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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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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슈 성은 프랑스에 위치한 역사적인 성으로, 12세기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간의 분쟁 속에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샤를 7세, 아녜스 소렐, 잔 다르크 등 역사적 인물들과 관련된 일화가 있으며, 루이 11세 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미국 독립 전쟁 시기에는 영국인 포로 수용소로,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약탈과 파괴를 겪었다. 1861년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로슈 코뮌이 소유하고 있다. 성관은 고딕 양식, 요새는 로마네스크 양식, 상트르스 참사회 교회는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혼합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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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슈성
지도 정보
일반 정보
성의 항공 뷰
위치로슈, 앙드르에루아르 현, 프랑스
좌표47°07′29″N 0°59′48″E
종류
재료
상태폐허
소유주로슈 코뮌
공개 여부
크기
면적500m

2. 역사

로슈 성은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8세기 샤를 마르텔의 아들이 이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중세 시대에는 베리, 투렌, 푸아투 등 여러 영지의 경계에 위치하여 잉글랜드프랑스 사이의 소유권 분쟁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204년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 의해 함락된 후 프랑스 왕가의 영지가 되었다.[1]

샤를 7세 통치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잔 다르크가 이곳을 방문하여 샤를 7세의 즉위를 독려했으며, 왕의 총애를 받던 아녜스 소렐이 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샤를 7세의 아들 루이 11세는 이곳을 감옥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앙리에트-줄리 드 뮈레가 유폐되거나[2]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영국군 포로 수용소로 활용되는 등 감옥으로서의 기능이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약탈과 파괴를 겪었으며, 19세기 이후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일부는 여전히 폐허 상태로 남아있다. 현재는 로슈 코뮌 소유로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으며, 1861년 프랑스 문화부에 의해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3] 성의 자세한 역사적 사건들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 1. 초기 역사

로슈 성의 평면도


위에서 본 로슈의 마을과 성


로슈 성의 역사는 8세기에 샤를 마르텔의 아들이 이 땅에서 싸운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지리적으로 베리, 투렌, Poitou|푸아투프랑스어 등 여러 영지의 경계에 위치하여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후 루이 9세 (성 루이)가 이 성을 프랑스 왕가의 영지로 삼았다.

12세기 동안 로슈 성은 잉글랜드헨리 2세와 그의 아들 사자왕 리처드에게 점령되었다. 프랑스필리프 2세는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로슈 성은 그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견뎌냈으나 1204년에 결국 함락되었다.[1] 필리프 2세는 즉시 성을 거대한 군사 요새로 강화하는 건설 작업을 시작했다.

이 성은 프랑스의 샤를 7세가 가장 선호하는 거주지 중 하나였다. 1429년, 백년 전쟁 중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잔 다르크는 당시 왕세자였던 샤를이 머물고 있던 이 성을 방문했다. 그녀는 왕위 계승을 망설이던 샤를에게 랭스에서의 대관식을 통해 정식으로 즉위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고, 이는 샤를이 프랑스 왕 샤를 7세로 즉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성 안에는 잔 다르크와 샤를 7세가 만났던 알현실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즉위 후 점차 잔 다르크를 멀리했으며, 그녀가 루앙에서 잉글랜드 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구출 노력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였다.

샤를 7세는 자신이 총애하던 정부 아녜스 소렐에게 로슈 성을 개인 거처로 주었다. 아녜스 소렐은 공식적으로 왕의 '총애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여성이었으며, 왕의 후원을 바탕으로 큰 권세를 누렸으나 주변의 반감을 사 결국 독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샤를 7세의 아들인 루이 11세는 어린 시절을 로슈 성에서 보냈지만, 앙부아즈 성을 더 선호하여 로슈 성을 감옥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로슈의 거리는 한때 투르, 시농과 함께 중요한 지역으로 번성했으나, 르네상스 시대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2. 2. 잉글랜드와의 분쟁 및 프랑스 왕가



로슈 성은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8세기 샤를 마르텔의 아들이 이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베리, 투렌, 푸아투(fr) 등 여러 영지의 경계에 위치하여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2세기 동안에는 잉글랜드헨리 2세와 그의 아들 사자왕 리처드가 점령하였다. 이후 프랑스필리프 2세는 프랑스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전쟁에서 이 성을 공격하여 1204년에 함락시켰다.[1] 필리프 2세는 즉시 로슈를 거대한 군사 요새로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이후 루이 9세 (성 루이)가 이곳을 프랑스 왕가의 영지로 확립했다.

로슈 성은 프랑스샤를 7세가 가장 선호하는 거주지 중 하나였다. 1429년, 오를레앙 해방에 기여한 잔 다르크는 당시 왕세자 신분이던 샤를이 머물던 이 성을 방문하여, 왕위 계승을 주저하던 그에게 랭스에서의 대관식을 결심하도록 설득했다. 성 내부에는 이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방이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샤를 7세로 즉위한 후, 그는 점차 잔 다르크를 멀리했고 그녀가 루앙에서 잉글랜드 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외면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후 샤를 7세는 애첩 아녜스 소렐에게 로슈 성을 사저로 하사했다. 아녜스 소렐은 공식적으로 왕의 총애를 받는 여성으로 인정받은 첫 사례였으며, 왕의 후원을 바탕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주변의 시기와 반감 속에 독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샤를 7세의 아들인 루이 11세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으나, 성장 후에는 앙부아즈 성을 더 선호하여 로슈 성을 국가 감옥으로 개조해 사용했다. 한때 로슈는 투르, 시농과 함께 번성했으나, 르네상스 시대 이후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17세기 말, 앙리에트-줄리 드 뮈레는 동성애를 포함한 "충격적인 행위와 신념"에 대한 소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고, 결국 1702년 로슈 성에 유폐되었다.[2] 그녀는 1706년 남장을 하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2], 여러 감옥을 전전하다 1707년 다시 로슈 성으로 이송되었다.[2] 1709년에 이르러서야 부분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2]

미국 독립 전쟁 시기, 프랑스가 미국과 동맹을 맺고 대영 제국에 맞서 싸울 때, 루이 16세는 로슈 성을 영국군 포로 수용소로 활용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성은 심하게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1806년부터 일부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폐허 상태인 부분이 남아있다. 현재 로슈 성은 로슈 코뮌이 소유하고 있으며, 인접한 생토르 교회와 함께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다. 1861년부터 프랑스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어 프랑스 문화부의 관리를 받고 있다.[3]

2. 3. 잔 다르크와 샤를 7세

프랑스의 샤를 7세에게 로슈 성은 가장 선호하는 거주지 중 하나였다.[1] 그는 이곳을 자신의 정부(애첩)였던 아녜스 소렐에게 거처로 주었는데, 아녜스 소렐은 공식적으로 왕의 총애를 받는 여성으로 인정받은 첫 사례였다.

로슈 성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1429년에 일어났다. 백년 전쟁 중 오를레앙 포위전에서 승리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잔 다르크는 당시 왕세자 신분으로 로슈 성에 머물고 있던 샤를을 찾아왔다. 잔 다르크는 왕위 계승을 망설이던 샤를에게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용기를 주었다. 이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알현실은 현재까지도 성 내부에 보존되어 있다.

잔 다르크의 격려에 힘입어 샤를은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정식으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후, 샤를 7세는 점차 잔 다르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잔 다르크가 루앙에서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샤를 7세는 그녀를 구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사실상 방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2. 4. 아녜스 소렐과 샤를 7세



프랑스의 샤를 7세는 로슈 성을 가장 선호하는 거주지로 삼았으며, 그의 정부이자 애첩이었던 아녜스 소렐에게 성을 사저로 주었다. 아녜스 소렐은 프랑스 왕실 역사상 공식적으로 '총애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왕의 후원을 바탕으로 상당한 권세를 누렸으나, 이로 인해 주변의 많은 반감을 샀고 결국 독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2. 5. 루이 11세와 감옥

프랑스샤를 7세의 아들인 루이 11세는 어린 시절 로슈 성에서 살았지만, 앙부아즈 성을 더 선호하였다. 그는 로슈 성을 감옥으로 용도를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2. 6. 앙리에트-줄리 드 뮈레의 추방

1699년 12월, 앙리에트-줄리 드 뮈레는 동성애를 포함한 "충격적인 행위와 신념"에 대한 보고서가 퍼지면서 스캔들에 휘말렸다.[2] 이 일로 그녀는 남편과 별거하고 어머니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했으며, 출판 활동도 중단해야 했다. 결국 1702년 로슈 성으로 추방되었다. 1701년에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방탕하다는 비난이 더욱 거세졌다고 여겨진다.[2] 그녀는 1706년 남장을 하고 로슈 성에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2] 탈출 시도 후 다른 두 곳의 감옥을 거쳐 1707년 다시 로슈 성으로 이송되었다.[2] 1709년, 그녀는 아르장통 백작 부인의 도움으로 이모의 집으로 돌아가는 조건 하에 부분적인 자유를 얻었다.[2]

2. 7.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 전쟁 시기, 프랑스미국을 지원하며 대영 제국과 맞섰다. 당시 프랑스루이 16세는 로슈 성을 영국군 포로를 수용하는 감옥으로 활용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성은 약탈당하고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1806년부터 일부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현재까지도 일부는 폐허 상태로 남아 있다. 성은 로슈 코뮌이 소유하고 있으며, 인접한 고대 생토르 교회와 함께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로슈 성은 1861년 프랑스 문화부에 의해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3]

2. 8. 현대

프랑스 혁명 당시, 성은 약탈당하고 심하게 파괴되었다. 1806년에 일부 주요 복원이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에는 폐허로만 보이는 부분이 있다. 로슈 코뮌이 소유하고 있으며, 성과 인접한 고대 생토르 교회는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다.

로슈 성은 1861년부터 ''역사 기념물''로 인정받았으며 프랑스 문화부에 의해 등재되었다.[3]

3. 건축 양식

로슈 성은 다양한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건축물로는 11세기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요새(돈존), 백년 전쟁 무렵에 전투용 건축에 화려한 고딕 양식 장식이 더해진 성관, 그리고 11세기와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합된 상트르스 참사회 교회가 있다. 각 건축물의 세부적인 특징과 역사는 하위 문단에서 자세히 다룬다.

3. 1. 성관

성관백년 전쟁 무렵에 축조되었으며, 전투용 건축에 화염식(플람보아양) 고딕 양식의 장식이 더해졌다.

3. 2. 요새 (돈존)

11세기에 앙주 백작 풀크 3세가 건설한 로슈 성의 요새(돈존)는 전투를 위한 중후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4] 크기는 가로 23.3m, 세로 15.4m이며, 벽의 두께는 2.8m에 달한다. 4층 건물로 전체 높이는 37m이며,[4] 각 층은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요새처럼 1층은 주로 창고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6]

3. 3. 상트르스 참사회 교회

상트르스 참사회 교회는 완공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나타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두 시대의 건축 양식이 융합된 독특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정면 입구에 있는 채색된 화려한 장식 아치가 주목할 만하다.

참조

[1] 서적 2002
[2] 서적 A Trip to the Country: by Henriette-Julie de Castelnau, Comtesse de Murat https://books.google[...]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2011-09-15
[3] 간행물 Château de Loches
[4] 서적 2002
[5] 서적 2005
[6] 서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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