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페스티벌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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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열 페스티벌 홀은 1951년 5월 3일 개관한 런던의 콘서트 홀이다. 런던 카운티 의회 수석 건축가 로버트 매튜가 주도하여 레슬리 마틴, 로빈 데이 등이 참여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1급 지정 건축물로 지정되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주요 공연 장소이며, 2,900석 규모의 콘서트 홀과 7,866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을 갖추고 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음향과 건물 레이아웃 개선을 위한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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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페스티벌 홀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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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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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유형 | 콘서트 홀 |
건축 양식 | 모더니스트 |
위치 | 벨베데레 로드, 런던, SE1, 잉글랜드 |
세부 정보 | |
기공 | 1948년 (18개월 만에 완공) |
개관 | 1951년 5월 3일 |
리모델링 | 2005년–2007년 |
비용 | 2백만 파운드 (1951년) |
리모델링 비용 | 1억 1100만 파운드 (2007년) |
소유 및 관리 | |
의뢰인 | 런던 카운티 의회 |
소유주 | 런던 카운티 의회 (1951–1965) 대 런던 의회 (1965–1986) 영국 예술 위원회 (1986–1988) 사우스뱅크 센터 유한회사 (1988–현재) |
주요 계약자 | 홀랜드, 하넨 & 쿠비츠 |
디자인 | |
건축가 | 로버트 매튜 및 레슬리 마틴 |
가구 디자이너 | 로빈 데이 (현존하는 강당 좌석 포함) |
크기 | |
기타 정보 | |
웹사이트 | southbankcentre.co.uk |
2. 역사
로열 페스티벌 홀은 1951년 5월 3일 런던 사우스뱅크에 개관한 대표적인 공연장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새로운 문화 공간을 조성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양조장이 있던 자리에 건립되었다. 1988년 4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1급 지정 건축물로 지정되었다.
2. 1. 건립 배경

로열 페스티벌 홀 건립 프로젝트는 당시 런던 카운티 의회의 수석 건축가였던 로버트 매튜가 이끌었으며, 그는 레슬리 마틴을 포함한 젊고 재능있는 디자이너 팀을 구성했다. 레슬리 마틴은 에드윈 윌리엄스[6], 피터 모로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으며, 가구 디자이너 로빈 데이와 그의 아내이자 텍스타일 디자이너인 루시엔 데이도 참여했다. 음향 컨설턴트는 호프 배그널이었고, 건축 연구소의 헨리 험프리스, 피터 파킨, 윌리엄 앨런과 함께 작업했다.[7] 당시 마틴은 39세였으며 알바 알토와 군나르 아스플룬드의 북유럽 활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8]
이 프로젝트를 실제로 추진한 인물은 노동당 정치인 허버트 모리슨이었다. 그는 매튜가 마틴을 부건축가로 임명하여 페스티벌 홀을 특별 프로젝트로 다루도록 했다.[9]
2. 2. 초기 설계 및 건축 (1949-1951)
로열 페스티벌 홀 프로젝트는 런던 카운티 의회의 수석 건축가 로버트 매튜가 이끌었으며, 레슬리 마틴을 포함한 젊고 재능있는 디자이너 팀을 구성했다. 레슬리 마틴은 에드윈 윌리엄스[6], 피터 모로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고, 가구 디자이너 로빈 데이와 그의 아내이자 텍스타일 디자이너인 루시엔 데이가 참여했다. 호프 배그널이 음향 컨설턴트를 맡았고, 건축 연구소의 헨리 험프리스, 피터 파킨, 윌리엄 앨런과 함께 작업했다.[7] 마틴은 당시 39세로 알바 알토와 군나르 아스플룬드의 북유럽 건축에 큰 영향을 받았다.[8]
프로젝트를 추진한 핵심 인물은 노동당 정치인 허버트 모리슨이었다. 그는 매튜에게 마틴을 부건축가로 임명하여 페스티벌 홀을 특별 프로젝트로 다루도록 했다.[9]
1948년 마틴의 스케치는 콘서트 홀 디자인을 '상자 속의 달걀'로 묘사했다. 이 디자인의 강점은 내부 공간 배치에 있었는데, 중앙 계단은 웅장함을 주며 빛과 공기가 다양한 층으로 우아하게 이동하도록 했다.[8]
프로젝트 팀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지향하면서도, 이전의 많은 공공 건물에서 보이는 개선된 고전주의를 모방하지 않으려 했다. 바와 레스토랑이 있는 넓은 로비는 모두를 위한 만남의 장소로 계획되었고, 계층별 별도 바는 없었다. 이러한 공공 공간은 강당 주변에 배치되어 인접한 철도 교량 소음으로부터 홀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10]
레슬리 마틴은 "현수 강당은 건물에 주요 속성을 부여한다. 건물 내부의 열린 광활함, 대칭적인 계단 배치, '상자 속의 달걀'로 불리는 갤러리의 흐르는 듯한 순환이 그것이다."라고 설명했다.[11]
건축에는 현대 건축에서 선호하는 철근 콘크리트와 함께 아름다운 목재, 더비셔 화석 석회암 같은 고급 재료가 사용되었다.[10] 건물 외관은 밝은 흰색으로, 주변의 검게 그을린 도시와 대비를 이루도록 했다. 건물 정면의 넓은 유리창은 빛이 내부로 자유롭게 들어오게 했고, 밤에는 내부 빛이 강 밖으로 쏟아져 런던의 어둠과 대조를 이루었다.[12]
홀은 원래 2,901석 규모였다. 캔틸레버 박스는 급하게 꺼낸 서랍 같다는 묘사도 있지만, 시야를 가리는 부분은 없었다. 천장은 의도적으로 조각적인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당시 건축 기술의 한계에 도전하는 독창적인 발상이었고, 결과적으로 당시 음향 이해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8] 로빈 데이는 강당 가구를 디자인하면서 굽은 합판과 강철을 사용해 명확한 구조를 표현했다.[10]
원래 건물에는 무성한 옥상 테라스가 있었다. 2층 로비 카페는 강을 향한 테라스로 이어졌고, 원래 입구는 건물 측면에 있어 방문객이 강당으로 가는 계단을 바로 이용할 수 있었다.
1949년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1837년 건설된 옛 라이온 양조장 부지에 초석을 놓았다.[13] 건물은 홀란드, 해넌 & 커비츠에 의해 200만파운드의 비용으로 건설되었고, 1951년 5월 3일 조지 6세 국왕과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한 갈라 콘서트에서 공식 개관했으며, 말콤 사젠트 경과 애드리안 볼트 경이 지휘를 맡았다.[15] 초대 총지배인은 이전에 할레 오케스트라를 관리했던 T. E. 빈이었다.
버나드 레빈 기자는 건물 첫인상에 대해 "내부의 독창성과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숨 막힐 듯한 기쁨을 느꼈다. 마치 내가 즉시 미래로 이동해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10]

2. 3. 오르간 설치 (1950-1954)
1950년부터 1954년까지 7,866개의 파이프 오르간이 잉글랜드 더럼(더럼)의 해리슨 앤 해리슨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오르간은 런던 카운티 의회의 컨설턴트이자 음향 마무리를 감독한 랄프 다우네스의 설계에 따라 제작되었으며,[16] 풍부하고 다양한 앙상블을 포함하는 균형 잡힌 클래식 악기로 설계되었다. 또한 단독으로 또는 조합하여 모든 오케스트라 또는 합창 그룹의 다이내믹 스케일에 필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솔로 레퍼토리를 소화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16]이 오르간의 설계 원칙은 영국 오르간 개혁 운동을 낳았고, 이는 코벤트리 대성당, 블랙번 대성당, 크로이던의 페어필드 홀스, 맨체스터의 브리지워터 홀 콘서트 홀 오르간에 영향을 미쳤다.[17] 다른 국가의 수많은 오르간도 이 오르간의 영향을 받았다.[17]
그러나 하우징 내 오르간 설계로 인해 유지 관리가 어려워졌고, 2000년에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2005년 홀 자체의 복원을 시작하기 전에 완전히 제거되었고, 해리슨 앤 해리슨에 의해 복원 및 업데이트된 후 오르간의 3분의 1이 재설치되었다. 나머지 부분은 2012년과 2013년 사이에 재설치되었으며, 음성 조정은 2014년에 완료되었다.[18]
2. 4. 1964년 증축
1964년 건물 강가 측면에 로비와 테라스를 추가하고 건물 면적을 약 9.14m 늘렸으며, 후면에 더 많은 대기실을 추가하여 건물을 대대적으로 변경했다. 강을 내려다보는 외관을 변경하면서 장식용 타일을 제거하여, 건물의 주요 공공 외관의 스칸디나비아 모더니즘을 더 단순하고 날카로운 스타일로 변경했다. 이러한 변경과 1967/68년에 건설된 인근 퀸 엘리자베스 홀, 퍼셀 룸, 헤이워드 갤러리를 위한 건물 주변의 콘크리트 보도 추가로 인해 건물의 원래 입구 시퀀스는 크게 훼손되었다.2. 5. 음향 문제 및 보조 공명 시스템 (1962-1998)
건축 연구소의 호프 베제널과 그의 동료들은 로열 페스티벌 홀 설계 팀의 핵심적인 부분을 맡았습니다. 더 정확한 설계를 위해 좌석의 음향 거동을 실험실에서 측정하고 테스트했으며, 외부 소음 문제에도 신중하게 고려했습니다.[19]홀 개장 후, 음향의 특정 측면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이는 음향 컨설턴트가 결정한 방 표면의 원래 사양 중 일부가 건축 과정에서 무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주자들에게는 무대에서 서로의 소리를 듣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울어진 '폭발' 측벽과 합판 반사판 모두 소리를 무대 밖으로 내보냈습니다.[19]
일반적으로 홀이 '너무 건조'하고 잔향이 충분하지 않으며, 특히 저주파수에서 베이스 톤이 약하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실내악 및 현대 음악에는 음향이 '우수'했지만, 고전 또는 낭만주의 음악 시대의 음악에는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존 바비롤리 경은 "모든 것이 선명하고 명확하며, 절정에 임팩트도 없고 충만함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7]

레오 베라넥은 세계 유수의 콘서트 홀을 모두 측정했던 미국의 음향학 엔지니어였는데, 강당 내부의 처리 방식이 너무 많은 소리를 흡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22] 1962년, 관계자들은 오랜 실험 끝에 홀의 잔향을 표면 처리를 더 이상 개선할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잔향 시간을 늘리려면 주요 구조를 수정하여 좌석 수를 줄이고 새로운 천장을 설치해야 했는데, 이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드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특히 '따뜻함'이나 '공명'에 대한 가상의 이득이 홀이 일반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다른 긍정적인 특성, 예를 들어 명료성, 음향 응답의 비교적 균일성, 에코 부재 등을 희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23]
고대 그리스인들이 강당에 내장된 항아리를 사용하여 음조를 강화하거나 음질을 개선하는 공명 기술을 개발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지만, 그 효과는 매우 미미했습니다. 영국 건축 연구소는 '보조 공명'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잔향 시간을 늘리는 전자적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이는 홀의 표면에서 손실되는 음향 에너지를 스피커가 공급하는 음향 에너지로 대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각 마이크와 관련된 스피커는 헬름홀츠 공명기 안에 마이크를 배치하여 단일 주파수로 제한되었으며, 비평가와 음악가들이 홀에서 충분히 공명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광범위한 저주파수 범위에 걸쳐 공명하는 다양한 크기로 천장에 설치되었습니다. 58Hz에서 700Hz까지의 주파수 범위를 커버하기 위해 172개의 채널이 사용되었으며, 125Hz 옥타브 대역에서 잔향 시간을 1.4초에서 2.5초로 늘렸습니다.[24] 그러나 이 시스템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신뢰성이 떨어져 공연 중에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1998년에 시스템이 꺼지면서 음향 상태가 다시 나빠졌고, 사이먼 래틀 경에 따르면 공연자들은 "살 의지를 잃을" 정도로 심각했습니다.[25]
2. 6. 2005-2007년 리노베이션
다이앤 헤이가 이끄는 건축가 팀과 Max Fordham LLP (M&E), Price & Myers (구조) 등의 컨설팅 엔지니어 회사들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로열 페스티벌 홀의 열악한 음향과 건물 레이아웃을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진행했다.[27] 이 리모델링 전까지 콘서트 홀 공간의 내부는 무대 캐노피와 벽이 단순하고 사각형 형태로 재건축되어 거의 온전하게 유지되었다. 합창석을 포함한 좌석 수는 2,788석으로 약간 줄었다. 이 공사는 20세기 협회를 중심으로 한 보존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행되었다.Kirkegaard Associates의 조언에 따라, 강당 구조를 변경하여 반향 부족과 음악가들에게 어려운 연주 환경을 개선했다. 이전에는 소리를 흡수했던 표면을 소리를 지원하고 유지하도록 변경했다. 박스 뒷벽의 태피스트리는 반향을 증가시키기 위해 걷어 올렸지만, 필요에 따라 무대 위와 홀 주변에 추가 흡음 블라인드를 배치할 수 있도록 했다. 홀의 나무 벽 패널은 음향 특성을 변경하기 위해 다시 덮었으며, 물결 모양의 석고 천장 패널은 더 따뜻한 소리를 제공하고 저주파를 지원하기 위해 더 견고한 재료를 사용하여 완전히 재구성했다.
무대 너비 위에 새로운 조절 가능한 음향 캐노피를 설치하여 저주파가 무대 위 공간에서 공명하고 고음 주파수가 반사되어 연주자에게 피드백을 개선할 수 있게 했다. 무대는 연주자에게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하도록 재구성되었으며, 무대 주변 벽의 배열이 크게 변경되었다. 로빈 데이가 디자인한 원래 좌석은 복원되어 더 편안하고 음향적으로 적합하도록 재가공되었다.[28]
대대적인 개조 공사는 'get-in'과 'get-out' 과정을 하루 만에 더 쉽게 만들고, 공연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기회를 제공했다. 극장 컨설턴트인 Carr & Angier는 ISG Interior Exterior and Stage Technologies와 협력하여 무대 공간 위에 4개의 대형 이동식 조명 브리지가 있는 새로운 작업 공간을 만들었으며, 맞춤형 리그 없이 대규모 투어 프로덕션을 들어 올릴 수 있는 하중 분담이 가능하게 했다. Delstar Engineering은 무대 플랫폼을 형성하기 위해 11개의 리프트를 공급했다. 이를 통해 무대 레이아웃을 공연 성격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합창 벤치를 밖으로 밀어내어 무대 및 댄스 공연을 위한 평평한 바닥을 제공할 수 있다. 객석의 콘크리트 바닥을 재건하여 좌석 열 사이의 공간을 75mm 늘렸으며, 좌석은 118석만 줄었다. 강당의 기류를 반전시켜 냉방 시설을 도입했다.[29]
2000년대에는 홀 서쪽 맞은편에 7개의 상업 시설로 구성된 건물이 세워졌으며, 그 위에는 사우스뱅크 행정 사무실이 많이 들어섰다. 강변에는 상점과 레스토랑이 추가되었다.
이 공연장은 2007년 6월에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재개장했다. 개조 공사에는 약 9100만파운드가 소요된 것으로 추산되었다.[30] 개조 공사를 다룬 영화 ''This Is Tomorrow''는 폴 켈리가 감독하고 앤드루 힌튼이 제작했다.
2. 7. 오르간 복원 (2010-2014)
1950년부터 1954년까지 7,866개의 파이프 오르간이 잉글랜드 더럼의 해리슨 앤 해리슨(Harrison & Harrison)에 의해 제작되었다. 랄프 다우네스(Ralph Downes)가 설계를 맡았고, 런던 카운티 의회의 컨설턴트로서 오르간의 음향 마무리를 감독했다.[16] 이 오르간은 풍부하고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단독으로 또는 다른 악기들과 함께 연주될 때 오케스트라나 합창단의 소리에 필적할 수 있고, 모든 종류의 솔로 연주도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16]이 오르간의 설계 원칙은 오르간 개혁 운동이라는 새로운 오르간 제작 방식을 이끌어 냈으며, 코벤트리 대성당과 블랙번 대성당의 오르간, 크로이던의 페어필드 홀스, 맨체스터의 브리지워터 홀 콘서트홀 오르간 등 영국 내 여러 오르간에 영향을 주었다.[17] 또한, 다른 나라의 많은 오르간들도 이 오르간의 영향을 받았다.[17]
그러나 오르간 설계상의 문제로 유지 보수가 어려워졌고, 2000년에는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2005년 홀 자체의 복원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오르간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해리슨 앤 해리슨에 의해 복원 및 업데이트되었다. 오르간의 3분의 1이 재설치되었고, 나머지는 2012년과 2013년 사이에 재설치되었다. 2014년에는 음색 조정 작업이 완료되었다.[18]
오르간은 새로운 건축 및 음향 조건에 맞게 재구성되었다. 깊이는 110cm 줄었지만, 기본적인 레이아웃 원칙은 유지되었다.[16]
오르간의 완전한 복원 및 재설치를 위해 230만 파운드(£)(229.99999999999997만파운드)가 모금되었고, 최초 오르간 제작사인 해리슨 앤 해리슨(Harrison & Harrison)이 2013년 8월 29일에 재설치를 완료했다. 파이프의 균형을 다시 맞추는 작업을 포함한 추가 작업이 진행되었고, 오르간이 처음 공개된 지 60년이 되는 2014년 3월 18일에 오르간 재개관에 맞춰 완료되었다. 첫 번째 오케스트라 및 오르간 콘서트는 2014년 3월 26일에 열렸으며,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자체 라이브 레이블에 녹음되었다.[31] 오르간은 7,866개의 파이프와 103개의 스탑을 갖춘, 영국에서 세 번째로 큰 오르간으로 알려져 있다.
3. 건축적 특징
로열 페스티벌 홀 프로젝트는 런던 카운티 의회의 수석 건축가 로버트 매튜가 주도했으며, 레슬리 마틴을 포함한 젊은 디자이너 팀을 구성했다. 에드윈 윌리엄스[6], 피터 모로, 로빈 데이, 루시엔 데이 등이 참여했다. 음향 컨설턴트는 호프 배그널이었고, 건축 연구소의 헨리 험프리스, 피터 파킨, 윌리엄 앨런과 함께 작업했다.[7]
이들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필요로 하면서도, 이전 공공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선된 고전주의를 모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우려했다.
3. 1. '상자 속의 달걀' 디자인
마틴은 1948년 스케치에서 콘서트 홀 디자인을 '상자 속의 달걀'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이 디자인의 강점은 내부 공간 배치에 있었다. 중앙 계단은 웅장한 느낌을 주며, 빛과 공기의 다양한 수준을 통해 우아하게 이동한다.[8]바와 레스토랑이 있는 넓게 트인 로비는 모든 사람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 의도되었으며, 다른 계층의 고객을 위한 별도의 바는 없었다. 이러한 공공 공간은 강당 주변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인접한 철도 교량의 소음으로부터 홀을 격리하는 효과도 있었다.[10]
레슬리 마틴은 "현수 강당은 건물에 주요 속성을 제공한다. 건물 내부에서 열린 광활한 공간감, 대칭적으로 배치된 계단과 '상자 속의 달걀'로 알려진 갤러리에서 나오는 흐르는 듯한 순환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11]
건설된 홀은 현대 건축에서 선호하는 재료인 철근 콘크리트를 아름다운 목재와 더비셔 화석 석회암 같은 고급스러운 요소와 함께 사용했다.[10] 건물의 외관은 밝은 흰색으로, 주변의 검게 그을린 도시와 대조를 이루도록 의도되었다. 건물 정면의 넓은 유리창은 빛이 내부 전체에 자유롭게 흘러 들어가게 했으며, 밤에는 유리창을 통해 내부의 빛이 강 밖으로 쏟아져 나와 황혼 후 런던의 어둠과 대조를 이루었다.[12]
홀은 원래 2,901석 규모였다. 캔틸레버 박스는 종종 급하게 도둑질을 하다가 꺼낸 서랍처럼 보인다고 묘사되지만, 시야를 가리는 부분은 없었다. 천장은 의도적으로 조각적인 형태였으며, 건축 기술의 가장자리에 있는 기발한 발상이었고, 결과적으로 음향에 대한 당시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었다.[8] 강당 가구를 디자인한 로빈 데이는 굽은 합판과 강철을 사용하여 명확하게 표현된 구조를 디자인에 사용했다.[10]
3. 2. 재료 및 외관
페스티벌 홀 프로젝트는 당시 런던 카운티 의회의 수석 건축가였던 로버트 매튜가 이끌었으며, 그는 레슬리 마틴을 포함한 젊고 재능 있는 디자이너 팀을 모았다. 레슬리 마틴은 에드윈 윌리엄스[6], 피터 모로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으며, 가구 디자이너 로빈 데이와 그의 아내이자 텍스타일 디자이너인 루시엔 데이가 참여했다.[7]마틴의 1948년 스케치는 콘서트 홀의 디자인을 '상자 속의 달걀'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디자인의 강점은 내부 공간의 배치에 있었다. 중앙 계단은 웅장한 느낌을 주며 빛과 공기의 다양한 수준을 통해 우아하게 이동한다.[8]
그들은 이 프로젝트의 규모가 기념비적인 건물을 요구하는 반면, 이전의 많은 공공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선된 고전주의를 모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우려했다. 바와 레스토랑이 있는 넓게 트인 로비는 모든 사람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 의도되었으며, 다른 계층의 고객을 위한 별도의 바는 없었다. 이러한 공공 공간은 강당 주변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인접한 철도 교량의 소음으로부터 홀을 격리하는 효과도 있었다.[10]
그들이 건설한 홀은 현대 건축에서 선호하는 재료인 철근 콘크리트를 아름다운 목재와 더비셔 화석 석회암과 같은 고급스러운 요소와 함께 사용했다.[10] 건물의 외관은 밝은 흰색으로, 주변의 검게 그을린 도시와 대조를 이루도록 의도되었다. 건물 정면의 넓은 유리창은 빛이 내부 전체에 자유롭게 흘러 들어가게 했으며, 밤에는 유리창을 통해 내부의 빛이 강 밖으로 쏟아져 나와 황혼 후 런던의 어둠과 대조를 이루었다.[12]
홀은 원래 2,901석 규모였다. 캔틸레버 박스는 종종 급하게 도둑질을 하다가 꺼낸 서랍처럼 보인다고 묘사되지만, 시야를 가리는 부분은 없었다. 천장은 의도적으로 조각적인 형태였으며, 건축 기술의 가장자리에 있는 기발한 발상이었고, 결과적으로 음향에 대한 당시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었다.[8] 강당의 가구를 디자인한 로빈 데이는 굽은 합판과 강철을 사용하여 명확하게 표현된 구조를 디자인에 사용했다.[10]
3. 3. 내부 공간
레슬리 마틴의 1948년 스케치는 콘서트 홀의 디자인을 상자 속의 달걀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디자인의 강점은 내부 공간의 배치에 있었다. 중앙 계단은 웅장한 느낌을 주며 빛과 공기의 다양한 수준을 통해 우아하게 이동한다.[8]바와 레스토랑이 있는 넓게 트인 로비는 모든 사람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 의도되었으며, 다른 계층의 고객을 위한 별도의 바는 없었다. 이러한 공공 공간은 강당 주변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인접한 철도 교량의 소음으로부터 홀을 격리하는 효과도 있었다.[10]
레슬리 마틴은 "현수 강당은 건물에 주요 속성을 제공한다. 건물 내부에서 열린 광활한 공간감, 대칭적으로 배치된 계단과 '상자 속의 달걀'로 알려진 갤러리에서 나오는 흐르는 듯한 순환이 그것이다."라고 말한다.[11]
건설된 홀은 현대 건축에서 선호하는 재료인 철근 콘크리트를 아름다운 목재와 더비셔 화석 석회암과 같은 고급스러운 요소와 함께 사용했다.[10]
홀은 원래 2,901석 규모였다. 캔틸레버 박스는 종종 급하게 도둑질을 하다가 꺼낸 서랍처럼 보인다고 묘사되지만, 시야를 가리는 부분은 없었다. 천장은 의도적으로 조각적인 형태였으며, 건축 기술의 가장자리에 있는 기발한 발상이었고, 결과적으로 음향에 대한 당시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었다.[8] 강당의 가구를 디자인한 로빈 데이는 굽은 합판과 강철을 사용하여 명확하게 표현된 구조를 디자인에 사용했다.[10]
원래 건물에는 무성하게 심어진 옥상 테라스가 있었다. 2층 로비 카페는 강을 바라보는 테라스로 이어졌으며, 원래 입구는 건물 측면에 배치되어 방문객이 강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바로 갈 수 있었다.
3. 4. 음향 설계
건축 연구소의 호프 베제널과 그의 동료들은 설계 팀의 핵심적인 부분을 형성하여, 이론적, 실험적 측면 모두에서 과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건설된 세계 최초의 콘서트 홀 중 하나를 만들었다.[19] 더 정확한 설계를 위해 좌석의 음향 거동이 실험실에서 측정 및 테스트되었고, 외부 소음 문제에 대한 신중한 고려가 이루어졌다.홀 개장 후, 음향의 특정 측면에 대한 비판이 있었는데, 이는 음향 컨설턴트가 결정한 방 표면의 원래 사양 중 일부가 건축 과정에서 무시되었기 때문이었다.[19] 연주자들에게는 무대에서 서로의 소리를 듣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고, 기울어진 '폭발' 측벽과 합판 반사판은 소리를 무대 밖으로 내보냈다.[19]
존 바비롤리 경은 "모든 것이 선명하고 명확하며, 절정에 임팩트도 없고 충만함도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홀은 '너무 건조'하고 잔향이 충분하지 않으며, 특히 저주파수에서 베이스 톤이 약하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있었다.[7] 레오 베라넥은 강당 내부의 처리 방식이 너무 많은 소리를 흡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22]
1962년, 관계자들은 오랜 실험 끝에 홀의 잔향을 표면 처리를 더 이상 개선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잔향 시간을 늘리려면 주요 구조를 수정하여 좌석 수를 줄이고 새로운 천장을 설치해야 했지만, 이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드는 것으로 간주되었다.[23]
영국 건축 연구소는 '보조 공명'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잔향 시간을 늘리는 전자적 방법을 개발했다. 이는 홀의 표면에서 손실되는 음향 에너지를 스피커가 공급하는 음향 에너지로 대체하는 방식이었다.[24] 58Hz에서 700Hz까지의 주파수 범위를 커버하기 위해 172개의 채널이 사용되었으며, 125Hz 옥타브 대역에서 잔향 시간을 1.4초에서 2.5초로 늘렸다.[24] 그러나 이 시스템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신뢰성이 떨어져 공연 중에 가끔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1998년에 시스템이 꺼지면서 음향 상태는 다시 나빠졌다.[25]
2005년에서 2007년 사이에 다이앤 헤이가 이끄는 건축가와 컨설팅 엔지니어 회사 Max Fordham LLP(M&E) 및 Price & Myers(구조)의 주도로 열악한 음향과 건물 레이아웃을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조 공사가 진행되었다.[27]
음향 회사인 Kirkegaard Associates의 조언에 따라, 반향 부족과 음악가들에게 어려운 연주 환경은 강당의 구조 변경을 통해 개선되었다. 소리를 흡수했던 표면은 소리를 지원하고 유지하도록 변경되었고, 박스 뒷벽의 태피스트리는 반향을 증가시키기 위해 걷어 올려졌다.[28] 홀의 나무 벽 패널은 음향 특성을 변경하기 위해 다시 덮였으며, 물결 모양의 석고 천장 패널은 더 따뜻한 소리를 제공하고 저주파를 지원하기 위해 더 견고한 재료를 사용하여 완전히 재구성되었다.
새로운 조절 가능한 음향 캐노피가 무대 너비 위에 설치되어 저주파가 무대 위의 공간에서 공명하고 고음 주파수가 반사되어 연주자에게 피드백을 개선할 수 있게 되었다. 무대는 연주자에게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하도록 재구성되었으며, 무대 주변 벽의 배열이 크게 변경되었다. 원래 로빈 데이가 디자인한 좌석은 복원되어 더 편안하고 음향적으로 적합하도록 재가공되었다.[28]
객석의 콘크리트 바닥을 재건하여 좌석 열 사이의 공간을 75mm 늘렸으며, 좌석은 118석만 줄었다. 강당의 기류를 반전시켜 냉방 시설을 도입했다.[29] 이 개조 공사에는 약 9100만파운드가 소요된 것으로 추산되었다.[30]
4. 주요 시설
로열 페스티벌 홀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88년 4월에 처음으로 1급 지정 건축물로 지정되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런던 공연 대부분이 이곳에서 열리며, 좌석 수는 2,900석이다. 원래 양조장이 있던 자리에 예술 시설로 개조되어 1951년 5월 3일에 개관했다.
1949년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초석을 놓았고,[13] 홀란드, 해넌 & 커비츠가 200만파운드를 들여 건설했다. 1951년 5월 3일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말콤 사젠트 경과 애드리안 볼트 경의 지휘로 공식 개관했다.[15]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음향과 건물 레이아웃 개선을 위해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진행했다.[27] 콘서트 홀 내부는 무대 캐노피와 벽이 단순하고 사각형 형태로 재건축되었고, 좌석 수는 합창석 포함 2,788석으로 줄었다. 개조 공사로 'get-in'과 'get-out' 과정이 쉬워졌고, 공연장 유연성이 높아졌다. 2007년 6월 재개장했으며, 개조 공사에는 약 9100만파운드가 소요된 것으로 추산된다.[30]
4. 1. 콘서트 홀
마틴은 1948년 콘서트 홀 디자인을 상자 속의 달걀에 비유했다. 이 디자인의 강점은 내부 공간 배치에 있었는데, 중앙 계단은 웅장하면서도 빛과 공기의 흐름을 통해 우아한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8]넓은 로비는 바와 레스토랑을 갖춰 모든 사람을 위한 만남의 장소로 설계되었으며, 별도의 바는 없었다. 이러한 공공 공간은 강당 주변에 배치되어 철도 교량 소음으로부터 홀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10]
마틴은 "현수 강당은 건물에 주요 속성을 부여한다. 내부의 광활한 공간감, 대칭적 계단, '상자 속의 달걀' 갤러리에서 나오는 흐르는 듯한 순환이 그것이다."라고 설명했다.[11]
홀은 철근 콘크리트와 함께 고급 목재, 더비셔 화석 석회암 등 고급스러운 재료를 사용했다.[10] 밝은 흰색 외관은 주변의 검게 그을린 도시와 대조를 이루도록 의도되었고, 넓은 유리창은 빛이 내부로 자유롭게 흘러들어 밤에는 내부 빛이 강 밖으로 쏟아져 런던의 어둠과 대조를 이루었다.[12]
홀은 원래 2,901석 규모였다. 캔틸레버 박스는 시야를 가리지 않았고, 천장은 음향에 대한 이해를 뛰어넘는 조각적 형태였다.[8] 로빈 데이는 굽은 합판과 강철을 사용해 가구를 디자인했다.[10]
옥상 테라스, 2층 로비 카페, 건물 측면 입구 등도 특징이었다.
1949년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초석을 놓았고,[13] 홀란드, 해넌 & 커비츠가 200만파운드를 들여 건설했다. 1951년 5월 3일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말콤 사젠트 경과 애드리안 볼트 경의 지휘로 공식 개관했다.[15]
버나드 레빈 기자는 "내부의 독창성과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숨 막힐 듯한 기쁨을 느꼈다."라고 회상했다.[10]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다이앤 헤이가 이끄는 건축가 팀과 컨설팅 엔지니어 회사 Max Fordham LLP(M&E) 및 Price & Myers(구조)가 음향과 건물 레이아웃 개선을 위해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진행했다.[27] 콘서트 홀 내부는 무대 캐노피와 벽이 단순하고 사각형 형태로 재건축되었고, 좌석 수는 합창석 포함 2,788석으로 줄었다. 20세기 협회 등 보존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진행되었다.
Kirkegaard Associates의 조언에 따라 강당 구조 변경을 통해 반향 부족과 연주 환경 문제를 개선했다. 소리를 흡수하던 표면은 반향을 늘리도록 변경되었고, 박스 뒷벽 태피스트리는 걷어 올려졌다. 필요시 무대와 홀 주변에 흡음 블라인드를 배치할 수 있게 했다. 홀 벽면 나무 패널은 음향 특성 변경을 위해 다시 덮였고, 석고 천장 패널은 견고한 재료로 재구성되어 따뜻한 소리와 저주파를 지원하도록 했다.
무대 위에는 조절 가능한 음향 캐노피가 설치되어 저주파 공명과 고음 주파수 반사를 통해 연주자 피드백을 개선했다. 무대는 재구성되어 공간을 넓혔고, 벽 배열도 변경되었다. 로빈 데이 디자인 좌석은 복원 및 재가공되었다.[28]
개조 공사로 'get-in'과 'get-out' 과정이 쉬워졌고, 공연장 유연성이 높아졌다. Carr & Angier는 ISG Interior Exterior and Stage Technologies와 협력해 무대 위 작업 공간을 만들고, 리그 없이 대규모 투어를 가능하게 했다. Delstar Engineering은 11개 리프트를 공급해 무대 레이아웃을 다양하게 재구성할 수 있게 했다. 합창 벤치는 밀어내어 평평한 바닥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객석 바닥 재건으로 좌석 열 간격이 늘어났고, 좌석은 118석 감소했다. 냉방 시설 도입을 위해 기류를 반전시켰다.[29]
2000년대에는 홀 서쪽에 상업 시설 건물이 세워졌고, 강변에는 상점과 레스토랑이 추가되었다.
2007년 6월 재개장했으며, 개조 공사에는 약 9100만파운드가 소요된 것으로 추산된다.[30]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런던 공연 대부분이 이곳에서 열린다. 좌석 수는 2,900석이다.
1951년 5월 3일에 개관했다.
4. 2. 오르간
1950년부터 1954년까지 해리슨 앤 해리슨이 잉글랜드 더럼에서 7,866개의 파이프 오르간을 제작했으며, 런던 카운티 의회의 컨설턴트이자 음향 마무리를 감독한 랄프 다우네스의 설계에 따라 제작되었다. 이 오르간은 풍부하고 다양한 앙상블을 포함하는 균형 잡힌 클래식 악기로 설계되었으며, 단독으로 또는 조합하여 모든 오케스트라 또는 합창 그룹의 다이내믹 스케일에 필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솔로 레퍼토리를 소화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16]이러한 설계 원칙은 영국 오르간 개혁 운동을 낳았고, 코벤트리 대성당과 블랙번 대성당의 대성당 오르간, 크로이던의 페어필드 홀스, 맨체스터의 브리지워터 홀 콘서트 홀 오르간 등 영국 내 여러 오르간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오르간의 영향을 받은 다른 국가의 수많은 오르간도 존재한다.[17]
그러나 하우징 내 오르간 설계로 인해 유지 관리가 어려워졌고, 2000년에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2005년 홀 자체의 복원을 시작하기 전에 완전히 제거되었고, 해리슨 앤 해리슨에 의해 복원 및 업데이트된 후 오르간의 3분의 1이 재설치되었다. 나머지 부분은 2012년과 2013년 사이에 재설치되었으며, 음성 조정은 2014년에 완료되었다.[18] 오르간은 새로운 건축 및 음향 요건에 맞게 재구성되었다. 깊이는 110cm 줄었지만, 레이아웃의 기본 원칙은 존중되었다.[16]
230만파운드를 모금하여 오르간의 완전한 복원 및 재설치를 진행하였고, 최초의 오르간 제작자인 해리슨 앤 해리슨(Harrison & Harrison)은 2013년 8월 29일에 재설치를 완료했다. 파이프워크의 균형을 다시 맞추는 작업을 포함한 추가 작업이 이어졌고, 오르간이 처음으로 제막된 지 정확히 60년이 되는 2014년 3월 18일에 오르간 재개관에 맞춰 완료되었다. 첫 번째 오케스트라 및 오르간 콘서트는 2014년 3월 26일에 열렸으며,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자체 라이브 레이블에 녹음되었다.[31] 오르간은 7,866개의 파이프와 103개의 스탑을 갖춘, 영국에서 세 번째로 큰 오르간으로 남아 있다. 오르간은 홀 음향에서 불편하게 제약된 소리를 내며, 독주회나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반주하기 위해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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