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1875년 9월 20일에 태어나 1921년 8월 26일에 암살당했다. 그는 독일 중앙당 소속으로, 독일 제국 의회 의원을 거쳐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재무장관 겸 부총리를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휴전 협정에 서명하여 전쟁 종결에 기여했지만, 이로 인해 민족주의 우익 세력의 비난을 받았다. 에르츠베르거는 재정 개혁을 통해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려 했으나, 보수 세력의 반발과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독일의 각료 -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는 1909년부터 1917년까지 독일 제국 총리를 지낸 프로이센 귀족 출신 정치인으로, 국내적으로는 타협을, 국제적으로는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을 막지 못하고 벨기에 중립 침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 독일 중앙당 당원 - 요제프 비르트
    요제프 비르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독일 정치인으로, 이행 정책과 라팔로 조약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부 불안정과 극우 세력의 반발로 사임하고, 전후에는 동독과의 협력 추구로 비판받기도 했다.
  • 독일 중앙당 당원 - 프란츠 폰 파펜
    프란츠 폰 파펜은 독일의 군인, 외교관, 정치인으로, 독일 제국 시기 군인과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정계에 입문하여 총리를 지냈으나 실각 후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기여했으며 나치 정권 하에서 부총리, 대사를 역임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탈나치화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바이마르 국민회의 제헌의원 - 구스타프 노스케
    구스타프 노스케는 독일 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킬 군항 반란과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진압에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이후 나치 집권 후 해임되어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 바이마르 국민회의 제헌의원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독일 사회민주당 당수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노동 운동가 출신으로, 혼란한 정국 속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19년의 에르츠베르거
1919년의 에르츠베르거
이름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출생일1875년 9월 20일
출생지부텐하우젠, 뷔르템베르크, 독일 제국
사망일1921년 8월 26일
사망지바트 그리스바흐, 바덴, 독일
정당중앙당
정치 경력
직책독일 부총리
임기 시작1919년 6월 21일
임기 종료1919년 10월 3일
총리구스타프 바우어
전임자베른하르트 데른부르크
후임자오이겐 시퍼
직책1재무장관
임기 시작11919년 6월 21일
임기 종료11920년 3월 12일
총리1구스타프 바우어
전임자1베른하르트 데른부르크
후임자1요제프 비르트
직책2무임소 장관
임기 시작21918년 10월 3일
임기 종료21919년 6월 20일
총리2막스 폰 바덴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필리프 샤이데만(장관-대통령)
직책3국회 의원
뷔르템베르크 선거구
임기 시작31920년 6월 24일
임기 종료31921년 8월 26일
전임자3선거구 신설
후임자3헤르만 에거
직책4국회 의원
뷔르템베르크 16 선거구
임기 시작41903년 12월 3일
임기 종료41918년 11월 9일
전임자4게프하르트 브라운
후임자4선거구 폐지

2. 초기 경력

에르츠베르거는 1903년 비베라흐 구에서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중앙당에 입당했다. 다양한 정치 활동을 통해 의회 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식민지 정책[3]과 재정 정책 전문가로서 1909년 재정 개혁에 기여했다. 1912년에는 의회 정당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고, 1913년까지 독일의 군사력 증강에 기여했다.[1]

1900년 로텐부르크 암 네카어에서 사업가의 딸 파울라 에버하르트와 결혼하여 세 자녀(아들 하나와 딸 둘)를 두었다.[1][2]

2. 1. 유년 시절과 교육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는 1875년 9월 20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부텐하우젠(오늘날 뮌징겐의 일부)에서 재단사이자 우편 배달부인 요세프 에르츠베르거(1847–1907)와 카테리나(1845–1916)의 아들로 태어났다.[1][2] 어릴 때 비만을 앓았으나, 나이가 들면서 체중을 줄였다. 1894년 슈바비슈 할과 바트 자울가우에 있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1] 교사로 일하면서 스위스 프리부르에서 헌법과 경제학을 공부했다.[1] 2년 후, 슈투트가르트에서 가톨릭 중앙당의 기관지 ''독일 민족지(Deutsches Volksblatt|독일 민족지de)''의 기자로 일하면서 프리랜서 작가를 겸임했다.[1][3]

2. 2. 언론인 및 정치 입문

에르츠베르거는 슈투트가르트에서 가톨릭 중앙당 기관지 ''독일 민족지(Volksblatt)''의 기자로 일하면서 프리랜서 작가를 겸했다.[1] 1903년 비베라흐 구에서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그는 의회에서 식민지 정책[3]과 재정 정책 전문가로 활동하며 1909년 재정 개혁에 기여했고,[1] 1912년 의회 정당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1]

3. 제1차 세계 대전

에르츠베르거는 초기에는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지지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평화주의자로 입장을 바꾸었다.

1914년 9월, 그는 벨기에와 로렌 일부 지역의 병합을 옹호하는 등 독일의 전쟁 목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각서를 작성했다.[2][4] 그러나 1917년 양측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반대하고 평화 협상을 주장했다. 1917년 4월에는 스톡홀름에서 러시아 사절단과 만나 평화 조건을 논의하기도 했다.[10]

1917년 7월 6일, 독일 의회 연설에서 에르츠베르거는 영토적 야망을 포기하고 하루빨리 종전할 것을 촉구했다.[11]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위한 시도는 실패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과 독일군의 취약점에 대한 지적은 독일 정부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잃게 만들고, 전쟁 지지를 약화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13]

1918년 11월, 에르츠베르거는 콩피에뉴 숲에서 연합군과 협상을 위해 독일 대표로 파견되었다. 페르디난드 포슈 원수는 독일군 철수에 할당된 시간을 약간 연장하는 것 외에는 거의 양보하지 않았다.[26]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새 총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지시에 따라, 에르츠베르거는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을 끝내는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27]

3. 1. 전쟁 초기 입장

에르츠베르거는 중앙당의 다른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지지했고, 민족주의적 분위기에 동참했다.[2] 1914년 9월, 그는 독일의 전쟁 목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각서를 작성하여 벨기에와 로렌 일부 지역 병합을 옹호했다.[2][4] 그는 독일 의회의 군사 업무 위원회 비서이자 재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특히 가톨릭 단체와 관련된 대외 선전을 담당했으며, 교황청프리메이슨의 지원금을 사용하여 정보 수집 시스템을 구축했다.[2] 또한 에르츠베르거는 1915년 이탈리아의 참전을 막기 위한 베른하르트 폰 뷜로와의 협력 시도 등 일부 외교 임무에도 참여했으나 실패했다.[2] 그는 독일의 합병에 대한 과도한 계획이 담긴 서한을 주요 군사 당국자들에게 보냈는데, 이 서한은 나중에 공개되었다.[3] 그는 기회주의자로 여겨졌으며, "신념은 없고 욕망만 있을 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5]

3. 2. 외교 활동과 입장 변화

제1차 세계 대전 중,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제외하면, 에르츠베르거는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 영내 소수파 기독교도 정책과 그에 대한 비판에 소극적인 독일 정부를 공공연히 비판한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7][8] 그는 여러 번 터키를 방문하여 청년 튀르크당의 권력자들과 협상하여, 아르메니아인 학살시리아·레바논에 거주하는 기독교도에 대한 선처를 요구했다. 1916년 2월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엔베르 파샤와 탈라트 파샤를 만났으나, 그의 제안은 오스만 정부에 의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7][8]

1917년 7월에는 승리가 아닌 평화적 협상에 의한 전쟁 종결을 주장하며, 전쟁 종결 후 독일이 타국 영토를 병합하지 않도록 의회에서 요구했고, 이 의견에 기초한 결의안은 같은 달 찬성 다수로 가결되었다.[11] 1917년 4월, 그는 스톡홀름에서 러시아 특사를 만나 평화 조건을 논의하기도 했다.[10]

1915년에는 베른하르트 폰 뷜로와 함께 이탈리아의 참전을 막기 위한 외교 임무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2]

3. 3. 평화 결의안과 휴전 협정

1917년 7월 6일, 에르츠베르거는 독일 의회 연설에서 영토 야망을 포기하고 조속한 종전을 촉구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11] 그는 이 연설에서 독일군의 약점을 지적하며 전쟁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 7월 19일, 에르츠베르거는 국회에서 평화 결의안을 주도하여 통과시켰다.[11] 이 결의안은 합병이나 배상금 없는 평화, 공해 자유, 국제 중재를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비록 이 결의안은 당시 재상 미하엘리스에 의해 무시되었지만, 에르츠베르거는 사회민주당이 전쟁 대출에 계속 찬성표를 던지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13]

1918년 10월 3일, 에르츠베르거는 막시밀리안 폰 바덴 공의 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1] 1918년 11월 6일, 그는 콩피에뉴 숲에서 연합군과의 휴전 협상에 독일 대표로 파견되었다.[17] 막시밀리안 공은 가톨릭 정치인이자 평화주의자로 명성이 높았던 에르츠베르거가 프로이센 군 장교보다 연합군에게 더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연합군 수석 협상가인 포슈 원수는 독일군 철수 시간을 약간 연장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18] 에르츠베르거는 협상을 연장해야 할지, 아니면 연합군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휴전 협정에 서명하라고 지시했고, 새 총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에르츠베르거에게 서명을 위임하는 전문을 보냈다.[17]

결국 에르츠베르거는 1918년 11월 11일 콩피에뉴 휴전 협정에 서명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켰다.[19] 그는 협정 내용의 가혹함에 항의하며 "7천만 인구는 고통을 받을 수 있지만 죽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포슈는 에르츠베르거의 악수 시도를 무시하며 응수했다고 한다.[19]

4. 전쟁 이후

에르츠베르거는 전쟁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19년 1월 바이마르 국민 의회 선거 이후 필리프 샤이데만이 이끄는 정부에서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샤이데만이 사임한 후에는 구스타프 바우어 내각에서 재무장관 겸 부총리를 맡았다.[1] 바이마르 헌법 발효 후에도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3]

1919년 5월 베를린에서 에르츠베르거와 에두아르트 다비드 장관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독일 재정과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치적 반대 세력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4. 1. 종전 위원회와 베르사유 조약

베를린으로 돌아온 에르츠베르거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정부에서 종전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수락했다. 그러나 이는 패전의 책임을 떠안는 굴욕적인 일이었다.[1]

1919년 1월 바이마르 국민 의회 선거 후, 에르츠베르거는 필리프 샤이데만 내각에서 휴전 담당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군사적, 정치적 대안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에 찬성했다.[1] 이 때문에 그는 울리히 폰 브로크도르프-란차우 외무 장관과 대립했다.

4. 2. 에르츠베르거 재정 개혁

1919년 구스타프 바우어 내각에서 재무장관 겸 부총리가 된 에르츠베르거는 "에르츠베르거 재정 개혁"으로 알려진 독일 재정 개혁을 단행했다.[1] 이 개혁은 두 가지 주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18]

첫째, 독일 연방 정부에 과세 및 지출에 대한 최고의 권한을 부여하여 중앙 정부가 구성 국가에 의존하는 것을 종식시키려 했다.[1][20] 둘째, 저소득층 및 중간 소득층 가구의 세금 부담을 완화하고 부유층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려 했다.[18]

이를 위해 1919년 7월에는 소득 및 재산에 대한 전시 부과금과 최초의 독일 상속세가 도입되었다.[18] 1919년 12월에는 부유층에게 1회성 "비상" 재산세가 부과되었고,[21] 1920년 3월에는 연방 소득세가 도입되었다.[21]

이러한 조세 개혁 외에도, 에르츠베르거는 이전의 독립적인 주 철도 행정부를 독일 국영 철도로 개혁하고 통합하여,[2] 처음으로 이익을 내고 전쟁 배상금 지불에 기여하도록 했다.

에르츠베르거의 재정 개혁은 독일 조세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1]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부담으로 인해 재정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다.[1] 그는 소득세를 주세에서 라이히세로 전환하고, 도이치 철도를 통일·국유화하는 등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조세 제도의 공정화는 충분히 달성되지 못했다. 세수의 중앙 집권화와 대자본가로부터의 징세는 우익 선전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1]

4. 3. 우익의 반발과 사임

에르츠베르거의 재정 개혁은 대자본가와 우익 세력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21] 특히, 민족주의자 지도자이자 전쟁 당시 재무부 차관이었던 카를 헬페리히와 개인적인 분쟁을 겪었는데, 헬페리히는 "Fort mit Erzberger!|에르츠베르거를 제거하라!de"라는 소책자를 출판하기도 했다.[1][2] 에르츠베르거는 결국 헬페리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나,[1][2] 1920년 3월 12일 법원은 헬페리히의 주장이 부분적으로 정당하다고 판결했다.[3] 이 판결에서 에르츠베르거의 부패한 사업 관행과 허위 진술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었다. 그 결과 에르츠베르거는 1920년 3월 당의 압력으로 장관직과[3] 국민 의회 의원직을 모두 사임해야 했다.[1]

5. 암살

1918년 휴전협정에 서명한 에르츠베르거는 많은 우익 세력에게 반역자로 여겨졌다.[3] 1921년 8월 26일, 슈바르츠발트에서 산책하던 중 게르만 기사단의 주요 인물인 폰 킬링어가 고용한 전직 독일 제국 해군 장교 두 명에게 암살당했다.[3]

암살범들은 헝가리로 도피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기소되었다.[3] 그의 묘지는 비베라흐 안 데어 리스에 있다.

5. 1. 암살 배경

보수 언론들은 에르츠베르거에 대해 통상적인 비난을 넘어 신변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비난했다. ''일간 신문(Tägliche Rundschau)''은 에르츠베르거를 "그는 총알처럼 둥글지만 방탄은 아니다"라고 표현했다.[3] 1920년 1월 26일, 에르츠베르거는 법정을 나오던 중 육군 소위 올트비히 폰 히르슈펠트의 암살 시도로 부상을 입었다.[3] 히르슈펠트는 에르츠베르거에게 두 발의 총알을 발사했는데, 한 발은 어깨에 맞았고 다른 한 발은 시계줄에 의해 빗나갔다.[22] 히르슈펠트는 체포되었으나, '위험한 신체 상해' 혐의로 1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4개월 후 가석방되었다.[22]

에르츠베르거는 1920년 6월 총선에서 국회로 복귀했지만, 탈세 혐의 소송으로 인해 즉시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다.[3] 1920년, 그는 전쟁 중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각서를 발표했다.[3]

5. 2. 극우 테러 조직에 의한 암살

1921년 8월 26일, 에르츠베르거는 슈바르츠발트에서 휴가 중 극우 테러 조직 콘술의 조직원들에게 암살당했다.[3] 만프레트 폰 킬링거의 지시를 받은 하인리히 틸레센de과 하인리히 슐츠 (암살자)|하인리히 슐츠de는 1918년 휴전 협정에 서명한 에르츠베르거를 반역자로 여겼다. 이들은 해체된 해군 여단 에르하르트 소속 전직 독일 제국 해군 장교들이었다.[24][1] 암살범들은 바트 그리스바흐의 온천에서 동료 카를 디에츠와 산책 중이던 에르츠베르거에게 총을 쏴 살해했다.[25]

암살범들은 헝가리로 도피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기소되었다.[2] 나치스 집권 후인 1933년 사면되었으나, 종전 후 재심을 받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6. 유산

에르츠베르거는 독일의 평화 정착과 재정 개혁에 기여했지만, 그의 정치적 유산은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22년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다니엘 브륄이 에르츠베르거를 연기했다.

6. 1. 긍정적 평가

에르츠베르거는 독일이 평화를 맞이하도록 준비하고, 기독교민주연합의 전신인 가톨릭 중앙당의 정치적 영향력 유지에 기여했다. 그의 재정, 연방, 철도 개혁은 독일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그는 낙관주의와 책임감을 가지고 어려운 과제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인물이었다.[2]

기념비 비문

6. 2. 부정적 평가와 논란

에르츠베르거가 휴전 협정에 서명한 것은 배후 중상설의 근거로 이용되어 나치 선전에 활용되었다.[2] 군사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 서명은 수십 년 동안 독일군의 전투 의지를 훼손한 배신 행위로 묘사되었다. 특히, 사리사욕을 위한 사회주의 정치인들이 배후에서 독일을 중상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는 배후 중상설을 나치 선전의 핵심 요소로 삼아 권력을 잡는 데 이용했다. 에르츠베르거는 이러한 역할 때문에 "11월의 범죄자" 중 한 명으로 낙인 찍혔다.[2]

그의 진보적인 정책은 보수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참조

[1] 웹사이트 Matthias Erzberger 1875-1921 http://www.dhm.de/le[...]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LeMO (Living virtual Museum Online) - DHM 2015-10-25
[2] 웹사이트 Deutsche Biographie: Matthias Erzberger http://www.deutsche-[...] Bayerische Staatsbibliothek (BSB) 2015-10-25
[3] 문서 Erzberger, Matthias
[4] 서적 August 1914 Papermac
[5] 문서 Tuchman, p. 315.
[6] 웹사이트 Auxiliary Service Law (December 1916) https://ghdi.ghi-dc.[...] 2022-04-30
[7] 서적 Erlebnisse im Weltkrieg Deutsche Verlags-Anstalt
[8] 서적 Der Völkermord an den Armeniern 1915/16. Dokumente aus dem Politischen Archiv des deutschen Auswärtigen Amtesde Zu Klampen Verlag
[9] 문서 Erzberger. ''Erlebnisse''. pp. 56ff, 82ff.
[10] 웹사이트 Erzberger, Matthias. In: Neue Deutsche Biographie 4. [Online-Version] https://www.deutsche[...] 2015-10-25
[11] 웹사이트 Matthias Erzberger 1875-1921 https://www.dhm.de/l[...] 2015-10-25
[12] 서적 Tagebücher 1914–1919. Der Erste Weltkrieg und die Entstehung der Weimarer Republik in Tagebüchern, Leitartikeln und Briefen des Chefredakteurs am "Berliner Tageblatt" und Mitbegründer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Partei". Erster Teil, hrsg. von Bernd Sösemann
[13] 서적 Matthias Erzberger und das Dilemma der deutschen Demokratie
[14] 서적 Matthias Erzberger, ein Wegbereiter der deutschen Demokratie
[15] 서적 Die nervöse Großmacht 1871–1918. Aufstieg und Untergang des deutschen Kaiserreichs S. Fischer Verlag
[16] 서적 Enzyklopädie Erster Weltkrieg Ferdinand Schöningh
[17] 서적 Die deutsche Revolution 1918/19 Kindler
[18] 간행물 Weimarer Republik, Informationen zur politischen Bildung, Nr. 261 (German) http://www.bpb.de/sh[...] 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11
[19] 뉴스 World War I Continues to Have Relevance 100 Years Later http://www.spiegel.d[...] 2014-01-08
[20] 웹사이트 Chronik 1919 http://www.dhm.de/le[...]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LeMO (Living virtual Museum Online) - DHM 2015-10-25
[21] 웹사이트 Innenpolitik http://www.dhm.de/le[...]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LeMO (Living virtual Museum Online) - DHM 2015-10-25
[22] 서적 The Downfall of Money: Germany's Hyperinflation and the Destruction of the Middle Class Bloomsbury Publishing 2013
[23] 서적 Christian Democracy in Europe Since 1945 Routledge 2004
[24] 뉴스 ERZBERGER MURDERED. http://nla.gov.au/nl[...] 1921-08-29
[25] 서적 Political Education of Arnold Brecht: An Autobiography, 1884-1970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6
[26] 저널 Weimarer Republik, Informationen zur politischen Bildung, Nr. 261 (German) http://www.bpb.de/sh[...] 2013-06-17
[27] 서적 Die deutsche Revolution 1918/19
[28] 웹인용 World War I Continues to Have Relevance 100 Years Later http://www.spiegel.d[...]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