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에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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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독일의 정치인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1871년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나 재봉사의 아들로 자랐으며,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노동조합주의자로 활동했다. 1905년 독일 사회민주당 사무총장을 거쳐 1913년 당수가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쟁 지지 입장을 보였다. 1918년 11월 혁명 이후 막스 폰 바덴 공의 뒤를 이어 독일 총리가 되었으며,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따른 대통령령을 남발하고 좌파 노동자 폭동을 우파 의용군을 이용하여 억제하는 등 논쟁적인 행보를 보였으며, 1925년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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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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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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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Priedrih Ebereuteu |
출생일 | 1871년 2월 4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 하이델베르크 |
사망일 | 1925년 2월 28일 |
사망지 |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
소속 정당 | 독일 사회민주당 |
배우자 | 루이제 에베르트 (1894년 5월 9일 결혼) |
자녀 | 5명 (아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주니어 포함) |
정치 경력 | |
독일 대통령 | 임기 시작: 1919년 2월 11일 임기 종료: 1925년 2월 28일 전임: 사무실 설립 (빌헬름 2세 황제) 후임: 파울 폰 힌덴부르크 |
총리 | 필리프 샤이데만 (1919) 구스타프 바우어 (1919) |
수상 | 구스타프 바우어 (1919–1920) 헤르만 뮐러 (1920) 콘스탄틴 페렌바흐 (1920–1921) 요제프 비르트 (1921–1922) 빌헬름 쿠노 (1922–1923)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1923) 빌헬름 마르크스 (1923–1925) 한스 루터 (1925–1926) |
독일 임시 정부 수반 | 임기 시작: 1918년 11월 9일 (사실상) 임기 종료: 1919년 2월 13일 전임: 막시밀리안 폰 바덴 대공자 (수상) 후임: 필리프 샤이데만 (총리) |
독일 사회민주당 대표 | 임기 시작: 1913년 9월 20일 임기 종료: 1919년 6월 15일 전임: 아우구스트 베벨 후임: 헤르만 뮐러, 오토 벨스 |
독일 제국 의회 의원 | 선거구: 뒤셀도르프 2 임기 시작: 1912년 2월 7일 임기 종료: 1918년 11월 9일 전임: 프리드리히 린츠 후임: 선거구 폐지 |
2. 생애
에베르트는 1871년 2월 4일 바덴 대공국의 하이델베르크에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교에 가고 싶어 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1885년부터 1888년까지 안장 제작 기술을 배웠다.[1] 1889년 직인이 된 후 독일 곳곳을 여행하며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4][5]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서를 공부했지만,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할 실질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4]
1891년 브레멘에 정착하여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1] 1893년 사회주의 신문 ''브레머 뷔르거차이퉁''의 편집자로 일했고, 1894년 노동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루이즈 룸프와 결혼했다.[1][6] 이후 술집 주인이 되었고 브레멘 사회민주당의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 1900년 노동조합 서기로 임명되었고, ''브레머 뷔르거샤프트''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7] 1904년 브레멘에서 열린 당 전국 회의를 주재하며 사회민주당의 "온건파" 지도자가 되었고, 1905년 SPD의 사무총장이 되어 베를린으로 이사했다.[4]
1912년 ''라이히슈타크'' 의원으로 당선되었고,[1] 1913년 아우구스트 베벨이 사망하자 휴고 하세와 함께 공동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4][5]
1914년 7월 위기 당시 휴가를 보내고 있었으나, 전쟁이 선포된 후 독일 사회민주당의 자금을 가지고 취리히로 갔다.[8] 8월 6일 귀국하여 사회민주당 의원들을 이끌고 전쟁 자금 지원에 거의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지도록 했다.[8] 필리프 샤이데만과 함께 ''시민 평화''에 참여하여 전쟁을 지지했고, 이는 사회민주당의 분열로 이어졌다.[4] 1916년 하세가 사임하고, 에베르트는 샤이데만과 함께 ''Reichstag'' 대표단의 지도력을 공유했다.[4]
1918년 늦여름과 가을, 전쟁 패배가 분명해지자 군 최고 사령부는 독일 제국의 "의회화"를 추진했다.[9] 에베르트는 "우리는 틈새로 뛰어들어야 한다"며 당을 설득하여[9] 10월 초 막시밀리안 폰 바덴 공을 총리로 하는 새 정부에 참여했다.
1919년 2월 11일 제1차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독일 공화국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22] 8월 21일 독일 대통령으로 취임했다.[1] 그는 독일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가 원수였다.[6]
대통령으로서 빌헬름 쿠노와 한스 루터와 같은 중도 우파 인사를 수상으로 임명했으며, 제48조에 따른 광범위한 권한을 사용하여 카프 반란과 뮌헨 폭동에 대처했다.[4] 1924년까지 대통령의 비상 권한을 총 134번 사용했다.[28]
에베르트는 담석과 잦은 담낭염 발병으로 고통받았다. 1925년 2월 중순 급성 질환을 앓았고, 2월 23일 밤 급성 패혈증으로 긴급 충수 절제술을 받았으나,[29] 4일 후 패혈성 쇼크로 사망했다.[30]
2. 1. 생애 초기
1871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그는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가난했기 때문에 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마구 제조업을 배워 마구 제조업자로서 독일 전역을 돌아다녔다. 곧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노동조합주의자가 되었는데, 그는 수정주의적이고 점진적이며 자유주의적인 '노동조합' 사회주의를 대변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 투쟁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독일 노동자계급의 생활수준을 높여서 혁명을 안 일으키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베르트는 독일 제국이 수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71년 2월 4일, 바덴 대공국의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재단사 카를 에베르트(1834–1892)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결혼 전 성씨 힝켈, 1834–1897)의 아홉 자녀 중 일곱 번째였다. 그의 형제자매 중 세 명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1][2][3] 에베르트는 대학에 다니고 싶어 했지만,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불가능했다.[4] 대신 1885년부터 1888년까지 안장 제작 기술을 배웠다.[1] 1889년 직인이 된 후, 그는 독일의 관습에 따라 독일 곳곳을 여행하며 나라를 구경하고 직업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만하임에서 그는 삼촌의 소개로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여 1889년에 입당했다.[4][5] 에베르트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서를 공부했지만,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할 실질적이고 조직적인 문제에 이념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4] 그의 정치 활동으로 인해 에베르트는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그는 거주지를 계속 옮겨 다녔다. 1889년에서 1891년 사이에 그는 카셀, 브라운슈바이크, 엘버펠트-바르멘, 렘샤이트, 콰켄브뤼크, 그리고 브레멘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안장 제작자 협회의 지부를 설립하고 의장을 맡았다.[1]
1891년 브레멘에 정착한 후, 에베르트는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1] 1893년에는 사회주의 신문 ''브레머 뷔르거차이퉁''의 편집자로 일하게 되었다. 1894년 5월, 그는 수동 노동자의 딸이자 하녀, 상자 라벨링 업무에 종사했으며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루이즈 룸프(1873–1955)와 결혼했다.[1][6] 이후 그는 사회주의 및 노동 운동의 중심지가 된 술집 주인이 되었고 브레멘 사회민주당의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 1900년, 에베르트는 노동조합 서기로 임명되었고, 사회민주당 대표로서 ''브레머 뷔르거샤프트''(시 및 주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7] 1904년, 에베르트는 브레멘에서 열린 당 전국 회의를 주재했고, 더 많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1] 그는 사회민주당의 "온건파" 지도자가 되었고, 1905년에는 SPD의 사무총장이 되어 베를린으로 이사했다.[4] 당시 그는 당 집행부의 최연소 구성원이었다.[6]
한편, 에베르트는 SPD가 승리할 가능성이 없는 선거구에서 여러 차례 ''라이히슈타크'' (독일 의회) 의석에 출마했다. 1898년 페히타(올덴부르크 대공국), 1903년과 1906년 슈타데(하노버 주).[6] 그러나 1912년, 그는 엘버펠트-바르멘 (현재 부퍼탈의 일부) 선거구에서 ''라이히슈타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1] 이 선거에서 SPD는 총 397석 중 110석을 차지하며 중앙당을 넘어 ''라이히슈타크''에서 가장 강력한 정당이 되었다. 1913년 8월 13일 아우구스트 베벨이 사망하자, 에베르트는 9월 20일 예나에서 열린 회의에서 473표 중 433표를 얻어 공동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4][5] 그의 공동 의장은 휴고 하세였다.[1]
2. 2. 정치 활동
1918-1919년 독일 혁명으로 SPD은 11월 7일 내각에서 더 강력한 발언권을 요구했으며, 프로이센 왕국의 의회주의 확대와 빌헬름 2세 황제 및 왕세자 빌헬름의 퇴위를 요구했다. 에베르트는 군주제 유지를 선호했지만, "황제가 퇴위하지 않으면 사회 혁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 죄처럼 싫어한다"라고 말했다.[11]11월 9일, 혁명이 베를린에 도달하자 SPD는 영향력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막스 공작의 정부에서 사임한다고 발표했다.[10] 막스 공작은 빌헬름 2세에게 퇴위를 설득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퇴위했다고 발표했고,[9] 다음날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12]
막스 공작의 발표 직후, 에베르트는 총리에게 정부를 넘겨달라고 요청했고,[10] 막스 공작은 사임하며 에베르트에게 직위를 넘겼다. 에베르트는 독일 총리이자 프로이센 총리가 된 최초의 사회주의자였다.[9]
에베르트는 국민들에게 침착과 질서 회복을 요청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필리프 샤이데만은 독일을 공화국으로 선포했고, 에베르트는 이에 격분하며 선출된 국민 의회에 결정을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10]

인민 대표 평의회가 에베르트 지도하에 권력을 잡으려 했지만, 에베르트는 자신의 당과 권력을 공유해야 했다.[9] 11월 10일, SPD는 새로 선출된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 다수가 지지자들 중에서 나오도록 보장했고, USPD는 협력과 인민 대표 평의회 권력 공유에 동의했다. 에베르트는 SPD와 USPD 각각 3명으로 구성된 평의회에 협약을 발표했고,[9] 에베르트와 하아세(USPD)는 공동 의장이 되었다.[1] 같은 날, 빌헬름 그뢰너는 에베르트에게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군대 충성을 약속했다. 에베르트는 장교단에 부대 지휘권이 남을 것을 약속했고, 힌덴부르크는 군대 질서 유지를 위해 OHL 수장으로 남았다.[13][9] 이는 에베르트-그뢰너 협약으로 알려졌다.[14]
에베르트 지도하에 인민 대표 평의회는 여러 사회 개혁을 도입했다.[15][17] 혁명 초기, 에베르트와 SPD 지도부는 보수, 민족주의 세력 편을 들었고,[9] 에베르트와 그뢰너는 베를린 질서 회복 계획을 세웠다.[18]
12월 16일, 제국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는 국민의회 선거일을 1919년 1월 19일로 정했다.[9] 12월 24일, 베를린에서 전투가 벌어졌고(크리스마스 위기)[9], USPD는 12월 29일 인민 대표 평의회를 떠났다. 다음 날, SPD의 구스타프 노스케와 루돌프 비셀이 자리를 차지했다.[9]
1919년 1월 5일, USPD와 KPD은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켰다.[20] 에베르트는 자유군단으로 봉기를 진압했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 약 170명이 사망했다.[21]
2. 2. 1. 사회민주당 정치 활동
1905년에 독일 사회민주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의 당원과 지지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으며, 얼마간의 물질적인 자산과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다. 그는 당의 행정체제를 혁신하면서 타자기를 도입했고 당사수색을 염려해 갖추어놓고 있지 않던 서류함들을 구비했다.[9]하이델베르크에서 재봉사의 아홉 남매 중 일곱째 아들로 태어난 에베르트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마구 수습공이 되었다. 그러나 사장과 싸운 탓에 장인(마이스터) 면허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한동안 실업을 경험하기도 했다. 수련 중에 노동조합에 투신하여, 1889년 경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여 정치에 경도되었다. 1890년, 하노버에서 마구 직공 조합의 서기장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의해 당국의 감시를 받던 그는 이주를 강요받아 브레멘으로 이사했다.
브레멘에서는 직공 및 임시 노동자로 지냈다. 1893년에 SPD 계열의 지역 신문 '브레멘 시민 신문' 편집원이 되었다. 이듬해 SPD의 지구 대표가 되어 정치 경력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때 루이제 룸프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평생 에베르트를 지지하게 된다. 에베르트는 음식점 경영을 이어받았고, 그 가게는 브레멘의 노동 조합원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1900년에 노동조합의 서기로서 수입을 얻게 되었고, 1902년에는 헤르만 뮐러와 함께 브레멘의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과 생활의 실정을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SPD는 1904년에 브레멘에서 당 대회를 열었는데, 그 의장을 맡은 에베르트는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이듬해인 1905년에 SPD 사무국장이 되어 14년간 살았던 브레멘을 떠나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SPD의 당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거기서 마르크스주의 및 경제학 강사를 맡고 있던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배웠다. 1912년에 에베르트는 제국 의회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고, SPD는 의회 제1당으로 약진했다. 이듬해인 1913년에 아우구스트 베벨이 사망하자, 9월 20일 당대회에서 그는 후고 하제와 함께 당수(간부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에베르트는 SPD의 온건 수정주의의 리더가 되었다. 또한 엘버펠트(현재의 부퍼탈)에서도 정치가를 지냈다.
2. 2. 2. 제1차 세계 대전과 사회민주당의 분열
1914년 7월 위기 당시 에베르트는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8월 초 전쟁이 선포되자, 에베르트는 오토 브라운 당 재무와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의 자금을 가지고 취리히로 가서 독일 제국에서 사회민주당이 불법화될 경우 해외 조직을 구축할 수 있도록 대비했다.[8] 8월 6일 귀국한 그는 사회민주당의 ''제국 의회'' 의원들을 이끌고 전쟁 자금 지원에 거의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지도록 했다. 특히 러시아 제국 차르의 독재 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전쟁을 애국적이고 방어적인 필요한 조치로 받아들였다.[8]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8월 4일 전시 예산안 의결에 즈음하여 에베르트는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버려두지 않겠다"며 전쟁을 필요한 애국적 방어 수단으로 받아들이고(부르크프리덴), 전시 적응법을 지지하여 당론 구속으로 거의 만장일치로 투표하게 했다.
에베르트와 필리프 샤이데만 등 "온건파"들의 지도 아래, 사회민주당은 ''시민 평화''에 참여했다. 이는 전쟁 기간 동안 국가의 에너지를 오로지 독일의 성공적인 종전을 위해 집중시키기 위해 ''Reichstag''의 정당들 간의 국내 정책 차이를 억누르기 위한 합의였다. 이로 인해 당은 타협적인 평화를 목표로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사회민주당의 분열로 이어졌다. 전쟁에 급진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은 1917년 초에 사회민주당을 떠나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USPD)을 결성했다.
1916년 1월, 하세가 사임했다.[1] 비슷한 정책 갈등으로 인해 에베르트는 ''Reichstag''의 일부 좌파 의원들과의 의회 동맹을 종료하고 1916년에 중앙당 및 독일 진보당과 긴밀히 협력하기 시작했다.[4] 나중에 에베르트에 의해 쫓겨난 이들은 스스로를 "스파르타쿠스단"이라고 불렀다. 1916년부터 에베르트는 샤이데만과 함께 ''Reichstag'' 대표단의 지도력을 공유했다.[4]
전쟁 승리 전망이 희박해지자 전쟁에 반대하는 하제나 카를 카우츠키를 비롯한 좌파는 1916년에 탈당하거나 제명되었다. 이듬해 4월 미국이 연합국에 참전하자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USPD)을 결성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나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 급진 좌파는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하여 분리되었다. 에베르트는 하제의 의원단장 직을 이어받고 샤이데만이 공동 당수가 되었다.
그는 서부 전선에서 군사적 정복을 통한 영토 획득 정책에 반대했지만(독일어를 사용하고 쉽게 편입될 수 있었던 룩셈부르크는 예외), 방어적 투쟁으로서 전쟁 노력을 전반적으로 지지했다.[4] 에베르트는 네 명의 아들 중 두 명이 전쟁에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하인리히는 1917년 2월 마케도니아에서, 게오르크는 1917년 5월 프랑스에서 전사했다.[6] 이 대전에서 에베르트의 세 아들 중 두 명이 전사했고, 막내 프리드리히도 부상을 입었다.
1917년 6월, 에베르트가 이끄는 사회민주당 대표단은 룩셈부르크를 제외한 서부 전선에서의 영토 병합 없이 전쟁을 종식시키고,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부분의 알자스-로렌을 반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회의를 위해 다른 국가의 사회주의자들과 회담하고자 스톡홀름으로 갔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다.[6]
2. 2. 3. 독일 혁명기(1918~1919)와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1918년 11월 9일, 혁명이 성공한 베를린에서 막스 폰 바덴 총리는 에베르트에게 총리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9] 에베르트는 황제를 위한 섭정체제 구성을 희망했지만, 혁명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11월 10일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대표들로 소비에트 정부를 구성했다. 이 인민대표위원회는 노동자·병사위원회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며 독일과 독일 공화국을 대변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베를린의 공장과 연대에서 자의적으로 선출된 인사들의 집합에 불과했다.[36]에베르트는 인민대표위원회와 노동자·병사위원회의 권력을 가능한 한 빨리 자유롭게 선출된 독일 의회에 이양하고자 했다. 그는 사회주의 정권보다는 자유주의적인 연립정부가 형성되기를 희망했다. 1919년 1월 선거에서 흑-적-황 연합은 85%의 득표로 다수당이 되었고, 에베르트의 동료인 필리프 샤이데만이 이끄는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정부는 흑-적-황 연합 3당을 기초로 구성되었다. 흑-적-황 연합은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했고, 에베르트는 이들의 지지를 얻어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thumb 수상 (중앙 우)과 '''에베르트''' (중앙 좌) (1920년)]]
혁명의 고조 속에서도 에베르트는 전선에서 복귀한 병사로 구성된 의용군으로 급진적인 노동자·병사 레테(평의회)의 움직임을 억누르려 했다. 크리스마스에 궁전을 점거한 레테의 수병을 무력 진압하기로 한 에베르트의 결정에 반대하여 USPD 위원들은 임시 정부에서 이탈했다.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원에 의한 폭동이 발생하자 에베르트는 군대와 의용군으로 이를 진압했다. 이 폭동으로 독일 전국에서 수천 명이 사망했다. 같은 달 제헌 의회를 위한 총선거에서 SPD는 제1당이 되었고, 2월 6일 바이마르에서 국민 회의가 개최되어 바이마르 헌법 제정과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이 결정되었다. 2월 11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에베르트는 독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 2. 4. 바이마르 대통령 시절
에베르트와 헌법학 교수이자 바이마르 헌법의 기초자인 후고 프로이스는 지역 정부가 연결되어 있는 라이히 체제를 없애려 했다. 그러나 구(舊) 독일 국가들(Länder)은 통일 국가(Einheitsstaat) 수립을 위한 에베르트와 프로이스의 계획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프로이센은 계속해서 별개의 국가(land)로 남아 있었고, 당시까지도 구 독일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집단과 세력의 권력은 손상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왜냐하면 에베르트가 대통령으로 있던 초기 몇 년 간 바이마르 공화국은 에베르트의 동료였던 좌파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대항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공산주의와의 내전으로 그 힘을 소진했으므로, 공화국의 영구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구 독일 제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민주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에베르트와 그의 동료 구스타프 노스케 국방장관은 의용단(Freikorps)을 모집했다. 대부분 구 독일 제국 군대의 장교로 구성된 의용단은 공산주의자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그러한 진압은 공화국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나온 것이었다. 후에 구 장교 부대는 공화국 군대인 국방군(Reichswehr)의 주력 부대가 되었다. 이와 함께 장교 계급, 구 관료, 엘베 강 동쪽의 토지 귀족인 융커 계급 역시 혁명에서 살아남았으며, 그들은 대토지와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4]1920년 6월 6일 바이마르 공화국 제1대 의회 선거에서 흑-적-황 연합은 패배했고, 이후 그 패배를 만회할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선거에서 참패한 후 사회민주당은 독일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할 수 없었고 그의 권력 기반도 사라져 버렸다. 사회민주당의 패배는 베르사유 조약의 직접적인 결과였는데, 당시 에베르트를 포함한 독일인들은 베르사유 평화 조약이 독일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선거 결과로 인해 흑-적-황 연합은 자신감을 상실했으며, 그것은 비록 독일의 국력과 안정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베르사유 평화 조약의 첫 결과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항한 쿠데타로 나타났다. 카프 반란으로 불리는 이 쿠데타는 1920년 3월 13일에 일어났는데, 쿠데타의 주동자는 베르사유 평화 조약에 의해 해체하기로 되어 있던 의용단과 국방군 내의 급진적인 민족주의자 집단이었다. 쿠데타의 리더인 지방 관료 볼프강 카프는 군주제의 부활을 계획했다. 쿠데타는 며칠 만에 진압되었으나, 에베르트가 기대했던 군대와 사회민주당 간의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곧이어 정부는 거의 치명적인 위기를 맞았다. 1923년 1월 독일이 베르사유 평화 조약의 배상금 조항이 규정한 석탄 인도를 이행할 수 없다고 선언하자, 배상금 문제의 확실한 해결을 바라던 프랑스는 루르 지역을 점령했다. 대부분의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에베르트는 국민적 반대와 루르 지역의 총파업을 지지했으며, 그 결과 외국의 군사 지배는 저지되었다. 그러나 파업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양산되고, 인플레이션은 엄청난 비율로 증가하는 등 독일에는 심각한 사회적·정치적 위기가 초래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에른에서 거의 권력을 잡기에 이르렀다. 루르 총파업 전날 총리에 임명된 무소속 출신 빌헬름 쿠노는 에베르트가 특별히 신임하는 사람이었지만, 위기 상황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쿠노의 뒤를 이은 중도 우파 인민당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이 위기를 수습했다. 처음에 슈트레제만의 임명을 주저했던 에베르트는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으나 나중에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에베르트는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민주당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슈트레제만의 우익화 경향을 옹호했다. 에베르트의 이러한 태도는 흑-적-황 연합의 해체를 가져왔고, 1923년 11월 슈트레제만 총리는 사임했다. 이로써 에베르트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은 이후 몇 년 동안 독일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없애버린 셈이다.
독일의 통일은 유지되었다. 인플레이션은 화폐 개혁을 통해 진정되었으며, 배상금 문제는 미국의 배상금 감축 제안에 의해 어느 정도 해결을 보았다. 루르 지방의 군대 철수도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많은 우파 독일인들은 그에 대한 중상모략을 계속했다. 1924년 12월 마그데부르크 배심 재판의 판사들은 최소한의 합법적 견지에서 전쟁 동안 에베르트의 행위, 즉 그가 군수 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한 행위에 반역죄를 선고했다. 이 재판 와중에 에베르트는 맹장염 치료를 소홀히 하여 1925년 2월 28일 사망하였고, 자신의 고향인 하이델베르크에 안장되었다.[1]
3. 죽음과 장례
에베르트는 담석과 잦은 담낭염으로 고통받았다. 우익 반대자들의 악의적인 공격은 종종 사법부에 의해 묵인되거나 지원받았고, 이러한 공격에 대한 방어는 그의 건강을 악화시켰다.[4] 1924년 12월, 마그데부르크 법원은 에베르트를 "조국 반역자"라고 칭한 언론인에게 벌금을 부과했지만, 법률적으로 에베르트가 반역을 저질렀다고 판결했다.[4] 이 소송으로 그는 의료 지원을 받지 못했다.[4]
에베르트는 1925년 2월 중순 급성 질환을 앓았다. 2주 후 급성 패혈증을 앓았고, 충수염으로 긴급 충수 절제술을 받았다.[29] 4일 후, 54세의 나이로 패혈성 쇼크로 사망했다.[30]
에베르트는 하이델베르크에 묻혔다. 그의 장례식에는 여러 고위 정치인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연설했고, 하이델베르크 성령 교회의 목사 헤르만 마스도 연설했다.[31][32] 에베르트가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마스의 장례식 참여는 교회와 보수 정치인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31][32]
뮌헨의 신문은 독일이 대전에서 패한 것은 에베르트 등의 "배후로부터의 일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에베르트는 파업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 위원장을 맡았다고 항변했지만, 마그데부르크 지방 법원 판사는 에베르트가 국가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했다. 에베르트는 1925년 2월 28일 복막염으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고향 하이델베르크에 매장되었다.
4. 역사적 평가
일부 역사가들은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및 공산주의 스파르타쿠스단이 추진했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막기 위한 에베르트의 행동이 불가피했다고 옹호한다. 반면, Bernt Engelmann|베른트 엥엘만de과 제바스티안 하프너 같은 역사가들은 당시 독일에서 조직화된 공산주의는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33] 에베르트와 국방부 장관 구스타프 노스케가 반란군에 대항한 행동은 ''자유군단''의 급진화와 파시스트 사상 지지 증가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에베르트가 1919년 8월 법으로 서명한 바이마르 헌법은 사회 각계각층에 노동자 평의회를 설립하도록 규정했지만,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에베르트는 항상 의회 민주주의 제도를 인민의 의지를 더 정당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혁명의 산물인 노동자 평의회는 과도기 동안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했다. 극좌파의 "모든 권력을 (노동자) 평의회에!"라는 구호와 대조적으로, 그의 당의 구호는 "모든 권력을 모든 인민에게!"였다.
에베르트는 혁명이 아닌 '개혁'만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대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좌파에게 반역자로 불리는데, 그들은 그가 극우,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의 부상을 위한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정책이 정당했다고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들은 그가 독일을 공산주의의 과도함으로부터 구했다고 주장한다.[34]
뮌헨의 신문이 독일이 대전에서 패한 것은 1918년 1월의 스트라이크 위원장이었던 에베르트 등이 "배후로부터의 일격"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소송 소동이 일어났다. 오히려 파업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 위원장을 맡았다고 에베르트는 항변했지만, 마그데부르크 지방 법원의 판사가 에베르트는 그 당시 국가 반역죄였다고 말하며 에베르트를 곤경에 빠뜨렸다.
독일 역사상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현재 독일에서는 모든 도시에서 그의 이름이 붙은 대로가 있다. 한편 에베르트는 오늘날까지 매우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후임 힌덴부르크보다 많은 횟수로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따른 대통령령을 남발하고, 좌파 노동자의 폭동을 우파 의용군을 이용하여 억제했기 때문에, 치안 유지라는 점에서는 일정한 평가를 받는 한편, 좌파로부터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5.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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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르트와 하제의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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