 캠벨을 포함한 정부 고위 인사들은 법률의 불일치에 반대하여 선서를 거부했다. 1685년 제임스 7세가 즉위했고, 아가일 봉기가 발생했지만 실패했다.[1]

3. 6. 명예혁명과 1690년 합의

1688년 명예혁명으로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 군주로 즉위하였다. 1689년 스코틀랜드 회의는 권리 청원과 "불만 사항"을 통과시키고, 제임스의 왕위 상실을 선언하였다. 1690년 총회는 주교 제도를 폐지하고, 성공회 성직자 다수를 제거하였다.[3]

4. 언약도의 유산

언약도는 "살육 시대"를 거치며 그들의 무덤과 기념비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교회 외부에 남아 있던 소수의 연합 사회 회원들에 의해 이러한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1701년부터 이들은 사망자의 무덤을 찾고 표시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정부는 순례지 조성을 막기 위해 많은 무덤을 외딴곳에 만들었다.[2]

1816년 월터 스콧 경의 소설 ''올드 모탈리티''에는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언약도 무덤의 비문을 갱신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1966년에는 스코틀랜드 언약도 기념 협회가 설립되어 스코틀랜드 전역의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 1707년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에 세워진 기념비는 1661년부터 1680년까지 살해된 18,000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가장 유명한 기념비 중 하나이다.[2]

17세기 동안 언약도 교회는 주로 아일랜드 얼스터 지방에 설립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 1717년 윌리엄 테넌트는 가족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여 북아메리카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인 로그 칼리지를 설립했다.[1] 1743년에는 북아메리카의 많은 전직 언약도들이 북아메리카 개혁 장로교회에 합류했다.[2]

4. 1. 기념물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 순교자 기념비


"살육 시대"의 언약도 무덤과 기념비는 정치적 메시지를 영속시키는 데 중요해졌으며, 처음에는 교회 외부에 남아 있던 소수의 연합 사회 회원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1701년, 그들의 회의는 사망자의 무덤을 찾거나 표시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의도적으로 순례지를 만드는 것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많은 무덤들이 외딴곳에서 발견되었다.[2]

1816년 월터 스콧 경의 소설 ''올드 모탈리티''에는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언약도 무덤에 비문을 갱신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1966년, 스코틀랜드 언약도 기념 협회가 설립되어 스코틀랜드 전역의 이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1707년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에 세워진 것으로, 1661년부터 1680년까지 살해된 18,000명의 순교자를 기념한다.[2]

4. 2. 북아메리카의 언약도

17세기 동안 언약도 교회는 주로 아일랜드 얼스터 지방에 설립되었으며,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이후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 1717년 윌리엄 테넌트는 가족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나중에 북아메리카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인 로그 칼리지를 설립했다.[1]

1743년 북아메리카에서 많은 전직 언약도들이 북아메리카 개혁 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에 합류했다.[2]

참조

[1] 웹사이트 Our Structure https://www.churchof[...] Church of Scotland 2010-02-22
[2] 문서 Wodrow
[3] 저널 Covenanters https://en.wikipedia[...] 2020-02-25
[4] 웹인용 National Covenant ,Scottish history https://www.britanni[...] 2020-07-18
[5] 웹인용 "[스크랩] 장로교회사 강의노트(종합본)" http://blog.daum.net[...] 20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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