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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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는 1909년부터 1917년까지 독일 제국의 총리를 역임한 정치인이다. 그는 프로이센 내무장관과 제국 내무장관을 거쳐, 빌헬름 2세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었다. 베트만홀베크는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등 외교적으로 유화 정책을 추구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군부의 영향력 확대로 인해 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었다. 국내적으로는 좌우 세력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했으나, 전쟁 장기화와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 등으로 인해 영향력을 상실하고 1917년 사임했다. 사임 후에는 독일 혁명을 비판하며 회고록을 집필했고, 192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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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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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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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테오발트 테오도르 프리드리히 알프레트 폰 베트만 홀베크 |
출생일 | 1856년 11월 29일 |
출생지 | 호헨피노, 프로이센 왕국 |
사망일 | 1921년 1월 1일 |
사망지 | 호헨피노, 프로이센 자유주, 바이마르 공화국 |
학력 | 라이프치히 대학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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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직책 | 독일 제국 제5대 제국수상 프로이센 왕국 제27대 총리 독일 제국 제4대 내무장관 프로이센 왕국 내무대신 브란덴부르크주 지사 |
독일 제국 수상 임기 시작 | 1909년 7월 14일 |
독일 제국 수상 임기 종료 | 1917년 7월 13일 |
프로이센 왕국 총리 임기 시작 | 1909년 7월 14일 |
프로이센 왕국 총리 임기 종료 | 1917년 7월 13일 |
독일 제국 내무장관 임기 시작 | 1907년 6월 24일 |
독일 제국 내무장관 임기 종료 | 1909년 7월 10일 |
프로이센 왕국 내무대신 임기 시작 | 1905년 3월 21일 |
프로이센 왕국 내무대신 임기 종료 | 1907년 6월 24일 |
브란덴부르크주 지사 임기 시작 | 1899년 10월 9일 |
브란덴부르크주 지사 임기 종료 | 1905년 5월 29일 |
군주 | 빌헬름 2세 |
부수상 | 클레멘스 폰 델브뤽 칼 헬페리히 |
전임 수상 | 베른하르트 폰 뷜로 |
후임 수상 |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
전임 내무장관 | 아르투어 폰 포자도프스키베너 |
후임 내무장관 | 클레멘스 폰 델브뤽 |
소속 정당 | 무소속 |
군사 경력 | |
소속군 | 독일 제국 육군 프로이센 왕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4년 – 1918년 |
최종 계급 | 명예 육군 중장 |
개인 정보 | |
배우자 | 마르타 폰 퓔 |
2. 초기 생애와 경력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는 1856년 11월 29일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주 호헨피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로이센 관리 펠릭스 폰 베트만홀베크, 할아버지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총장과 프로이센 문화부 장관을 지낸 법학자 아우구스트 폰 베트만홀베크였다.[1] 베트만 가문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은행가 집안이었으며,[1] 어머니 이사벨라 드 루주몽은 프랑스계 스위스인이었다.
포르타 기숙학교를 거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2] 1년간 의무 복무병으로 군 복무 후,[2] 1884년 왕립 정부 평가관으로 공직에 입문했다.[3]
1885년 임시로 군수(Landrat)직을 맡았고, 1886년 정식 임명되어 29세에 브란덴부르크 주 최연소 군수가 되었다.[4] 융커 출신 아버지와 달리, 마을을 직접 방문하여 지주와 노동자 모두와 소통하며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중시하는 업무 방식으로 당시 가장 진보적인 군수로 평가받았다.[5]
1890년 독일 연방 선거에 출마, 한 표 차로 승리했으나 부정행위 의혹으로 재선거가 치러졌고 불참했다. 이후 당 정치와 거리를 두고 독립적 입장을 고수했다.
1896년 군수직에서 물러난 후, 1899년 43세에 브란덴부르크 주 총독(Oberpräsident)이 되었다.[6] 빠른 승진에는 정치적 재능, 할아버지의 명성, 클로드빅 폰 호엔로에 총리의 후원이 작용했다.[6]
1905년 프로이센 내무장관으로 임명된[7] 베트만홀베크는 보수와 자유주의-급진주의 사이의 "대각선 정책"을 추구했다.[8] 사회민주당의 국가 구조 헌신에 주목, 공공 복지를 강조했다.[9] 3계급 선거권 문제에는 노동 계급 열망을 칭찬하면서도 보통선거 도입에는 반대했다.
포제넨 주에서 발생한 폴란드어 종교 수업 요구 파업에는 군사력 사용을 거부하고 폴란드어 수업을 허용했다.[11][12]
1907년 베른하르트 폰 뷜로 총리의 추천으로 제국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13] 1908년 황제에게 프로이센 왕국 선거 개혁을 건의, 발표하게 했다.[16]
2. 1. 가문과 교육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는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였던 브란덴부르크주 호헨피노에서 프로이센 관리 펠릭스 폰 베트만홀베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아우구스트 폰 베트만홀베크는 저명한 법학자이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총장 겸 프로이센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그의 증조부 요한 야코프 홀베크는 부유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은행가 집안인 베트만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1] 그의 어머니 이사벨라 드 루주몽은 프랑스계 스위스인이었다.그는 포르타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2] 그는 경력을 시작하기 전에 1년간 의무 복무병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1889년, 베트만홀베크는 프로이센 총리 에른스트 폰 프펠의 조카인 마르타 폰 프펠과 결혼했다.
2. 2. 관료 경력
베트만홀베크는 1884년 12월 왕립 정부 평가관으로 경력을 시작했다.[3] 1885년, 그의 아버지가 군수(Landrat)직을 사임하고자 하는 뜻을 밝히자 임시로 그 직책을 맡았고, 1886년 1월 공식 임명을 통해 그 자리를 확보했다. 그는 29세의 나이에 브란덴부르크 주에서 가장 젊은 군수가 되었다.[4]베트만홀베크의 아버지는 프로이센 지주 계급인 융커(Junker)들의 전형적인 권위적인 방식으로 직무를 수행했던 반면, 테오발트는 마을들을 직접 방문하여 지주들과 노동자들 모두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업무는 권위적인 지시가 아닌 시민계급의 자발적인 참여라는 원칙에 기반을 두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그를 당시 가장 진보적인 군수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5]
세 정당의 연합은 1890년 제국 의회 선거(1890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베트만홀베크를 공동 후보로 내세웠다. 그는 한 표 차이로 승리했지만, 부정행위 의혹에 대한 반대 후보들의 항의로 인해 재선거가 치러졌고, 베트만홀베크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자유보수당(Free Conservative Party) 의원이자 당 정치인으로서 그의 짧은 경력의 끝을 의미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독립적인 입장을 유지했고 당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1896년, 10년간의 군수직 근무 후 그는 두 차례의 빠른 승진을 거쳐 1899년 43세의 나이에 프로이센에서 가장 젊은 브란덴부르크 주의 총독(Oberpräsident)이 되었다. 그의 급속한 성공은 그의 정치적 재능, 그의 할아버지의 명성, 그리고 그의 부상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제국 총리 클로드빅 폰 호엔로에(Chlodwig zu Hohenlohe-Schillingsfürst)의 덕분이었다.[6]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1882년 프로이센 내무성에 입성했다. 1899년에는 브란덴부르크 주(Provinz Brandenburg) 주지사에 취임하여 7월에 전 프로이센 총리 에른스트 폰 푸르의 딸 마르타와 결혼했다. 1905년에 프로이센 내무장관에 취임하고, 1907년에는 독일 제국의 국무대신(Staatsminister (Deutschland))에 임명된다.[86]
2. 3. 프로이센 내무장관 및 제국 내무장관
베트만홀베크는 1905년 3월 21일 프로이센 내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프로이센의 기존 질서와 맞지 않는 자신의 견해 때문에 이 직책을 맡는 것을 매우 망설였다.[7] 당시 독일 사회는 민족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우익과 급진적인 공화주의적 좌익으로 분열되고 있었는데, 베트만홀베크는 이러한 상황에서 내정에 타협적인 노선을 취하고자 했다. 그는 독일의 보수 세력과 자유주의-급진주의 세력 사이에서 "대각선 정책"을 추구하고자 했다.[8]그는 사회민주당이 기존 국가 구조에 헌신하는 것에 주목했다. 1905년 4월 6일 프로이센 대표원에서 그는 공공 복지를 "오늘날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과제"라고 묘사하며, 사회 각 계층의 자유로운 참여를 통해 관료주의적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9] 그는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권 문제에 대해서는 "민주적 평등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노동 계급의 열망을 칭찬하며, 국가 의회의 보통선거 도입에는 반대했다.
같은 해, 포제넨 주에서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이 폴란드어로 종교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10] 보수파는 군사력 증강을 원했지만, 베트만홀베크는 이를 거부하고 폴란드어 종교 수업을 허용했다.[11][12]
1907년, 베트만홀베크는 베른하르트 폰 뷜로 총리에 의해 제국 내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맡는 것을 망설였지만, 황제의 명령으로 여겨 결국 수락했다.[13] 1907년 10월, 그는 기독교 노동조합 총회인 독일 노동자 대회에 참석했는데, 이는 황제의 국무장관이 참석한 중대한 진전으로 평가받았다.
1908년 10월 20일, 베트만홀베크의 조언에 따라 황제는 프로이센 왕국의 선거 개혁을 발표했다. (프로이센 선거 제도는 1918년 11월 12일까지 최종적으로 개혁되지 않았다.) 빌헬름 2세는 "유기적인 추가 발전"을 약속했는데, 그는 이것을 "현재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프리드리히 나우만은 베트만홀베크가 황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16]
3. 제국 총리
베트만홀베크는 영국과의 군비 경쟁을 피하고 유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해군 대신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반대로 실패했다. 1911년 제2차 모로코 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영국과의 관계 개선은 계속되었다. 발칸 전쟁 동안에는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와 협력하여 긴장 완화에 힘썼고, 3B 정책에 대한 타협을 모색하는 협상도 진행했다.
국내 정치에서 베트만홀베크는 좌파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우파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타협을 시도하며, 다른 정치인들과의 갈등을 피하려 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베트만홀베크는 외무장관 고틀리프 폰 야고와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에드워드 그레이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왕국 간의 조정을 제안했지만, 베트만홀베크는 오스트리아가 개전을 망설일 것을 우려하여 이 제안을 무시했다. 베트만홀베크와 야고는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전면전을 예상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 최후통첩이 발표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사임을 요청했으나, 빌헬름 2세는 이를 거부했다.[88]
베트만홀베크는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벨기에의 중립을 위반하고, 이에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크게 분노했다. 그는 에드워드 고셴 주독 영국 대사에게 1839년 런던 조약(벨기에 중립 보장 조약)을 "쓰레기"라고 칭하며, 영국이 친족 국가와 전쟁을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베트만홀베크는 영국의 식민지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계획, 특히 힌두-독일 음모에 깊이 관여했다.
일반적으로 베트만홀베크는 대전 중 온건 정책을 펼치려 했으나, 육군 참모본부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프리츠 피셔의 연구에 따르면, 베트만홀베크는 1914년 9월에 폴란드 전역을 병합하고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킨 후 독일인을 이주시켜 생존권을 확보하는 "Septemberprogramm"을 검토하는 등, 알려진 것보다 적극적으로 강경파의 의견을 수용했다.[89]
베트만홀베크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중재를 통한 조건부 평화를 모색했다. 1916년 여름, 에리히 폰 팔켄하인을 축출하고 군부의 실권을 장악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주장했지만, 베트만홀베크는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1917년 3월, 헤닝 폰 홀첸도르프 제독의 각서에 의해 무제한 잠수함전이 강행되었다. 베트만홀베크는 군부의 방침에 반대하며 점차 정부 내 영향력을 상실했고, 1917년 7월 13일 라이히스타크에서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의 평화 결의안이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진보당, 중앙당 연합에 의해 가결되면서 사임했다. 후임 총리로는 게오르크 미하엘리스가 임명되었다. 이후 독일의 전쟁 지휘, 외교 등 행정은 육군 최고 사령부에 의해 주도되어 사실상 군부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
1918년, 독일 국내의 전쟁 지지도는 파업과 정치적 선동으로 인해 점차 약화되었다. 10월, 독일 제국 해군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킬 군항의 반란은 독일 11월 혁명으로 이어져 전쟁은 종결되었다.
3. 1. 임명과 국내 정책
빌헬름 2세 황제는 1909년 7월 7일 베트만 홀베크를 제국 총리로 임명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뷔로 총리의 부총리였으며, 황제는 그가 당파 간의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타협할 의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수수한 외모와 빌헬름에 대한 고문으로서의 성공은 또한 그를 황제의 총애를 얻게 했다. 베트만 홀베크의 임명은 외무부의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을 포함하여 정치권에서 이전에 제안된 바 있다.[17]전반적으로 모든 당에서 임명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지만, 가톨릭 중앙당은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고, 사회민주당(SPD)에게 베트만 홀베크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또 다른 총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당파의 관대한 중립성은 베트만 홀베크의 다면적인 측면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융커가 아니었는데, 이는 좌파가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의 가계는 그를 국민자유당과 중앙당으로부터 인정받게 했고, 행정관으로서의 활동은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게 했다.
해외의 반응은 전적으로 우호적이었다. 프랑스의 Journal des Débats|주르날 데 데바|프랑스어는 프랑스-독일 관계에 대한 "안심할 만한 신호"라고 말했다. 베를린 주재 프랑스 대사인 쥘 캉봉은 새로운 제국 총리에게 축하 편지를 보냈는데, 이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파울 볼프 메테르니히가 이끄는 런던 주재 독일 대사관은 영국의 에드워드 7세 국왕이 새로운 총리를 "평화 유지를 위한 중요한 파트너"로 여겼다고 전했다.
1910년 1월 베트만 홀베크는 정부가 "국민의 정치적 교육이라는 중대한 과제, 즉 구호와 피상적인 평가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것"에 직면해 있다고 적었다. 그는 국사(國事)의 기본적인 과제를 "발전 상황을 경청하는 일종의 행위"로 보았다. 1910년 그는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법을 개혁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했지만, 프로이센 주의회(Landtag)에서 거부되었다.[17] 그는 또한 라익스타크에서 1870-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프랑스로부터 획득한 알자스-로렌의 헌법적 지위 개혁을 추진했다. 알자스-로렌은 양원제 의회를 가진 독자적인 헌법을 부여받았고, 하원은 라익스타크 선거(보통 남성 선거권)에 따라 선출되었다. 라익스 총리의 법안은 보수파와 군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11년 3월 23일 통과되었다. 프로이센과는 달리 베트만 홀베크는 영향력 있는 보수파의 반대를 받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민주적인 헌법 개혁이 가능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1882년 프로이센 내무성에 입성했다. 1899년에는 브란덴부르크 주(Provinz Brandenburg) 주지사에 취임하여 7월에 전 프로이센 총리 에른스트 폰 푸르의 딸 마르타와 결혼했다. 1905년에 프로이센 내무장관에 취임하고, 1907년에는 제국 국무장관(Staatsminister (Deutschland))에 임명된다. 1909년에 베른하르트 폰 뷰로의 사임으로 인해 후임으로 제국 총리에 취임했다.[86]
3. 2. 외교 정책과 제1차 세계 대전
베트만홀베크는 외교 정책에서 영국과의 이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알프레트 폰 키델렌-바흐터(Alfred von Kiderlen-Waechter)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했으나, 1911년 제2차 모로코 사태에서 키델렌-바흐터의 강경 외교는 황제의 평화 정책과 일치하지 않았다. 베트만홀베크는 외교 전문성 부족을 느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신카메룬(Neukamerun) (Neukamerun|노이카메룬de) 획득으로 위기를 해결했다.[19] 이후 자유주의 성향의 빌헬름 졸프(Wilhelm Solf)를 식민지국무장관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외교 정책을 강화했다.모로코 위기 이전 독일-러시아 관계는 긍정적이었으며, 1910년 니콜라이 2세(Tsar Nicholas II)의 포츠담 방문과 1912년 발티스크포트(현재 에스토니아 팔디스키) 회담을 통해 양국 관계는 더욱 개선되었다. 베트만홀베크는 블라디미르 코코프초프(Vladimir Kokovtsov) 러시아 총리, 세르게이 사조노프(Sergey Sazonov) 외무장관과의 대화를 통해 "신뢰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다고 기록했다.[20]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는 베트만홀베크에게 유럽 관세 동맹, 지중해에서의 영국 제국주의 중단, 독일의 이익을 위한 영국과의 동맹을 제안했고, 베트만홀베크는 이에 "일반적으로 동의"했다.[20]
그러나 베트만홀베크의 두 번째 외교 정책 문제는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Alfred von Tirpitz) 제독의 독일 함대 확장이었다. 영국과의 대화를 통해 함대 확장을 조절하려 했으나, 양국 보수주의자들의 반대로 실패했다.[21] 1912년 할데인 사절단에서도 해군 군비 경쟁 합의에 실패했지만, 베트만홀베크는 에드워드 그레이(Sir Edward Grey) 영국 외무장관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22]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조약 협상을 통해 발칸 국가들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1912년 4월, 베트만홀베크는 군대 증강 법안을 추진했고,[24] 1년 후 군대를 13만 6천 명 증원하고 무기 구매를 위해 13억 마르크를 추가 요구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사회민주당(SPD)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만 마르크 이상 자산에 대한 "특별 방위 기여금"을 통해 법안을 통과시켰다.
1913년/1914년 연말,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제2차 발칸 전쟁이 종식되고, 러시아와의 관계도 안정되면서 베트만 홀베크는 외교 정책에 낙관론을 가졌다. 그러나 1914년 초여름 영국-러시아 해군 협정으로 그의 외교 정책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19]
1914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이후,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백지 수표"를 발행하여 동맹 의무를 확인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1914년 7월 6일, 7월 위기 동안 독일이 동맹국과 함께 싸울 것이라고 확신시켰다.[25]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공격 요구는 베트만 홀베크의 지원을 받았다.
베트만 홀베크는 갈등을 지역화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통첩[27]을 강경하게 작성할 것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영국의 중립성을 믿고 "오스트리아가 행동에서 중요한 이익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동맹국인 독일의 간섭은 있을 수 없다"고 런던에 전보를 보냈다.[26]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대부분을 수락했음에도,[28] 베트만 홀베크는 영국의 전쟁 참전 위협에 잠시 벨그라드 정지 제안을 했으나, 러시아의 불만을 우려했다.[29] 황제의 압력에 굴복한 베트만 홀베크와 외무부는 억제 요구를 약화시켰다.[30][31]
에드워드 그레이 경이 갈등이 확대될 경우 영국도 방관할 수 없다고 경고하자, 베트만 홀베크는 오스트리아에 러시아와의 협상을 촉구했지만, 독일은 "무모하게 … 세계적 대화재에 끌려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밝혔다.[19]
헬무트 폰 몰트케 참모총장의 총동원 촉구와 슐리펜 계획에 따른 벨기에 통과는 베트만 홀베크의 갈등 지역화 노력을 무너뜨렸다.[19] 독일은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고 동원을 시작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국제법에 따른 확증"을 위해 공식적인 선언을 고집했다.[33] 러시아의 동원 이후 독일이 동원함으로써, 독일 정부는 러시아 공격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사회민주당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33]
8월 3일, 베트만 홀베크는 에드워드 그레이에게 러시아의 동원이 독일을 궁지에 몰아 벨기에 통과를 요구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제법 위반을 피하고 "유럽 문화 국가들의 자멸의 광기" (Kulturnationen|쿨투어나치오넨de)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19][33]
8월 4일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베트만 홀베크는 라이히스타크에서 독일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러시아가 불을 지폈다고 강조했다. 그는 "벨기에에 대한 불의"는 바로잡혀야 하지만, 위협받는 사람들은 길을 뚫고 나갈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 에드워드 고슈 경 영국 대사와의 대화에서 베트만 홀베크는 1839년 런던 조약(벨기에 중립 보장 조약)을 "쓰레기 조각"이라고 부르며 영국이 친족 국가와 전쟁을 벌이려 한다고 비난했다.[34] 그는 자신의 노력이 "카드 집처럼 무너져 내렸다"고 한탄했다.[34]
베트만 홀베크는 1914년 8월 독일의 애국적 열기("1914년의 정신")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36] 9월 계획에서 제국은 유럽 영토 요구와 유럽 관세 동맹 창설을 포함한 구체적인 전쟁 목표를 설정했다.[37][38] 베트만 홀베크는 벨기에와 프랑스를 "약속"(Faustpfand|파우스트판트de)으로 언급하며 합병주의적 주장에 대한 수사적 무기로 사용했다.[40]
에리히 폰 팔켄하인 참모총장은 마른 전투 이후 불리한 군사 상황에 대한 대중 교육을 촉구했지만, 베트만 홀베크는 외무부와 사업 협회의 조언에 따라 군사적 진실 보급을 거부했다.[19]
전쟁 초기, 베트만 홀베크는 사회민주당을 제국에 협력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는 사회민주당 집행위원회를 체포하고 당을 해산하려는 군부의 계획을 거부했다.[45] 1914년 8월 4일 국회 연설에서 "나는 더 이상 어떤 당이나 종파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독일 형제이고 오직 독일 형제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45]
베트만홀베크는 영국과의 군비경쟁을 피하고 유화정책을 내세웠으나, 해군대신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반대로 실패했다. 1911년 제2차 모로코 사건으로 긴장 상태가 되었지만, 영국과의 관계 개선은 진행되었다. 발칸 전쟁 당시에는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와 협력하여 긴장 완화에 힘썼으며, 3B 정책에 대한 타협을 요구하는 협상도 벌였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외무장관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전면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레이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왕국의 조정을 제안했지만, 오스트리아가 개전을 주저할 것을 우려하여 제안을 무시했다. 그러나 베트만홀베크는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전면전을 예상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 최후통첩이 발표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사임을 청했지만, 빌헬름 2세에게 거절당했다.[88]
전쟁 이전 외교 정책의 대부분이 영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있었던 베트만홀베크에게는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벨기에의 중립을 깨고 영국이 선전포고를 한 것에 특히 분개했다. 에드워드 고셴 주독 영국 대사에게 "쓰레기"(1839년 벨기에 중립을 보장하는 런던 조약) 때문에 왜 영국이 전쟁을 하는가 하고 질문했다고 한다. 베트만홀베크는 영국이 참전할 경우의 계획을 몇 가지 세웠는데, 영국의 식민지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계획, 특히 힌두-독일 음모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정설에 따르면, 대전 중 베트만홀베크는 온건 정책을 취하려고 했지만 육군 참모본부의 독주에 휘둘렸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역사가 프리츠 피셔의 연구에 따르면, 종래 생각되었던 것보다 적극적으로 강경파의 의견을 채택했으며, 1914년 9월에는 폴란드 전역을 병합한 후 주민을 강제로 퇴거시키고 독일인을 직접 이주시켜 생존권을 확립하는 "9월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89]
베트만홀베크는 미국의 우드로 윌슨을 중재로 조건부 평화를 모색하고 있었고, 1916년 여름 에리히 폰 팔켄하인을 축출하고 군부의 실권을 장악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각각 동부 전선 사령관, 참모총장)가 주장하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반대했지만, 그들은 1917년 3월, 헤닝 폰 홀첸도르프 제독의 각서에 의해 무제한 잠수함전의 채택을 강행했다. 군부의 방침에 반대하는 베트만홀베크는 점차 정부 내에서 영향력을 잃어가고, 1917년 7월 13일에 라이히스타크에서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의 평화 결의가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진보당, 중앙당 연합에 의해 가결되고, 더욱이 군부의 의향에 따르는 총리를 원한 루덴도르프에 쫓기는 형태로 사임했다. 후임 라이히스총리에는 당시 거의 무명이었던 게오르크 미하엘리스가 취임했다. 그 이후 독일 국내의 전쟁 지휘와 외교 등 기타 행정은 힌덴부르크, 루덴도르프가 이끄는 군부(육군 최고 사령부)의 이후에 따르는 형태가 되어, 사실상의 군부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
1918년, 독일 국내의 전쟁 지지는 파업과 정치적 선동에 의해 점점 위협받게 되었다. 10월, 독일 제국 해군의 수병들이 영국 해군과의 최종 결전을 향해 출항 명령을 받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킬의 반란은 독일 11월 혁명의 계기가 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베트만홀베크는 라이히스타크를 설득하여 평화 협상에 응하는 것을 선택하게 하려고 했다.
3. 3. 전쟁 중의 정책과 사임
1913년 말, 자베른 사건으로 독일 정계와 여론이 혼란에 빠졌다. 베트만홀베크는 1913년 12월 3일 독일 제국 의회에서 황제의 군복은 어떤 상황에서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선언하며 육군장관 에리히 폰 팔켄하인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이전까지 그를 지지했던 중앙당, 진보인민당, 국민자유당, 사회민주당은 그에게 불신임안을 제출했다.[1] 필립 샤이데만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모범적인 헌법 질서를 언급하자, 베트만홀베크는 이를 무시하고 야유를 보냈다. 중도 성향이었던 총리는 우익으로 이동한 것처럼 보였고,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발언을 했다.1915년 2월, 정부는 프로이센의 선거 개혁을 포함하는 "재편성"을 결정했다. 베트만홀베크는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권이 "불가능해졌다"고 말하며 남성 평등 선거권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47] 그러나 그는 정치적 중도의 부재 속에서 양측으로부터 비난받았다.

1915년 3월, 올덴부르크 대공 프리드리 খাওয়াই 아우구스트 2세는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3세에게 베트만홀베크의 해임을 빌헬름 2세에게 요구할 것을 제안했지만,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이 이를 막았다.
1915년 봄, 베트만홀베크는 실레시아의 두 지역을 오스트리아에 할양하여 이탈리아가 협상국 편에 참전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그의 제안은 거부되었다. 이탈리아는 1915년 5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했다.[49]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이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공격하여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50] 베트만홀베크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피하려 노력했으나, 1916년 3월 초 사퇴 위협을 통해 이를 지연시켰다.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는 사임했고, 베트만홀베크는 잠수함 작전의 가장 큰 적수를 제거했다.
1916년 3월, 사민당(SPD)이 분열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하의 온건파는 당의 좌파와 결별했고, 후고 하제는 사임 후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결성했다. 베트만홀베크는 중도 정당 구성을 희망했으나 실패했다.

1916년 7월, 발터 라테나우 등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에게 최고군사령부(OHL)를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힌덴부르크를 지지하여 8월 28일 팔켄하인을 해임시키고, 힌덴부르크를 참모총장, 루덴도르프를 제1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전쟁 초기, 베트만 홀베크는 폴란드 입경지대를 병합하고 폴란드인들을 제거하는 계획을 지지했다.[54][55][56] 1916년 8월, 중앙 연합국 대표들은 폴란드의 독립적인 헌법 왕국에 동의했지만, 베트만 홀베크의 압력으로 전쟁 후 선포될 예정이었다.[57] 1916년 11월 5일 폴란드 섭정 왕국 선포가 발표되었다.
1916년 가을, OHL은 힌덴부르크 계획에 따라 보조 서비스 법을 초안하여 경제를 군사화하려 했다. 이 계획은 노동 조합과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 정당들의 저항으로 인해 수정되었다.[58]
1916년 10월 7일, 중앙당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베트만 홀베크는 의회가 최고군사령부(OHL)에 정치적 권력을 넘겨주었다고 기록했다.[59]
1916년 12월 12일, 베트만 홀베크는 협상을 통한 평화를 제안했으나 연합국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2월 18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평화 제안을 발표했다. 빌헬름 졸프는 벨기에령 콩고 합병을 제안했지만, 베트만 홀베크에게 식민지 전쟁 목표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61]
1917년 1월 7일, 베트만 홀베크는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1월 9일, 황실 평의회 회의에서 잠수함 작전이 결정되었다. 베트만 홀베크는 사임을 고려했으나, 빌헬름 2세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사임하지 않았다.
1917년 3월, 2월 혁명 이후 베트만 홀베크는 러시아와의 특별 평화 가능성을 보았다.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빌헬름 2세는 4월 23일 크로이츠나흐 전쟁 목표 회의를 시작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모든 합병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지만, 최고군사령부는 거부했다.[67]
1917년 2월 27일, 베트만 홀베크는 자유주의적 통치 형태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68] 3월 9일,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이고 의원내각제적인 모든 사상"을 거부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3계급 선거권 고집을 거부했지만, 이 문제를 서두르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69]

1917년 3월 31일, 베트만 홀베크는 평등 선거권을 언급하는 황제의 메시지 초안 위원회를 임명했다. 빌헬름 2세는 부활절 메시지에서 프로이센의 민주화에 동의했다. 루덴도르프는 이를 "혁명에 대한 굴복"이라고 묘사했다.[70]
베네딕토 15세의 평화 이니셔티브에 대한 희망이 있었고, 베트만 홀베크와 빌헬름 2세는 교황의 노력에 동의했다.[70] 에우제니오 파첼리는 베트만 홀베크가 총리로 남아 있었다면 평화의 전망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71]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라이히스타크 평화 결의안을 제출하자, 베트만 홀베크는 놀랐다.[72] 뤼덴도르프는 베트만 홀베크를 축출하기 위해 라이히스타크를 이용했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총리가 협상된 평화에 부적합하다고 선언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전쟁 중 국민들의 압도적인 업적"을 언급하며 평등 선거권이 군주제를 강화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17년 7월 12일, 뤼덴도르프는 사임을 위협했고, 힌덴부르크는 최후통첩에 동참했다. 베트만 홀베크는 사임서를 제출했고, 황제는 군 수뇌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1917년 7월 13일 그의 사임을 수락했다.
베트만 홀베크의 후임인 게오르크 미하엘리스는 교황의 평화 제안 진전을 막았다. 미하엘리스는 1917년 11월 1일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헤르틀링은 베트만의 "매우 좌익으로 기울어진" 견해를 싫어했다.[73]
전 총리는 호헨피노(Hohenfinow)의 자신의 영지로 은퇴했다. 그는 1918년 11월 독일에서 발생한 독일 혁명을 désastre|재앙프랑스어이라고 불렀다.

1919년 5월, 베트만 홀베크의 '세계 대전에 대한 성찰'의 첫 번째 부분이 출판되었다. 그는 전쟁 발발에 있어 독일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우리는 1870/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우리의 중앙 지리적 위치 때문에 가장 큰 짐을 지고 있었다. 황제가 집권한 후, 우리는 종종 그 부담을 견딜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의 반대를 했다. 물론, 우리의 개입 없이도 세계 제국주의가 만연했을 것이고, 우리가 합리적으로 행동했다 하더라도 프랑스, 러시아, 영국의 자연적인 적대감이 우리에 맞서 단결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우리가 스스로 초래한 죄가 있지만, 전 세계적인 재앙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전방위적이고 공통적인 죄뿐이었다.
베트만 홀베크는 1919년 6월, 황제 대신 자신을 재판에 회부해 줄 것을 연합국에 공식적으로 요청했다.[74] 최고전쟁평의회는 그의 요청을 무시했다.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1921년 1월 1일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75]
베트만홀베크는 영국과의 군비경쟁을 피하고 유화정책을 내세웠으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1911년의 제2차 모로코 사건이 발생했지만, 영국과의 관계 개선은 진행되었다. 발칸 전쟁 당시에는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와 협력하여 긴장 완화에 힘썼다.
국내 정치에서도 베트만홀베크는 좌파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와 우파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고틀리프 폰 야고와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전면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베트만홀베크와 야고 모두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전면전을 예상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 최후통첩이 발표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사임을 청했지만, 빌헬름 2세에게 거절당했다.[88]
베트만홀베크는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벨기에의 중립을 깨고 영국이 선전포고를 한 것에 분개했다. 에드워드 고셴 주독 영국 대사에게 "쓰레기"(1839년의 벨기에 중립을 보장하는 런던 조약) 때문에 왜 영국이 전쟁을 하는가 하고 질문했다고 한다.
베트만홀베크는 영국의 식민지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계획, 특히 힌두-독일 음모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정설에 따르면, 대전 중 베트만홀베크는 온건 정책을 취하려고 했지만 육군 참모본부의 독주에 휘둘렸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프리츠 피셔의 연구에 따르면, 1914년 9월에는 "Septemberprogramm"을 검토하고 있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89]
베트만홀베크는 우드로 윌슨을 중재로 조건부 평화를 모색하고 있었고, 1916년 여름 에리히 폰 팔켄하인을 축출하고 군부의 실권을 장악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주장하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반대했지만, 그들은 1917년 3월, 헤닝 폰 홀첸도르프 제독의 각서에 의해 무제한 잠수함전의 채택을 강행했다. 군부의 방침에 반대하는 베트만홀베크는 점차 정부 내에서 영향력을 잃어가고, 1917년 7월 13일에 라이히스타크에서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의 평화 결의가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진보당, 중앙당 연합에 의해 가결되고, 더욱이 군부의 의향에 따르는 총리를 원한 루덴도르프에 쫓기는 형태로 사임했다. 후임 라이히스총리에는 게오르크 미하엘리스가 취임했다. 그 이후 독일 국내의 전쟁 지휘와 외교 등 기타 행정은 육군 최고 사령부의 이후에 따르는 형태가 되어, 사실상의 군부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다.
1918년, 독일 국내의 전쟁 지지는 파업과 정치적 선동에 의해 점점 위협받게 되었다. 10월, 독일 제국 해군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킬의 반란은 독일 11월 혁명의 계기가 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4. 사임 이후와 죽음
1919년 6월, 연합국이 빌헬름 2세를 기소하려 하자, 대신 피고로서 재판을 받겠다고 나서 주목을 받았다.[90] 그러나 이 제안은 묵살되었다. 베트만 홀베크는 고향으로 돌아가 회고록을 집필하며 여생을 보냈으나, 1920년 크리스마스에 감기에 걸려 급성 폐렴을 일으켜 1921년 1월 1일에 사망했다.
5. 유산과 평가
베트만홀베크의 친구들 중 누구도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베트만홀베크의 생각과 관련된 유일한 정치인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었지만, 그는 국회(Reichstag)의 국민자유당 의원으로서 베트만홀베크를 비난했던 인물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베트만홀베크 총리의 인격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철학적인 약자의 비참한 태도와 나약함"을 한탄하며 그의 국회 연설을 "무력한 더듬거림"이라고 불렀다.[1]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대제독은 "우리 지식인들의 서구 문화에 대한 경향"을 비난했다.[2]
베트만홀베크와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관계는 이 당의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Burgfriedenspolitik|성내 평화정책de의 결과로 SPD는 중산층의 상당 부분에게 "선거 가능한" 당이 되었고, 국민 정당으로서 바이마르 공화국뿐만 아니라 독일 연방 공화국의 헌법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폰 비체에 따르면, SPD가 중도좌파의 부르주아 국민 정당으로 발전하는 것은 베트만홀베크가 SPD를 정치 체제에 통합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더 어려웠을 것이다.[3]
베트만홀베크의 국내 반대자들은 그를 "패배주의자"이자 "썩은 평화"로 "승리의 열매를 국민에게서 속이려는"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평가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국가주의 정당들에 의해 유지되었고, 결국 나치당의 승리와 함께 공식적인 평가가 되었다. 1945년 이후 베트만홀베크는 "자질 없는 총리", "스스로를 의심하는 결단력 없는 햄릿"으로 여겨졌다.[4]
오늘날 호헨피노우에는 낡고 부분적으로 파괴된 전직 총리의 묘비만 남아 있다. 그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없는 유일한 독일 제국의 총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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